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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당선생문집』은 장만걸(張萬杰 ; 1654∼1717)의 시문집이다. 장만걸의 자는 기언(器彦), 호는 행당(杏堂),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이 책은 후손 진두(鎭斗)·진규(鎭圭) 등이 편집하였으며, 간행연대는 알 수 없다. 시(詩)는 특히 이황(李滉)의 시에 차운한 것이 60여 수에 이르며, 장편 「부운가(浮雲歌)」와 「한거자영(閑居自詠)」에는 시대를 근심하고 세상일을 개탄하는 저자의 소신이 잘 드러나 있다. 서(書)는 스승인 장신, 벗인 권두인(權斗寅)·김성탁(金聖鐸) 등에게 보낸 것으로 안부의 말과 예학, 기타 강학(講學)의 논의가 들어 있다. 기(記)의 「행당기(杏堂記)」는 도학으로 노년을 즐기는 저자의 모습을 잘 담고 있다.
장만걸은 판서 말손(末孫)의 7대손으로 윤병(玧秉)의 아들이다. 장신(張?)·장진(張?)으로부터 가학을 전수받고, 이동표(李東標)·이유장(李惟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소과에 합격하였으나 더 이상 과업(科業)을 일삼지 않고, 예학(禮學)에 힘써 『비요집람(備要輯覽)』·『의례문답(疑禮問答)』·『가례익해(家禮翼解)』등을 저술하였으며, 서법(書法)에도 뛰어났다.
『행당원고』는 숙종조의 소년 김경림(金景霖 ; 1700∼1708)의 시문집이다. 김경림의 본관은 순천(順天).자는 택세(澤世), 호는 행당(杏堂)이다.
이 책은 1717년 박손경(朴孫慶) 등이 편집하여 간행을 보았고, 다시 1937년권술조(權述祖)등이 중간하였다. 권두에 이상정(李象靖)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권술조의 중인발문이 있다. 시 11수, 집구(集句) 4수,잠(箴) 2편, 잡저 3편이 수록되어 있고, 부록으로 유사와 행략(行略) 외에 박손경의 초간 시 발문, 안민수(安敏修)의 「행당원고부세첩시기사(杏堂寃稿附世帖時記事)」 외에 20편에 이르는 향리 문인노사(文人老士)들의 추술을 수록하였다. 시는 9세된 아동의 작품으로 보기에 숙성해 보이며, 특히 「사시음(四時吟)」과 집구 등 여러 편은 습작으로 그 재주가 조숙했음을 볼 수 있다. 잡저의 「금인불견고시월변(今人不見古時月辯)」과 「간야담제(看野談題)」는 각각 이백(李白)의 시구와 『어우야담』 기사의 한 대목을 두고 논란한 내용이다. 원문집의 내용은 매우 조촐하나, 유사 및 행략, 서후(書後) 등 다른 이들의 추술을 많이 실어 9세 요절의 재주를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곡진히 담았다. 끝에 저자의 누이의 문집 『행당상자원고(杏堂?姉寃稿)』를 부첨하였는데, 여기에는 시 7수와 「고결서(告訣書)」 1편, 부록으로 「효랑행기(孝娘行記)」와 「서행당상자원고후(書杏堂?姉寃稿後)」가 실려 있다.
김경림의 아버지는 필형(弼衡)이고, 어머니는 광주김씨(光州金氏)이다. 유아시부터 기이하고 뛰어난 재주와 몸가짐으로 장래가 촉망되었으나 9세에 요절하였다.
『행정선생실기』는 이중광(李重光 ; 1592~1685)과 후손들의 시문을 합쳐놓은 책이다. 이중광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이다.
이 책은 1838년 후손 기영(璣永), 효순(孝舜)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도화(金道和), 이만도(李晩燾)의 서문과, 권말에 9대손 효태(孝泰)의 발문이 있다. 권1에 선계록(先系錄), 연보, 시 11수, 서(書) 8편, 기(記) 1편, 제문 2편, 권2는 부록으로 후인들의 문자인데 차운시 37수, 수연기(壽宴記) 2편, 수연서(壽宴序) 3편, 발 1편, 만사 1편, 제문 1편이 있다. 권3에 이돈우(李敦禹)가 찬한 행장, 한구(韓?)가 찬한 묘갈명, 청천사기(淸川祠記), 청천사사우개기문(淸川祠祠宇開基文), 상량문, 봉안문, 상향문, 사우종유록(師友從遊錄)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김인섭(金麟燮)과 9대손 효기(孝驥)의 발문이 있다.
