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미상∼1289년(충렬왕 15). 고려 충렬왕 때의 몽고어 역관(譯官). 초명은 화상(和尙). 진주 사람. 일찍이 포로가 되어 몽고에 가 수형(守衡)이라 이름을 고치고, 원나라 궁정에서 고려관계 통역을 맡았다. 원종을 원나라로부터 호위하여 귀국하였으며, 1274년(충렬왕 즉위) 11월에 추밀원부사 판위위시사 상장군(樞密院副使判衛尉寺事上將軍)이 되었다. 1275년 10월에 원나라 황실과 고려왕실과의 통혼문제(通婚問題) 및 고려의 관제를 강등시키는 문제 등에 관한 원나라 세조의 조서를 가지고, 원나라의 사신 악탈연(岳脫衍)과 같이 고려에 왔다. 1278년 2월에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가 되고, 같은해 4월 북경동지(北京同知)로서 원나라에 가는 충렬왕을 보좌하였다. 또한, 원나라의 대령총관(大寧摠官)이 되어 고려 사신이 오면 이를 안내하였고, 1287년 7월에 내안대왕(乃顔大王)이 반란을 일으키자 동경총관(東京摠官)이 되어 반란진압에 참여하였으며, 찬성사(贊成事)에 올랐다.
1709년(숙종 35)∼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사숙(士肅). 아버지는 학생(學生) 강정일(姜鼎一)이다. 60세의 나이로 1768년(영조 44)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35위로 합격하였다.
1428년(세종 10)∼1481년(성종 1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장(景章), 호는 수헌(守軒). 아버지는 우덕(友德), 형은 영의정을 지낸 맹경(孟卿)이다. 경희전직(景禧殿直)과 주부를 거쳐 1457년(세조 3)에 제언경차관(堤堰敬差官)으로 있으면서 가뭄을 이기는 유일한 방책은 제언을 축조하는 것뿐임을 상소하였다. 벼슬은 1460년 밀양도호부사를 거쳐 강원도사·집의에 이르렀다. 1469년(성종 즉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중용하려 하였으나,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특별히 함안군수에 제수되었다. 함안군수로 재직할 때 백성을 특별히 잘 다스린다 하여 치적이 조정에 보고되기도 하였다.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미상∼1515년(중종 10). 조선 연산군과 중종 때의 문신·서화가.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자양(子讓). 아버지는 희(曦)이다. 1492년(성종 23)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사관(史官)·의금부도사를 거쳐, 1496년(연산군 2)에 사헌부지평이 되어 공신들의 가자(加資)가 외람(畏濫)됨을 지적하는 등 언론활동을 전개했다. 1504년 사간원사간으로 있을 때 연산군의 생모 폐비윤씨의 추숭을 반대하다 화를 당하여 재령으로 장류(杖流)되었다. 그뒤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07년(중종 2) 광주목사(廣州牧使)로 서용(敍用)되었다가, 재직중에 백성들의 진휼(賑恤)을 소홀히 하고 백성들을 다스림에 근면하지 못하다는 경기관찰사의 장계에 따라 한때 파직당하였으나,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재서용되었다. 1514년에는 좌의정 정광필(鄭光弼)에 의해 추천되어 청백리로 녹선(錄選)되었으며, 그 포상으로 가자되어 당상관에 올라 행호군(行護軍)으로 재직중 죽었다. 성품이 본래 청렴하여 집이 몹시 가난하였으며, 죽은 뒤 염장(殮葬)할 용구조차 갖추지 못하였다. 글씨를 잘 써서 당대에 명필로 그 이름이 높았다.
