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영역 열기

krpia

도움말
도움말 검색 도움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자행(子行)
    남호(南湖)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0(고종 27) - 1972()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영술(姜榮述)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72년. 현대 정치인·관료. 자는 자행(子行)이고 호는 남호(南湖)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제주도 대정읍(大靜邑)에서 출생하였으며, 대정향교의 직원이자 유림의 반수(班首)이다. 광복 후에는 대정면장이 되어 4·3사건 수습에 온 힘을 쏟았다. 1952년 5월 초대 제주도의원 선거에서 자유당(自由黨) 후보로 당선되어 문교사회분과 위원장을 지냈다. 제주향교 재단이사장을 거쳐 1956년 9월 제2대 도의원 선거에 자유당 후보로 대정읍 선거구에서 재선되었다. 1960, 1968년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 출판추진위원회 고문을 맡아 추진 완성하였다.

  • 내형(乃亨)
    수재(睡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4(헌종 10) - 1915()
    본관
    진양(晋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영지(姜永墀)에 대하여

    1844년(헌종 10)∼1915년.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진양(晋陽). 자는 내형(乃亨), 호는 수재(睡齋). 아버지는 두황(斗璜)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지용(志溶)의 딸이다. 청빈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별다른 사우(師友)의 도움이 없이 주경야독으로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학문을 닦았다. 나이 15세에 문사(文詞)가 이미 성숙하였고 그뒤 학문을 계속 연찬하여 사서오경에 박통하였으며, 특히 《대학》·《중용》에 치력하였다. 심학(心學)에 관한 그의 연구를 집대성한 〈심학집략 心學輯略〉이 있는바, 이기(理氣)·심성(心性)·인의(仁義)·도덕(道德)·성경(誠敬)·예악(禮樂)·충서(忠恕) 등 유학의 전반적인 문제에 관하여 상당한 연구체계를 세웠다. 만년에는 집 뒤 대나무숲 속에 한칸 정자를 지어 기거하면서, 손수 오동나무를 잘라 거문고를 만들어 탔으며 물외(物外)에서 초연한 생활을 하였다. 또한, 곽종석(郭鍾錫)과 친분이 있었으며, 후진양성에도 힘썼다. 저서로는 《수재집》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영천(姜永天)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3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7세 때는 어머니 연일정씨(延日鄭氏)가 병으로 눕게 되자 어린나이에도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의 병수발을 들었다. 어머니의 병세가 더욱 깊어지자 손가락을 문지방에 찧어 그 피를 어머니의 입에 흘려 넣고는 정신을 잃었다. 어머니가 소생하여 쓰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아들을 정성껏 돌보아 회복시켰다. 이러한 사실이 널리 퍼져 ‘하늘이 내린 효자[天生孝子]’라는 칭송을 들었다. 사림에서 포장(襃獎)을 아뢰어, 1700년(숙종 26) 효자정문을 내려 받았다. 효자문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 적목리 논남부락에 있으며, 향토유적 제5호로 지정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871(고종 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영회(姜英會)에 대하여

    미상∼1871년(고종 8). 조선 후기의 의병. 강영회(姜英會)는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 때 의병을 총지휘한 도영장(都領將)이었다. 그는 미국의 육전대가 강화도에 침입하자 훈의청(勳義廳)이라는 의병 모군청(募軍廳)을 직접 설치하고 모집된 의병들을 훈련시켰다. 훈의청의 군사들은 의병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엄한 군령에 잘 따랐으며, 모든 군용품은 의병이 자체로 조달하여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고종이 상금 오백 냥을 하사하였다.그 뒤 이들 강영회가 이끄는 의병은 갑곶(甲串), 영종(永宗), 황산도(黃山島) 등지로 파견되어 많은 승전을 거두었다. 이후 광성보(廣城堡) 전투에서 분전하던 끝에 역부족으로 의병의 대다수가 순국하였고, 강영회 또한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 인원(仁元)
    잠곡(潛谷)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7(고종 24) - 1948()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영희(姜永熙)에 대하여

    1887년(고종 24)∼1948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인원(仁元), 호는 잠곡(潛谷)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의 15세손이다. 천성이 순후하며 행실이 공검(恭儉)하고 처세에 근신(謹愼)하였다. 자질(子姪) 교육에는 효우(孝友)와 근엄(謹嚴)으로 표본이 되어 사림(士林)의 존경을 받았는데 《동헌비고(東獻備考)》중 〈음사편(蔭仕篇)〉에 자세히 기술되었다. 아들 강신태(姜信泰)가 있다.