행정유고 뒤에는 죽촌공유고(竹村公遺稿), 청사공유고(淸?公遺稿), 청계공유고(淸溪公遺稿)가 덧붙여져 있다. 죽촌공유고는 이중광의 아들인 이현재(李玄栽)의 유고로 시 4수, 서(書) 4편, 부록으로 김도화(金道和)가 찬한 행장, 이만인(李晩寅)이 찬한 묘갈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사공유고는 이중광의 증손인 이세태(李世泰)의 유고로 시 8수, 서(書) 6편, 부록으로 김도화(金道和)가 찬한 행장, 이동적(李東迪)이 찬한 유사, 유치명(柳致明)이 찬한 비음기(碑陰記)로 구성되어 있다. 청계공유고는 이중광의 증손인 이세후(李世?)의 유고로 시 7편, 서(書) 1편, 부록으로 차운시 1수, 서(書) 1편, 행장, 묘갈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권말에 9대손 효태의 발문이 있다.
이중광의 시 중 「제행정(題杏亭)」이라는 작품은 유명하다. “죽더라도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살아서는 마땅히 안빈낙도 하리라/수 레를 돌려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세로(世路)는 티끌과 시끄러움이 많구나(死可飢周粟 生當掛瀕瓢 回車及未遠 世路多塵)”라는 짧은 내용의 시어지만 작가의 정신세계를 응축시켜 놓은 작품으로 후대 사람 들이 많은 차운시를 지을 정도로 알려진 것이다. 이현일(李玄逸)과 이재(李栽)는 그와 척족(戚族)이 되는 관계로 차운시를 지었고, 이밖에 부록에 실린 차운시가 그것 이다. 또, 「수비산연구(首比山聯句)」도 저자가 삼종숙 석계공(石溪公)을 영양(英陽)에서 방문하고 당시 유명한 홍우정(洪宇定)과 함께 지은 것으로, 당시 의리로 뭉친 선비들의 기개를 짐작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밖에 「행정기(杏亭記)」는 저자가 당호(堂號)를 짓 게 된 내력과 행정의 함의를 문답형식으로 설명한 글이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나 소옥(小屋)을 지어 행정이라 편액하고 지은 시로서, 자신의 청렴결백한 기개와 충의의 정신을 나타 낸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민족의 시련기에 지식인이 어떠한 자세로 처신하였던가를 보여 주었다.
이중광의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유성(惟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득궤(得?)의 딸이다
『행정유고』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중광(李重光 ; 1592∼1685)의 시문집이다. 이중광의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경현(景顯). 호는 행정(杏亭)이다.
이 책은 1838년(헌종4) 후손 기영(璣永)·효순(孝舜)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조긍섭(曺兢燮)·김도화(金道和)·이만도(李晩燾)의 서문과, 권말에 이효기(李孝驥)·이효태(李孝泰)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11수, 서(書) 7편, 기(記) 1편, 제문 2편, 권2는 부록으로 연보·행장·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 시의 「제행정(題杏亭)」이라는 작품은 유명한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치욕을 듣고 벼슬에서 물러나 소옥(小屋)을 지어 `행정(杏亭)`이라 편액하고 지은 시로서, 자신의 청렴결백한 기개와 충의의 정신을 나타낸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민족의 시련기에 지식인이 어떠한 자세로 처신하였던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죽더라도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살아서는 마땅히 안빈낙도하리라/수레를 돌려 멀리 가지도 않았는데 세로(世路)는 티끌과 시끄러움이 많구나(死可飢周粟 生當掛영(水+潁)瓢 回車及未遠 世路多塵?).″라는 짧은 내용의 시어지만 작가의 정신세계를 응축시켜 놓은 작품으로 후대 사람들이 많은 차운시를 지를 정도로 알려진 것이다.
이중광의 아버지는 사옹원봉사 유성(惟誠)이며, 어머니는 전의이씨(全義李氏)로 득궤(得?)의 딸이다. 청송 노래산(老萊山)에서 태어났으나 6세에 부친상, 9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외삼촌인 이대기(李大期)에게 양육되었다. 그에게 학문을 배우고, 뒤에 성안의(成安義)에게 수학하였다. 1617년(광해군 9) 향시에 합격하였고. 이듬해인 1618년에 과거에 응시하였다. 이때 페모론이 대두되자, 탄식하면서 과거를 포기하고 경학공부에 힘썼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송라도찰방(松羅道察訪) 겸 수륙군향차원(水陸軍餉差員)에 제수되어 북진하다가 조령에 이르러 강화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벼슬을 버리고 물러났다.
『향계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김태명(金泰鳴 ; 1661∼1721)의 시문집이다. 김태명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달부(達夫), 호는 향계(香溪)이다.
