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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산천록(山天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산천록(山天錄)』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 1711~1781)의 일대기를 적어놓은 것이다. 첫머리에 십구사(十九史)를 받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서 연도표기상으로는 계묘년(1723년)에서 신축년(1781년)까지 기록되어 있다. 대산 이상정의 연보와 대조한 결과 그의 나이 7세 때인 1717년의 일이였다. 이상정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보기보다는 연보간행을 위해 그의 문인이나 자식 중에 한 사람이 기록한 듯하다. 뒷부분에 이상정의 전반적인 일대기를 다 시 한 번 기술하고 있음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산천록』에 수록된 주요내용을 중심으로 이상정의 문집인 『대산선생실기』의 연보와 대조한 결과 내용이 동일하였다. 이상정의 자는 경문(景文), 호는 대산(大山), 본관은 한산(韓山)이다. 태화(泰和)의 아들이며 외조부 이재(李栽)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심취하였고 20세 이후로는 성리학에 전념하여 『주자서절요』와 『심경』, 『근사록』 등을 탐독하였다. 1735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한 달 뒤에 증광문과 급제하였다. 연원찰방ㆍ부사과ㆍ연일현감 등 역임하였다. 이후 정언ㆍ감찰ㆍ예조참의ㆍ형조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임하였다. 제자들과 더불어 강학에 힘써 당세의 종사(宗師)로 일컬어졌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며, 고산서원(高山書院)에 제향하였다.
  • 제목
    상언사천일록(上言泗川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상언사천일록(上言泗川日錄)」은 영양남씨 집안의 주요 인물들의 유집을 모아 놓은 『신안세고』 권 5 「무망재유고」의 잡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1636년(인조 14) 12월 9일에서 이듬해인 1637년(인조 15) 2월 21일까지를 기록하고 있다. 1636년은 우리나라 역사상 씻을 수 없는 치욕인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고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 누루하치에게 9두 3배를 한 해이다. 이 일기에서도 그때의 정황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1637년 2월 11일에 어가가 청영에서 도성으로 돌아갔음을 기록하고 있다. 21일에 신촌에 이르러 사천현감을 하고 있는 부친을 배알했음을 기록하며 일기를 마무리 짓는다. 「사천일록」이라고 명명한 것은 남연이 마지막 도착한 곳이 사천이기 때문에 기록한 듯하다. 무망재(无妄齋)는 남연(南? ; 1598~1664)의 호이다. 자는 연부(鍊夫), 융달(隆達)의 아들로 일찍 문예를 이루어 1624(인조 2)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형조정랑, 대동도(大同道) 찰방을 거쳐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는데 정사를 엄정히 하였다. 1636년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를 따라 종군하였다. 이어 공조정랑, 성균관직강을 거쳐 김세렴(金世濂) 막하의 보조관이 되고, 또 독운사(督運使) 홍무적(洪茂績) 막하의 참모가 되었다. 그 뒤로 벼슬을 거듭하여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는데 아버지 상(喪)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제목
    서북기행(西北紀行)
    발급년
    190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북기행(西北紀行)」은 이가순(李家淳 ; 1768∼1844)이 무진년(1808년) 4월 하순에 소수서원을 유람하고 남긴 기행록으로 그의 문집『하계집(霞溪集)』 권 6에 수록되어 있다. 유람을 가는 도중에 오천에 들러 간재 이덕홍과 그의 아들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고, 소수서원에 도착해서는 서원주변의 풍광과 서원내부의 건축구조물과 역사적 흔적을 남기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백운동 세 글자는 퇴계 이황의 글씨고, 금성단은 금성대군과 대군을 추종하다가 죽은 사람들을 위해 설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안향(安珦), 주세붕(周世鵬), 황준량(黃俊良), 곽진 등 영주와 관련된 인물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소백산유람은 다음 기회로 미루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가순의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학원(學源), 호는 하계(霞溪)이다. 이황의 후손으로,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 구서(龜書)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안동김씨(安東金氏)로 정랑 오응(五應)의 딸이다. 그는 1805년 증광시에 장원으로 급제 했으나 당인의 방해로 낙방 되었으며, 1813년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4년 통사랑으로 임명되고, 1820년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 1821년 시강원설서등을 역임하였다. 1831년 선전관에 이어 사간원 정언, 홍문관수찬, 사헌부장령, 응교, 교리 등을 역임하면서 시폐(時弊)를 구제하는 데 노력하였다.
