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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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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문해(權文海)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본관은 예천,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祉)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와 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조선 중기의 문신. 학자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본관은 예천,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아버지는 지(祉)다. 1560년(명종 1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좌부승지와 관찰사를 지내고 1591년에 사간이 되었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류성룡(柳成龍), 김성일(金誠一) 등과 친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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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탁(鄭琢)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정탁(鄭琢, 1526∼1605)은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예천 출신.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생원 교(僑)이고, 아버지는 이충(以忠)이며, 어머니는 한종결(韓從傑)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1552년(명종 7) 성균관생원시를 거쳐 155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5년 정언을 거쳐 예조정랑, 헌납 등을 지냈다. 1568년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고,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72년(선조 5) 이조좌랑이 되었고, 이어 도승지대사성, 강원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581년 대사헌에 올랐으나, 장령 정인홍(鄭仁弘), 지평 박광옥(朴光玉)과 의견이 맞지 않아 사간원의 계청(啓請)으로 이조참판에 전임되었다. 1582년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다 이듬해 돌아와서 다시 대사헌에 재임되었다. 그 뒤 예조?형조?이조의 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다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 왕을 의주까지 호종하였다.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상수(象數), 병가(兵家) 등에 이르기까지 정통하였다. 1594년에는 곽재우(郭再祐), 김덕령(金德齡) 등의 명장을 천거하여 전란 중에 공을 세우게 하였으며, 이듬해 우의정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72세의 노령으로 스스로 전장에 나가 군사들의 사기를 앙양하려 하였으나, 왕이 연로함을 들어 만류하였다. 특히 이해 3월에는 옥중의 이순신을 극력 신구(伸救)하여 죽음을 면하게 하였으며, 수륙병진협공책(水陸倂進挾攻策)을 건의하였다. 1599년 병으로 잠시 귀향했다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되고 판중추부사를 거쳐, 1603년 영중추부사에 올랐다. 이듬해 호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예천의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약포집』, 『용만문견록(龍灣聞見錄) 』 등이 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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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상일(權相一)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후기의 문인, 학자 권상일(權相一 ; 1679∼1759))의 본관은 안동. 자는 태중(台仲), 호는 청대(淸臺). 상주의 근암리(近?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증이조판서 심(深)이며, 어머니는 경주이씨로 부사 달의(達意)의 딸이다. 일찍 학문을 깨우쳐 20세에 옛사람들의 독서하는 법과 수신하는 방법을 모아 「학지록 學知錄」을 저술하였다. 1710년(숙종 36)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으며, 1715년 저작·전적·직강 등을 역임하고, 1720년 예조좌랑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병조좌랑을 지내고, 1727년(영조 3)에는 만경현령이 되어 이듬해 일어난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사전에 탐지하여 영문에 보고하고, 난을 토벌하여 공을 세웠다. 1731년 영암군수와 사헌부장령을 지내고, 1733년 양산군수 군자감정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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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윤목(鄭允穆)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중기의 학자 정윤목(鄭允穆, 1571∼1629)의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노곡(蘆谷)?죽창거사(竹窓居士), 본관은 청주이며 예천 사람이다. 아버지는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 탁(琢)이며, 어머니는 거제반씨로 충(?)의 딸이다. 그는 일찍이 가정에서 교육을 받다 정구(鄭逑),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89년(선조 22)에는 아버지가 중국 연경에 사신으로 갈 때 동행하며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 벼슬에 뜻이 없어 두 차례 재랑(齋郞)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1616년(광해군 8)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취임하였으며, 1618년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정에 불만을 품고 사직, 산수를 벗 삼아 시와 서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에는 용궁의 장야평에 초려(草廬)를 짓고 마을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1786년부터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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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보양(趙普陽)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후기의 문신 조보양(趙普陽, 1709∼1788)의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인경(仁卿), 호는 팔우헌(八友軒).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원익(元益)이며, 어머니는 예안이씨로 기만(基晩)의 딸이다. 이경익(李景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당시 학자로 명성이 높던 권상일(權相一)의 인정을 받았다. 1747년(영조23) 진사시를 거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그 뒤 예조좌랑에 올랐으나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다. 1781년(정조 5)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으나 6일 만에 사직하였으며, 1788년 첨지중추부사와 오위장(五衛將)에 승직되었으나 연만하여 부임하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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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필규(鄭必奎)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정필규(鄭必奎, 1760∼1831)의 자는 명응(明應), 호는 노암(魯庵), 본관은 청주다. 