  • 성문(聖文)
    만은(晩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4(고종 31) - 1968()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예조(姜叡祚)에 대하여

    1894년(고종 31)∼1968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성문(聖文)이고, 호는 만은(晩隱)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증조부는 수죽(水竹) 강문오(姜文伍)이고, 조부는 강석우(姜錫宇)이며, 아버지는 추은(樞溪) 강재선(姜在善)이다. 매서(梅西) 김극영(金克永)과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그의 문집으로 《만은유고(晩隱遺稿)》가 있다.



  • 시호

    이칭
    강한주(姜漢周)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2(광무 6) - 196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예능보유자
    강옥경(姜玉瓊)에 대하여

    1902년∼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 〈진주검무 晋州劍舞〉의 기예능보유자. 본명은 한주(漢周). 진주 출신. 최완자(崔完子)로부터 무용을 배워 〈진주검무〉공연에 참가하였다. 1967년에 〈진주검무〉 기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다.



  • 시호

    이칭
    골롬바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60(영조 36) - 1801(순조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천주교인
    강완숙(姜完淑)에 대하여

    1760년(영조 36)∼1801년(순조 1). 초기 천주교회의 순교자. 최초의 여성회장이다. 세례명 골롬바. 충청남도 내포 지방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덕산에 사는 홍지영(洪芝榮)에게 후처로 시집갔으나, 천주교가 충청도 지방까지 전해지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고, 남편과 헤어져 시어머니와 전처의 아들 필주(弼周)와 함께 서울로 이사해 살았다. 서울에 올라온 뒤 교우들과 접촉하면서 전교에 힘쓰는 한편, 지황(池璜) 등을 도와 신부 주문모(周文謨)를 영입하는 데 큰 소임을 하였다. 주문모가 1794년(정조 18) 12월 밀입국하여 서울 최인길(崔仁吉)의 집에 숨어서 전교활동을 하던 중, 1795년 6월 배교자 한영익(韓永益)의 밀고로 체포령이 내려지자, 강완숙은 그를 자기집 나뭇광에 숨겨주었으며, 그뒤 6년간 주문모의 전교활동을 여러 모로 도왔다. 주문모는 그녀에게 영세를 주고 여회장으로 삼아 여자들에 대한 전교를 전담하게 하는 한편, 교회일을 맡아보게 하였다. 그녀는 당대의 남인학자들과도 교유하여 교리에 대한 토론도 하였으며, 구변과 수완이 좋아 많은 부녀자들을 감화시켜 입교시켰는데, 특히 왕실의 은언군(恩彦君)의 처 송씨와 그의 며느리 신씨(申氏)에게 교리를 가르쳐, 주문모에게 직접 영세를 받게까지 하였다. 이와 같은 그녀의 다방면에 걸친 활동으로 교세는 크게 늘어났지만,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같은해 2월 28일 체포되어 갖은 고문으로 주문모의 행방을 추궁당하면서도 끝내 함구하여, 7월 2일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다.



  • 시호

    이칭
    대숭린(大嵩璘)
    시대
    남북국시대 > 발해
    생졸년
    ? - 80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강왕(康王)에 대하여

    미상∼809년. 발해의 제6대왕. 재위 794∼809##. 이름은 대숭린(大嵩璘). 제3대 문왕의 막내아들이다. 794년에 즉위한 제5대왕 대화여(大華璵)가 그해에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정력(正曆)’이라는 연호를 썼다. 당나라에서는 즉위 이듬해인 795년 2월 대숭린에게 ‘발해군왕’의 책봉을 내리고, 798년에는 다시 ‘발해국왕’의 책봉을 내렸다. 15년간에 걸친 치적은 네 차례에 걸친 당나라에의 사신파견과 빈번하였던 일본과의 사신내왕이 알려져 있을 뿐, 특기할만한 것은 전해지지 않는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6(헌종 12) - 193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용(姜鎔)에 대하여

    1846년(헌종 12)∼1934년. 1900년(고종 37)에 영릉참봉(英陵參奉)으로 임용되었으나, 곧 의원면직(依願免職)되었다. 1901년(고종 38)에는 천릉도감감조관(遷陵都監監造官)으로 임명되었으나 곧 체직(遞職)되었고, 1902년(고종 39)에도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으로 임용되었으나, 같은 해에 의관면직되었다.


