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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3년(철종 4)∼미상.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승지 순흠(淳欽)의 손자이며, 경산현령(慶山縣令) 희영(羲永)의 아들이다. 1874년(고종 1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81년 홍문관교리·응교(應敎)가 되었다. 그뒤 광무 연간에 들어와서는 궁내부특진관으로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장례원소경이 되었으며, 1901년 봉상시제조를 지냈다.
1511년(중종 6)∼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광중(光仲). 대사간 경서(景敍)의 손자이며 공망(公望)의 아들이고, 섬(暹)의 형이다. 1534년(중종 29) 진사시에 합격하고,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46년 공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으로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어서 정언·헌납·지평·남원부사·동부승지 등을 지냈다. 1557년(명종 12) 승지로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고, 남원부사 재직시 깨끗하지 못한 일이 많았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상호군(上護軍)으로 체직되었다. 1558년 공조참의가 되었고, 그 다음해에는 관압사(管押使)로 다녀와서 이준경(李浚慶)과 더불어 중국내정의 혼란함에 대비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뒤 우승지·도승지·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예조참의 등을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1566년 수원부사가 되어 기민의 진휼에 공이 있어 향표리(鄕表裏) 1습(襲)을 하사받았다.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청렴하지 못하다는 평이 있었다.
1772년(영조 48)∼1834년(순조 3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경하(擎厦), 호는 송서(松西). 안동 출신.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색(𣽤),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빈(儐)의 딸이다. 1798년(정조 2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807년 정시문과에 급제, 정자(正字)·전적(典籍)·지평(持平)·이조정랑 등을 역임했다. 그가 관생(館生)으로 있을 때, 정조가 사생문답(師生問答)을 들이라 하여 그것을 보고는 강운의 성명을 어병(御屛)에 써놓고 잊지 않으려 하였다. 1821년 이후로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강회(講會)에 참석하여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 등을 강의하였으며, 여러 곳의 명승지들을 두루 유람하였다. 그는 《근사록집해》와 《주서차의 朱書箚疑》 수십권을 남겼고, 칠서(七書)에 대한 훈고와 의례에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으며, 후진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죽은 뒤 홍문관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송서집》 10권이 있다.
1526년(중종 21)∼1587년(선조 2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응택(應澤), 호는 이지당(二芝堂). 조부는 강문한(姜文翰)이고, 아버지는 강린(姜璘)이다.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의와 겸양에 힘썼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아들 강첨(姜籤)과 손자 강학년(姜鶴年)이 귀하게 되어 1605년(선조 38) 숭정대부(崇政大夫)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추증되고, 인조 때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효성으로 정려를 받았는데 지금은 훼철되고 없다. 묘는 회덕 잔골(대전 대덕구 석봉동)에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계청(季淸). 아버지는 목사 세징(世徵)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합격, 생원이 된 뒤 15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66년 전의현감(全義縣監)으로 재직중 벼슬을 잘한 수령으로 뽑혀 승품(陞品)되었으며, 1581년(선조 13) 공주목사를 지낼 때까지 여섯 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특히, 청주목사 재임 때 고을 사람들은 그를 ‘삼청선생(三淸先生)’이라 불렀는데 자가 계청이며, 관직이 청주목사이고 정치가 청렴하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재물에 달관하였으며, 목민관의 귀감이 되었다.
생몰년 미상. 동학(東學)의 접주(接主). 동학교조 최제우(崔濟愚)가 경상도 지방을 중심으로 포교를 시작한 이래, 그 교세가 점차 확장되어 1862년(철종 13)부터 접주제도를 두어 각 지역에 접소(接所)를 설치하는 등 동학교단을 조직할 때에 경주접소의 접주가 되어 포교에 종사하였다. 경주지역은 교조 최제우의 고향이자 동학의 발원지라고도 할 수 있는 곳으로, 이곳에는 당시 이내겸(李乃謙)·백사길(白士吉)·강원보 세 사람의 접주가 있었다. 이때 그의 접(接)에는 문벌이 높은 사람과 문장이 있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1863년 12월, 교조 최제우와 함께 선전관(宣傳官) 정운구(鄭運龜)에게 체포되어 이듬해 3월 다른 동학교도 12명과 함께 유배형에 처해졌다.