  • 제목
    서유록(西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유록(西遊錄)」은 심의식(沈宜植 ; 1860~1937)이 신해년(1911년)에 서간도(西艮道 ; 西間島)를 유람하고 보고 느낀 점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노산문집(老山文集)』 권 4에 수록되어 있다. 3월 22일 배성구(裵成九)와 함께 출발하여 의성, 선산을 지나 김천역에 도착해서 기차를 타고 30일 서울을 지나 중국 안동현(安東縣) 압록강에 도착하게 된다. 여기에서 5, 6일을 체류한 후 4월 8일 배를 타고 17일간을 이동하여 4월 26일에 서간도에 도착하게 된다. 주변의 넓은 광야와 아름다운 자연을 돌아보고 한 달 정도 머무른 후에 신의주를 거처 5월 25일 평양에 도착하였으며, 김천, 선산, 의성을 거쳐 6월 7일에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6천 리나 되는 여정이었으며, 약 100간의 여행이었다. 심의식은 서간도를 다녀온 것은 여행이 아니고 세상을 피하고 살아갈 땅을 선택하기 위해서 여행을 간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나라 잃은 서러움을 토로하고 있다. 하루빨리 통일이 되어 기차나 자동차를 타고 옛 우리의 영토인 서간도로 가서 우리의 영토를 회복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심의식의 자는 경립(景立), 호는 노산(老山),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아버지는 능걸(能杰)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 붕진(朋進)의 딸이고, 계비(繼妃)는 평산신씨 계주(啓周)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주위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여러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자 운명으로 돌리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 제목
    서유록(西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유록(西遊錄)」은 허훈(許薰 ; 1836~1907)의 문집인 『방산선생문집(舫山先生文集)』 권 14의 잡저에 기록되어 있다. 을유년(1885년) 9월 7일 연산(連山)을 출발하여 19일 돌아온 것으로 되어 있다. 김천, 추풍령, 양산, 옥천, 금산, 진산, 은진을 거쳐 백제의 유적지인 고란사와 백마강, 낙화암 일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회를 지은 것이다. 특히 사제 관촉사의 미륵불이 전체 길이가 55척, 둘레가 30척이고 덮개높이가 8척, 넓이가 11척이며 고려 광종 때 승려 혜명(慧明)이 만들었는데 37년이 걸렸다는 자세한 사실을 소개하고 있는 점은 특이할 만하다. 허훈의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순가(舜歌)이다. 자질(資質)이 뛰어나고 총명이 남달랐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을 사사하여 천덕(天德)과 인도(人道)의 요지를 듣고 심의제도(深衣制度)하여 사칠설(四七說)을 강질(講質)하였고 또 계당(溪堂) 유주목(柳疇睦)에게 예설(禮說)을 질의하였다. 개령(開寧)의 방암(舫巖) 아래에 집을 짓고 방산(舫山)이라 호(號)하였으며 『서경』, 『예기』, 『논어』를 반복해서 공부하고 제자백가를 두루 연구하였다.