  • 단야(檀野)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강용구(姜鎔求)에 대하여

    1896년(고종 33)∼미상. 대종교 중진 중의 한 사람. 본관은 진주. 호는 단야(檀野). 부여 출신. 임오교변에서 순교한 철구(鐵求)의 아우이다. 1916년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교육계에서 3년간 근무하다가 24세 때 만주로 건너가 간도성 화룡현(間島省和龍縣)의 동명학교(東明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1920년에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경신국장(警信局長)으로 활약하였다. 1921년 9월 참교(參敎)가 되었으며 남일도본사(南一道本司) 계리감정(計理監正)과 계선시교당(桂善施敎堂) 찬무(贊務)를 역임하였다. 1946년 2월 지교(知敎), 3월에 상교(尙敎)로 승진되어 총본사(總本司) 전강(典講) 등 요직을 지냈다. 1955년 정교(正敎)로 승진되면서 대형호(大兄號)를 받았으며, 그뒤 원로원 참의(參議), 삼일원(三一園) 대덕(大德), 대일각(大一閣) 전교(典敎) 등 중책을 맡아 교단발전에 공헌하였다.

  • 덕일(德一)
    무산(武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0(헌종 6) - 1908(융희 2)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용하(姜龍夏)에 대하여

    1840년(헌종 6)∼1908년(융희 2).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덕일(德一)이고, 호는 무산(武山)이며, 초명은 강신영(姜愼永)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고, 경상남도 함양군(咸陽郡) 엄천면(嚴川面) 연화동(蓮花洞) 출신이다. 강회중(姜淮仲)의 후손이다. 고조는 탄수(炭叟) 강건(姜健), 증조는 강익열(姜翼烈), 조부는 애련재(愛蓮齋) 강재만(姜在萬)이다. 부친 강치흠(姜致欽)과 모친 남원양씨(南原梁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외조부는 양덕용(梁德容)이다. 부인은 하대련(河大連)의 딸 진양하씨(晉陽河氏)이다. 어려서부터 태도가 반듯하였다. 자라서는 근엄하고 단정하였으며, 정신이 밝게 깨어있었다. 8세에 홀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세상이 날로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고 독서하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가르침을 청하자마자 곧바로 임헌회가 허락할 만큼 그의 언행은 예사롭지 않았다. 정재규(鄭載圭)·김현옥(金顯玉)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며 평생을 경외(敬畏)하며 보냈다. 부인과의 사이에 4남 강수형(姜壽馨)·강계형(姜桂馨)·강주형(姜柱馨)·강전형(姜全馨)을 두었다. 묘소는 무산(武山)에 자리하고 있다. 그의 유고 《무산유집(武山遺集)》은 6권 2책의 목활자본으로 정승현(鄭承鉉)의 서문과 안효진(安孝鎭)·강성희(姜性熙)의 발문을 붙여 1928년에 간행되었다. 증별시(贈別詩)와 차운시(次韻詩)·화답시(和答詩)·만시(輓詩)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실천과 마음 수행에 대해 읊은 〈독심경발휘(讀心經發揮)〉와 〈사천(事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잡저의 〈독소학자경설(讀小學自警說)〉·〈자경(自警)〉·〈유내정(諭內庭)〉·〈유자손(諭子孫)〉 등을 통해 그가 규범에 충실한 생활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5(고종 2) - 193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강용환(姜龍煥)에 대하여

    1865년(고종 2)∼1938년. 조선말 고종·순종조를 거쳐 민족항일기초에 활약한 판소리 명창 및 창극 명인. 전라도 무안 출신. 가야금산조의 명인인 태홍(太弘)의 아버지이며 판소리명창인 남중(南中)의 작은아버지이다. 이날치(李捺致)로부터 판소리를 배워 명창이 되었고 서편제소리를 하였는데 계면조를 주장하였다. 풍채도 좋고 학식도 있고 판소리도 잘하여 귀재라는 말을 들었다. 1900년에 상경하여 광무대협률사(光武臺協律社)의 공연에 참가하여 〈춘향가〉 중 옥중가를 잘 불러 이름을 떨쳤다. 특히, 창극을 창안하여 김창환(金昌煥)과 함께 원각사(圓覺社) 창극운동에 주역을 담당하였다. 〈심청가〉 및 〈춘향가〉를 창극화하였고, 특히 최초의 본격적인 창극으로 알려진 〈최병두타령〉을 창극화하여 인기를 끌었다. 후에 김창환협률사(金昌煥協律社)에 참가하였고 창극 〈춘향가〉에는 판소리 〈춘향가〉에 없는 ‘어사(御史)와 초동(樵童)’을 창작하였고, 〈변강쇠타령〉도 창극화하여 공연하였다. 1912년 광주협률사(光州協律社)가 창립되자 〈춘향전〉을 연출, 지도하였다. 말년에는 향리에서 후진을 양성하였다. 〈춘향가〉·〈적벽가〉를 잘하였고, 특히 〈적벽가〉에 뛰어났다. 그의 문하에서 전일도(全一道)·박종원(朴宗元)·신용주(申用柱)와 같은 명창이 배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8(광무 2) - 1972()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학 > 소설/수필가
    강용흘(姜鏞訖)에 대하여

