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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가귀(可歸)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후기의 승려이며, 효소왕(孝昭王) 때 승려인 승전(勝詮)의 제자이다.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으나, 《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귀는 자못 총명하여 도리를 잘 알았으며 승전의 법등을 이어받아 〈심원장(心源章)〉을 지었다.”고 하였다.



  • 시호

    이칭
    포고이(布古伊)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귀화/유민
    가라포고이(加羅布古伊)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일본에 귀화한 신라인. 《일본후기 日本後紀》에 의하면 814년(흥덕왕 6) 8월 23일에 귀화해온 신라인 가라포고이 등 6명을 미농국(美濃國)에 배치하였다고 한다. 이때는 신라와 왜 사이에 정상적인 통교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표류하다가 왜에 도착한 뒤에 돌아가지 않고 귀화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을 가라포고이라고 한 것을 보면 가야 지방의 유이민으로 이름은 ‘포고이’였던 것 같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고구려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귀화/유민
    가루(可婁)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구려의 유신(遺臣). 순노부(順奴部) 출신의 귀족으로 관직은 상부대상(上部大相)이다. 고구려 멸망 후 고구려의 부흥운동에 참여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671년(문무왕 11)에 유민(遺民)들이 다시 세운 고구려의 사신으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즉, 고구려 멸망 후 부흥운동에 참여하여 안승(安勝)이 이끈 ‘고구려국’ 고관을 역임하였고,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것이다.



  • 시호

    이칭
    기마(奇麻)/허세가마(許勢哥麻)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가마(歌麻)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성왕 때 일본에 파견되었던 사신. 기마(奇麻)·허세가마(許勢哥麻)라고도 한다. 544년 3월 성왕이 신라에 의해 멸망된 탁기탄(啄己呑: 慶山으로 비정됨.)·탁순(卓淳: 대구로 비정됨.)·남가라(南加羅: 김해로 비정됨.)의 부흥을 위하여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때 나솔(奈率) 아탁득문(阿乇得文), 물부(物部)의 나솔 기비(奇非) 등과 함께 갔다가 긴메이왕[欽明王]에게 임나삼국의 부흥을 요청하는 글을 바치고 11월에 귀국하였다. 577년 4월에 다시 전부(前部)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과 함께 원병을 청하기 위하여 일본에 파견되었다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고구려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가서일(加西溢)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일본에서 활약한 고구려 출신의 화가. 일본 나라(奈良) 주쿠사(中宮寺)에 소장된 천수국만다라수장(天壽國曼陀羅繡帳)의 뒷면 명문(銘文)에서 확인된 화가로, 그 수장의 밑그림을 그렸다.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은 621년 쇼도쿠태자(聖德太子)가 죽은 1년 뒤에, 그의 부인의 하나인 다치바나(橘大郞女)가 태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뒷면의 명문에는 화사(畵師) 고려의 가서일, 동한말현(東漢末賢), 한노가기리(漢奴加己利)가 수장의 밑그림을 그렸다고 되어 있다. 이 천수국만다라수장은 자사(紫紗)와 황릉(黃綾)으로 짜여진 포(布) 위에 백·적·황·청·녹색 등으로 수를 놓은 것이다. 특히, 이 수장에 나타난 측면에서 보고 그린 연화문(蓮花文) 및 인물표현 중에서 저고리와 주름치마의 기법 등이 덕흥리벽화고분(德興里壁畵古墳)·쌍영총(雙楹塚)·수산리벽화고분(修山里壁畵古墳) 등 고구려 고분벽화와 흡사하여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음을 짐작하게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설화인물
    가실(嘉實)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진평왕 때 열녀인 설씨녀(薛氏女)의 남편.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가난하지만 정직한 마음의 소유자였다. 당시에 가난하지만 용모가 아름답고 행실이 의젓해 인근 사람들의 흠모를 받던 설씨녀를 사모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설씨녀는 늙고 병든 아버지가 변방의 수자리를 서게 되어 크게 걱정을 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가실은 설씨집에 찾아가 자신이 그 역을 대신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리고 가실과 설씨녀는 방수(防戍)가 끝나면 결혼하기로 약속하였다. 그뒤 가실은 군대에 나아갔으나, 약속한 3년이 지나도 당시의 군사상 어려움으로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복무하게 되었다. 그런데, 설씨녀의 아버지는 약속기간이 지나 6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그녀를 다른 남자에게 결혼시키려 하였다. 바로 이때 가실은 전선에서 돌아와 마침내 날짜를 받아 두 사람은 결혼을 하고 일생을 해로하였다.