  • 제목
    서유록(西遊錄)
    발급년
    189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유록(西遊錄)」은 유휘문(柳徽文 ; 1773~1832)의 문집인 『호고와선생문집(好古窩先生文集)』 권 16에 등재되어 있다. 정축년(1817년) 8월에 일 때문에 한양에 들어갔는데 그날이 문묘 석전제 하루 전날이었다. 이날 율(律)에 왜 12개를 쓰고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은 왜 16개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였다. 그리고 8월 28일은 송경(松京 : 개성)의 유람을 계획하였고, 9월 4일에는 강도(江都 : 강화도)로 유람하였고, 9월 23일에는 마니산 북쪽 10리쯤에 있는 정족산성(鼎足山城)에 갔다. 여기는 사고(史庫)와 선원각(璿源閣)이 있는 곳으로 '삼랑성(三郞城)'이라고도 불리며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28일에 작별하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유휘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이며, 만휴(萬休)의 아들이다. 유장원ㆍ남한조ㆍ정종로의 문인이다. 1821년에 류장원이 지은 『예서통고』와 고조부 유정원의 『역해참고』를 교정하였다.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저서로 본집 이외에 『주역경전통편(周易經典通編)』, 『율려신서(律呂新書)』, 『창랑문답(愴浪問答)』 등이 있다.
  • 제목
    서정기(西征記)
    발급년
    171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기(西征記)』는 신미년(1711년) 9월 17일에 송천자(松川子) 권득여(權得輿 ; 1636~1716)가 영덕군 송천을 출발하면서부터 기록하고 있다. 첫 페이지의 절반가량이 분실되어 목적이 분명치 않으나, 짐작컨대 관직에 임명되어 보령 지역으로 가면서 쓴 기록이다. 10월 29일 이후부터는 글씨체도 완전히 초서로 써서 알아보기도 힘들고, 섣달 19일 임진 정월 초이일 등으로 기록된 것으로 보아 매일 매일 일기를 기록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령으로 가면서 감흥을 읊은 시가 대단히 많고 뒷부분의 절 반 가량이 친구나 친척들의 축하 시로 편집되어 있다. 일기라기보다는 시집에 가까운 글이다. 서체도 처음에는 행서이고 중간에는 초서로 뒷부분의 축하 시들은 또 행서로 기록된 것을 보면 시간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권득여(權得輿)는 대은(台隱) 경(璟)의 아들이며, 호는 송천자(松川子)이다. 저서로 『독오록(獨娛錄)』이 있으며 참판에 증직되었다.
  • 제목
    서정록(西征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록(西征錄)」은 김기찬(金驥燦 ; 1748∼1812)이 벼슬을 제수받고 사은숙배를 위해 대궐로 간 정황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 『동곽유고(東郭遺稿)』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을묘년(1795년) 10월 23일에 사간원 정언에 제수받았는데 11월 18일에 서경(署經 : 당하관을 임명한 뒤에 성명, 문벌, 이력 등을 써서 대간에게 그 가부를 묻는 일)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빨리 올라오라는 전갈이 있었다. 그래서 병진년(1796년) 1월 2일에 길을 떠나 12일에 대궐에 도착해서 패(牌)를 올렸으나 능원군 선마(宣麻)의 일 때문에 제대로 올려 지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상경이 늦었다고 오인 받아서 사간원 정언(正言)에서 태천현감(泰川縣監)으로 제수받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김기찬은 의성인으로 자는 덕여(德汝), 호는 동곽(東郭), 김기찬은 김성일의 18세손이며 주훈(柱勳)의 아들이다. 정조 정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 제목
    서정록(西征錄)
    발급년
    177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록(西征錄)」은 김영조(金榮祖 ; 1577∼1648)의 문집『망와집(忘窩集)』 권 5에 수록되어 있다. 계해년(1623년)에 접빈사의 임무를 띠고 모문룡(毛文龍)을 만나려고 가도(?島)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2월 17일 도성을 출발하여 이듬해 2월 21일에 복명할 때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가도에 도착해서는 도독인 모문룡이 입은 의상의 특이한 점과 머무르는 집의 구조에 대해서 우리나라와 다른 점 등을 언급하고 있다. 여정 중에 접한 이괄의 난에 대한 정황도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김영조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효중(孝仲), 호는 망와(忘窩)이다. 산음현감 대현(大賢)의 아들이며, 김성일(金誠一)의 사위이다. 9형제 중 5명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1601년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2년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를 거쳐 전적에 승진하였으나, 당시 혼란한 정치를 보고 10여 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복관되어 정언, 지평, 부수찬령 대사헌, 대사성, 대사간, 부제학,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고 여섯 차례나 어사로 나갔다. 1642년에 이조참판으로 있으면서, 취재(取才) 때 인사 부정이 있었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하였다.
