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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호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봉조(金奉祖 ; 1572∼1630))의 시문집이다. 김봉조의 본관은 풍산. 자는 효백(孝伯), 호는 학호(鶴湖)이다.
이 책은 서문·발문이나 간기(刊記)가 없어 그 간행경위나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부록에 유규(柳奎)가 쓴 행장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19세기 초로 추측될 뿐이다. 앞에 학호선생세계도(鶴湖先生世系圖)와 학호선생연보(鶴湖先生年譜)가 있고, 권1은 시 53수, 부(賦) 2편, 권2는 소(疏) 7편, 계(啓) 9편,전(箋) 2편, 권3은 서(書) 31편, 권4는 부록으로 저자의 행장·행락(行略)·묘표음기(墓表陰記), 제문 5편, 만사 23편, 증시(贈詩)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 가운데 「여강서원차김자준운(廬江書院次金子埈韻)」·「청음김공상헌여자광찬내방유시위증근차기운이수(淸陰金公尙憲與子光燦來訪留詩爲贈謹次其韻二首)」·「차삼제효언운 (次三弟孝彦韻)」등의 차운시에는 특별히 원운(原韻)을 실었는데, 이에서 김령(金?)·김상헌(金尙憲)과는 친분이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칠월기망범주강성벽하(七月旣望泛舟江城壁下)」는 소식(疏軾)의 「적벽부(赤壁賦)」를 연상하여 지은 시로, 강성(江城 : 지금의 경상남도 산청군)의 옛 이름이 적벽이었던 때문이다. 소 6편 중 5편은 이황(李滉)의 문묘배향을 모함한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을 논박한 상소이며, 나머지는 익산군수로 있을 때 군민을 위하여 올린 상소이다. 계는 모두 왜사접위관(倭使接慰官)으로서 부산에 근무할 때 올린 「왜정장계(倭情狀啓)」로, 여기에서 왜사는 대마도주(對馬島主)가 보낸 진하정관(進賀正官) 미나모토(源智次)이다. 접견절차와 예우문제에 대한 트집을 비롯하여 세견선(歲遣船)의 교역량을 늘려달라는 저들의 요구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우리나라와 대마도간의 외교 및 무역문제를 연구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김봉조의 아버지는 이조참판에 추증된 대현(大賢)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찬금(纘金)의 딸이다. 그는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임진왜란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키기도 하였다. 1601년(선조 34)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613년(광해군 5)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사도사직장(司導寺直長),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을 역임하고, 그 뒤 단성현감(丹城縣監), 경상도도사·익산군수·예조정랑을 거쳐 사헌부지평·성균관직강이 되었으며,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승진되었다.
『한강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정구(鄭逑 ; 1543∼1620)의 시문집이다. 정구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사중(思中)으로 성주(星州)에 거주했다. 12세에 오덕계(吳德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63년(명종 18)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1573년(선조 6) 예빈사참봉(禮賓寺參奉)이 되었으나 부임치 않았으며, 1578년 사포서사포(司圃署司圃)가 되었으나 역시 사임했으며, 1580년 창령현감(昌寧縣監)이 되어 서재(書齋)를 설립하고 훈장을 선임하며 향교를 수리하여 교육을 장려하고 예속을 숭상하는 등 치적을 올렸으며, 이듬해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종친부전부(宗親府典簿),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 사직령(社稷令), 군자감찰관(軍資監判官), 통천군수(通川郡守) 등을 역임하고, 1592년 왜란에 의병을 일으켜 토적에 힘쓰고, 이듬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江陵府使, 동부승지(同副承旨), 우부승지(左右承旨), 형조참의(刑曹參議),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냈다. 1613년 계축옥사에 상소하여 영창대군을 구하려 했으며, 폐모사건에 또 소를 올리려다 그만 두었다. 1623년 (인조 1)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하고, 1625년 시호를 문목(文穆)이라 하고, 1657년(효종8)에는 영의정(領議政)을 추증(追贈)했다.
