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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후옹집(後翁集)
    발급년
    17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후옹집』은 조선 중기의 학자, 김건준(金建準 ; 1627∼1688)의 시문집이다. 김건준의 자는 평중(平仲), 호는 후옹(後翁), 혹은 쌍청헌(雙淸軒), 본관은 일선(一善), 아버지는 진계(震啓)이나, 이후에 종익(綜益)에게 입양되었다. 일찍이 외삼촌인 김종일(金宗一)의 문하에 들어가서 백가제서(百家諸書)를 모두 통달하고, 문사(文詞)가 출중하여 명성이 높이 났다. 1657(효종 8)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여러 번 천거되었으나, 이당인(異黨人)의 반대로 자리를 얻지 못하여 포부를 펴지 못했다. 1650년 오례(誤禮)때에 연상(漣上)에 왕래하여 허목(許穆)의 논에 따라 상소한 다음 자서부(自?賦)를 지어 감회를 진술했고, 「후옹설(後翁說)」을 지어 자기의 뜻을 밝혔다. 저서로 『동경지(東京誌)』『금별총화(金鰲叢話)』등이 있었으나, 병란으로서 산실되었다.
  • 제목
    훈지노연방집(勳地盧聯芳集)
    발급년
    18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훈지노연방집』은 조선 후기의 문인 정광복(鄭光復 ; 1716∼1796)·정광리(鄭光履 ; 1722∼1799) 형제의 시문집이다. 정광복의 자는 사심(士心), 호는 훈노(塤魯)이며, 정광리의 자는 사겸(士謙), 호는 지노(?魯)로 아버지는 득형(得衡)이며 경주에 거주했다. 형인 정광복은 동생인 광리와 더불어 일찍이 김유일(金推一)의 문하에 들어가서 수학하였고, 효도와 우애로 이름이 높았다. 형은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나, 동생은 1749년에 도시(道試)에 합격하여 익년 사마시(司馬試)에 장원하였다. 형제는 공자를 추모하는 뜻에서 노촌(魯村)이라 편액을 달고 학문을 연구하며 제자들을 가르쳐 원근의 자제들이 그 덕행을 듣고 많이 모였다. 후에 부윤(府尹) 홍양호(洪良浩)가 다시 노일(魯一)이라 편액하고 그의 학덕을 기렸다. 만년에는 왕이 장(杖)과 건(巾)을 특별히 하사하여 유연자적하며 세상을 마쳤다.
  • 제목
    훈지양선생문집(勳地梁先生文集)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훈지속집』은 정만양(鄭萬陽 ; 1664∼1730)과 정규양(鄭葵陽 ; 1667∼1732) 형제의 시문집의 속집이다. 정만양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 정규양의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 아버지는 석주(碩胄)이다.
    이 책 권1의 「곤지록내편(困知錄內篇)」에는 심성정(心性情)에 대한 묘리와 학문의 진수(進修)에 관한 방법을 천명하였고, 권2의 「곤지록외편(困知錄外篇)」에는 천문·지리·흠경각(欽敬閣)의 제도·율려(律呂)·관명(官名)·녹질(祿秩) 등을 서술하였다. 권3∼6의 「치도의설(治道擬說)」에는 전정(田政)·군정(軍政)·공거(貢擧)에 대한 경국지책(經國之策)을 저자의 소신대로 밝혀 놓았다. 「훈지어록(塤?語錄)」에는 문인 이홍리(李弘?)가 정문(程門)의 『정자어록(程子語錄)』을 모방하여 평소 두 스승에게 견문하였던 성정(性情)·이기(理氣)·인륜(人倫)·격물(格物)·귀신(鬼神)·천문·지리·율력(律曆)·상수(象數) 등에 대한 논리를 모두 수록하였다.
  • 제목
    훈지양선생문집(塤?兩先生文集)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훈지양선생문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만양(鄭萬陽 ; 1664∼1730)·정규양(鄭葵陽 ; 1667∼1732) 형제의 시문집이다. 정만양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 정규양의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로 아버지는 석주(碩胄)이다.