  • 제목
    서정일기(西征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일기(西征日記)」는 박재현(朴宰鉉 ; 1830∼1883)의 문집 『난석집(蘭石集)』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계해년(1873년) 1월 15일에 집을 나서 2월 3일 서울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주요경로는 대구, 칠곡, 효령, 상주, 조령, 충주, 용인, 죽산, 광주를 거쳐 서울에 도착하였으며, 여행날짜는 18일이 소요되었으며, 여행거리는 880리(352㎞)를 이동하였다. 도중에 좋은 풍광이나 역사적 발자취가 있는 곳에 이르면 시를 지어 자신의 감회를 표현하곤 하였다. 「서정일기」에 의하면 연풍(延?)의 미인촌(美人村)은 미인이 많은 곳이지만, 혼인을 하는 날 모두 죽게 되는 괴이한 전설이 있었고, 죽산의 적각산(賊脚山)은 주변의 다른 산들은 모두 서울을 향해 공북(拱北)하고 있는데 이 산만 유독 등지고 있다는 이유로 이름이 붙여졌으며, 그 이후로 변란이 생기면 시체는 모두 이곳에 버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박재현의 자는 국현(國見), 호는 난석(蘭石), 본관은 순천(順川)이다. 아버지는 규호(奎昊)이다. 성주(星州)에서 살았다. 박재현은 망현재(望賢齋)와 수월당(水月堂)에게 수학하여 17세에 경사(經史)를 마치고 감영에 선발되어 낙육재(樂育齋)에 들어가서 공부에 전념하였다. 문장에 능했으나 과거에 불리한 후로 벼슬길에 뜻을 끊고 경전을 탐구하였다. 재종숙(再從叔) 반구재(反求齋)와 종숙 대사간(大司諫) 규찬(奎燦), 삼종형 참의(參議) 정현(定鉉), 삼종제 지평(持平) 우현(宇鉉), 재종제(再從弟) 조현(肇鉉), 정언(正言) 계현(啓鉉) 등과 서로 교유하였다.
  • 제목
    서정일기(西征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일기(西征日記)」는 이교문(李敎文 ; 1878~1958)의 문집『지재유고(止齋遺稿)』 권 5에 수록되어 있다. 을유년(1945년) 가을에 선묘(先墓)의 제사 때문에 금강(錦江)과 전의(全義)를 다녀온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9월 22일 출발하여 10월 12일에 도착하기까지의 여정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주요경로는 남원, 전주, 김제, 논산을 거쳐 9월 30일에 금강에 도착해서 하룻밤을 자고, 10월 1에 선조의 묘각에 가서 제를 올리니 모인 사람이 60여명이었다. 10월 2일에는 태사공 도(棹)의 묘소가 있는 전의(全義) 양한리(良閑里)에 가서 초헌관으로서 제를 올린다. 이후 4일에는 서울로 갔고 5일에는 양평에 들렀으며, 대전, 대구, 밀양, 진주를 거쳐 돌아오게 된다. 이교문의 초명은 교관(敎?), 자는 명선(鳴璇),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이교문은 희란(熙?)의 아들로 진주(晋州)에서 살았다. 그는 삼형제 중에서 둘째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큰형을 도와 일체의 잡무를 도맡아 하여 아우가 안심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뒷받침하였다. 그리하여 가계가 윤택해지고 아우의 학업이 성취되자 정사(精舍)를 세워 독서와 수양에 힘썼고, 향내의 사우들을 초청하여 학문을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 제목
    서정일록(西征日錄)
    발급년
    190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정일록(西征日錄)」은 황중윤(黃中允 ; 1577∼1648)의 문집인 『동명문집(東溟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1620년(광해군 12) 금군(金軍)을 정벌한 양경리 조명군(助明軍)의 주문사(奏聞使)로 요동(遼東)에 갔을 때의 일기로, 그해 3월 26일부터 8월 17일까지 기록하고 있다. 3월 26일 정준의 장계에 의해서 4월 1일 주문사로 차출되고 비변사에서 재촉을 하므로 4월 7일 떠나려 하였지만, 임금이 너무 급하다고 생각해서 4월 11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나 여행경비와 물품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아 4월 15일 수연에 참석한 후 길을 떠나게 된다. 5월 7일에 요동에 도착하여 금나라와 맞서 싸우다가 8월 17일 귀국하게 된다. 