『한계문집』은 오선기(吳善基 ; 1630∼1703)의 시문집이다. 오선기의 자는 경부(慶夫), 호는 한계(寒溪), 본관은 고창(高敞)이다.
이 책은 손자 성재(聖再)와 증손 수규(壽奎)가 편집한 것을 1823년(순조 23) 매림서원의 사림들이 간행하였다. 이 중 「소학석의(小學釋義)」는 『소학』의 어려운 문구를 한글로 주석한 것인데, 총론·범례·서제(書題)·제사(題辭)·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 등의 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묵은 총 36자의 해서체(楷書體)로 되어 있는데, 필법이 매우 훌륭하다.
오선기는 익전(益?)의 아들로 고령(高靈)사람이다. 장용우(張龍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으며,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는 고령으로 이사하여 후진교육에 힘써 정종호(鄭宗鎬)·김세명(金世鳴) 등 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매림서원(梅林書院)·남계사(南溪祠) 등에 제향되었다.
『한벽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곽기수(郭期壽 ; 1549∼1616)의 시문집이다. 곽기수의 자는 미수(眉壽), 호는 한벽당(寒碧堂)이다.
이 책은 1918년 후손 송승(宋升)·인섭(仁燮)이 편집하고, 1930년 10대손 홍익(洪翊)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서종급(徐宗伋)의 서문이, 권말에 곽종석(郭鍾錫)의 발문이 있다. 권상은 오언절구 60수, 칠언절구 62수, 오언율시 18수, 칠언율시 6수, 오언고시 2수, 칠언고시 3수, 악부(樂府) 3편, 가사 1편, 부(賦) 4편, 전(箋) 2편, 권하는 기(記) 3편, 지(誌)·설(說) 각 1편, 책(策) 2편, 부록으로 유사·묘갈명·금릉창의록(金陵倡義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끝에 아들 치우(致禹)의 문집인 『영취재유고(暎翠齋遺稿)』가 실려 있다. 시는 평이한 시어를 구사하였는데, 매화·대나무·달의 순으로 읊은 「한벽당십영(寒碧堂十詠)」과 새소리를 듣고 읊은 「팔금영(八禽詠)」, 국한문혼용으로 노래한 「만흥삼결(漫興三口)」 등은 모두 16세기의 시가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곽기수의 아버지는 세유(世幼)이며, 1579년(선조 12) 진사과에 합격하였으며, 158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그 뒤 관직이 예조좌랑에 이르렀고, 부안현감에 재직중 부모가 모두 90여의 나이가 되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오로지 『주역』의 연구에 몰두하여 『주역』의 암송으로 귀신을 쫓을 수 있다고까지 할 정도로 세간에 소문이 자자하였다.
『한송재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정보(李禎輔 ; 1766∼1845)의 시문집이다. 이정보의 자는 익부(翼夫), 호는 한송재(寒松齋),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이 책은 1928년 이회직(李會稷)이 주관하여 안동(安東) 시은당(市隱堂)에서 간행하였다. 시(詩)는 사서(四書)나 『근사록(近思錄)』등을 읽은 감흥, 친구나 문생과 주고받거나 그들에 대한 만사(輓詞)가 대부분이다. 서(書)에는 성리설(性理說)에 관한 내용이 약간 들어 있다. 설(說) 중 「춘추설(春秋說)」은 『좌전(左傳)』뿐만 아니라 『곡량전(穀梁傳)』·『공양전(公羊傳)』·『호씨전(胡氏傳)』까지 절충하여 보아야 함을 말해 주목된다. 「척불설(斥佛說)」은 당시 기세를 올리던 불교를 경계한 글이다.
이정보의 아버지는 생원 조범(祖範)이며, 어머니는 진보이씨(眞寶李氏) 효상(孝常)의 딸이다.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최화진(崔華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영남의 학자였던 최흥원(崔興遠)·이상정(李象靖)과 긴밀하였다.