이 책은 1911년 6대손 명호(命鎬)와 7대손 영선(永善)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도화(金道和)의 서문이, 권말에 명호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166수, 권2는 서(書) 1편, 책(策) 7편, 기(記)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지후(至後)」·「추야음(秋夜吟)」·「초동(初冬)」·「입춘(立春)」등 계절적 감회를 읊은 것이 많다. 그리고 「설후(雪後)」·「춘우(春雨)」·「우청(雨晴)」등 날씨를 소재로 느끼는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으며, 그밖에 인간적인 고민과 갈등을 표현한 「배민(排悶)」·「자소(自笑)」, 여행노정의 감회를 읊은 「구곡도중음(九曲道中吟)」, 영물(詠物)인 「송(松)」·「매(梅)」, 교훈적인 내용을 설유한 「안분(安分)」 등이 있다. 또한, 증별이나 화답의 시도 상당수 있다. 서(書)는 종사(宗事)로 첨종(僉宗)에게 보낸 것이며, 책은 「문왕패(問王覇)」·「문형옥(問刑獄)」·「문곡(問穀)」·「문무(問巫)」·「문검사(問儉奢)」등 군학(君學)과 시무(時務)에 대하여 쓴 것이 대부분이다.
김태명의 아버지는 팔화(八和)이며, 어머니는 영산신씨(靈山辛氏)로 공조좌랑 시망(時望)의 딸이다. 가학(家學)으로 학문을 배우고, 17세에는 이미 경사(經史)에 박통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여러번 낙방한 뒤로는 심성(心性)공부에 전념하였다.
『향산문집』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이만도(李晩燾 ; 1842∼1910)의 시문집이다. 이만도의 자는 관필(觀必), 호는 향산(響山),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이 책은 1916년 조카 중철(中轍)·강호(康鎬)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2의 「의상봉사(擬上封事)」는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흉계를 폭로하고 오로지 전통적 우호국인 청나라와의 협력관계를 적극 긴밀히 하여야 함을 강조한 내용이며,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는 1905년 을사조약에 찬성한 오적의 죄상을 춘추대의에 입각하여 엄히 성토하고 그들을 처형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 것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우국충정을 담고 있다.
이만도는 휘준(彙濬)의 아들이며 예안(禮安)사람이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지평(持平)·중학교수(中學敎授) 등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1876년 일본대사 구로다(黑田淸隆)가 와서 강화도조약을 체결할 때, 최익현(崔益鉉)이 반대의 상소를 올리자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동공박을 받았는데, 그때 집의로서 탄핵문의 문구가 부당하다고 말소하였다가 대사헌의 미움을 받아 집의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복직되고, 사성·응교·장악정(掌樂正) 등을 역임하였다. 양산군수에 있을 때는 어려운 백성을 구휼하고 탐관오리를 소탕하는데 공을 세웠다. 1878년 다시 집의에 임명되어 홍문관·사헌부·사간원의 요직을 역임하고, 1882년 통정대부에 올라 곧 공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사임하고 세상이 어수선하므로 환로를 단념하였는데, 당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 백동(柏洞)에 작은 서재를 지어놓고 경전을 연구하며 날을 보내다가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예안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매국죄를 통박한 상소를 올렸다. 1907년 가선대부, 1910년 자헌대부에 올랐으나 그 해 8월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유서를 지어 고결(告訣)한 뒤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향오집』은 조선 후기의 문인 권찬환(權瓚煥 ; 1782∼1836)의 시문집이다. 권찬환의 자는 문옥(文玉), 호는 향오(香塢),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동진(東鎭)으로 경주에 거주했다. 일찍이 이근오(李覲塢)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문사(文詞)가 뛰어나 대·소향시(大·小鄕試)에서 여러 번 합격하니 과장에 임했던 사람들이 공의 글을 보고 탄복하였다. 1811년에 백형(伯兄)과 스승의 상을 당하고 1823년에 부친상을 1832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이를데 없었으며, 부친 여읜 조카들을 부양하였다. 183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등용되지 못하고 익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그의 재주를 애석하게 여겨 승정원주서겸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兼春秋館記事官)을 증(贈)하였다.
『허백속집』은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洪貴達 ; 1438~1504)의 시문집이다. 홍귀달의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이다.