황중윤의 자는 도광(道光), 호는 동명(東溟),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아버지는 여일(汝一)이다. 정구와 장현광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14년 예빈시직장, 성균관전적을 거쳐 이듬해 춘추관편수관,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때 대비에게 효를 다할 것을 소청하였다가 광해군의 진노를 사서 파직 당하였고, 1617년에 헌납, 좌랑, 정랑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1619년 재차관으로 요동에 다녀와서 직강, 지평이 되었다. 이듬해 동부승지가 되어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가서 자문(咨文)을 올리고 우부승지ㆍ좌부승지가 되고 용천부사(龍川府使)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이 해 겨울에 청나라가 선천(宣川)에 침입함에 공이 겉으로 유화책(宥和策)을 쓰면서도 안으로 수비를 튼튼히 할 것을 주장했으나 실시되지 못했다. 인조반정 후 공이 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정온의 소청으로 풀려 나왔고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 항복의 소식을 듣고 비분을 금치 못하여 산협 속의 절간에 우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 제목
    서행기록(西行記錄)
    발급년
    169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행기록(西行記錄)』은 권희학[權喜學 ; 1672(현종13)∼1742(영조18)]의 1698년(숙종 24) 3월 13일부터 5월 50일까지의 일기로 최석정(崔錫鼎 ; 1646~1715)이 해군시랑 영사사(海軍寺郞迎謝使)로 서울에서 의주까지 행차할 때에 군관(軍官)으로 수행하면서 지나는 지역의 관청이나 성첩(城堞), 그 지역의 인물들과 보고 들은 것, 자신이 지은 시 등을 기록한 일기이다. 권희학은 조선의 문신이며, 자는 문중(文仲), 명형(命逈)의 아들이다. 왕세자(王世子) 책봉주청사(冊封 奏請使) 최석정(崔錫鼎)을 따라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3진(鎭)의 첨사(僉使) 등을 지냈다. 1728년(영조 4)에 금위영교련관(禁衛營敎鍊官)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이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곤양(昆陽)ㆍ운산(雲山)의 군수(郡守), 장연부사(長淵府使) 등을 역임했다.
  • 제목
    서행일기(西行日記)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행일기(西行日記)』는 1741년(영조 17, 신유년) 4월 27일부터 8월 22일까지 안동에 사는 김모가 서울에 가서 생활하면서 보고 겪은 일들을 기록한 문서이다. 일기를 쓴 사람은 분명치 않으나 문서 안에 나타나는 내용으로 볼 때 의성김씨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후손으로 보인다. 서울에 가게 된 목적은, 자신의 아버지가 죄를 얻어 귀양 가있는 동안 자신의 조모 상을 당하여 잠시 초상을 치를 수 있었으나, 다시 배소로 가있으므로 이를 호소하여 귀양에서 풀려나게 해 달라고 청원하기 위해서였다. 즉, 자신이 아직 병이 없고 젊으니 자신을 종으로 삼는 대신에 자기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청원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기회를 찾고자 하였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는 과정을 기록하였다.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견문하고 경험한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였고, 뒷부분에는 이광의(李匡誼), 송익휘(宋翼煇) 등의 죄에 대한 조정의 기록을 함께 적어 놓았다.