『한와문집』은 이시일(李時逸 ; 1731∼1792)의 시문집이다. 이시일의 자는 경안(敬安), 호는 한와(閒窩),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 책은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그의 시(詩) 2수는 벗과의 사별을 아쉬워하는 만장이다. 서(書) 가운데 스승 이홍리에게 보낸 편지는 뒤늦게 학문의 길에 들어서 게을러 성취가 더딤을 자탄하며 분발을 다짐하는 내용이며, 잡저(雜著)의 「대학의설(大學義說)」은 『대학』전편에 걸쳐 가장 중요한 핵심처를 골라 논단한 것으로, 『대학』은 곧 대인(大人)의 학문이니 사리사욕을 버리고 명덕(明德)을 밝힘에 힘쓸 것을 말하였다. 「덕성각연설(德成閣筵說)」은 1757년(영조 33) 장헌세자(莊獻世子)가 덕성각에 있을 때 주로 왕세자의 병세에 대하여 왕세자와 주고받은 문답 내용을 자세하게 적고 있어, 장헌세자와 관계된 여러 사실을 이해하는데 참고가 된다.
이시일의 아버지는 기배(基培)이며, 종숙 홍리(弘?)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756년(영조 32) 문과에 급제하여 가주서(假注書)에 제수되었고, 선략장군(宣略將軍)·봉정대부·형랑(刑郞) 등의 벼슬을 거쳤다.
『한재선생문집』은 주필대(朱必大 ; 1616∼1693)의 시문집이다. 주필대의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한재(寒齋), 본관은 신안(新安)이다.
이 책은 1919년 후손 재영(在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몇 수 되지 않으나 시의가 고결하고 품격이 높다. 잡저 중 「격암남선생사우고유(格菴南先生祠宇告由)」는 조선 중기의 천문학자 남사고(南師古)의 해박한 지식을 찬탄하여 그를 위한 사우를 지어 봉안한 뜻을 밝힌 것이다. 「죽변기우제문(竹邊祈雨祭文)」·「삼방산기우제문(三方山祈雨祭文)」은 산신이나 수신에게 비를 내려 풍년이 들게 하여줄 것을 비는 글로, 민간의 전통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주필대의 아버지는 군자감정에 추증된 성유(聖兪)이며, 임만휴(任萬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62년(현종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당쟁으로 조정이 어수선하자 벼슬을 포기하고 향리로 돌아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한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민덕(李敏德 ; 1728∼1786)의 시문집이다. 이민덕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명준(明俊), 호는 한호(漢湖) 또는 회실(晦室). 성주출신이다.
이 책은 1937년 5대손 기덕(基德)이 편집하고, 현손 금희(錦熙)와 광희(光熙)가 간행을 도왔다. 권두에 이원조(李源祚)와 송준필(宋浚弼)의 서문이, 권말에 금희와 기덕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80수, 만사78수, 뇌사(?辭) 3편, 권2·3은 서(書) 4편, 잡저 2편, 서(序) 5편, 기(記) 3편, 발(跋) 2편, 상량문 4편, 제문 30편, 권4는 부록으로 만사 40수, 가장(家狀)·행장·유사·묘표·묘지명 각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소박하면서도 사실적이다. 「독논어(讀論語)」는 『논어』를 읽고 난 학문적인 감회를 표현한 것이며, 「동경회고(東京懷古)」는 천년고도인 경주를 돌아보고 지난날의 번화와 현실의 쓸쓸함을 비교하여 읊은 것이다. 서(書)의 「여신청천(與申靑泉)」은 신백한(申伯翰)에게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면서 함께 매진할 것을 제의한 글이다. 잡저의 「독서설(讀書說)」은 학문을 배우는 것은 행하려는데 있으므로 글을 배워서 행하지 못함은 배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고 설명한 글이다. 「김종택부인조씨열행정영문(金宗澤婦人曺氏烈行呈營門)」은 김종택의 부인 조씨가 남편이 병들어 사경을 헤맬 때 자신의 다리를 베어 삶아 먹여서 소생시킨 사례를 들어 표창할 것을 건의한 것이다. 기의 「몽견퇴계선생기(夢見退溪先生記)」는 꿈에 이황(李滉)을 만나 학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내용을 적은 것이고, 「주서초어발(朱書抄語跋)」은 주희(朱熹)의 어록 중에서 진수만을 골라 편찬하고 그 이유와 용도를 설명한 글이다.