이 책은 원집 3권. 속집 6권, 합 9권 6책으로 원집은 1611년(광해군 3) 외현손 최정호(崔挺豪)가 가장초고(家藏草稿)를 편집, 간행하였고, 속집은 1843년(헌종 9) 후손 종구(宗九)·종표(宗標)·기찬(箕瓚) 등이 원집에 빠진 시문을 수집, 간행하였다. 원집 권두에 정경세(鄭經世)의 서문이, 권말에 유치명(柳致明)의 속집후서(續集後序)와 홍은표(洪殷標)의 발문이 있다. 원집 권1은 시 419수, 권2는 기(記) 30편, 서(序) 34편, 소(疏) 6편, 권3은 비지(碑誌) 31편, 제문 19편, 잡저 34편, 속집 권1∼4는 시 636수, 권5는 서(序) 8편, 기 5편, 묘비명 6편, 연보, 권6은 행장, 임호서원봉안문(臨湖書院奉安文), 상향축문(常享祝文) 2편, 양산서원봉안문(陽山書院奉安文)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 가운데 「청석동노인탄(靑石洞老人歎)」은 청석동을 지나다가 예순살 된 초라한 행색의 노인과 만나 나눈 대화를 적은 것으로, 오랑캐에게 1남2녀가 모두 끌려가고 늙은 부부만 남아 풀뿌리로 연명해 가는 비참한 정경을 묘사하였다. 「자술(自述)」에서는 세사를 잊고 물고기·새를 벗삼아 자연에 묻히고 싶은 심회와 병중에도 시를 놓지 못하여 오히려 병이도지고,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즐기므로 늘 가난하기만 한 살림을 노래하기도 하였다. 그는 또 「빙옥난고서(氷玉亂藁序)」에서 시란 아름답게 꾸미기 보다는 성정의 바름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는 자신의 시관(詩觀)을 정리하였다. 그의 시는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던 초년의 시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기까지 만년의 시는 분위기에 있어 어조의 차이가 있지만, 전반적으로 차분히 가라앉은 절제된 시정이 돋보인다. 소는 모두 당시의 시폐(時弊)를 들어 직간한 내용으로, 간신(諫臣)의 풍모가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정부소(政府疏)」는 모두 10조에 걸쳐 당시 폐정의 시정을 건의한 내용인데, 임금의 바른 치도(治道)의 확립과 언로개방, 변방문제, 고을수령의 자질문제, 군사제도, 흉년문제 등 여러 폐단의 척결을 요구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사좌천되기까지 하였으며, 사림과 훈구세력간의 알력이 사화로까지 이어져 파란이 일던 당시의 전반적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 참고자료가 된다.
홍귀달의 아버지는 증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세조 6) 강릉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겸예문(兼藝文)을 거쳐 봉교(奉敎), 이조정랑(吏曹正郞),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천추사(千秋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성(大司成), 중추(中樞)를 거쳐 대제학(大提學), 호조판서(戶曹判書)등을 역임했다. 1504년에 손녀(彦國의 딸)를 후궁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하였고 전후 여러 차례의 간쟁으로 연산군(燕山君)
『허주문집』은 김여욱(金汝煜 ; 1581∼1661)의 시문집이다. 김여욱의 자는 숙회(叔晦), 호는 허주(虛舟),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이 책은 1892년(고종 29) 후손 복연(福淵)과 창희(昌羲)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의 시(詩)는 주변경관을 노래하며 자연에 묻혀 지내는 즐거움과 선비의 자세를 읊은 내용이 많다. 「오상지(傲霜枝)」와 「상후견국(霜後見菊)」등에서는 국화의 오상고절을 기리며, 도잠(陶潛)과 굴원(屈原)의 탈속한 자태를 본받으려는 마음가짐을 노래하였다. 반면, 우국의 충정과 현실을 개탄하는 작품으로 「장한가(長恨歌)」가 있는데,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 아래 삼전도에서의 항복소식을 듣고 비분절통의 마음을 담아 지은 것이다. 「만고연의사(萬古演義辭)」는 장편으로 난세에 대장부로 태어나 경륜을 펴보지도 못하고 묻혀 지내는 통탄으로 말을 열어, 만고에 변할 수 없는 의리를 고금 역대의 수많은 고사와 인물을 동원하여 설명한 뒤, 병자년의 국치를 염두에 두어 강개통한하는 마음을 노래하였다. 권2 잡저(雜著)의 「소국설(疏菊說)」은 온갖 초목이 다 시든 뒤 서리를 무릅쓰고 늠름히 피어난 국화의 자태에서 옛 도잠과 굴원 등 군자의 지취(志趣)를 떠올리며, 이에 스스로를 가탁한 국화애호의 변이다. 병자호란 때 재야 선비의 현실인식을 엿볼 수 있는 글이 많다.
김여욱은 1613년(광해군 5)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연흥부원군 피살사건을 보고 벼슬에 뜻을 잃어 낙향하여 학문에 힘썼다. 임진왜란 때에는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던 아버지 개국(蓋國)과 함께 출전하기도 하였다.
『현암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민치긍(閔致兢 ; 1810∼1885)의 시문집이다. 민치긍의 자는 근지(謹持), 호는 현암(玄?),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종혁(宗爀)이고, 어머니는 전주류씨(全州柳氏)로 제휴(濟休)의 딸이다.