  • 시호

    이칭
    가실왕(嘉實王)/가보왕(嘉寶王)
    시대
    삼국시대 > 가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가실왕(嘉悉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가야 말기의 왕. 혹은 가실왕(嘉實王)이라고도 한다. 가야연맹체의 여러 나라 중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다. 금관가야(金官加耶)에 관한 기록인 〈가락국기 駕洛國記〉에는 가실왕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국의 왕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대가야(大加耶)의 왕이라는 견해, 또는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왕이라는 견해가 있다. 또는 가실왕은 곧 금관가야의 취희왕(吹希王)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악기 쟁(箏)을 보고 열두달의 악률(樂律)을 형상하는 십이현금(十二弦琴), 곧 가야금(加耶琴)을 만들었다. 또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므로 성음(聲音) 또한 일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십이곡을 만들게 하였다. 이때 우륵이 지은 열두곡은 〈하가라도 下加羅都〉·〈상가라도 上加羅都〉·〈보기 寶伎〉·〈달이 達已〉·〈사물 思物〉·〈물혜 勿慧〉·〈하기물 下奇物〉·〈사자기 師子伎〉·〈거열 居烈〉·〈사팔혜 沙八兮〉·〈이혁 爾赥〉·〈상기물 上奇物〉 등이었다. 가야가 망하게 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 지금의 忠州)에 두고 가야의 음악을 계승케 하였다. 우륵과의 관계를 보면 가실왕은 신라 진흥왕과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각가(覺伽)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의자왕 때의 귀족. 당시의 관등은 좌평이었다. 660년(의자왕 20)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의 서울인 사비성을 공격해왔을 때,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명령을 받고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에게 글을 올려 퇴군을 요청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덕(覺德)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진흥왕 때의 고승. 신라불교 초기의 유학승(遊學僧)이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도(道)를 배우는 사람으로서 스승을 구하지 않고 편안히 지낸다면 불자로서의 보은(報恩)에 어긋나는 일”이라 하였으며, 540년에 사신을 따라 양(梁)나라로 가서 여러 고승들에게 불도를 배웠다. 549년에 양나라 사신과 함께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이것이 우리나라에 사리가 들어오게 된 최초의 일이다. 진흥왕은 백관을 인솔하고 흥륜사의 앞까지 나가서 환영하였으며, 이때부터 신라의 불교가 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 송파(松坡)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96(선조 29) - 1675(숙종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민(覺敏)에 대하여

    1596년(선조 29)∼1675년(숙종 1). 조선 중기 정관문파(靜觀門派)의 선승(禪僧). 성은 노씨(盧氏). 호는 송파(松坡). 충주 출신. 어릴 때 길가에 나가 노는데, 충청도안찰사가 그를 사랑하여 데리고 가서 영(營)에서 머물게 하였다. 몇 년 후 늙은 어머니를 뵙기 위하여 집에 돌아갔다가 출가하여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있던 유정(惟政)의 제자 한한(寒漢)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였다. 그뒤 가야산에서 불경과 외전(外典)을 탐구하였고, 태능(太能)의 문하에서 수도하였으며, 이어 비슬산(琵瑟山)의 호구(虎丘)에게서 경전을 배웠다. 그뒤 각성(覺性)과 태호(太浩)를 만나 마음속에 품었던 의심을 물었고, 충언(冲彦)을 찾아가 7년 동안 유불도(儒佛道) 3교의 깊은 뜻을 강구하여 《해의 解疑》라는 저술을 남겼다. 1643년에 금강산에서 응상(應祥)의 지도를 받아 도를 깨달았다. 이때부터 도명(道名)이 높아졌고, 특히 3교에 능통하여 많은 사람들을 지도하였다. 이후 10여 년을 소백산 용문사(龍門寺)와 해인사 등지를 내왕하다가 입적하였다. 법맥은 휴정(休靜)―일선(一禪)―충언으로 이어진다.



