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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신천(信川)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신(康愼){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신천. 부사 거의(居義)의 아들, 어머니는 안렴사(按廉使) 신우(申祐)의 딸, 부인은 경주부윤 오식(吳湜)의 딸이다. 생원시를 거쳐 1420년(세종 2)의 문과에서 동진사과(同進士科)에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며, 1423년 예문관대교로서 유관(柳觀) 주재하의 《고려사》 개수에 참여하였다. 1434년 감찰·세자시강원필선을 역임하고 퇴직하였다. 청렴결백한 성품과 시재로 명망이 있었고,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 면경(勉卿)
    동고(東皐)
    시호
    의간(毅簡)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3(중종 38) - 1615(광해군 7)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신(姜紳){2}에 대하여

    1543년(중종 38)∼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면경(勉卿), 호는 동고(東皐). 생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고 사안(士安)에게 입양되었다. 생모는 임간(任幹)의 딸이며, 양모는 윤광운(尹光雲)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수석으로 진사가 되고, 1577년(선조 10)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1589년 문사랑(問事郞)으로 정여립옥사(鄭汝立獄事)의 처리에 참여하여 평난공신(平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진흥군(晋興君)에 봉해졌다. 이조낭관·홍문관직을 역임하고, 1592년 승지·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나 임진왜란을 맞아 함경도순찰사를 거쳐, 1594년 도승지, 1596년 서북면순검사(西北面巡檢使)와 대사간을 역임하였다. 정유재란 때 명나라 군사와 함께 왜군을 격퇴한 뒤에 1602년 경기도관찰사, 1609년 우참찬, 다음해 좌참찬을 역임했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의간(毅簡)이다.

  • 옥여(玉汝)/여장(汝章)
    감계(監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61(철종 12)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신면(姜信冕)에 대하여

    1861년(철종 12)∼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옥여(玉汝), 여장(汝章), 호는 감계(監溪). 아버지는 유학(幼學) 강인희(姜仁熙)이고, 생부는 행 소경원수봉관(行昭慶園守奉官) 강주희(姜周熙)이다. 형은 강신도(姜信道), 동생은 강신영(姜信榮)이다. 31세 때인 1891년(고종 28)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12위로 합격하였다. 성품은 온후(溫厚)하고 근각(謹慤)하였으며, 간재(艮齋) 전우(田愚)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일제가 억지로 머리를 깎고 성(姓)을 바꾸려고 하였으나, 의연하게 굴하지 않았다.


  • 소죽(小竹)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9(융희 3) - 1985()
    본관
    진주(晋州)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강신명(姜信明)에 대하여

    1909년∼1985년. 목사·교육자. 본관은 진주. 호는 소죽(小竹). 경상북도 영풍 출생. 목사인 병주(炳周)와 최영주(崔榮周)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하여, 이영신(李永信)과 결혼하였다. 대구의 계성중학교를 거쳐 1934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에 평양의 장로회신학교 본과를 마치고 1940년에 일본의 동경신학교에서 수학하였다. 광복 후 1953년에 미국의 프린스턴신학교(Princeton神學校)에서 교회사분야의 신학석사학위를 받았으며, 1964년에는 목회와 교육사업의 공로가 인정되어 미국의 스털링대학(Sterling大學)으로부터 명예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신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평양의 서문밖교회와 선천(宣川)의 남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였으며, 신학교를 졸업한 후인 1938년에 선천의 남교회에 목사로 부임한 때부터 본격적인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뒤 1942년에 선천북교회로 옮겼으나 남북분단 이후 남쪽으로 내려와 1947년에 당시의 피난민교회였던 서울의 영락교회(당시에는 베다니교회)에서 목사 한경직과 함께 동역목사(同役牧師)로 일했다. 심방과 교인들의 교육 그리고 설교를 담당하였으며, 또 음악에 소질이 있어서 성가대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1955년에 영락교회를 사임하고 장로교의 역사적 상징인 서울의 새문안교회에서 25년간 목회를 하였으며, 1980년에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복음적인 신앙의 방향으로 생활하고 실천하면서 목회를 담당하였으며 종교가 윤리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는 기본적인 입장에 서서, 경건한 믿음과 도덕적인 생활을 내세웠지만, 사회의 부정과 불의를 지적함에 있어서 철저하여야 할 예언자적인 사명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변화되어 이룩되는 온건한 사회변혁을 지향하며 화해와 조화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회개와 정화를 통한 교회의 갱신을 주장함과 동시에,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에큐메니컬운동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해 개혁교회의 온건한 신앙으로써 사회에 대한 관심을 유도하였다. 행정적인 능력과 함께 교육에 대한 열정으로 교육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서울의 동흥중학교 교장, 숭실대학 재단이사, 계명대학 재단이사, 그리고 연세대학교의 재단이사 및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숭전대학교의 이사장을 거쳐 1982년에는 그 학교의 총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죽었다. 대한기독교교육협회의 회장으로 세번 선출되었으며 서울장로회신학교를 설립, 1962년부터 1985년까지 교장으로 있었다. 그리고 마산에 있는 창신학원의 이사도 담당한 일이 있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에 속하는 목사로서 한국기독교선교단체협의회의 회장,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의 회장,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의 최고직위인 총회장에 선출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사단법인 세계대학봉사회의 이사·이사장 그리고 총재를 역임하였으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의 산실이었던 입법회의에서 입법의원으로 참여하였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키려는 미국의 일부 여론에 반대하면서 그 대책위원회의 회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교육사업에 대한 공로가 인정되어 1970년에 국민훈장모란장이 수여되었다.