이 책은 서(序)와 발(跋)이 없어 편찬경위를 알 수 없다. 시(詩)는 산중생활의 묘사가 많고,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느끼는 한가로운 정감이나 계절의 느낌을 노래한 작품이 많다. 서(書)에는 안부 외에 시사(時事) 및 학술적 강론의 내용도 일부 들어 있다. 잡저(雜著)의 「부부설(夫婦說)」은 부부를 하늘과 땅에 견주어,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 만물을 화육(化育)하듯 부부의 화합으로 가정을 화평하게 하고, 나아가 사회안정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논한 것이다. 「계학도(戒學徒)」는 제자들을 경계한 글로, 병을 고치기 위하여 의원과 약이 필요하듯 학업의 성취를 위하여 스승의 경계를 귀담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함을 말하였다. 「왕정기(王鼎記)」에는 고려 때 만들어진 용량이 다섯 말에 무게가 80근이나 되는 타원형 솥이 500년이 지나도록 잘 보존되어온 일을 적었다.
『현암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홍석(洪奭 ; 1736∼1805)의 시문집이다. 홍석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청중(淸仲), 호는 현암(玄巖)이다.
이 책은 1930년 5대손 재관(在寬)·재규(在圭)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기호(李琦浩)의 서문이, 권말에 재관·재규의 후서(後敍)가 있다. 앞에 목록이 있고, 권1은 시 95수, 소(疏) 1편, 권2는 소(疏) 2편, 계(啓) 4편, 서(書) 7편, 전(箋) 2편, 명(銘) 1편, 부록으로 행장·묘갈명·현암기(玄巖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태극(太極)」·「음양(陰陽)」·「오행(五行)」 등 성리학 사변을 읊은 것과,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주염계(周濂溪)」·「정명도이천(程明道伊川)」·「주회암(朱晦庵)」 등 선현들을 경모하는 내용의 연작시가 관심을 끈다. 만시로는 스승 채제공(蔡濟恭)에 대하여 쓴 「번암선생만(樊庵先生挽)」이 있다. 소에는 지평·정언의 사직소와, 군정(軍政)의 개선책을 논한 「병조진정소(兵曹陳情疏)」가 있다. 서(書)에는 스승 체제공에게 보낸 것 3편 외에 이광정(李光靖)에게 보낸 글이 있는데, 대개 문안인사를 주고받은 내용이다.
홍석의 아버지는 유규(有圭)이며, 어머니는 순천김씨(順天金氏)로 기천(起天)의 딸이다. 1765년(영조 41) 사마시에 합격한 뒤 채제공(蔡濟恭)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77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고, 그 뒤 홍문관의 저작·박사 등을 거쳐 1782년(정조 6) 성균관전적·시강원설서, 이듬해 온릉영(溫陵令), 다음해 예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혜사집』은 조선말기의 문인·의사(義士) 강원형(姜遠馨 ; 1862∼1914)의 시문집이다. 자는 성윤(聖允), 호는(蕙社),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경상북도 칠곡(漆谷)에서 태어났다.
이 책은 1961년 아들 봉희(鳳熙)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창숙(金昌淑)·이수기(李壽麒)의 서문이, 권말에 박문식(朴文植)과 봉희의 발문이 실려 있다. 권1은 시 10수, 소(疏) 3편, 서(書) 2편, 잡저·제문·연보 각 1편, 권2는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부분 수창이나, 「영설연구사십오운(詠雪聯句四十五韻)」은 1905년 경무청에 잡혀가 이설(李?)·김복한(金福漢)·장지연(張志淵) 등 8인과 함께 읊은 작품으로 우국의 정을 담고 있다. 소의 「청환어겸진구폐소(請還御兼陳救弊疏)」는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 함으로써 국위가 손상된 점을 지적하고 시국의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도를 역사 전고를 들어가며 논리정연하게 제시한 글이다. 「청파오조협약참제적신소(請罷五條脅約斬諸賊臣疏)」는 을사조약에 대하여 13도 유생을 대표하여 올린 글로, 조약의 부당성과 일제침략의 진상을 밝히고 오적신(五賊臣)의 매국적 행위를 규탄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만큼 불의에 대한 비분강개와 선비의 절조를 담고 있다. 「재소(再疏)」 역시 유사한 내용이다. 두 편의 편지글은 일본 공관과 영국·미국·프랑스·독일·청 등에 보낸 것으로 각기 『황성신문(皇城新聞)』에 실린 바 있다. 「여영미법덕청각공관공함(與英美法德淸各公館公函)」에서는 을사조약의 부당성을 각국에 고하여 일본의 조약 강제를 야만적 폭행으로 규정하였다. 「당후일기(堂後日記)」는 승정원 가주서로 있을 때인 1893년(고종 30) 2월 22일에서 27일까지의 기록으로, 당시의 국정이 소상하게 적힌 귀중한 사료이다.