생몰년 미상. 조선 순종 때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1907년(순종 1) 나인영(羅寅永)·오기호(吳基鎬)와 함께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암살을 계획했다. 을사오적은 박제순(朴齊純)·이지용(李址鎔)·이근택(李根澤)·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이다. 3월에 권중현을 저격하려다 체포되었다. 공모자를 검거하려는 일제의 혹독한 고문에도 불구, 끝내 자백하지 않았다. 심문 도중에 스스로 혀를 물고 끊어 대답하지 않겠다는 강건한 의지를 보였다. 7월 나인영, 전덕준(全德俊) 등과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생몰년 미상. 대한제국시대의 의관. 1899년(광무 3) 7월 대한의학교에 입학하여 1902년 7월에 졸업하고, 1904년 11월에 의학교 교관으로 있으면서 유행병 예방 임시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뒤 1907년(융희 1) 육군 3등 군의관에 임명되었다.
1680년(숙종 6) 8월 25일∼1757년(영조 33) 1월 18일.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여약(汝約)이고, 호는 오여재(吾與齋)·태백산옹(太白山翁)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경상북도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법전리(法田里)에서 태어났다. 증조부는 강식(姜寔)이고, 조부는 강호(姜鄗)이며, 아버지는 통덕랑(通德郞) 강재필(姜在弼)이다. 외조부는 찰방(察訪) 이희철(李希哲)이고, 처부는 정섭(鄭涉)이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과 교유하였고,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풍모를 흠모하여 매번 대의(大義)를 논할 때면 송시열을 거론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 의 일파가 무신역변(戊申逆變)을 일으키자 승지(承旨) 나학천(羅學川)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묘는 경상북도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에 있다. 저서로 《오여재문집(吾與齋文集)》이 있다.
1862년∼1914년. 애국유생·민족운동가. 경상북도 칠곡 출신. 1895년 10월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는 격렬한 구국상소를 올렸다. 1904년 일본이 러일전쟁을 도발하고 무력으로 제1차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함으로써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감행하자, 1905년 1월 대한십삼도유약소(大韓十三道儒約所)를 설치하고 수좌(首座)가 되어 항일투쟁을 본격화하였다. 먼저 일본공사관에 내정간섭과 침략정책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공개장을 보내어 일본의 반성을 촉구하였고, 만일 계속 내정간섭을 자행할 경우에는 우리 민족도 결사적으로 그에 맞서 싸울 결의를 통고하였다. 1905년 3월에 일본헌병대가 전판서 김학진(金鶴鎭), 전참판 최익현(崔益鉉), 비서승 허위(許蔿) 등 3인을 일본의 침략에 대한 규탄의 격문을 돌렸다는 이유로 구속하자, 일본군사령부에 항의공개장을 보내어 일본의 불법을 힐문하고, 3인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하였다. 또한, 대한십삼도유약소의 대표로서 동지를 규합하고, 2천만 민족의 대표로 각국 공사관에 공한을 보내어 일본의 야만성을 지적한 뒤, 3인에 대한 공개담판을 개최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그러한 운동의 결과로 3인은 석방되었으나, 그는 일본헌병대에 잡혀 45일간 구속당하였다. 1905년 5월 석방된 뒤 계속하여 일본의 배신적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항의공개장을 여러 차례 일본공사관에 발송하였다. 또한, 11월 을사조약의 강제체결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십삼도유생연명소 十三道儒生聯名疏〉의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조약의 파기,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 일본공사의 횡포와 무례를 엄징할 것 등의 상소를 올렸다. 동시에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하여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투옥된 뒤 1906년 3월 20일 출옥하였다.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憤死)하였다. 경상북도 칠곡군 지천면 신동에 의사비(義士碑)가 있으며, 1980년에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20년(순조 20)∼1884년(고종 21). 조선 말기의 한문학자·개화사상가. 본관은 진양. 이름은 호(浩)·성호(性澔)·위(瑋)라고도 한다. 