  • 우선(友善)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4(고종 1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신문(姜信文)에 대하여

    1874년(고종 11)∼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우선(友善).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 강성희(姜性熙)이다. 1891년(고종 28), 18세에 신묘(辛卯) 증광시(增廣試) 진사(進士) 3등 286로 합격하였다. 1903년(고종 40) 관리서주사(管理署主事)로 임용되었으나, 곧 의원면직(依願免職)되었다.

  • 길원(吉元)
    퇴산(退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9(고종 16) - 1949()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신철(姜信喆)에 대하여

    1879년(고종 16)∼1949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길원(吉元), 호는 퇴산(退山)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으로, 경상남도 밀양부(密陽府) 청운리(靑雲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강문영(姜文永), 조부는 도암(道巖) 강만형(姜晩馨), 아버지는 주사(主事) 강상희(姜象熙)이다. 어머니는 벽진이씨(碧珍李氏) 이석토(李錫土)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재능을 보였으며, 20살이 되자 허전(許傳)의 제자로 실학(實學)에 관심이 많던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6년(광무 10) 부친의 부름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고연정(高淵亭)을 짓고 거하였다. 부친이 병으로 눕자, 단지효행(斷指孝行)을 하였으나 끝내 효험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에 크게 애통해 하며 정성을 다하여 치상하고 3년을 하루 같이 시묘(侍墓)하며 효를 다하였다. 이후 오직 사서(四書)와 육경(六經)을 연구하여 기문(奇文)이나 벽서(僻書)에 치우침이 없었다. 그의 학행이 널리 알려지자 인근에서 배우고자 하는 유생들이 몰려들어 온전히 집에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으며, 이들을 이름 하여 '고연학도(高淵學徒)'라 부르기도 하였다. 또한 향사(鄕士)들을 모아 함께 동약계(同約契)를 만드는 등 향촌자치에 깊게 관여하였다. 1931년 스승 소눌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심상(心喪)을 지내고 유집(遺集)을 간행하는 일에 참여하였다. 1938년 봉계(鳳溪)에 단산서당(丹山書堂)을 짓고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매진하다 1949년 향년 7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는 비봉산(飛鳳山)에 있다. 저서로는 《퇴산선생문집(退山先生文集)》이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지방세력가
    강심(江深)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신라 문무왕 때 삼국통일전쟁에 활약한 이동혜(尔同兮: 지금의 善山 부근) 지방의 촌주. 667년(문무왕 7) 8월 문무왕이 직접 김유신(金庾信) 등 30여명의 장군들을 통솔하고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성정(漢城停: 지금의 廣州)에 이르러 당나라 이적(李勣)이 평양성에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이적이 11월 2일 평양성 북방 2백리 지점에 당도하여 강심을 사자로 삼아 거란(契丹)의 기병 80여명을 데리고 문무왕에게 가게 하였다. 아진함성(阿珍含城: 강원도 安峽)을 지나 한성에 도착하여 문무왕에게 병기를 독촉하는 이적의 편지를 전달하였다. 이때 문무왕은 당나라 군대가 평양성에 도착하기를 기다리면서 고구려의 군사에 의해 막혀 있는 도로를 개통하기 위하여 칠중성(七重城: 경기도 積城)을 공격하고 있었다. 문무왕은 11월 11일 급히 군사를 돌려 평양성으로 향하였던바, 장새(獐塞: 황해도 遂安)에 이르렀을 때, 영공이 군대를 돌려 귀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되돌아왔다. 이에 그 공로가 인정되어 대나마(大奈麻)에서 급찬(級飡)으로 승진하고, 속(粟) 2백석을 포상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기타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의열