직(稷)의 아들이고, 예천에서 살았다. 선생은 1776년에 김강한(金江漢)에게 『중용(中庸)』을 배워 깨달음이 많았다. 1789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814년에 학행이 추천되어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종수(李宗洙), 정종로(鄭宗魯), 남한조(南韓朝)등 제현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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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산해(權山海)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초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권산해(權山海, 1403∼1456년)의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본관은 안동(安東)으로, 아버지는 관(寬)이며 예천 사람이다. 일찍이 과거 시험을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힘썼다. 1454년(단종 2)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이 되었으나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두문불출하였고, 1456년 성삼문(成三問) 등의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정조 때 복직되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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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의(權?)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권의(權?, 1475∼1558)의 본관은 안동.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영의정에 추증된 사빈(士彬)의 아들이며, 권벌(權?)이 그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었으나 더는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예천의 저곡리에 거주하다 1540년(중종 35) 찰방이 되었고, 1545년(인종 1) 의흥현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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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욱(權旭)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권욱(權旭, 1556∼1612)의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 심언(審言)의 아들이다. 8, 9세에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의 장구(章句)를 읽고 통달하였으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 주서(朱書)와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들과 문경 지역을 방어하였다. 1602년(선조 35)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물가에 작은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매당(梅堂)’이라 칭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벗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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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일(金南一)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후기 학자인 김남일(金南一 ; 1635∼1696)의 자는 중백(重伯), 호는 지남(砥南), 본관은 선성(宣城)이다. 외할아버지인 권사고(權?皐)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677년(숙종 3) 향천(鄕薦)으로 현릉참봉(顯陵參奉)에 임명되었으며,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괴산군수(槐山郡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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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문(朴希文)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박희문(朴希文, 1586~1659)의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빈(子彬), 호는 금은(琴隱). 아버지는 정랑(正郞) 환(?)이며, 어머니는 창원황씨로 목사 흠(欽)의 딸이다. 예천 개포리에서 태어났으며 추월당(秋月堂) 한산두(韓山斗)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산수를 벗 삼아 소요하였으며, 만년에 자연정(自然亭)을 짓고 매화?대나무?연?국화 등을 심어 사시(四時)의 흥을 붙였으니, 당시의 지우들이 차운한 시가 부록에 다수 실려 있다. 김응조(金應祖), 정윤묵(鄭允?), 조정융(曺挺融) 등과 교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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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상(尹祥)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윤상(尹祥, 1373∼1455)의 본관은 예천(醴泉), 초면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이다. 1393년(태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6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선산, 상주의 교수가 되었다. 그 후 산음, 황간의 감무를 거쳐 교서, 교리, 성균직강, 형조?예조의 정랑을 역임하였다.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성균사예, 지제교가 되고 노친을 위해 외직을 청하여 금산, 영주, 대구의 수령이 되고 대사성에 올랐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에 올라 성균관박사가 되어 세손(단종)에게 학문을 강의했고, 문종 초에 치사(致仕)했다. 이로부터 별동에서 후진 교육에 힘썼다. 예천 향현사(鄕賢祠)에 봉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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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중립(李中立)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중립(李中立, 1533∼1517)의 자는 강중(剛中), 호는 귀계(龜溪), 본관은 경주, 준(竣)의 맏아들이다. 1558년(명종 13) 사마시에 합격하여 태학의 장의(掌議)가 되었다. 김성일(金誠一), 권호문(權好文), 서해(徐?) 등과 교유하였고, 서당을 지어 후진 양성에 힘썼다. 퇴계 선생을 사사하여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함재(涵齋) 서해(徐?)와 친교하였고, 아우 성오당(省吾堂)과 천륜지기(天倫知己)로서 서로 강마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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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원발(全元發)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고려 말과 조선 초의 문신인 전원발(全元發, ∼1421)의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다. 전법총랑 충경(忠敬)의 증손으로, 판도총랑 대년(大年)의 손자이며, 응양군 민부전서(鷹揚軍民部典書) 진(?)의 아들이다. 고려 말기에 원나라에 가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부상서 집현전 태학사에 오르고 영록대부(榮祿大夫)에 가자되었다. 