강원형은「십삼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의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조약의 파기,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 일본공사의 횡포와 무례를 엄징할 것 등의 상소를 올리고, 동시에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하여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투옥된 뒤 1906년 3월 20일 출옥하였다.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憤事)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 의사비(義士碑)가 있으며, 1980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혜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이상규(李祥奎 ; 1846∼1922)의 시문집이다. 이상규의 자는 명뢰(明賚), 호는 혜산(惠山)이다.
이 책은 1924년 아들 진걸(鎭杰)과 조카 진보(鎭輔)·진인(鎭仁) 등이 간행하였다. 권두에 장석영(張錫英)의 서문이, 권말에 권상빈(權相彬)의 발문이 있다. 권1∼4는 부(賦)·시, 권5∼8은 서(書), 권9·10은 잡저·설(說)·서(序), 권11은 기(記), 권12는 발(跋)·명(銘)·행장, 권13은 상량문·봉안문·상향문·통문·제문, 권14는 묘갈명, 권15는 부록으로 저자에 대한 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끝에 「지감록(志感錄)」 2권이 합쳐져 있다. 서(書)는 조성교(趙性敎)·이세재(李世宰)·이병전(李秉銓)·채규상(蔡圭祥) 등에게 준 것인데, 일상적인 내용으로 지장문(誌狀文) 청탁이나 안부의 글이다. 잡저의 「독서수차(讀書隨箚)」는 사서(四書)의 의문처를 설명한 것이다. 그밖에 박세당(朴世堂)의 문학과 덕행을 기린 「삼호설(三湖說)」, 『맹자』`무치지치(無?之?)`를 인용하여 인(仁)을 논한 「치치설(??說)」 등이 주목된다. 기는 서(序)와 함께 문집류와 각종 계(契)에 붙이거나, 누정·재실 등의 연혁을 쓴 것이 대부분이며, 연보·일기·산수(山水)를 대상으로 한 것도 있다. 「지감록(志感錄)」은 선대의 유적지와 각 묘소, 인근의 지명·산수 등을 기록하고 소서(小序)를 붙였으며 129수의 시를 적어두었다.
이상규는 제권(濟權)의 아들로, 과거에 실패한 후 학문에 전념하였고, 단구(丹邱) 묵곡(默谷)에서 후학을 양성하였다. 허전(許傳)의 문하로, 박치복(朴致馥)·허유(許愈)·곽종석(郭鍾錫) 등과 교유하였다.
『호계선생유집』은 신적도(申適道 ; 1574∼1663)의 시문집이다. 신적도의 자는 사립(士立), 호는 호계(虎溪),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이 책은 후손 상하(相夏)·돈식(敦植) 등이 간행하였다. 서(書)는 정구·장현광·정경세(鄭經世)·이경석(李景奭) 등 당대 명유에게 준 것이 많다. 잡저(雜著)는 「성설(性說)」 ·「심설(心說)」·「심성정지의변(心性情志意辨)」·「인의예지설(仁義禮智說)」·「무극이태극설(無極而太極說)」등의 성리학에 관한 것과 「가계오조(家系五條)」·「채미헌기(採薇軒記)」등이 실려 있다. 잠(箴)과 명(銘) 역시 심성수양에 대한 것이 대부분이다.「창의록(倡義錄)」은 병자호란 때의 의병활동을 기록한 것으로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신적도는 흘(?)의 아들이며 의성(義城)사람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5년(선조 38) 향시에 합격하여 유성룡(柳成龍)의 칭찬을 크게 받기도 하였지만 벼슬은 찰방에 그쳤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실패한 뒤 학산(鶴山) 미곡(微谷)에 채미헌(採薇軒)을 짓고 두문불출하였다.
『호고와선생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유휘문(柳徽文 ; 1773∼1827)의 시문집이다. 유휘문의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책의 19권은 1896년(고종 33) 후손에 의해 간행되었다. 권1∼2에 350여 수의 시(詩)가 실렸는데, 서경을 겸한 서정시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권3∼9의 서(書) 132편은 학문적 질의응답이 대부분인데, 스승인 유장원을 비롯하여 동학들과 경학·성리학의 의문점을 질의, 응답한 것이다. 권10∼17은 잡저(雜著)인데, 그 중 「독서쇄의(讀書?義)」는 사서삼경에 관하여 종래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구문이나 주석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쓴 것으로 경서의 연구에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권15의 「석궁보(釋宮補)」는 옛날 궁실제도를 연구한 자료로, 건물의 위치·명칭 등이 명기되어 있어서 이 방면의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금률설고해(禁律說攷解)」·「성률변고해(聲律辨攷解)」는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에 대한 이론을 밝힌 것이다.