1390년(공양왕 2)∼1468년(예종 즉위). 조선 초기의 명장. 본관은 신천. 자는 태초(太初). 증조부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윤성(允成)이다. 갑사(甲士)로 벼슬길에 올라 무관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 첨지중추원사로 있다가, 북방야인을 다스리기 위해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 박천에 나가 북방의 방어에 전념하게 되었다. 1453년(단종 1) 행회령도호부사(行會寧都護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로 전임되었다가, 1458년(세조 4) 다시 첨지중추원사로 복귀하여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60년 판길주목사로 부임했다가 새로 설치된 영북진(寧北鎭)의 도호부사로 전임되어 진(鎭)의 성을 쌓는 일에 진력하였다. 그뒤 신숙주(申叔舟)의 모련위야인정벌(毛憐衛野人征伐)에 종군하여 공을 세우고, 자헌대부에 올라 종성절제사가 되었다. 이듬해 함길도도절제사가 된 뒤, 1465년 중추원사로 전임될 때까지 5년 가까이 북방 방어에 힘쓰면서 세조의 신임을 받았다. 세조는 북방 방어에 노력하는 그의 노고를 덜어주려고 처와 함께 부임하도록 특명하였다. 또한, 함길도도절제사로 있을 때는 임기가 찼는데도, 세조는 믿고 교대시킬 더 좋은 인물이 없음을 들어 그대로 유임시키기도 하였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가 난을 일으키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평안도병을 이끌고 어유소(魚有沼)·남이(南怡) 등과 함께 홍원(洪原)·북청(北靑)·만령(蔓嶺) 등지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의 평정에 공을 세웠다. 그 공으로 정충출기포의적개공신(精忠出氣布義敵愾功臣) 1등에 녹훈되고 우의정에 승진되었다. 이어 서정장군(西征將軍)으로 남이·어유소 등과 압록강을 건너 건주위(建州衛)의 동북쪽 파저강(婆猪江) 올미부(兀彌部)의 여러 곳을 소탕하고 추장 이만주(李滿住)를 죽이는 등 공을 세웠다. 이 공으로 명나라 헌종(憲宗)으로부터 은 20냥과 비단을 하사받았다. 1468년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으로 오위도총관에 임명되었으나, 같은해 유자광(柳子光)의 무고로 일어난 남이의 옥사에 연루되어 사형당했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南公轍)의 건의로 누명이 풀리고 관작이 복구되었다.
1898년(광무 2)∼미상. 독립운동가·정치가. 경상남도 진주 출생.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으며, 1921년에도 사회주의운동에 관계하여 체포되어 재류금지처분(在留禁止處分)을 받았다. 이후 만주로 망명하여 1923년에는 만주공산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27년 9월 조선공산당재건운동에 관련하여 간도에서 체포되었다. 1933년 이후에는 중국 난징(南京) 등지에서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주력하다가 1935년 7월 의열단·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을 집결하여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 1937년 朝鮮民族革命黨으로 개칭)을 창당하였으며, 민족통일전선이 형성되자 거기에 참여하였다. 또한, 1943년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연합내각을 결성하고 민족통일전선 노선에 합류하자 대한민국임시의정원에 의원으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6년 5월 귀국하였으며, 당시 미소공동위원회와 함께 추진되던 좌우합작위원회가 우익측의 8원칙과 좌익측의 5원칙으로 합작원칙을 두고 교착상태에 빠지자, 9월 온건한 좌익대표로 교체된 좌우합작위원회 준비회담에 참여하여 절충안으로서 좌우합작 7원칙의 성안에 힘써 민족통일전선 형성노선을 지속하였다. 1946년 11월에는 황한철(黃漢喆)·이지탁(李智鐸) 등과 함께 근로대중당을 창당하여 위원장에 취임하고, 같은해 12월에는 근로인민당 대표 자격으로 탁창혁(卓昌赫)과 함께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단독정부수립노선이 굳어지자 1948년 4월에는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세칭 남북협상)에 참여하여 북한에 남아 있다가 그해 8월에 북한최고인민회의 제1기대의원, 1962년 10월에 최고인민회의 제3기대의원 및 상임위원을 역임하였으나, 그뒤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본관은 신천(信川). 호는 화곡(化谷). 증조부는 우정승을 지낸 숙재(淑才), 할아버지는 상호군을 지낸 증상산부원군(贈象山府院君) 서(庶), 아버지는 찬성사를 지낸 곡산군(谷山君) 윤성(允成)이다. 처음 원나라에 들어가서 숭문감소감(崇文監少監)이 되고, 이름을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라 칭했다. 1354년(공민왕 3) 본국에 돌아와 강중상(姜仲祥)과 함께 지밀직사사를 거쳐, 찬성사가 되었다. 1374년 오랑캐출신으로 고려에 귀화한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 등을 살해하고 북원(北元)의 장수 나하추(納哈出)에게 달아났는데, 이때 김의를 원나라에 보냈다는 혐의로 유배되었다. 누이동생은 신덕왕후(神德王后)로 이성계(李成桂)의 비이다. 양가의 통혼은 전형적인 부원관력(附元官歷)을 배경으로 한 결합으로 원나라의 몰락기인 공민왕 때에 고려조정에 진출하여 현달한 가문이다. 이성계의 정변과 집정과정에서 유력한 협력세력으로 작용하였다. 조선개국 이후 재령백(載寧伯)의 작호를 받았으며, 제1차왕자의 난에 일족이 참화를 당하였다.