  • 시호

    이칭
    각복모(觮福牟)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귀화/유민
    각복모(角福牟)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멸망 후 일본으로 망명한 귀족. 각복모(觮福牟)라고도 하며, 음양오행설에 능하였다. 당시 관등은 달솔(達率)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뒤인 663년 백제부흥군이 왜군과 연합하여 당군과 싸웠으나 백강(白江) 싸움에서 대패함으로써 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이때 좌평 여자신(余自信), 달솔 목소귀자(木素貴子)·곡나진수(谷那晋首)·억례복류(憶禮福留) 등 많은 귀족과 유민들이 왜군의 함선을 타고 일본으로 갔는데, 이들과 함께 간 듯하다. 671년 백제의 도래귀족들에게 관작이 주어졌는데, 음양에 익숙하여 소산하(小山下)의 관위를 받았다.

  • 징원(澄圓)
    벽암(碧巖)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5(선조 8) - 1660(현종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성(覺性)에 대하여

    1575년(선조 8)∼1660년(현종 1). 선승(禪僧)·승병장(僧兵將). 성은 김씨, 자는 징원(澄圓), 호는 벽암(碧巖). 각성은 법명이다. 1. 탄생 및 출가수행 어머니는 조씨(曺氏)이며, 12월에 충청북도 보은의 서삼산(西三山)에서 태어났다. 어머니가 북두칠성께 기도하여 백발노인으로부터 거울을 받아 지니는 꿈을 꾼 뒤에 낳았다. 9세에 아버지가 죽자 출가를 결심하고 10세에 출가하여 설묵(雪默)의 제자가 되었으며, 14세에 보정(寶晶)에게서 구족계를 받은 후 불경을 공부했다. 그뒤 선수(善修)의 제자가 되어 스승을 따라 속리산·덕유산·가야산·금강산 등의 명산에서 정진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해전에 참여하였으며, 전쟁이 끝난 뒤 가야산에 있을 때, 명나라 장수 이종성(李宗城)은 “불도징(佛圖澄)과 도안(道安)을 해외에서 다시 보는 것 같다.”고 하였다. 그뒤 스승과 함께 지리산으로 옮겨 ‘삼걸(三傑)’로 널리 알려졌던 충휘(冲徽)·태능(太能)·응상(應祥) 등과 함께 수행하였다. 이때 그는 많은 시게(詩偈)를 남겨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대한 뛰어난 지식을 나타냈다. 2. 행적 1600년에 지리산 칠불사(七佛寺)에서 스승의 뜻에 따라 강석(講席)을 열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제자들에게 항상 “생각이 망령되지 않아야 하고, 얼굴에 부끄러움이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되며, 허리를 구부려 앉지 않아야 한다[思不妄面不愧腰不屈].”는 3가지 계로써 일깨웠다. 1612년에 선수가 광승(狂僧)에게 무고를 입어 투옥되자 그도 연루되어 옥에 갇혔다. 그러나 광해군이 직접 치죄하다가 그의 덕에 감복되어 하사품을 내리고 방면하였다. 이때 사람들은 부휴와 각성을 대불과 소불이라 지칭하였다. 또한, 광해군은 봉은사에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함을 내렸고, 그곳에서 많은 사대부와 교유를 갖게 되었으며, 특히 동양위(東陽尉) 신익성(申翊聖)과 가까이 지냈다. 1615년 지리산 칠불암으로 옮겼고, 1616년 다시 신흥사(新興寺)로 옮기자 7백인의 대중이 모여왔으므로 밤중에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은거하였다. 