    1898년∼1972년. 재미교포 소설가. 함경남도 홍원 출생. 함흥 영생중학교(永生中學校)를 졸업하고, 3·1운동 후 중국·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대학에서 의학을, 하버드대학에서 영미문학을 전공하고, 이어 《대영백과사전 大英百科事典》의 편집위원을 지냈다. 대표작으로 일제의 한국 강점과 3·1운동을 배경으로 한 자전적인 첫 영문 장편소설 〈초당 草堂, The Grass Roof〉이 있다. 이 작품은 1931년 출간된 것으로, 1947년 김성칠(金星七)에 의하여 제1권이 국역되었으며 제2권은 번역되지 못하였다. 또한, 독일·프랑스·유고슬라비아·체코슬로바키아 등 10여개국에서 번역, 간행되었다. 그뒤 로마대학·뮌헨대학·파리대학 등에서 연구하였으며, 뉴욕대학 등에서 동양문화와 비교문학을 강의하면서, 소설 〈행복한 숲 The Happy Grove〉(1934)·〈동양인이 본 서양 East Goes West〉(1965)과 희곡 〈왕실에서의 살인〉(1935) 등을 발표하였다. 이밖에도 번역서로는 〈동양의 시 Oriental Poetry〉(1929), 한용운(韓龍雲)의 〈님의 침묵 Nim-e Ch'immuk〉(1971: 아내 프란시스 킬리와 공역)이 있고, 영어교재와 미국사관계(美國史關係)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역임하기도 한 그는 항상 한국과 한국인에게서 작품의 소재를 찾았다. 미국 작가 펄벅은 ‘동방의 가장 빛나는 예지’라고 격찬하였다.

  • 순서(舜瑞)
    호석(湖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2(철종 13) - 1932()
    본관
    진주(晋州)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강우(姜虞)에 대하여

    1862년(철종 13)∼1932년. 민족항일기의 대종교 지도자. 본관은 진주. 자는 순서(舜瑞), 호는 호석(湖石). 부여 출신. 진구(鎭求)·철구(銕求)·용구(鎔求)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모두 정교(正敎)와 대형호(大兄號)를 받았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1895년부터 9년간 함경북도 성진·길주·경원 등 세 곳의 감리(監理)를 역임하였다. 1909년 대종교가 조직되자 입교하였다. 1911년 지교(知敎), 1914년에는 상교(尙敎)로 승진되어 총본사의 총전리(總典理)로서 5년동안 교문의 최고행정책임자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1916년 정교(正敎)로 승진됨과 동시에 대형호를 받았으며, 1918년에는 교주를 제외하고는 최고위 직책인 사교(司敎)에 임명되었다. 1921년에 남도본사(南道本司)를 부설(復設)하고 도사교위리(都司敎委理)로서 3년간 시무하였다. 특히 신앙생활에 있어서, 1914년 교주인 나철(羅喆)을 대신하여 백두산 상봉에 올라 혈서로 제천하였고, 1920년에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서, 1924년에는 마니산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수도하는 등, 교문의 사표가 되었다. 교리연구에도 진력하여 《종리문답 倧理問答》·《천산도설 天山圖說》·《제천혈고사 祭天血告辭》·《일삼경 一三經》(天符經解說)·《애오가 愛吾歌》 등의 유저가 있다. 1950년 5월에 규범개정으로 도형호(道兄號)가 추증되었다.

  • 찬구(燦九)
    일우(日愚)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5(철종 6) - 1920()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우규(姜宇奎)에 대하여