유휘문은 유장원(柳長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821년(순조 21) 유장원이 지은 『예서통고(禮書通攷)』와 고조부 정원(正源)의 『역해참고(易解參攷)』를 교정하였다. 1826년(순조 26) 천거로 후릉참봉(厚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1827년 다시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그는 일생을 학문과 후진양성에 바쳤다. 경서와 제자서에 두루 밝았고,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저서로는『주역경전통편(周易經傳通編)』·『계몽통해(啓蒙通解)』·『근사보록(近思補錄)』·『가례고증(家禮攷證)』등이 있다.
『호고와선생별집』은 유휘문(柳徽文 ; 1773∼1827)의 시문집의 별집(別集)이다. 유휘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이다.
이 책은 1898년 후손에 의하여 간행되었다. 별집 8권은 모두 잡저(雜著)인데, 권1∼2의 「관복고증(冠服考證)」은 고대의 모자와 복장에 관한 고증적 연구로 태백관(太白冠)·치포관(緇布冠)·주현관(周玄冠)·진현관(進賢冠) 등 모자를 비롯하여 허리띠·신발 등 20여 조목으로 분류, 기술하였다. 권3∼4의 「가례고증(家禮攷證)」은 주희(朱熹)의 『가례』를 연구, 고증한 것으로 통례(通禮)·관례·혼례·상례·제례로 나누어 서술하였으며, 권5∼7의 「계몽고의(啓蒙攷疑)」는 주희의 『역학계몽(易學啓蒙)』중에 어렵거나 의심스러운 곳을 연구, 해석한 것으로 이황(李滉)의 『계몽전의(啓蒙傳疑)』, 서명응(徐命膺)의 『역학계몽집전(易學啓蒙集箋)』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주역』연구서 중의 하나이다.
『호고와선생외집』은 유휘문(柳徽文 ; 1773~1827)의 자연철학에 대한 논저이다. 유휘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 호는 호고와(好古窩)이다.
이 책은 1972년에 간행되었다. 서문은 없고 5대손 병희(秉熙)의 발문이 있다. 권두에 선기옥형(璇璣玉衡)의 사진이 있고, 권1부터 권6까지 문집 전체가 「창랑답문(滄浪答問)」이라는 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휘문이 32세 때 저술한 것으로 총 170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내용은 천문, 역수(曆數), 음양, 오행, 율려(律呂), 역괘(易卦), 운명, 지리 등을 문답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창랑문답』이라 명명한 것은 창랑주인(滄浪主人)이 사의객(?衣客)과 더불어 문답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선기옥형을 만들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운행을 보았고,『창랑문답』을 지어서는 천지만물의 조화를 말하였으니, 원대한 것을 궁구하였으며 미세한 것도 정밀히 관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유휘문의 아버지는 만휴(萬休)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현동(顯東)의 딸이다. 유장원(柳長源), 남한조(南漢朝),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1821년에 유장원이 지은『예서통고』와 고조부 유정원의『역해참고』를 교정하였다.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뒤였다. 일생을 학문과 후진양성에 바쳤으며 조승수(趙承粹), 이병운(李秉運), 이병원(李秉遠), 유건휴(柳健休), 유정문(柳鼎文), 유치명(柳致明) 등의 학자들과 교유하였다. 고산 서당(高山書堂)을 비롯하여 여강(廬江), 구계(龜溪), 황산(黃山), 고운(孤雲) 등 여러 서당에서 후진을 교육하였다. 경서와 제자서에 두루 밝았고, 많은 저술을 하였다.
『호봉문집』은 이돈(李燉 ; 1568∼1624)의 시문집이다. 그의 자는 광중(光仲), 호는 호봉(壺峯), 본관은 진보(眞寶)이다.
이 책은 손자인 영(泳)이 수집하였고, 1897년 후손들이 간행하였다. 시(詩) 중에서 「산수정가(山水亭歌)」와 「유망천서(遊輞川序)」는 1612년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에 낙향하여 산수정(山水亭)·이로당(怡老堂)을 짓고 학문과 사색을 하며 지은 것이다. 그에게는 학문적 업적을 보여주는 글은 별로 없으나, 시 중 특히 백가의체(百家衣體) 16수는 당·송 제가들의 시구를 가져와 작품화한 것이다.
이돈은 참봉 원회(元晦)의 아들로 이공(李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01년(선조 34)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 여러 벼슬을 거친 후 헌납(獻納)이 되어 정인홍(鄭仁弘)을 논척(論斥)하다가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좌천되었다. 1612년(광해군 4) 관직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安東)에 돌아가 학문에 힘쓰다가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에 기용되었고, 부모봉양을 위해 영천군수(永川郡守)에 재직 중 병사(病死)했다.