1850년(철종 1) 8월 24일∼1943년 10월 6일.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성팔(聖八)이고, 호는 이산(二山)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조부는 강치중(姜致重)이고, 조부는 강흠(姜欽)이며, 아버지는 강의(姜漪)이다. 외조부는 안석구(安錫九)이고, 처부는 이만철(李晩澈)이다.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문인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향리에서 자손들과 인근 후학들을 가르치며 일생을 보냈다. 그의 문집으로 《이산선생문집(二山先生文集)》이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신종 때의 무신. 1199년(신종 2)에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다. 이때 김준거(金俊琚)·이적중(李勣中)·김준광(金俊光) 등이 최충헌(崔忠獻)에게 반란을 일으키자, 최충헌의 명으로 이들을 진압하고 장군이 되었다. 다시 1202년 10월에 경주에서 패좌(孛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섭대장군(攝大將軍)으로 초토처치병마우도사(招討處置兵馬右道使)가 되어 김척후·최광의 등과 더불어 이를 토벌하고 최충헌으로부터 작질(爵秩)을 받았다.
1882년(고종 19)∼1921년. 독립운동가. 초명은 순필(順必), 일명 병수(炳洙). 경상북 상주군 이안면 출생. 경술국치 이후 국권을 회복하기 위하여 동지를 찾던 중 1913년 경상북도 풍기에서 뜻을 같이하는 채기중(蔡基中)·유창순(庾昌淳)·유장렬(柳璋烈)·한훈(韓焄)·김병렬(金炳烈)·정만교(鄭萬敎)·김상옥(金相玉)·정운홍(鄭雲洪)·정진화(鄭鎭華)·황상규(黃尙奎)·이각(李覺) 등과 비밀결사인 대한광복단을 조직하였고, 1915년 대구에서 활약하던 박상진(朴尙鎭)·우재룡(禹在龍)·양제안(梁濟安)·권영만(權寧萬)·정운일(鄭雲馹)·엄정섭(嚴正燮) 등의 동지들과 합류, 조직을 확대하여 대한광복회를 결성하였다. 대한광복회 행형부(行刑部)의 위원으로서, 군자금모금에 반대할 뿐만 아니라 이를 방해해온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면의 부호 장승원(張承遠)을 처단하였고, 김한종(金漢鍾)·채기중 등과 안동의 부호 안승국(安承國)·권영식(權寧植)·권준흥(權準興)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1918년 초에 대한광복회의 활동이 일본경찰에 발각, 많은 회원이 검거되자 같이 붙잡혀 1921년 사형당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479년(성종 10)∼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인보(仁甫)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조부는 강안복(姜安福)이고, 조부는 강이성(姜利誠)이며, 아버지는 중훈대부(中訓大夫)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 강황(姜璜)이다. 외조부는 이돈인(李惇仁)이고 처부는 윤석보(尹碩輔)이다. 29세인 1507년(중종 2) 정묘(丁卯)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 3등 48위로 합격하였고, 44세 때인 중종 17년(1522) 임오(壬午) 11월 세자관례 경축 별시(別試) 갑과(甲科)에 장원 급제하였다. 벼슬은 1522년(중종 17) 11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제수(除授)되었고, 1523년(중종 18) 4월 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을, 윤4월에 다시 정언(正言)에 제수(除授)된 뒤 수찬(修撰)에 이르렀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양(子揚), 호는 완휴재(玩休齋). 대제학(大提學) 강회중(姜淮仲)의 증손(曾孫)이며, 송산군(松山君) 강순(姜純)의 아들이다. 강호(江湖) 김숙자(金淑滋)의 문인(門人)이다. 여러 주군(州郡)을 관장하면서, 농업을 권장하고, 학업을 흥하게 하였다. 김제(金堤)에 부임하여 단종(端宗)이 임금의 자리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듣자,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세조(世祖)가 송산군(松山君)에 봉했으나 받지 않고,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에 들어가 초혼제(招魂祭)를 지내고, 단종을 삼현사(三賢祠)에 모셨다. 1784년(정조 8)에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건립한 전라북도 김제의 봉서사(鳳棲祠)에 배극렴(裵克廉)과 함께 봉안(奉安)되었다. 