자는 중무(仲武)·요장(堯章)·위옥(韋玉), 호는 추금(秋琴)·자기(慈屺)·청추각(聽秋閣)·고환당(古懽堂). 1. 출신과 수학 가계는 조선 중엽부터 문관직과는 거리가 멀어져서 강위의 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무반신분으로 굳어져 있었다. 그리하여 신분상의 제약으로 문신이 될 수 없음을 알자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과 문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과거에 뜻을 두고 공부할 때 영의정을 지낸 정원용(鄭元容)의 집에 기숙하면서 그의 손자인 건조(健朝)와 함께 수학하였다. 이같은 인연으로 뒷날 이조판서를 역임한 정건조와는 일생의 지기로서 왕래하였다. 그러나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과거를 포기한 뒤 정건조의 극력 만류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단으로 몰려 은거하던 민노행(閔魯行)의 문하에서 4년간 수학하였다. 민노행이 사망하자 그의 유촉(遺囑)에 따라 제주도에 귀양가 있던 김정희(金正喜)를 찾아가 5년 남짓 사사하였다. 그런데 민노행과 김정희는 다 같이 청대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자기대로의 학문체계를 수립한 실학자들로 당대의 정주학(程朱學)과는 학문적 인식을 달리하였다. 따라서, 강위도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2. 문학활동 스승인 김정희가 북청 귀양에서 풀려난 뒤 김정희를 하직하고 방랑생활로 들어갔다. 이때 그의 방랑생활을 밑받침해 준 것은 시인으로서의 명성이었다. 원래, 그는 고심하며 시를 짓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시고를 다시 다듬고 고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러나 개성이 뚜렷하고 관습적 표현을 극력 배격한 참신한 시편들은 그를 당대 제일의 시인으로 꼽는 데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이같은 방외인적(方外人的)생활태도를 버리고 현실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기 시작한 것은 1862년 삼남지방을 시발로 하여 전국적으로 확산된 민란의 충격이었다. 이 민란의 와중에서 난군들에게 감금당하여 격문을 기초할 것을 강요받았으나 탈출하여 경사(京師)로 올라왔다. 이때 친구인 정건조의 강권에 의하여 지은 것이 3만어에 달하는 시무책인 〈의삼정구폐책 擬三政捄弊策〉인데, 그 내용이 너무 혁신적이라 정건조가 조정에 제출하는 데 난색을 표하자 미련없이 이를 불살라버리고 말았다. 3. 사상적 성향 한편, 실학자로부터 개화사상가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1873∼1874년에 걸친 두번의 중국 여행을 통해서였다. 원래 역관들과 친숙하여 해외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으나, 이 두 차례의 여행을 통하여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위기를 절감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박규수(朴珪壽)와 함께 적극적인 개항론자가 되어 1876년 한일간에 강화도조약이 체결될 때 전권대신 신헌(申櫶)을 막후에서 보좌하였다. 그뒤 1880년 조정에서 김홍집(金弘集)을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할 때 김옥균(金玉均)의 추천에 의하여 서기로 수행하였다. 이 여행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개화파 인사들이 조직한 흥아회(興亞會)에 참석하여 그들과 교유를 맺었고, 특히 중국대사관의 참찬으로 파견되어 있던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귀국 후에 《조선책략 朝鮮策略》으로 알려져 있는 황준헌의 연미거아책(聯美拒俄策)을 적극 옹호하였다. 다시 2년 뒤인 1882년 김옥균·서광범(徐光範) 등 젊은 개화파 관료들이 일본에 파견될 때 제자인 변수(邊燧)와 함께 이들을 수행하였다. 이때 이들은 유럽주와 아메리카까지 돌아보고자 하였으나, 임오군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서둘러 귀국하였으며, 강위는 나가사키(長崎)에서 일행과 헤어져 단신으로 세번째 중국여행을 떠나 상해일대의 개화파 인사들과 교유한 뒤 귀국하였다. 4. 업적 그의 문집은 그가 사망한 뒤 친구인 방치요(房致堯)가 평소 그와 교유하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모은 시문을 편집, 간행한 것이다. 그런데 갑신정변 이후의 국내정세 때문에 그와 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 인사들 사이에서 오고간 시문은 모두 삭제되고 말았다. 또한, 고증학자로서 그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경위합벽 經緯合璧》·《손무자주 孫武子註》와 같은 저술은 세론이 두려워서 문집간행 때 제외되었다가 산일되고 말았다. 현재, 그의 문집과 해외여행 때의 일기, 〈담초 談草〉·《동문자모분해 東文字母分解》 등은 아세아문화사에서 《강위전집》으로 영인, 간행되었다.