  • 제목
    서행일기(西行日記)
    발급년
    172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행일기(西行日記)」는 김우굉(金宇宏 ; 1524∼1590)의 문집인『개암선생문집(開巖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을축년(1565년) 7월 3일에 을사사화의 주모자인 보우선사와 윤원형 탄핵을 두고 상소를 올리게 되는데 영남에서는 김우굉이 소두가 되어 23일 출발하여 30일에 도성에 도착하게 된다. 「서행일기」는 이때 각 지역에서 상경하여 8월 25일까지 연이은 상소를 올리는 과정의 일을 기술한 것이다. 보우선사는 문정왕후의 불교에 대한 호의적인 관심 때문에 많은 대우를 받아오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탄핵을 받게 된다. 윤원형도 자신의 누님인 문정왕후와 애첩 정난정의 도움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문정왕후가 죽자 역시 탄핵을 받아 정치적 영향권을 잃자 스스로 도망을 가다가 죽게 된다. 김우굉의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개암(開巖), 본관(本貫)은 의성(義城)이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1542년 향시에 수석 합격하고, 1552년 사마시에도 수석으로 합격하였다. 156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후 여러 관직을 두루 지내다가 1589년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 성주로 돌아갔다. 상주 속수서원(涑水書院)에 제향되었다
  • 제목
    서행일기(西行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행일기(西行日記)」는 조선 중기 학자인 이만백(李萬白 ; 1657∼1717)의 『자유헌선생문집(自濡軒先生文集)』에 수록되어 있다. 날씨와 여행지 등을 중심으로 간단히 적은 견문록이다. 이만백의 자는 여백(汝自), 호는 자유헌(自濡軒), 본관은 여주(驪州)다. 과거에 실패한 뒤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수양에만 힘써서 경사(經史)뿐 아니라 잡기에도 능했다. 이이두(李而杜)의 문인으로 권두경(權斗經), 조덕린(趙德隣), 신몽참(辛夢參), 송명기(宋命基), 김해일(金海一) 등과 교류했다.
  • 제목
    서행일록(西行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서행일록(西行日錄)」은 유장식(柳璋植)의 문집인『가림문집(可林文集)』 권 4에 실려져 있다. 임자년(1912년) 3월 30일에 출발하여 4월 21일까지의 여정을 기록하고 있다. 여행의 동기는 고조고의 문집인 『창랑문답(滄浪問答)』을 간행하려고 했지만 여러 가지로 문제로 인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평소에 면식이 있는 유복립의 후손인 유근(柳瑾)이 경성에 있으면서 최남선과 광문회를 조직하여 당색에 관계없이 우리나라의 역사와 유현들의 사적들 중에서 후세에 전할 만한 것들은 모두 간행한다고 하였다. 또한 동산 류인식도 『창랑유고』를 간행함에 동의하였기에 부로들과 합의하여 수곡에 사는 족형인 유회식(柳晦植)과 함께 상경하기로 한 것이다. 상경의 주요 경로는 풍산, 상주, 김천, 추풍령, 수원을 지나 서울에 도착한 것이 4월 6일이며 유근을 만난 것은 7일이다. 여행 도중에 각 지역의 주요 경관과 주요인물 들에 대해서 기술을 하고 있다.