1617년 광해군이 청계사(淸溪寺)에서 큰 재를 열었을 때 설법을 하였으며, 1624년 조정에서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임명되어 승군을 이끌고 3년 만에 성을 완성시켰다. 이에 나라에서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직함과 함께 의발을 하사하여 그 공을 치하하였다. 1632년에는 화엄사를 중수하여 대총림으로 만들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전국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 ’는 격문을 보냈다. 의승군 3천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이름 짓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적들을 섬멸하면서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도중에 전쟁이 끝났으므로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 후학들을 위해서 《도중결의 圖中決疑》와 《참상선지 參商禪旨》 등을 저술하였다. 1640년 봄에 쌍계사(雙溪寺)를 중수하였고, 그해 8월에 호남관찰사(湖南觀察使) 원두표(元斗杓)의 청으로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직을 맡아서 무주 적상산성(赤裳山城)에 있는 사고(史庫)를 보호하였다. 1641년 해인사로 가서 머물 때, 조정에서는 각성을 일본에 사신으로 파견하고자 하였으나 서울로 향하던 도중 병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백운산 상선암(上仙庵)에 머물렀으며, 1642년 보개산으로 들어가서 법석(法席)을 베풀었다. 이때 왕자였던 효종은 그를 만나 화엄종지(華嚴宗旨)를 배웠다. 1646년 가을 속리산 법주사에서 동문인 희언(熙彦)과 은거하였고, 희언이 화엄사로 가서 입적하자 그도 화엄사로 가서 지내다가 제자들에게 ‘도업(道業)에 힘써 국은에 보답할 것’과 ‘사후에 비를 세우지 말 것’을 유언한 뒤 입적하였다. 나이 86세, 법랍 73세였다. 3. 업적 대표적인 제자로는 수초(守初)와 처능(處能)이 있으며, 문하의 제자들이 취미파(翠微派)·백곡파(白谷派)·침허파(枕虛派)·고운파(孤雲派)·동림파(東林派)·연화파(蓮花派)·벽천파(碧川派) 등의 7파를 세워서 그의 선법을 크게 전파하였다. 그는 수행에 통달하였고, 원융무이(圓融無二)한 이념의 한국불교 전통성을 깊이 익혀 정혜쌍수(定慧雙修)·교관겸수(敎觀兼修)를 실천하였으며, 무자간화선(無字看話禪)을 크게 중요시하고 화엄사상에도 해박하였다. 특히, 문도들을 가르칠 때 ‘참되고 깨끗하고 굳세게’라는 삼잠(三箴)으로써 지침을 삼아 교육하였는데, 이것은 휴정(休靜)이 불교계의 장래를 염려하여 선수에게 부탁하였던 ‘기강의 재정돈’을 이어받아 구체적으로 이행한 것이다. 저서로는 《선원집도중결의 禪源集圖中決疑》·《간화결의 看話決疑》·《석문상의초 釋門喪儀抄》가 있으며, 스승의 시문집인 《부휴당집 浮休堂集》 5권을 편찬하였다.

  • 환여(幻如)
    두륜산인구계(頭輪山人九階)/범해(梵海)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20(순조 20) - 1896(건양 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안(覺岸)에 대하여