사당이 있는 봉서서원(鳳棲書院)은 1869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복원되지 못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1400년(정종 2).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정당문학(政堂文學) 군보(君寶), 아들 회계(淮季)는 공양왕의 부마가 되었다. 1357년(공민왕 6) 성균시에 급제하고 문하찬성사를 역임한 뒤, 추충보조공신(推忠輔祚功臣)이 되고 청성군(菁城君)에 봉해졌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던 태조 즉위년에, 유사(有司)의 상언(上言)으로 고려의 대신 이색(李穡) 등 56인을 숙청하였는데, 어을진 등과 함께 직첩을 회수당하고 멀리 유배되었다. 1400년(정종 2)에 죽으니, 공목(恭穆)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12년(광해군 4)∼1682년(숙종 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오(儆吾). 좌찬성 희맹(希孟)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순(淳)이다. 1648년(인조 26) 진사가 되고, 1652년(효종 3)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장령·지평 등을 지냈다. 1667년(현종 8) 정언이 되고, 1671년 지평이 되었으며, 1673년 다시 정언이 되었으나 병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갔다. 군내에 거주하는 종친들을 모아 종회(宗會)를 설립하고, 종친 사이의 화목과 유대강화에 힘썼다. 1675년(숙종 1) 경상도사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1679년에는 이황(李滉)을 본받아 향약(鄕約)을 조직하여 종친뿐 아니라 고향의 나이어린 자제를 교육하는 한편, 환란을 당했을 때 상부상조하게 하였다. 1682년 종부시정 겸 춘추관편수관(宗簿寺正兼春秋館編修官)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788년(정조 1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량(汝亮, 汝良). 진창군(晋昌君) 인(絪)의 8대손, 아버지는 승지 준흠(俊欽)이다. 1819년(순조 19)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수찬을 지내고, 1829년 진하사(進賀使)의 서장관으로 정사 이광문(李光文)과 부사 한기유(韓耆裕)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1838년(헌종 4) 부수찬을 거쳐 1843년 충청도관찰사, 1846년 행호군(行護軍), 1848년 한성부판윤·형조판서, 1854년(철종 5) 대사헌을 지냈으며, 1859년 예조판서가 되었다. 1866년(고종 3) 조대비가 수렴섭정(垂簾攝政)을 철회하고,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아 인사배치를 할 때 남인으로 기용되어 홍문관제학을 거쳐 이조판서로 승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미상∼1894년(고종 31). 동학의 차도주(次道主). 본관은 진주. 본명은 수(洙)·사원(士元)·방준(方俊). 시원은 동학 입도 후인 1875년 10월, 최시형(崔時亨)과 함께 개명한 이름이다. 영덕 출신. 정(錠)의 아들이다. 1863년경 입도하여 최제우(崔濟愚)의 지도를 받았고, 1864년 3월 최제우 순도(殉道) 후에는 최시형을 도와 흩어진 교인을 모으고 약화된 교세를 신장시켜 교문(敎門)을 조직화하였다. 1871년 3월에 이필제(李弼濟)가 일으킨 영해 교조신원운동 때, 이 운동을 준비하고 취당(聚黨)을 하며 영해 관아에 쳐들어가 인부(印府)를 탈취하는 등 적극 가담하였으나 실패함으로써, 그뒤 최시형·이필제 등과 단양으로 도피, 오랫동안 잠적생활을 하였다. 도피생활중에 최시형과 의형제로 결속하여 최시형 중심의 교문확립에 기여하였다. 또한, 영해신원운동 이후 최시형과 함께 동학의 각종 종교의식의 확립에도 참여하였다. 1872년 10월에는 교문의 제2인자격인 차도주에 임명되었고, 1879년에는 교문 최초의 교단사인 《최선생문집도원기서》를 집필, 이듬해에 간행하였는데, 여기서 최시형을 도통의 전수자로 확정함으로써 교문의 정통성을 최시형에게 두었다. 1880년의 《동경대전》, 1881년 《용담유사》 등의 동학경전 간행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손천민(孫天民)이 1883년 이후 주로 최시형을 보좌하기 전까지 최시형의 법설이나 명령 등을 받아쓰는 구실을 담당하여, 동학교리의 체계화에도 이바지하였다. 1885년에는 한때 관군에 체포되었으나 곧 풀려났으며, 1893년 2월 서울 복합상소를 뒤에서 총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894년 9월에는 북접동학농민군을 인솔하여 동학운동에 참여했다가, 11월 청주전투에서 관군에게 체포되어 순도하였다.