    강씨(姜氏){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김종엽(金宗燁)의 아내이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시부모에게 예를 다하여 섬기었다. 항상 입에 맞는 음식과 몸에 편한 의복을 준비하는데 부지런히 하였고, 시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병으로 고생할 때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시탕하였고, 위급하게 되자 단지(斷指)를 하여 효험을 보았다. 90이 넘은 시할머니가 병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었을 때도 정성을 다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예제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러한 효행으로 호세(戶稅)와 민역(民役)을 면제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의열
    강씨(姜氏){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공종리(孔宗履)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벽을 마주하고 꼿꼿히 누운 채로 죽을 것을 다짐하고서, 남편이 임종하면서 한 말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남편이 말한 것은 후사(後嗣)를 정하는 일이었는데, 후사가 정해지자 남편의 묘소를 찾아 애도를 하고 돌아와 유서(遺書)를 지어 옷깃에 품고 약을 마시고 죽었다. 1780년(정조 4)에 정려(旌閭)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씨(姜氏){3}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문석빈(文碩彬)의 아내이다. 시부모를 정성을 다해 섬겼고 친척간에도 우의가 두터웠다. 남편이 병으로 고생할 때는 온갖 약을 구하여 바쳤고, 대신 아프게 해 달라고 밤낮으로 하늘에 빌었다. 남편이 죽자 그 뒤를 따랐다. 고을의 선비들이 여러 차례 포장해 주도록 추천하여 1887년(고종 24)에 정부인(貞夫人)의 직첩을 하사받고, 열녀 정려(旌閭)를 받았다.



  • 시호

    이칭
    왕자(王滋)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08(충렬왕 34)
    본관
    개성(開城)
    분류
    왕실 > 왕족
    강양공(江陽公)에 대하여

    미상∼1308년(충렬왕 34). 고려의 왕족.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자(滋). 충렬왕의 맏아들이다.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아버지이며, 충선왕의 이복형이다. 1279년(충렬왕 5) 충청도 아주(牙州) 동심사(東深寺)에 보내어져, 세자(世子: 뒤의 충선왕)와의 충돌을 피하게 하였다. 1283년 소환되어 강양공에 봉해졌다. 《고려사》의 이인임(李仁任) 열전에 강양군(江陽君)으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군(君)에 봉해지기도 한 것 같다. 어머니 정신부주(貞信府主)가 신종(神宗)의 손자인 시안공(始安公)의 딸이므로, 원나라의 왕실과 국혼이 시작되기 이전의 전통적인 고려사회에서라면, 당연히 태자로 책봉되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원나라 출신 공주의 소생을 중시하는 사회였으므로 불우한 생애를 보내게 되었다.