    1820년(순조 20)∼1896년(건양 1). 선승(禪僧). 경주최씨. 법호는 범해(梵海), 자는 환여(幻如), 자호는 두륜산인구계(頭輪山人九階). 각안은 법명이다. 아버지는 철(徹)이며, 전라남도 완도 구계(九階)에서 태어났다. 1833년 두륜산 대둔사(大芚寺)로 가서 출가하였고, 1835년 호의(縞衣)를 은사로 삼고 하의(荷衣)에게서 사미계를 받았으며, 초의(草衣)로부터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호의·하의·초의·문암(聞庵)·운거(雲居)·응화(應化) 등 6법사에게서 불법을 배웠고, 이병원(李炳元)에게서 유서(儒書)를 배웠으며, 태호(太湖)와 자행(慈行)으로부터 재공의식(齋供儀式)을 배웠다. 1846년에 호의의 법을 이어 진불암(眞佛庵)에서 개당하여 《화엄경》과 《범망경 梵網經》을 강설하고 선리(禪理)를 가르쳤다. ##22년 동안을 강당에서 학인들을 가르치다가 다시 조계산·지리산·가야산·영축산 등지에 있는 사찰을 순방하였고, 1873년에는 제주도를, 1875년에는 한양과 송악을 거쳐 묘향산과 금강산을 순례하였다. 그뒤 다시 대둔사로 돌아와서 후학들을 지도하다가 나이 77세, 법랍 64세로 입적하였다. 제자로는 교법을 전한 3인과 선법을 전한 81인이 있었으며, 그 가운데 성윤(性允)·예순(禮淳) 등이 가장 뛰어났다. 저서로는 고승전인 《동사열전 東師列傳》을 비롯하여 《범해선사유고 梵海禪師遺稿》·《범해시고 梵海詩稿》·《경훈기 警訓記》·《유교경기 遺敎經記》·《사십이장경기 四十二章經記》·《사략기 史略記》·《통감기 通鑑記》·《진보기 眞寶記》·《박의기 博儀記》·《사비기 四碑記》·《명수집 名數集》·《동시선 東詩選》·《은적사사적 隱跡寺事蹟》 등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예(覺倪)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사(高麗史)》에 의하면, 각예(覺倪)는 예종(睿宗)의 궁인(宮人)의 아들이다. 1164년(의종 18) 왕이 인지재(仁智齋)에 갔을 때 법천사(法泉寺)의 주지였던 승려 각예(覺倪)가 달령원(獺嶺院)까지 술을 준비하여 왕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1166년(의종 20)에는 왕이 성수원(聖壽院)에서 각예와 함께 연회를 베풀었는데, 성수원은 각예가 창건하였다. 이후 왕의 총애를 받아 여러 차례 의종의 부름에 응하여 시를 짓거나 하였는데, 1167년(의종 20) 장흥원(長興院)에 가서 우승선(右承宣)이었던 김돈중(金敦中) 등과 시를 짓기도 하였으며, 같은 해 중미정(衆美亭)에서 왕과 함께 배를 타고 놀았다는 기록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운(覺雲){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고승. 자세한 전기는 미상이나, 혜심(慧諶)의 제자로서 스승이 지은 《선문염송집 禪門拈頌集》 30권에 대해서 중요한 어구를 뽑아 다시 설화를 붙인 주소(注疏) 《선문염송설화》를 지었다. 이 저술은 고려시대에 널리 유통되어 선문(禪門)에서는 필독의 서적이 되었다.


  • 구곡(龜谷)/구곡각운(龜谷覺雲)/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숭신진승근수지도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운(覺雲){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의 선승(禪僧). 성은 유씨(柳氏), 호는 구곡(龜谷). 남원 사람. 보우(普愚)의 법통을 이어 남원 만행산 승련사(勝蓮寺) 있었으며, 《전등록 傳燈錄》에 심취하여 30여년간 연구하였다. 공민왕이 그의 도행을 숭상하여 〈달마절로도강도 達磨折蘆渡江圖〉와 〈보현육아백상도 普賢六牙白象圖〉를 그려서 하사하였고, ‘구곡각운(龜谷覺雲)’이라는 넉 자를 수서(手書)하여 그의 호로 삼게 하였으며, 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숭신진승근수지도도대선사(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崇信眞乘勤修至道都大禪師)의 법호를 내렸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왕에게 청하여 《경덕전등록》을 중간하였다. 그의 법계(法系)에 대해서는 이론이 있는데, 송광사개창비(松廣寺開創碑)에는 보우―환암(幻庵)―각운으로 기록하였고, 평안남도 평원군 법흥산 법흥사(法興寺)의 전등법맥(傳燈法脈)에도 보우―환암―각운―정심(淨心)―지엄―영관(靈觀)―휴정(休靜)의 순으로 나열하였다. 그런데 각운과 직접 교유했던 이색(李穡)은 각운을 졸암(拙庵)의 적사(嫡嗣)라고 하였다. 현재 후자의 기록을 따르고 있는데, 전자가 휴정의 법맥을 보우에게 잇게 하려는 후세의 가필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의 제자로는 만우(卍雨)가 있다.