『호상유고』는 조선 말기의 학자 이연성(李淵性 ; 1824∼1893)의 시문집이다. 이연성의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순서(舜瑞), 호는 호상(湖上)이다.
이 책은 1945년 후손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곽종석(郭鍾錫)의 서문이, 권말에 유필영(柳必永)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82수, 애사 3편, 권2는 서(書) 3편, 제문 14편, 발(跋) 5편, 서(序) 2편, 기(記) 1편, 명(銘) 1편, 행장 3편, 권3은 잡저 13편, 권4는 부록으로 만장·제문·유사·묘갈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화답과 수창이 대부분이며, 서정적인 내용보다는 담담히 생활주변에서 느끼는 정서를 이야기하듯 노래한 것이 많다. 「술회(述懷)」에서는 주경야독하는 힘든 생활 속에서도 늘 자기 수양에 힘을 쏟는 삶의 자세를 낙천적인 어조로 그려 보이고 있다. 잡저의 「독요전기삼백집전(讀堯典朞三百集傳)」은 천체(天體)에 대한 개괄적인 해설과 함께 세법(歲法)·세여법(歲餘法)·월법(月法)·일법(日法)에 대하여 풀이한 내용이다. 「관물설(觀物說)」은 유물필유칙(有物必有則)의 법칙을 들어 유형(有形)을 미루어 무형(無形)까지도 헤아릴 수 있음을 설명하였다.「중용강설(中庸講說)」은 『중용』에 있어서의 체용(體用)의 문제와 그 강령을 밝힌 것으로, 배우는 자가 그 요긴하고 절실한 곳을 골라 스스로 연구하고 실천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연성의 아버지는 원구(源求)이며, 어머니는 서산정씨(瑞山鄭氏)로 석윤(錫胤)의 딸이다. 일찍이 제자백가를 고루 읽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율려(律呂), 산수(算數), 의약(醫藥), 병가(兵家) 등을 통하고 기삼백(朞三百)을 주해(註解)하였다. 또 渾天儀를 만들고 藥器와 車制도 잘 알았으나 “학문은 체실함이 귀함이니 불요불급한 일에 정신을 소모할 게 못된다”하고 六經四子와 낙건제서에 전념하였다.
『호수실기』는 조선 중기의 학자 정세아(鄭世雅 ; 1535∼1612)의 실기와 시문집이다. 정세아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 영천(永川)에서 세거(世居)하였다.
이 책은 1781년(정조 5) 6대손 일찬(一鑽)이 편집, 간행하였고, 이를 대본으로 1874년(고종 11) 9대손 희규(熙奎)가 보안을 기하여 중간하였다. 권두에 정범조(丁範祖)·채홍리(蔡洪履)·박규수(朴珪壽)의 서문이, 권말에 목만중(睦萬中)·김노진(金魯鎭)·조성교(趙性敎)의 발문이 있다. 문집 중 권3은 유고로 시 23수, 서(書) 7편, 유묵 4편, 권4∼9는 부록으로 제문 1편, 만사 2수, 광기(壙記) 1편, 서술(서述) 35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주로 학자다운 아취와 당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우국충정을 나타낸 작품이 많다. 특히, 「팔공산회맹운(八公山會盟韻)」은 1596년(선조 29) 임진왜란 후 왜적의 재침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영남지방 의병활동에 참여하였던 사람들이 팔공산에 모여서 맹세할 때 지은 것으로, 국방에 대한 위기의식과 유사시에 목숨을 던져 국가를 수호하자는 결의에 차 있는 작품이다. 정경세(鄭經世) 등 32명과 함께 각기 자신의 자(字)를 붙여서 연구시(聯句詩)로 한 구절씩 읊은 작품은 유명하며, 당시 의병사를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주로 유정(柳汀)·조덕기(曺德驥)·금난수(琴蘭秀)와 함께 불국사 영지루(影池樓), 망부석(望夫石)등 사적지를 찾아 수창한 시를 아울러 싣고 있는데, 문화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비교적 시의 흐름이 전아하면서도 골격이 있고 기상과 격조가 높다. 서(書) 중에는 손기도(孫幾道)와 왕복한 것이 많은데, 주로 경전(經典)에 대한 논술이다.
정세아는 사성 종소(從韶)의 현손으로, 윤량(允良)의 아들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 때 곽재우(郭再祐)는 의령에서, 권응수(權應銖)는 신령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니, 이로 인하여 낙동강 왼쪽이 온전하였다. 이듬해 평양과 서울에 차례로 수복되자 군사를 조희익(曺希益)에게 맡기고 자양(紫陽)으로 돌아갔다.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에 의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사양하였고, 나중에 황산도찰방(黃山道察訪)을 잠시 지내고 곧 사직하였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