    정만양은 종조부(從祖父) 정시연(鄭時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37세 때에는 대전(大田)에서 이남산(尼南山) 아래 횡계동(橫溪洞)으로 이거하여 육유재(六有齋)와 태고와(太古窩)를 짓고 후학을 교육하며 훈지지락(塤?之樂)을 즐겼다. 1724년(경종 4)에 유일(遺逸)로서 순릉참봉(順陵參奉), 세마(洗馬)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치 안았다. 학문적으로는 치악산의 정시한(丁時翰)을 비롯하여 윤증(尹拯) 등과 성리(性理)를 논하고 이현일(李玄逸)에게는 스승의 예로 대우하였다. 저서로는『곤지록(困知錄)』,『심경질의보유(心經質疑補遺)』,『이기집설(理氣輯說)』,『의례편고(疑禮便考)』,『개장비고(改葬備考)』,『가례차록(家禮箚疑)』,『상지록(尙志錄)』 등이 있다.
    정규양은 23세 때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31세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 되었다. 후에 횡계서당(橫溪書堂)을 열고 『대학무존양설(大學無存養說)』,『례례통교(禮禮通攷)』,『경학연원도(敬學淵原圖)』,『소학의의(小學疑義)』,『가례문목(家禮問目)』,『대학차록(大學箚錄)』, 등을 저술하였다. 또 48세에 유일로 천거되어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으며,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에는 영천의병장으로 창의했다.
  • 제목
    훈지양선생어록(塤?兩先生語錄)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훈지양선생속집』은 정만양(鄭萬陽 ; 1664∼1730), 정규양(鄭葵陽 ; 1667∼1732) 형제의 어록과 속집이다. 형제의 본관은 영일(迎日). 정만양의 자는 경순(景醇), 호는 훈수(塤?). 아버지는 석주(碩胄)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방렬(邦烈)의 딸이다. 종조부 시연(時衍)과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아우 규양과 함께 수학하였다. 정규양의 자는 숙향(叔向), 호는 지수(??)이다.
    이 책은 4권 2책으로 이홍리(李弘?)가 정문(程門)의『정자어록(程子語錄)』을 모방하여 평소 두 스승에게 견문하였던 성정, 이기, 인륜, 격물, 귀신, 천문, 지리, 율력, 상수(象數) 등에 대한 논리를 모두 수록하였다. 권두에 정진헌(鄭鎭憲)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홍리의 지(識)이 있다. 문인(門人) 이홍리가 집록(輯錄)하고 후학 신체인(申體仁)이 산교(刪校)하였다.
    『훈지양선생속집』은 6권 3책으로 권1에 「인지록내편(因知錄內篇)」, 권2에 「인지록외편(因知錄外篇)」, 권3에 「치도의설(治道擬說) - 전정(田政)」, 권4에 「치도의설(治道擬說) - 군정(軍政)」, 권5에 「치도의설(治道擬說) - 군정(軍政)」, 권6에 「공거(貢擧)」에 글이 실려 있다. 권말에 정진헌(鄭鎭憲), 정태구(鄭泰九)의 후지(後識)가 있다. 「인지록내편(因知錄內篇)」은 심성정(心性情)에 대한 묘리와 학문의 진수에 관한 방법을 천명하였고, 「인지록외편(因知錄外篇)」은 천문, 지리, 흠경각(欽敬閣)의 제도, 율려, 관명(官名), 녹질(祿秩) 등을 서술하였다. 「치도의설(治道擬說)」에는 전정(田政), 군정(軍政), 공거(貢擧)에 대한 경국지책(經國之策)을 저자 소신대로 밝혀 놓았다.
    정만양, 정규양은 형제로서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 예학, 천문, 지리, 역학, 정치, 경제, 율려(律呂), 과제(科題) 등에 두루 정통하였으며, 당시 사림들이 이들을 옛날 정호(程顥), 정이(程?) 형제와 같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 제목
    휘헌선생문집(?軒先生文集)
    발급년
    186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휘헌선생문집』은 도신여(都愼與 ; 1605~1675)의 시문집이다. 도신여의 본관은 성주(星州). 자는 명숙(明叔), 호는 휘헌(?軒)이다.