1569년(선조 2)∼1637년(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백상(伯尙), 호는 서호(西湖). 1603년 성균관에 입학했다가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순안현령(順安縣令)을 지냈다. 광해군 때 여러번 내외 관직에 보직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함을 보고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을 계기로 벼슬길에 나아가 익찬(翊贊)·사어(司禦)를 거쳐 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사어(司禦)로서 뒤늦게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하였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효종 8) 좌승지에 추증되고, 뒤에 고향인 강화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다. 1811년(순조 11)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혜국지 惠局志》가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1597년(선조 30)∼1668년(현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공헌(公獻), 호는 상곡(商谷). 제천 출신. 아버지는 천민(天民)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가 되었다. 이때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는 등 광해군의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과거에 뜻을 버리고 10년 동안 고향에 칩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뒤 과거에 응시하여 이듬해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예빈시직장으로 임금을 모시고 강도(江都)로 들어가 화의를 반대하고 항전할 것을 주장하였다. 즉, 도망자들을 돌려보내 달라는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고 화의를 할 것을 주장하는 이귀(李貴) 등의 의견을 배척할 것을 상소하였다. 1639년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병조좌랑이 되었고, 1642년에 지평이 되었으며, 1651년(효종 2)에 의주부윤(義州府尹)이 되었다. 이어 조정에서 문무를 겸한 장재(將才)로 천거하여 1653년 함경남도병사에 임명되었다. 성벽수축과 병사의 훈련을 잘하여 왕이 좋은 말을 내려 그 업적을 극찬하고, 이듬해 북병마사를 제수하였다. 1656년 승지를 거쳐 황해감사·경기수군절도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충청감사를 역임하였다. 1659년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가서 왕의 북벌의 뜻을 받들어 적의 허실을 살피고 왔다. 그러나 이해 왕이 죽자 황해감사로서 북벌의 뜻을 이루지 못함을 크게 통곡하였다. 1661년(현종 2) 수원부사로서 가자(加資)되었으며, 1663년 우부승지·좌부승지·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강릉부사에 이어 호조참의가 되었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상곡집》이 있다. 시호는 충선(忠宣)이다.
1520년(중종 15)∼1549년(명종 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원숙(元叔), 호는 주천(舟川). 아버지는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 의(顗)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헌납 사걸(士傑)의 딸이다. 1537년(중종 32) 사마시에 합격,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좨주(祭酒) 송인수(宋麟壽)의 아낌을 받았다. 1545년 인종이 즉위하자 그는 성균관유생들과 함께 상소하여 조광조(趙光祖)의 신원(伸寃)·복작(復爵)을 호소, 관철시켰다. 인종이 죽은 뒤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내려가 산수를 즐기면서 세월을 보냈다. 1549년 이홍남(李洪男)형제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살(杖殺)되었다. 저서로는 《주천집》 1권이 있다.
1606년(선조 39)∼1666년(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수(汝垂), 호는 옥계(玉溪). 아버지는 현령 진소(晋昭), 어머니는 안씨(安氏)이다. 1649년(인조 2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소속되었다. 그뒤 승정원주서·전적·병조좌랑을 역임하고, 기장현령(機張縣令)의 외직으로 나갔다. 다시 경직으로 돌아와 1655년(효종 6)에 정언에 이르렀다. 시강원사서를 거쳐 이듬해 경기도사가 되었다가 청주목사로 전직되어, 포곡(逋穀) 2만섬을 서민의 책임이 아니라 하고서 부호들에게서 거두어들이는 용단을 보여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 1659년(효종 10) 지평을 거쳐 안후열(安後說)·김수흥(金壽興)·남구만(南九萬) 등과 함께 암행어사로 선발되어 전라도에 파견되었다. 그해 지평이 되었으나 패소(牌召)에 나가지 않았다 하여 출관(黜官)을 요구하는 김익렴(金益廉)의 탄핵을 받았으며, 즉위한 지 얼마되지 않은 현종에게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아뢰는 소를 올렸다. 1659년(현종 즉위) 정주목사로 나가 강계부사·의주부윤을 등을 역임하였다. 정주목사 시절에는 부호들이 차지한 전답을 서민들에게 돌려주는 한편, 청나라 사신들의 무리한 요구를 단호히 거절하여 기개를 보였다. 강계부사가 되어서는 백성들의 생활을 위하여 당시 국금(國禁)이었던 채삼(採蔘)을 허락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평안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으로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러한 청조(淸操)가 인정되어 숙종조의 청백리로 선정되었다.
1899년∼미상. 건축가. 충청남도 논산 출생. 미국감리교계통의 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를 졸업한 뒤 미국인 선교사였던 교장 윌리엄스(Williams, E. C.)와 일본 대판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 겸 건축가 보리스(Vories, W. M.)와의 인연으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보리스가 활동하던 주무대는 대판이었으므로 그는 보리스의 설계사무실에 나가며, 1923년 가까운 곳에 있는 간사이공학전수학교(關西工學專修學校: 지금의 大阪工業大學)에 입학, 건축수업을 하였다. 이 무렵에는 그와 비슷한 연배의 한국인 건축가 임덕수(林德洙)도 사무소에서 함께 근무하였다. 그는 학교·교회·YMCA·병원 등 기독교(감리교)의 선교목적을 위한 건축물을 위주로 한 일본과 한국에 설계되고 있는 보리스의 프로젝트에 적극 참여하다가, 1938년 보리스가 서울에 경성주재사무소(京城駐在事務所)를 개소하게 되자 주재원으로 파견되었다. 귀국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 건물군, 회현동 감리교회(남산교회당) 등을 설계하였으며, 그뒤 계속 ‘보리스건축’의 실현에 진력했다. 대표작으로는 태화기독교사회관(1939)을 들 수 있는데, 이 건물은 3·1운동의 장소로서 한·양절충식의 표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광복 후 대한기독교서회빌딩에 설계사무소를 차리고 그곳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초창기 회원들이 모임을 가졌다. 1966년 이후의 그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 것이 없다.