뒤에 귀국하여 조선 태조 때 축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서예에 뛰어났으며 용궁의 소천서원(蘇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작품으로 「법주사자정국존보명탑비(法住寺慈淨國尊普明塔碑)」가 있다. 아들이 사복판사(司僕判事) 한(?)이며, 손자 강(强)?근(謹)?경(敬)은 모두 장원급제하여 청환(淸宦)으로서 현달(顯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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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규양(趙葵陽)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규양(趙葵陽, 1706∼1776)의 자는 향경(向卿), 호는 둔암(鈍巖), 본관은 한양(漢陽), 아버지는 원익(元益)이다. 39세에 사마시에서 아우와 함께 동방 합격하였다. 연이어 동생 보양(普陽)과 아들 석회(錫晦)가 또 문과에서 동방 급제하였다. 그러나 부화에 들뜨지 않고 노부모 봉양과 학문에 진력하였다. 홍성(洪晟) 이맹휴(李孟休), 신광수(申光洙), 이복원(李福源), 이성원(李性源) 등과 교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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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귀달(洪貴達)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조선 전기의 문신 홍귀달(洪貴達 ; 1438~1504)의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겸선(兼善), 호는 허백당(虛白堂)·함허정(涵虛亭). 아버지는 증판서 효손(孝孫)이며, 어머니는 노집(盧緝)의 딸이다. 1460(세조 6) 강릉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겸예문(兼藝文)을 거쳐 봉교(奉敎), 이조정랑(吏曹正郞), 직제학(直提學), 동부승지(同副承旨)를 역임하고 천추사(千秋使)로 명(明)에 다녀온 후 이조참판(吏曹參判), 경주부윤(慶州府尹), 대사성(大司成), 중추(中樞)를 거쳐 대제학(大提學), 호조판서(戶曹判書)등을 역임했다. 1504년에 손녀(彦國의 딸)를 후궁에 들이라는 왕명을 거역하였고 전후 여러 차례의 간쟁으로 연산군(燕山君)의 노여움을 사서 장형(杖形)을 받고 경원(慶源)으로 유배도중에 교사(絞死)되었다. 공은 문장에 뛰어나고 글씨도 잘 썼으며 천성이 강직하여 불의에 굴하지 않으나 평소에는 극히 원만하여 남과 다툼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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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언충(洪彦忠)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홍언충(洪彦忠 ; 1473∼1508)의 자는 직경(直卿), 호는 우암(寓庵), 본관은 부계(缶溪)이다. 아버지는 귀달(貴達)이며 군위(軍威)에서 태어났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증광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승정원부정자가 되고 정자, 저작, 박사를 지냈다. 1498년 사가독서한 후 이듬해 수찬이 되고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03년 교리와 예조정랑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자사화로 진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해도(海島)에 이배(移配)되었다. 읍취헌(相翠軒) 박은(朴誾), 용재(容齋) 이행(李荇), 허암(虛庵) 정희량(鄭希良)과 함께 `시가사걸(詩家四傑)`로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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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여하(洪汝河)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홍여하(洪汝河 ; 1621∼1678)의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산택재(山澤齋), 혹은 목재(木齋), 본관은 부계(缶溪)이며, 대사간 호(鎬)의 아들이다. 1654년(효종 5) 진사시 및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등을 거쳐 경성판관(鏡城判官)이 되어 백성의 부담을 가볍게 하고, 학교를 일으켰으며, 선행을 포상하는 등 한결같이 근본에 힘쓰는 정치를 행하였다. 1659년 3월에 왕의 하문에 의하여 소를 올렸으나 그 소문(疏文)에 이후원(李厚源)을 논박하는 구절로 말미암아 이조판서 송시열(宋時烈)이 사직하는 등의 문제를 일으켜 황간(黃澗)에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났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가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제 2차 복상문제(服喪問題)로 송시열이 추방되는 등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정권을 잡자 다시 등용되어 병조좌랑이 되었으며, 이어 사간에 이르렀다. 특히 주자학에 밝아 당시 사림의 종사로 일컬어졌다. 1689년 부제학에 추증되고 상주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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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강년(李康秊)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1858년 음력 12월 30일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이기태(李起台)와 의령남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태몽은 남씨의 태몽에서 태양을 삼키는 꿈을 꾸었으므로 아명을 양출(陽出)이라 하였다. 운강이 태어나기 전에 마을 앞의 둔덕산이 계속 울었는데,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다가, 운강이 태어나자 울음을 멈추어 사람들이 앞으로 크게 될 인물이라 여겼다 한다. 3세 때부터 옥편에서 신체부(身體部)의 속자(俗字)를 알만큼 어려서부터 총명했고, 성장하면서 정의감과 애국심이 남달리 강했으며, 학문에 힘써 세속의 유자(儒者)들이 미치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이강년은 평소에 학식은 물론 무예와 병서에 능하였고,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으며, 22세 때인 고종 17년(1880)에 정시 무과에 합격하여 종6품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 行龍釀衛副司果)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으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을 계기로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왔다. 향리 문경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학문에 매진하여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을 굳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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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재(李縡)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이재(1680∼1746)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본관은 우봉(牛峰)이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 또는 한천(寒泉)이다. 유겸(有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숙(?)이고,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서울 남부 훈도방 주자동의 외가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숙부 만성(晩成)에게 수학하고,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시예에 뛰어나 이미 여덟살때 "游魚思碧海 睡鶴夢蒼洲 (물고기는 넓은 바다를 그리워하고, 조는 학은 창주를 꿈꾼다.)"란 詩를 지어 뭇사람들에게 칭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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