이민덕의 아버지는 석함(碩咸)이며, 어머니는 연안이씨(延安李氏)로 태원(泰原)의 딸이다. 뒤에 석림(碩臨)에게 입양되었다. 경전(經傳)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정통하였고, 의약·복서(卜筮)·천문·지리 등에도 통달하였다. 향시(鄕試)에는 여러 차례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 실패한 뒤로는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함계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석달(鄭碩達 ; 1660∼1720)의 시문집이다. 정석달의 자는 가행(可行), 호는 함계(涵溪), 본관은 영일이다.
이 책은 1773년(영조 49) 손자 일찬(一鑽)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상정(李象靖)의 서문이 있다. 권1·2는 시, 권3·4는 서(書), 권5는 잡저·서(序)·기(記)·잠(箴)·명(銘)·찬(贊)·제문·애사(哀辭)·행록(行錄), 권6은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만장(輓章)·제문·행장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주목할만한 것은 「발몽설 發蒙說」과, 이형상(李衡祥)과 이기(理氣)에 대하여 논변한 글이다. 「발몽설」에서는 음양(陰陽)·태극(太極)으로 시작하여 천지(天地)·오행(五行)·사시(四時)·일월(日月)·성신(星辰)·산악(山嶽)·하해(河海)·뇌전(雷電)·풍우(風雨)·우모(羽毛)·인개(鱗介)에 대하여 그 원리와 작용, 성질과 형태, 그리고 변화 등에 관하여 문답형식으로 자세하게 논설하였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 제일 중요한 부분은 마음이라고
단정하여, 사단(四端)·칠정(七情)을 거론하고 이를 터득할 수 있는 방편은 경(敬)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끝부분에서는 다시 태극으로 환원하여 천지가 태극일 수 있듯이 인간도 태극일 수 있다고 결론을 맺었다. 이형상(李衡祥)과 문답한 글의 내용 역시 태극이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있다는 상대방의 주장에 대하여 태극은 `이(理)`이고, 음양은 `기(氣)`라는 자신의 주장을 연역 설명한 것이 주를 이루고 있다.
정석달은 시심(時諶)의 아들로, 정시연(鄭時衍)의 지도를 받으면서 일생동안 여러 성현의 서적을 섭렵하면서 지냈다. 그는 『소학』, 『가례』, 『중용』, 『맹자』, 『논어』, 『근사록』, 『심경』 등을 더욱 탐독하였으며, 퇴계를 사숙(私淑)하여 정시한(丁時翰), 이현일(李玄逸), 이유장(李惟樟), 이형상(李衡祥) 등과 학문적인 교분을 가졌다.
『함재유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 권상구(權相龜 ; 1862∼1902)의 시문집이다. 권상구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천우(天禹), 호는 함재(咸齋)이다.
이 책은 1927년 아들 진용(瑨容)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조긍섭(曺兢燮)의 서문이, 권말에 송준필(宋浚弼)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37수, 서(書) 19편, 권2는 잡저 6편, 기(記) 2편, 발(跋) 1편, 상량문 2편, 자사(字辭)·혼계(婚啓) 각 1편, 애사(哀辭) 2편, 제문 4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시는 강호의 한정과 인생의 수양을 읊은 것이 많은데, 「도진노중작(桃津路中作)」은 인생살이를 길가는 것에 비유하여 언제나 대도를 가듯 인생을 살아야 미혹이나 후회가 없다는 내용이다. 서(書)중 「여척암김장서(與拓庵金丈書)」는 큰 스승에게 배우지 못한 것과 어진 벗들과 학문을 논할 기회가 없음을 한탄한 것이고, 이 밖의 글들도 대체로 시사(時事)나 인생문제, 학술적인 내용들을 담고 있다. 잡저 중 「서실우경(書室寓警)」은 심지를 굳건히 한 다음에야 비로소 올바른 배움의 길이 열린다는 학문의 자세를 논술한 것이다. 「노양생론(魯兩生論)」은 예악(禮樂)을 알지 못하고는 치란(治亂)에 대하여 말할 수 없음을 주장한 글이다.