    이 책은 1868년(고종 5) 6세손 석기(碩基)가 간행하였다. 권1은 시 25수, 부(賦) 2수, 소 1편, 서(書) 4편, 잡저 6편, 제문 2편, 묘지 4편, 권2는 부록으로 제현신장(諸賢口章)·제현서독(諸賢書牘)·만(挽)·제문·가장(家狀)·행장·묘갈명·묘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소의 「의례소(議禮疏)」는 1660년 자의대비의 상복문제를 논한 것으로, 송시열(宋時烈) 등이 주장한 기년설을 반대하고 『예경(禮經)』에 근거하여 삼년복을 주장하였다. 서(書)도 당시 예송(禮訟)에 관하여 허목(許穆)·조경(趙絅)·윤휴(尹口) 등에게 보낸 것들로 참고자료가 된다. 잡저 중 「문임관(問任官)」은 임금이 현능한 사람을 등용할 것을 주장한 글이다. 서(序) 중 「금호선유록후서(琴湖船遊錄後序)」는 1601년 서사원·장현광(張顯光)·여대로(呂大老)·김극명(金克銘) 등이 금호에서 선유한 기록의 서문이고, 「용담향약서(龍潭鄕約序)」는 1656년 용담현령으로 부임하여 향약을 창설하고 이어 쓴 서문이다. 제문에는 1657년 전라도병마절도사 배시량(裵時亮)에 대한 것이 있다. 17세기 가장 큰 정치적 핵심문제 중 하나였던 예송에 대하여 당시 영남 유림의 입장을 주장한 바, 예학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도신여의 아버지는 여유(汝兪)이며, 어머니는 여흥이씨(驪興李氏)로 우겸(友謙)의 딸이다. 종숙 성유(聖兪)에게 입양되었으며, 정구(鄭逑)·서사원(徐思遠)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65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창락찰방(昌樂察訪)·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예조좌랑·용담현령(龍潭縣令)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 예조정랑에 재임하면서 자의대비(慈懿大妃) 기년복(朞年服)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사직하였다. 이듬해 다시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이때 또 기년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려 황간으로 유배되었다. 1675년 숙종이 즉위하자 다시 기용되어 성균관사예를 지냈다.
  • 제목
    휴암실기(休巖實紀)
    발급년
    193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휴암실기』는 공서린(孔瑞麟 ; 1483∼1541)의 실기이다. 공서린의 자는 희성(希聖), 호는 휴암(休巖),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이 책은 12대손 재환(在煥)이 편집하여 1937년 공석우(孔錫祐)가 간행하였다. 이 중 주목되는 것은 두 편의 소(疏)이다. 권2의「논삼공재기장단소(論三公才器長短疏)」는 사간원사간으로 있을 때 올린 글로, 삼정승이 갖추어야 할 재질과 기량을 진술하고, 인물의 평론과 조정의 국정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당시 유생들의 불만을 함께 기록하고 있다. 또, 조정 중신들의 국정의 득실을 논하였고,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 신진사류와 심정(沈貞)·남곤(南袞) 등 훈구세력간의 갈등, 그리고 그 갈등이 빚어낸 기묘사화의 배경과 전말을 각 문헌에서 뽑아 부기해 놓고 있어, 이 시기 정치사 연구의 자료가 된다. 「인뇌진구언상소(因雷震求言上疏)」는 북쪽의 오랑캐가 침입할 조짐이 있는데도 방비가 소홀하고, 변방의 장수들은 탐학하며, 사류들은 풍속이 바르지 못하여 국가가 위태로움에 빠져 있음을 지적하는 한편, 그 대책을 촉구한 글이다. 그가 조야에서 활약한 사적이 함께 들어 있다.