생몰년 미상.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1890년(고종 27) 부사과(副司果), 1891년(고종 28) 숭인전참봉가설(崇仁殿參奉加設), 1892년(고종 29) 감찰(監察)로 단부(單付)되었으며, 1898년(고종 35)에는 제주도에서 방성칠(房星七)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성(城)을 지켰다는 기록이 있다. 1900년(고종 37)에 장릉참봉(章陵參奉)으로 임명되었으나, 다음날 의원면직(依願免職)되었다.
1766년(영조 42)∼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성여(聖汝). 아버지는 노(栳)이다. 1789년(정조 13)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811년(순조 11) 양양부사와 장령을 지내고 1825년 헌납이 되었다. 1836년(헌종 2) 부사직으로 있으면서 순조비 김씨의 수렴청정을 비난하고, 성학(聖學)의 권장, 빈민의 구제, 기강의 확립, 재용(財用)의 절약, 군정의 충실, 과거제 폐단의 혁파 등 6개 조목의 시정책을 상소하였다가 국정을 모독하였다는 죄로 절도(絶島)에 유배당하였다. 1840년에 헌종이 직접 정사에 임하게 되자 풀려났다. 저서로는 《건거록 巾車錄》이 있다.
1648년(인조 26)∼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자고(子固). 증조부는 강홍중(姜弘重),조부는 통훈대부 함흥진관병마절제도위(咸興鎭管兵馬節制都尉) 강급(姜)이고, 아버지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행 진보현감(行眞寶縣監) 강석로(姜碩老)이며, 외조부는 성곡(成穀)이다. 1669년(현종 10) 기유(己酉)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48위로 합격하고, 1689년(숙종 15) 기사(己巳)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68위에 합격하였다. 동생 강영(姜楧)이 1696년(숙종 22)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위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강해(姜楷)는 1705년(숙종 31)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2위로 합격하였다. 아들 강필문(姜必文)은 1713년(숙종 39)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2등 10위로 합격하였다. 1692년(숙종 18) 안음현감(安陰縣監), 1704년(숙종 30) 금정찰방(金井察訪), 1707년(숙종 33) 은율현감(殷栗縣監) 등의 관직을 거쳤다.
1734년(영조 10)∼1800년(정조 24). 조선 후기 유학자·효자. 자는 미중(美仲), 호는 소은(素隱)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임진왜란 때의 공신인 강덕룡(姜德龍)의 후손으로, 부는 매은(梅隱) 강흥운(姜興運)이고, 외조부는 인재(忍齋) 하윤관(河潤寬)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진양속지(晉陽續誌)》효행(孝行) 편에 그와 관련한 이야기가 전한다. 그는 어버이가 병이 나자 변을 맛보고 손가락을 절단해 피를 입에 넣어 드렸으며, 부친상을 당해서는 삼년 동안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새 곡식을 얻어서 제사를 올리고 육고기가 부족한 것을 걱정하자, 홀연히 까마귀가 계란 여덟 개를 물고 와서 곁에 두고 가기도 했으며, 묘소로 가는 길에 얼었던 눈이 저절로 녹았을 뿐만 아니라, 시묘살이 할 때에는 외진 골짜기라 물이 나는 샘이 없었는데도 샘물이 솟아오르다가 삼년상이 끝나자 저절로 말랐다고 전해진다. 또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으며 학문을 좋아했는데, 그는 옛 성현들의 학문을 그대로 본받아 따르고자 했다. 1799년(정조 23) 가을에 진주목사(晋州牧使) 윤노동이 진주향교에 여러 선비들을 모아놓고 향음주례를 행하면서 강식준에게 주관하도록 할 만큼 그의 학문적 위치는 뛰어났다.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등의 책을 손수 손자에게 필사하여 주면서 “우리 집안은 가난해 농사를 지을 논밭이 없다. 너희들은 글을 읽어 이를 체득하여 실천하는 것이 조부의 뜻이다”라고 할 만큼 학문에도 남다른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1800년(정조 24) 6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집 《소은선생문집(素隱先生文集)》은 현재 경상대학교에 보존되어 있는데, 자손들에게 남긴 글들과 ‘논학(論學)’, ‘논심(論心)’, ‘변화기질(變化氣質)’ 등 학문적 깊이를 알 수 있는 글들도 다수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