  • 제목
    선성왕환록(宣城往還錄)
    발급년
    191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선성왕환록(宣城往還錄)」은 이복(李馥 ; 1626∼1688)의 문집인『양계선생문집(陽溪先生文集)』 권 7의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무술년(1658년) 11월 20일에 안동을 출발하여 예안 일대를 둘러보고 24일에 돌아온 과정을 적은 유람록이다. 당시 예안현감은 그와 동년에 대소과에 급제한 정동엽이었다. 21일에는 백일장을 열었고, 22일에는 애일당을 들러 도산서원에 도착하였으며, 23일은 도산서당을 둘러보고, 내부 정경과 주변 정경을 하나도 빠짐없이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24일에는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과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을 모신 용산서원(龍山書院)에 들러 안동으로 돌아왔다. 선성(宣城)은 예안의 옛 지명이다. 이복의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아버지는 상규(尙規)이며, 어머니는 덕산황씨 하징(河徵)의 딸이다. 그는 이구(李坵)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궁리치지(窮理致知)에 힘썼다. 165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명경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이 되었다. 1658년 안동교수(安東敎授)에 임명되고 1660년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고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663년 만항현감(萬項縣監)이 되어 치적이 훌륭하여 포계(褒啓)를 입고 호조좌랑, 예빈시정(禮賓侍正),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하였으며 기해방례(己亥邦禮)의 잘못을 지적하여 고묘(告廟)와 반교(頒敎)를 청하고 종부사정(宗簿司正), 장악원정(掌樂院正)을 거쳐 동래부사(東萊府使)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679(숙종 5)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라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반대당의 무고로 삼영(三水)에 유배되고 1686년 흥양(興陽)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 제목
    성성록(惺省錄)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성성록(惺省錄)』은 저자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갑오년(1954년) 1월 1일부터 쓴 일기책으로, 다음해인 을미년(1955년)의 일기인 「시성성(時惺省)」과 병신년(1956년)의 일기인 「항성록(恒惺錄)」, 정유년(1957년)의 「성진록(惺眞錄)」, 무술년(1958년)의 「자명록(自明錄)」, 기해년(1959년)의 「명명록(明明錄)」, 경자년(1960년) 1월 1일부터 8월 2일까지의 일기인 「명잠(明箴)」까지의 일기이다. 마지막 장에 날짜와 일간지를 미리 적어 놓은 빈 양식이 한쪽 붙어 있다. 일기의 첫머리에 그 해 일기 제목의 서문이 있고 날짜와 간지, 날씨를 간략히 기술하고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무슨 책을 읽었으며, 누구의 문집을 읽었는지도 모두 기록하였고 일기를 쓰고 남은 여백에 다른 사람에게 들은 중풍을 치료할 수 있는 한방약을 조제하는 방법을 적어 놓기도 하고 주역으로 점을 친 것도 있으며, 친지들의 방문과 주변사람들의 문집 발간 및 집안 선조들의 묘갈문을 짓고 비석을 세우는 일 등등 주로 집안일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경자년 8월 2일 생을 마치는 날까지 일기를 기록한 것을 보면, 얼마나 맑게 살았는가를 알 수 있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성성록(惺惺錄)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성성록(惺惺錄)』은 저자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계미년(1943년) 1월 1일부터 그 해 말까지 쓴 일기와, 다음 해인 갑신년(1944년)의 일기인 「성성명(惺惺銘)」, 을유년(1945년)의 「주일명(主一銘)」, 그 다음해인 병술년(1946년)의 일기인 「명명설(明明說)」, 정해년(1947년)의 「자성록(自省錄)」, 병자년(1948년)의 「수우록(守愚錄)」 등 여러 해의 일기를 묶어 놓은 일기책이다. 매년도의 일기 앞에 제목에 대한 서문을 써놓았는데, 「성성명」, 「주일명」, 「명명설」 등과 다른 서체로 썼다. 매 일월과 간지와 날씨를 간략히 기술하고 주로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손님이 찾아오고 가는 일과 편지를 보내고 받은 일, 동네사람들에게 들은 것까지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해방 후 미소간(美蘇間)의 신탁통치 결정과 국민들의 반대 시위 등 우리나라의 운명과 관련된 내용들도 기록하였다. 국제정세, 민심의 변화와 일제하에서 간부생활을 한 사람들이 주민들로부터 공격받는 일 등도 기록하여 민심을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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