    공서린은 김굉필(金宏弼)에게서 배우고 조광조(趙光祖)와 교우했다.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519년 승지(承旨)가 되고 기묘사화 때 조광조와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그 후 어지러운 조정의 행정에 분격하여 재상을 공격하고 기묘사화 때 화를 입은 선비들의 무죄를 상소, 누차 관직을 삭탈당했다. 정권을 장악하여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가 죽은 후, 1538년(중종 33)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이듬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다.
  • 제목
    희암유고(希巖遺稿)
    발급자
    永川
    발급년
    194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희암유고』는 김재석(金在錫 ; 1857∼1925)의 시문집이다. 김재석의 자는 극중(極中), 호는 희암(希巖),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이 책은 1939년 김세현(金世鉉)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청량산귀로구호(淸凉山歸路口號)」·「부유정(復有亭)」·「원관정(遠觀亭)」등 70여 수가 있는데 주로 주변의 자연경관을 노래한 것들이다. 서(書)는 권태형(權泰亨)·권영국(權寧國) 등과 주고받은 것이다. 지(識)에는「족보지(族譜識)」·「퇴계이선생수수영양김씨세보도후(退溪李先生手修英陽金氏世譜圖後)」등이 실려 있다.
    김재석은 우성(宇聲)의 아들로 계부(季父) 연호(蓮湖)에게 처음 글을 배웠고, 뒤에 종형 재명(在明)에게 배웠다. 과거에 낙방한 뒤로는 독서와 과농(課農)을 지도하는데 힘썼다.
  • 제목
    희암유집(希庵遺集)
    발급년
    195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희암유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박치준(朴致準 ; 1838∼1898)의 시문집이다. 박치준의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휴(聖休), 호는 희암(希庵)이다.
    이 책은 1900년과 1904년 두 차례의 화재로 소실된 것을 손자 순국(淳局)이 수습하여 1953년에 간행한 것이다. 권두에 이탁(李鐸)의 서문이, 권말에 한동유(韓東愈)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43수, 서(書) 3편, 서문, 발문, 권2는 「강학도(講學圖)」 서문, 「태극도(太極圖)」 등 7편의 「도설(圖說)」, 「집례홀기(執禮笏記)」, 부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중 「강학도(講學圖)」는 이황(李滉)의 설을 바탕으로 하였으며, 향학을 진흥시키려고 창작한 것이다. 그밖에 당시 영남지방까지 확산된 서학(西學)의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에서 지어진 글이 많다.
    박치준은 기환(奇煥)의 아들로, 15세부터 배극소(裵克紹)에게 성리학을 배웠으며, 과거에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자 산속에 은거하여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당시 자인현감으로 부임한 이만윤(李晩胤)의 초빙을 받아 학궁교장(學宮敎長)이 되어 장학문(奬學文)과 강학도(講學圖)를 만들어 향학(鄕學)의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 제목
    희암집(希庵集)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희암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우상(李瑀祥 ; 생몰년 미상)의 시문집이다. 이우상의 자는 우왕(禹王), 호는 희암(希庵)이다.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으로 철종·고종연간의 인물이나 정확한 생몰년이나 이력은 알 수 없다.
    이 책은 서문과 발문은 없으나, 고종 때 편집,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권1·2는 시, 권3은 소(疏) 1편, 책(策)1편, 전(箋) 5편, 서(書) 14편, 권4는 서(書) 21편, 서(序) 8편, 기(記) 7편, 발(跋) 3편, 전(傳) 2편, 권5는 잡저 30여편, 권6은 뇌문(?文)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 가운데는 「차공암팔경(次孔巖八景)」이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책의 「대삼정책(對三政策)」은 전부(田賦)와 군적(軍籍), 환정(還政)을 논한 글이다. 서(書)는 유후조(柳厚祚)·조두순(趙斗淳)·한계원(韓啓源)·홍순목(洪淳睦) 등에게 준 것이 많다. 서(序)에는 「자아헌서(自我軒序)」와 「사전기의서(四傳記疑序)」가 있고, 기에는 「불능암기(不能菴記)」·「긍재기(肯齋記)」·「돈와기(遯窩記)」·「산수재기(山水齋記)」·「조양재기(朝陽齋記)」 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잡저에는 역(易)에 대하여 논한 「역상하편의(易上下篇義)」·「괘변관견(卦變管見)」 등 21편의 글과, 『시경』에 대하여 논변한 「억시(抑詩)」외 1편, 『논어』에 대한 「논어학이편총론(論語學而篇總論)」외 4편, 그밖에 「태극도강의(太極圖講義)」·「통서강의(通書講義)」·「묵장설(墨莊說)」등이 들어 있다.