  • 쌍송(雙松)/오향정(五香亭)/금헌(琴軒)
    시호

    이칭
    이숙(李潚)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3(단종 1) - 1499(연산군 5)
    본관
    전주(全州)
    분류
    왕실 > 왕족
    강양군(江陽君)에 대하여

    1453년(단종 1)∼1499년(연산군 5). 조선 초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숙(潚), 호는 쌍송(雙松)·오향정(五香亭)·금헌(琴軒). 세종의 손자, 계양군(桂陽君) 증(璔)의 아들, 어머니는 좌의정 한확(韓確)의 딸이다. 세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1455년(세조 1) 3세에 특별히 강양도정(江陽都正)이 되었고, 이후 다른 종친과는 달리 궁내에 거처하면서 세조가 정하여준 사부로부터 수학하였으며, 세조대를 통하여 내종친(內宗親)의 한 사람으로서 궁내에서 세조를 시종하고 대소행행을 수행하였다. 1467년 강양군(江陽君)에 책봉되었고, 1484년(성종 15) 전년의 정희왕후(貞熹王后)국상에 수반된 세조릉 시릉(侍陵)의 노고로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승자됨과 아울러 왕명에 의하여 제종친의 비위를 규찰하였다. 이후 독서·산수·탄금을 즐기면서 자적하다가 죽었다. 단아하고 근실한 성품, 정순한 학문 및 능숙한 음률로 명망이 있었다. 묘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산(坡平山)에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3(광무 7) - 1983()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기독교인
    강양욱(康良煜)에 대하여

    1903년∼1983년. 목사·정치인. 평양 출신. 북한 김일성(金日成)의 외종조부이다.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예과 수료 후 1923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였다. 장로교 목사로서 1945년 11월 조선민주당 중앙위원, 1946년 2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서기장, 같은해 11월 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장이 되었다. 1959년 조선민주당 위원장,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위원,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위원장, 1960년 5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회장, 1967년 12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1969년 11월 체육지도위 위원장, 1971년 3월 대외문화연락위 위원장, 1972년 12월 국가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을 거쳐 제5기 대의원, 1981년 사회민주당 위원장이 되었으며, 위원장으로 있던 중에 죽었다.

  • 여문(汝文)
    초정(草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5(인종 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언룡(姜彦龍)에 대하여

    1545년(인종 1)∼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문(汝文), 호는 초정(草亭). 선조 때 유곡도찰방(幽谷道察訪)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항쟁하여 의령·삼가(三嘉)·합천(陜川) 등을 수복하는 데 크게 공을 세웠으며, 이를 계기로 하여 정인홍(鄭仁弘)·김면(金沔) 등이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의령의 덕림사(德林祠)에 제향되었다.

  • 공섭(公涉)
    영당(咏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7(명종 2) - 1593(순조 26)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은사
    강여성(姜汝𦩠)에 대하여

    1547년(명종 2)∼1593년(순조 26). 자는 공섭(公涉), 호는 영당(咏堂). 삼산(三山) 강응청(姜應淸)의 손자이다. 만 권의 책을 읽어 한 번 보면 바로 기억하였다. 과거보기를 일삼지 않고 계사년 왜란에 오룡동으로 피난하여 밥을 짓는 데 밥이 익지 않자, “화가 오려면 반드시 조짐이 있다.”라고 하고 곧 떠나 십리를 못 가서 홀연히 적을 만나 공과 모부인이 같이 피해를 입으니 아들 강찬(姜纘)이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충돌하여 적 여러 명을 죽이고 죽었다. 이러한 사실이 나라에 알려지니 참의를 증직하였다. 《삼강록(三綱錄)》에 기재되어 있다.

  • 공망(公望)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01(선조 34) - 1658(효종 9)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여재(姜與載)에 대하여

    1601년(선조 34)∼1658년(효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공망(公望). 고려말과 조선초의 중신이었던 회백(淮伯)의 7대손이며, 아버지는 즙(楫)이다. 1624년(인조 2) 진사가 되고, 163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1648년부터 오랫동안 장령을 지냈다. 1649년(효종 즉위)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고, 이듬해에는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었다. 1651년 다시 장령이 되었다가 은퇴하였다.

  • 계숙(啓叔)
    기재(耆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19(광해군 11) - 1683(숙종 9)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여호(姜汝㦿)에 대하여

    1619년(광해군 11)∼1683년(숙종 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계숙(啓叔), 호는 기재(耆齋). 아버지는 진사 설(渫)이다. 1654년(효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사간원정언·사헌부장령을 거쳐 판결사를 지냈다. 함경도 종성부사로 있을 때 임금이 그의 직언을 요청하자, 시폐(時弊) 수천언을 문장으로 진언하였다. 청렴결백하여 물품을 주고받을 때에는 반드시 의(義)로 하였으며 봉급에 남는 것이 있으면 친척에게 나누어주었다. 종성부사의 임기를 끝내고 돌아올 때의 소지품은 침구(寢具)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을 만큼 청렴하였다.