권상구의 아버지는 국성(國成)이며,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가상(家祥)의 딸이다. 평생을 일체의 명리에는 관심을 끊고, 주경야독하면서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을 쓰면서 지냈다.
『합천세고』는 이희증(李希曾), 이희민(李希閔), 이희안(李希顔), 이윤서(李胤緖) 등 합천이씨(陜川李氏) 후손들의 시문집 및 실기(實紀)이며, 후손 이형원(李亨源)이 편집했다.
이희증(李希曾 ; 1486∼1509)의 자는 노옹(魯翁), 호는 월휘당(月暉堂),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윤검(允儉)의 맏아들로 1506년(중종 1) 문과에 급제했다.
이희민(李希閔 ; 1408∼1521)의 자는 효옹(孝翁), 윤검의 둘째아들로 조광조(趙光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6년(중종 11) 문과에 급제하였다. 1518년(중종 13)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이희안(李希顔 ; 1504∼1559)의 자는 우옹(愚翁), 호는 황강(黃江), 윤검의 아들로 1517년(중종 12)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판관(判官)을 역임하였다.
이윤서(李胤緖 ; 1574∼1624)의 자는 선승(善承), 호는 삼우당(三友堂), 천수(天受)의 아들로 1594년(선조 27) 무과에 급제하였다.
『항은일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 이응협(李膺協 ; 1826∼1894)의 시문집이다. 이응협의 자는 계약(啓若), 호는 항은(巷隱),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이 책은 1904년 아들 만영(晩榮)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세속에 뜻없이 자연 속에 묻혀 지내는 선비의 마음가짐이 잘 나타나 있다. 「조어(釣魚)」에서는 맑은 강에서 노니는 물고기와 낚시꾼을 바라보며 「어부가」를 부르는 풍류의 장면을 실감 있게 묘사하였고, 「회야우음(晦夜偶吟)」에서는 별빛 쏟아지는 초여름 밤 들판의 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느끼는 흥취를 잘 표현하였다. 그밖에 여러 편지는 벗들과 시사나 학문문제로 주고받은 내용들이다.
이응협은 8세에 유치명(柳致明)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27세 때에는 유치구(柳致球)를 사사하였다. 평생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고, 만년에는 성남정사(城南精舍)를 세워 후진양성에 힘을 쏟았다.
『해난집』은 구한말의 학자 정진소(鄭鎭韶 ; 1878∼1956)의 시문집이다. 정진소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해난(海難),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문집 중에는 그의 성리학에 대한 많은 논술이 보인다. 그의 잡저에는 「주역연의(周易硏義)」, 「공자경의(孔子經義)」, 「맹자전의(孟子傳義)」 등의 논술이 있고, 여러 경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적은 「역경(易經)-文言, 繫辭, 大衍, 說卦, 序卦」, 「서경(書經)-堯典, 舜典, 大禹謨, 仲口;之誥, 洪範, 多方」, 「예경(禮經)-大學, 中庸, 禮運, 樂記」, 「논어(論語)-學而, 爲政, 八佾, 里仁, 雍也, 泰伯, 先進, 顔淵, 堯曰」 등이 있다.