    1855년(철종 6)∼1920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자는 찬구(燦九), 호는 일우(日愚). 평안남도 덕천 출신. 가난한 농가에서 네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나집에서 자라면서 얼마동안 서당에서 공부하였다.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여 한약방을 열었으며 또 기독교신자가 되었다. 1911년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여 연해주를 넘나들면서 뜻있는 동료들을 만나 조국의 독립을 의논하였다. 1915년부터는 요하현(饒河縣)으로 옮겨 산 뒤에도 블라디보스토크를 자주 내왕하면서 동지들과 독립운동을 꾀하는 한편, 농토를 개간하여 신흥촌(新興村)을 건설하고, 1917년에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세워 인재를 양성하며 독립정신 고취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 소식을 듣고 자신이 가입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노인단 길림성지부장(新韓村老人團吉林省支部長)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해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히자, 이에 분개한 나머지 노인단 대표로서 국내에 잠입하여 일본총독 등 요인암살을 결심하였다.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 동지와 거사계획을 세우고, 8월에 서울에 잠입하여 준비를 계속했다. 9월 2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부임차 남대문정거장에 도착하여 마차에 오를 때, 그를 격살하고자 품에 지니고 있던 수류탄을 던졌으나 실패하고, 신문기자·수행원·일본경찰 등 37명의 사상자를 내었다. 사상자 중에는 총독부 정무총감과 만철이사(滿鐵理事), 미국 뉴욕시장의 딸 등이 포함되었다. 이 거사에서 총독 사이토는 화를 입지 않았다. 거사 뒤 현장에서 유유히 빠져나와서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장익규(張翊奎)·임승화(林昇華) 등의 집을 숨어다니다가, 9월 17일 일제의 앞잡이 김태석(金泰錫)에게 붙잡혔다. 1920년 3월 경성지방법원 1회공판 당시 최자남·허형·오태영 등이 공범으로 피수되었고, 그는 11월 2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당하였다. 순국 직전 “단두대 위에도 봄바람은 있는데, 몸은 있어도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상이 없으리오.”라는 사세시(辭世詩)를 남겼다. 유해는 광복 뒤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감옥공동묘지로부터 서울 우이동으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치되었다. 1962년 3월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신지(信之)
    연계(蓮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우문(姜祐文)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신지(信之), 호는 연계(蓮溪)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학문(學問)을 널리 닦고 지조(志操)가 있어 세인의 모범이 되었다. 참판(參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을 본보기로 삼았으며, 그와 도의(道義)로 교분을 나누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81(선조 14)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외교
    강우성(康遇聖)에 대하여

    1581년(선조 14)∼미상. 조선 중기의 역관.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주교수(籌敎授)였던 유경(有慶)이다. 자세한 생애는 밝혀져 있지 않으나, 단편적인 기록이 남아 있다. 1592년 10월 진주성이 임진왜란으로 함락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왜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당시 12살이었던 그도 포로 속에 섞여 일본으로 끌려간듯하다. 주로 대판(大阪) 또는 경도(京都)부근에서 10년 동안의 억류생활을 보내었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전투(關ケ原戰鬪)가 일어났을 때에는 도쿠가와(德川家康)쪽에서 전투광경을 직접 목격하기도 하였으며, 1601년 6월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갔던 포로 중 남녀 250명이 송환되어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그도 고국에 돌아올 수 있었던듯하다. 그는 일본의 풍속을 잘 알고 있었으며 언어에도 능통하여, 1609년(광해군 1)에는 역과(譯科)의 왜학(倭學)에 합격하였으며, 전후 다섯 차례에 걸쳐 부산훈도(釜山訓導)에 임명되어 일본과의 통상외교임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1617년과 1624·1636년 역관으로서 연속 세 차례나 일본에 다녀왔는데, 특히 첫번째와 두번째에는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간 포로들을 데려오는 일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멀고 가까움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닌 사실이 당시의 기록에 남아 있다. 그뒤 품계가 가선대부에 이르렀으며, 저술로는 일본어학습서인 《첩해신어 捷解新語》 10권을 남겼다. 이 책의 원고가 모두 완성되기는 1625년 이후 1636년 이전으로 추정되지만, 책이 실제로 간행된 것은 1676년이었다. 1678년부터는 이 책이 사역원 왜학의 과시용(科試用)교과서로 쓰였다.

  • 하경(夏卿)
    계헌(溪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5(고종 12) - 1947()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우순(姜禹淳)에 대하여

    1875년(고종 12) 9월 4일∼1947년 1월 13일.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하경(夏卿)이고, 호는 계헌(溪軒)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며, 경상남도 산청군(山淸郡) 금서면(今西面) 화계(花溪)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강태우(姜泰佑)이고, 조부는 강문봉(姜文鳳)이며, 아버지는 강재주(姜在周)이다. 외조부는 하재운(河濟雲)이고, 처부는 배문창(裵文昌)이다. 가은(嘉隱) 우의현(禹宜顯)의 문인으로, 화림사(花林寺)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이후 산청의 수령(守令)으로 온 조유승(曺有承)의 아들 조병렬(曺秉烈)에게 《주역(周易)》을 가르쳤다. 묘는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 비선(飛仙) 고개에 있다. 그의 문집으로 《계헌선생문집(溪軒先生文集)》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기타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우창(姜遇昌)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경기도 시흥군 왕륜면(旺倫面)에서 출생하고 성장하였다. 부모를 잘 봉양하고 그 뜻을 거스르지 않아 효행에 감동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지극한 효행이 알려져 효자문을 하사받고, 호조좌랑을 추증받았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