  • 정경(正卿)
    청천(菁川)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2(명종 7) - 1614(광해군 6)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연(姜綖)에 대하여

    1552년(명종 7)∼1614년(광해군 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정경(正卿), 호는 청천(菁川). 아버지는 사필(士弼)이다. 1590년(선조 23)에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593년 봉교(奉敎)가 되었고, 그뒤 정언·병조좌랑을 역임하였다. 1594년에 지평·헌납·필선(弼善), 1595년에 장령·겸문학(兼文學), 1599년에 사성(司成)·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집의(執義)가 되었다. 임진왜란 후 복구작업의 시급함을 들어 외방 수령직 가운데 비어 있는 곳은 경관(京官)으로써 우선해서 충원시킬 것을 건의하였다. 그뒤 사간·부교리·보덕(輔德)·좌부승지·우승지·좌승지를 거쳐 1603년에 공조참의가 되었다. 이듬해 인천부사, 1606년에 첨지중추부사, 1609년에 한성부판윤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청천일기》가 있다.

  • 정오(正吾)
    잠은(潛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영(姜怜){2}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정오(正吾), 호는 잠은(潛隱). 할아버지는 응교 덕서(德瑞), 아버지는 도사 윤조(胤祖)이다. 신흠(申欽)의 문인으로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한 뒤 성균관에서 공부하고, 태조비 한씨의 제릉(齊陵)의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597년 세마에 임명되고 이어 시직(侍直) 부수(副守)로 승진하였다. 1599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종향할 것을 상소하였는데 처음에는 허락받지 못하다가 뒤에 허락을 받았다. 계모 윤씨가 죽자 효행이 지극함을 인정받아 남구만(南九萬)의 천거로 성현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다. 이때 그곳에 가축의 병이 크게 유행하여 소가 많이 죽었는데 영동에서 소를 사서 역호(驛戶)의 대소를 헤아려 나누어 기르게 하여 폐농을 면하게 하였으며, 소도 많이 번식시켰다. 그리하여 역졸들은 이 소를 ‘강후우(姜候牛)’라 하였다. 이 공으로 산음현감(山陰縣監)으로 승진하여 선정을 베풀고 임기가 끝나 떠날 때는 이민(吏民) 수천명이 울었다고 한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후에는 심장세(沈長世)·홍우정(洪宇定)·민양(閔瀁)·홍석(洪錫) 등과 같이 태백산 춘양동(春陽洞)에 은거하였는데, 이들을 태백오현(太白五賢)이라 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영(康永){1}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공신. 본관은 신천(信川). 할아버지는 대호군 서(庶),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윤휘(允暉)이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에 침입하고 경성(京城)을 점령하였을 때, 호군으로서 1362년 경성을 수복한 공으로 1363년 수복경성일등공신(收復京城一等功臣)에 서훈되었고, 1359년 홍건적 침입 때 전상호군(前上護軍)으로서 적을 격주(擊走)한 공으로 1363년 11월에 기해격주홍적이등공신(己亥擊走紅賊二等功臣)으로 서훈되었다. 1373년 강계만호(江界萬戶)로서 나하추(納哈出)가 보낸 종자 10여명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하니, 공민왕이 이 소식을 듣고 소환하여 순위부(巡衛府)에 감금시켰다. 1376년(우왕 2) 왜구가 연산(連山: 지금의 論山)지역을 침범하니, 최영(崔瑩)·최공철(崔公哲)·박수년(朴壽年) 등과 더불어 조전원수(助戰元帥)로서 홍산(鴻山)에서 싸워 적을 대패시켰다. 1377년 왜구가 강화에 침구하자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나세(羅世)와 조사민(趙思民)·이원계(李元桂) 등과 더불어 격퇴시켰으며, 이어 왜구가 영광·장사(長沙)·해주·평주(平州) 등에 침입하자 원수(元帥)로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적을 격주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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