아버지는 치엽(致燁)으로 영천에 거주했다. 저자는 약관에 족형(族兄) 진헌(鎭憲)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다시 김도화(金道和) 문하로 옮겨 대도(大道)의 호연무애(浩然無涯)함을 깨닫고 자호를 해난(海難)이라 했다. 그리고 학문의 영역을 더 높이기 위하여 김흥락(金興洛), 권주욱(權周郁), 이종기(李種杞), 서정옥(徐廷玉), 장석영(張錫英), 곽종석(郭鍾錫), 조병소(曺秉韶), 이태일(李泰一), 정석채(鄭奭采) 등의 여러 현인들의 문하를 두루 돌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 후에는 성리학에 매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전력을 기울여 문하에 많은 제자를 두었다.
『해남집』은 손만래(孫萬來 ; 1680∼1760)의 시문집이다. 손만래의 자는 길부(吉夫), 호는 해남(海南),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석필(碩?)이며, 이현일(李玄逸)을 사사하였다.
이 책은 1902년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문집 중 시(詩)의 「산재즉사(山齋卽事)」는 거처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선가(仙家)의 한적함에 얹어 세속잡사에 초연한 심회를 잘 표현하였다. 서(書) 중에서 스승 이현일에게 보낸 「상갈암이선생(上葛庵李先生)」에서는 자신의 학문이 부족함을 자책하며 스승을 숭모하는 곡진한 정회를 잘 나타내 보이고 있다. 「여손서(與孫書)」는 남쪽지방으로 유람가서 아름다운 자연의 경관을 마주해 느낀 상쾌한 마음을 손자인 치대(致大)에게 적어 보낸 글이다. 「상갈암선생서별지(上葛庵先生書別紙)」에서는 상례(喪禮)의 구체적 문제를 질문한 내용이 실려 있어, 저자의 예학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해암집』은 조선 후기의 문인 최영록(崔永祿 ; 1793∼1871)의 시문집이다. 최영록의 자는 유천(幼天), 호는 해암(海庵) 혹은 노수(鷺睡), 본관은 영천(永川), 아버지는 성한(聲翰)이며, 고령(高靈)에 거주했다. 16세에 홍여하(洪汝河)의 현손녀에게 장가들어 그곳의 독서열을 보고 돌아 와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1814년에 큰 흉년이 들자 인척을 비롯하여 촌민에 이르기까지 고루 구휼하였다. 조모가 세상을 떠나자 가례(家禮)를 준수하였으며, 상을 다 마친후 해안(海晏)으로 이사하여 해암(海菴)이란 현판을 걸고 좌도우서(左圖右書)로 낙을 삼고, 자손들에게 훈계하여 「거빈설(居貧說)」을 지었다.
『해월문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황여일(黃汝一 ; 1556∼1622)의 시문집이다. 황여일의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이 책은 1776년(영조 52) 후손 상하(尙夏)와 이형복(李亨福) 등이 명계서원(明溪書院)에서 간행하였다. 시(詩) 중에는 김성일(金誠一)·양사언(楊士彦)·임제(林悌) 등과 창수한 것이 많다. 1598년(선조 31)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하여 명나라로 향하는 이항복(李恒福)·이정구(李廷龜) 일행을 따라 서장관(書狀官)으로 갔을 때, 그 해 10월 서울을 출발하여 다음해 4월 의주에 도착할 때까지 7개월에 걸쳐 이항복·이정구 등과 주고받은 시들, 그리고 연도의 풍경과 중국의 물색, 그간의 감회 등을 읊은 은사시(銀?詩) 100여 수는 대표작이라 할 만하다. 「은사일록(銀?日錄)」은 명나라를 오가면서 겪었던 일들을 적은 일기인데, 이것은 당시 중국과의 관계를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황여일은 응징(應澄)의 아들이며 평해사람이다. 그는 1576년(선조 9) 진사가 되고,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檢閱)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司書)에 이어 장령(掌令)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典籍)을 역임,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에 제향되었다.
『해은속집』은 조선후기의 학자 강필효(姜必孝 ; 1764∼1848))의 시문집이다. 강필효의 자는 중순(仲順), 호는 해은(海隱), 본관은 진주이다.