  • 중영(仲英)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웅(覺雄)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의 고승. 호는 중영(仲英). 자세한 생애는 전래되지 않고 있다. 일찍이 나옹(懶翁)의 제자가 되었으며, 나옹이 입적할 때까지 스승의 아낌을 받으면서 서기(書記)의 소임을 맡았다. 나옹이 입적한 뒤에 여주 신륵사(神勒寺)의 나옹부도 곁에서 6, 7년을 머물면서 떠나지 못하다가, 뒤에 발분하여 여러 곳의 스승을 찾아다니면서 도를 묻고 깨달음을 얻었다. 이색(李穡)은 그의 도를 위하여 〈중영설 仲英說〉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유(覺猷)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1258년(고종 45) 경주 기림사(祇林寺) 주지로 있었으며, 대선사(大禪師)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그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이 전부이다. 먼저 〈낙산이대성(洛山二大聖)〉에 따르면, 신라 의상법사(義湘法師)가 낙산사(洛山寺)에 간직해 두었던 관음 및 정취(正趣)보살의 진용(眞容)과 두 개의 보주(寶珠)가 몽고군의 침입으로 위험에 처하게 되자 명주도감창사(溟州道監倉使) 이녹수(李祿綏)에게 주어 감창고(監倉庫)에 보관하게 했다. 그리고 1258년(고종 45) 각유가 어부(御府)로 옮기기를 청하여 나라에서 야별초 10인을 파견, 그가 이들을 안내하여 명주성(溟州城)에서 그것을 가져다 내부(內府)에 보관하게 했다. 한편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서는, 고려 예종(睿宗) 때 전래된 불아(佛牙)가 중간에 분실되었다가 다시 봉안되는 과정을 각유가 이야기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특히 이 내용의 뒤에는 “전 기림사 대선사 각유가 친히 목격한 바를 이야기하여 내가 기록하게 된 것이다”라는 일연(一然)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각유는 《삼국유사》의 저자인 일연과도 관련이 있는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 시호
    충명국사(冲明國師)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각응(覺膺)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희종(熙宗: 1204∼1211)의 다섯째 아들이다. 출가하여 중이 되었으며, 시호(諡號)는 충명국사(冲明國師)라고 하는데,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각절왕(角折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일본의 《신찬성씨록 新撰姓氏錄》에 전하는 신라의 왕. 실제 신라의 왕이라기보다는 일본열도에 진출한 신라계통의 인물로 생각된다. 각절왕은 원래 고유명사이었다기보다는, 절풍(折風) 모양의 고깔에 양 옆으로 뿔을 꽂은 관모(冠帽)를 착용하였기 때문에 칭해진 것으로 보인다. 가야인으로 일본열도에 진출한 적이 있는 소나갈질지(蘇那曷叱智)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의 이름이 고깔모양의 관모를 가리키는 보통명사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이마에 뿔이 났다는 것 또한 머리에 쓴 관모가 뿔과 같이 보인 데 불과하다는 해석도 있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로는 신라의 관등(官等)인 각간(角干)에서 연유한 이름으로도 볼 수 있다. ‘각절’의 ‘절’은 각찬(角粲)의 ‘찬’과도 음이 통하는데, 각찬은 곧 각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시기를 알 수는 없으나 각절왕은 일본열도에 진출한 후, 지금의 대판 남쪽에 있던, 뒷날 이즈미구니(和泉國)가 되는 지역을 개척하였다. 그리하여 전문적인 직무를 가진 베(部)를 통솔하는 호족인 고키노오비도(近義首)라는 성씨의 조상이 되었다. 대판현 가이즈카시(貝塚市)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된 고키노향(近義鄕)이라는 지역의 이름은 ‘고키노오비도’라는 신라계통 호족의 근거지였다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하천을 끼고 있어 농경에도 적합한 이 지역에는 마루야마(丸山) 고분이라고 불리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남아 있다. 그런데 마루야마고분에서 출토된 마구류(馬具類)는 경주의 금관총(金冠塚) 출토품과 같은 계통인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각절왕으로 상징되는 신라계통 주민의 대판지역 진출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하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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