  • 제목
    희재문집(希齋文集)
    발급년
    1910이후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희재문집』은 김휘준(金輝濬 ; 1820∼1898)의 시문집이다. 김휘준의 자는 문숙(文叔), 호는 희재(希齋), 본관은 예안(禮安)이다.
    이 책은 족질 석(奭)과 손자 석진(奭鎭)이 간행하였다. 시(詩)는 학문과 처사적 생활의 즐거움, 사우(師友)간에 창수(唱酬)한 것이 대부분이다. 서(書) 57편은 친구들과 성리학에 대하여 토론한 내용이다.
    김휘준은 낙숭(樂崇)의 아들이며 영주(榮州)사람이다. 그는 7세 때부터 당숙 낙규(樂奎)에게 수학하였다. 과거제도가 문란하여지자 벼슬의 뜻을 버리고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1881년(고종 18)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어 선공감가감역관(繕工監假監役官)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영주·풍기(豊基) 등지를 기반으로 하여 주변 학자들과 성리학에 대하여 토론, 연구하면서 일생을 마쳤다.
  • 제목
    희재문집(喜齋文集)
    발급자
    淸道
    발급년
    193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희재집』은 박정태(朴廷兌 ; 1841∼1886)의 시문집이다. 박정태의 자는 내열(乃悅), 호는 희재(喜齋),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 책은 1930년 아들 윤묵(允默)·수묵(洙默)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그의 시(詩)는 청아하고 담박하여 새로운 감흥을 자아낸다. 특히 「효기(曉起)」·「공암(孔巖)」·「은해사(銀海寺)」·「과죽령(過竹嶺)」등은 서경(敍景)과 감회가 잘 어울려 시의 표현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근차최용산영엽(謹次崔龍山永燁)」·「소모장운(召募將韻)」·「임란충렬사적(壬亂忠烈事蹟)」등에는 저자의 우국심과 강개한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권 2 서(書)의 「상성재허선생(上惺齋許先生)」은 스승인 허전에게 보낸 편지로, 야소교(耶蘇敎)의 국내 전파를 우려하며 이를 강력히 배척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상이긍암돈우(上李肯庵敦禹)」는 태극도설(太極圖說)에 관한 질문으로, 주돈이(周惇?)의 설을 비판하며 태극 위에 과연 무극(無極)이 따로 존재하는가를 묻고 있다. 「여이경휘(與李敬輝)」에서는 하(夏)·은(殷)·주(周) 3대의 역법(曆法)이 다른 점, 정전법(井田法), 『주역』괘효(卦爻)의 생성과 변화, 신력(新曆)과 구력(舊曆)의 차이점 등에 관하여 상세히 설명하였다. 권4 서(序)의 「희재자서(喜齋自序)」는 자신의 인생관을 문답식으로 밝힌 것이고, 발(跋)의「서게성학십도후(書揭聖學十圖後)」는 이황(李滉)의 『성학십도』의 차례를 수정하고 그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박정태는 성덕(聖德)의 아들로 허전(許傳)의 문인이다.그는 일찍이 경전과 제자백가(諸子百家)를 통달하였으나,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을 연구하며 후진양성에 전력하였다. 특히 심성(心性)·이기(理氣)·천문(天文)·역학(易學) 등을 깊이 연구하였다. 1883년(고종 20) 성주에서 민란이 일어나 청도까지 파급되자 주민들을 모아 대책을 마련하는 등 민심수습에 앞장섰다.
  • 제목
    해창문집(海窓文集)
    발급년
    1957
    제작연도
    2007-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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