이 책은 1894년(고종 31) 손자 면(金+冕)이 간행하였다. 권1은 시, 권2∼8은 서(書), 권9∼14는 서·잡저, 권15는 잠(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문집 중 100편이 훨씬 넘는 왕복서신의 대다수는 경전·성리(性理)에 관한 내용이다. 그 중에서도 성근묵(成近默)에게 답한 것은 무려 1권에 달하는 방대한 양이 전부 성리와 『주역』에 관한 문답으로서 대단한 역작들이다. 사서와 오경의 주요내용을 몇 글자로 도식화하고 설명을 붙인 「사서요지도(四書要旨圖)」·「오경요지도(五經要旨圖)」, 그리고 『효경』의 대의를 밝힌 「효경대의도(孝經大義圖)」도 주목된다. 옛날 중국의 이상적 전지제도(田地制度)를 재천명한 「정전도(井田圖)」, 『주역』의 64괘(卦)중에서 회린흉구(悔吝凶咎)가 없는 유일한 괘인 겸괘를 도시한 「겸괘도(謙卦圖)」, 천자(天子)가 청정하던 「명당도(明堂圖)」, 왕이 지켜야 할 방도 제시가 된 『서경』무일편의 뜻을 딴 「무일도(無逸圖)」, 그리고 해 그림자를 가지고 시간과 절후를 측정하던 주관제(周官制)를 표본으로 한 「토규측영도(土圭測影圖)」 등도 저자의 박학을 보여준다. 「사유록(四遊錄)」 상하권은 1785년(정조 9) 스승 윤광소를 찾아 수학한 시절부터 1818년까지 보고 생각하고 겪은 것, 가본 곳, 만난 사람 등을 일기식으로 적은 것인데, 각 지역의 특색과 역사적 사실에 전설을 곁들여 흥미를 끌고 있다. 전가팔범(傳家八凡)·학령(學令) 학규(學規)·학금(學禁)으로 나누어진 34조에 달하는 「서실의(書室儀)」 등도 치가(治家)와 수신(修身)에 도움을 줄만한 관심작들이다.
강필효의 아버지는 식(植)이며, 봉화에 거주했다. 윤증(尹拯)의 학통을 받은 윤광소(尹光紹)를 사사한 그는 생애 85년을 학문에 바쳤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닐 만큼 학문에 몰두하였으며, 1803년(순조 3) 순릉참봉(順陵參奉), 호씨서별제(浩氏署別提),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 1843(헌종 9) 통정대부(通政大夫),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 등을 역임했다.
『해은유고』는 조선 후기의 학자 박기봉(朴岐鳳 ; 1643∼1712)의 시문집이다. 박기봉의 본관은 무안(務安). 자는 주서(周瑞), 호는 해은(海隱)이다.
이 책은 1885년(고종 22)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문호(李文浩)의 서문이, 권말에 김상헌(金尙憲)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만사 196수, 권2는 서(書) 3편, 제문 4편, 행장·유사·기(記)·서(序) 각 1편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시격이 청아하면서도 소박하고 사실적이다. 「동도회고십육음(東都懷古十六吟)」은 경주의 명승사적을 돌아보고 술회를 읊은 것이고, 「제포석정(題鮑石亭)」도 천년 고도의 번화하였던 옛날의 모습을 회고하며 지은 시이다. 서(書)중 「상갈암선생(上葛庵先生)」은 스승 이현일에게 올린 것으로, 학문하는 방법을 묻고 성리·경학·역학에 대하여 묻고 답하는 내용으로, 선유들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에 대하여는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밖에도 자기의 사상과 학문의 방향을 설명한 「해은기(海隱記)」가 있다.
박기봉의 아버지는 징(徵)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경(璟)의 딸이다. 일찍이 장인인 권경에게 수업을 받다가, 이휘일(李徽逸),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으며, 영남시(嶺南試)에 두 번, 관동시(關東試)에 세 번 장원하였으나 대과에는 합격하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기성(箕城)의 경치를 사랑하여 온 가족을 이끌고 월송(月松) 고직촌(高直村)에 거주하면서 황여정(黃汝正)의 장서 수천권을 빌어 종제(從弟) 권대림(權大臨)과 공부를 더욱 정밀히 하였다. 그는 이로써 관동에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해장실기』는 조선 선조 때의 무신 고언백(高彦伯 ; ?∼1609)의 실기이다. 고언백의 자는 국필(國弼), 호는 해장(海藏), 본관은 제주(濟州)이다. 교동의 향리로서 무과에 급제하였고, 군관(軍官)·변장(邊將)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원군수(寧遠郡守)로서 대동강 등지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배하고, 계속 분전하여 그 해 9월 왜병을 산간으로 유인, 지형을 이용하여 62명의 목을 베었다. 그 이듬해 양주에서 왜병 42명을 참살, 그 공으로 왕은 그를 양주목사(楊州牧使)에 임명하여 능침(陵寢)을 보호하도록 하였다. 양주에서 그는 장사를 모집하여 산속 험준한 곳에 진을 치고 복병하였다가 왜병을 공격하여 전과를 크게 올렸다. 태릉이 한때 왜군의 침범을 받았으나 그의 수비로 여러 능이 잘 보호될 수 있었다. 또, 내원한 명나라 군사를 도와 서울 탈환에 공을 세우고 경상좌도병마절도사로 승진하였으며, 정유재란 때는 경기도방어사가 되어 전공을 크게 세웠고, 난이 수습된 뒤 선무공신(宣武功臣) 2등에 책록되고 제흥군(濟興君)에 봉하여졌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할 때, 임해군의 심복이라 하여 살해되었다.
『해헌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황명하(黃命河 ; 1651∼1765)의 시문집이다. 황명하의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자윤(子潤), 호는 해헌(懈軒)이다.
이 책은 1971년 10대손 진학(鎭鶴)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주원(李周遠)·백순우(白淳愚)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남병기(南炳基)와 진학의 발문이 있다. 권1∼3은 시 478수, 권4는 만사 18수, 서(書) 21편, 잡저 1편, 대책(對策) 3편, 권5는 서(序) 5편, 기(記) 1편, 부록으로 제현수창시(諸賢酬唱詩) 54수, 제현왕복서(諸賢往復書) 24편, 서(序), 교유록(交遊錄), 교유록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리(性理)에 밝아 시에도 인의(仁義)가 함축되어 있다는 평을 받고 있으며, 「영산십영(英山十詠)」·「유대관령숙오봉서원(踰大關嶺宿五峰書院)」등 연작기행시가 다수 있다. 그밖에 친구와 이별할 때 쓴 증시(贈詩)와 차운(次韻)한시도 많다. 잡저의 「유교원제생문(諭校院諸生文)」은 향교의 교생과 서원의 원생에게 학문에 정진하라고 권유한 글로서, 가문을 빛내고 나라를 바르게 하고 시대를 구할 인재를 만들고자 하는 것이 향교와 서원에서 선비를 기르는 뜻이라고 하였다. 서(序) 중 「소곡동안서(蘇谷洞案序)」와 「기성향안서(箕城鄕案序)」 등에서는 동안과 향안을 통하여 사족 중심의 향촌사회의 질서를 확립하고자 하는 필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해당야사서(懈堂野史序)」는 저자가 『열성조실록(列聖朝實錄)』을 편집하여 14권을 만들고 붙인 서문인데, 당파에 따라 역사를 기술하는 자들이 잘못된 사관으로 자신에게 이롭게 씀으로써 나타나는 병폐를 지적하고 있어, 이 시기 역사 서술의 한 동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황명하의 아버지는 통덕랑 석건(石建)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시경(是經)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이 뛰어나고 교유의 범위가 넓었으며,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힘썼으며, 평해(平海)에 유배 중인 강석규(姜錫圭)의 가르침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