1701년(숙종 27)∼1782년(정조 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덕이(德以). 아버지는 이일(履一)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의 병치료를 위하여 손가락을 잘라 그 피를 먹이기도 하였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747년(영조 2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별검이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758년 예조좌랑, 이듬해 지평·장령 등에 제수되었으나 어머니의 노환을 이유로 모두 사퇴하였고, 당시 영남 지방에서 곡식매매에 관한 폐단이 심해지자 이에 대한 시정을 상소하였다. 1762년 은산현감과 세손시강원 필선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하였다. 뒤에 어머니의 상을 벗은 뒤에도 수찬·교리·집의·강계부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정조가 능력을 높이 사서 1779년 승지의 직함을 내리고 이듬해에는 홍충도(洪忠道: 충청도)관찰사에 임명하였지만, 나이가 많아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고 사퇴하였다. 이에 정조는 허락하지 않았으나 영의정 김상철(金尙喆)의 건의에 따라 교체하고 말았다. 원래 과거를 보고 입사(入仕)할 때부터는 정의공도(正義公道)에 살고자 하였으며, 후에 자신의 성품이 관직에 맞지 않는다 하여 퇴계(退溪)를 흠모, 자신의 생활은 ‘퇴(退)’자의 의미를 지키는 것이라고 하며 모든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였다.
생몰년 미상. 1286년(충렬왕 12) 영월에서 일어났던 폭동의 주모자. 충청도 출신. 충청도역참통제관(忠淸道驛站統制官) 이영주(李英柱)와 영월현령 이순(李詢)이 토색질이 심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심하자, 이 틈을 타 거짓 ‘신황제(新皇帝)의 사자’라고 칭하고, 역리 등의 무리를 모아 폭동을 일으켰다. 역마를 타고 횡행하며 이순 등을 살해하고 이영주도 죽이려 하였다. 왕은 이영주의 급보를 받고 동계초군사(東界抄軍使) 윤해(尹諧)를 보냈으나, 그를 체포하지 못하였으므로 윤해는 인책, 파면되었다. 뒤에 이영주에게 붙잡혀 폭동이 진압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곡산(谷山). 자는 대경(大卿), 호는 용담(龍潭). 아버지는 상산백(象山伯) 강서(康庶)이다. 강서부터 신천강씨(信川康氏)에서 곡산강씨(谷山康氏)로 분적되었다. 강윤성은 충혜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뒤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부시랑(吏部侍郞), 판삼사사(判三司事) 등을 지내고, 1343년(충혜왕 후 4)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임명되었다. 처는 진주강씨(晋州姜氏) 강은(姜誾)의 딸이다.태조 이성계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아버지이다. 태조의 국구(國舅)로서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에 봉해지고 경안백(慶安伯)에 추봉되었다. 슬하에 4남 2녀가 있는데, 아들은 강순룡(康舜龍), 강득룡, 강유권, 강계권이고, 딸은 신덕왕후와 영산신씨(靈山辛氏) 신귀(辛貴)의 처가 있다. 동생은 찬성사(贊成事) 강윤충(康允忠)과 판도사판서(版圖司判書) 강윤휘(康允暉)가 있다. 강윤충은 충숙왕 때 세를 떨쳤고, 충혜왕 때에는 조적(曺頔)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일등공신에 책봉되었다. 강윤휘는 충정왕 때 판도판서를 역임하였으며, 예종 때 남이(南怡)의 옥사에서 죽은 강순(康純)이 그의 증손자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시대의 장군. 원래 신안공(新安公) 전(佺)의 가노(家奴)로 처음에 환자(宦者)가 되었는데, 몽고어 해독을 잘하였다. 교활하고 아첨을 잘하며, 원종의 총애를 받았다. 낭장에 올라 여러 번 원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공이 있어 장군으로 승진되었으며, 1268년(원종 9) 김준(金俊)의 무리를 죽일 때 평소 가까웠던 임연(林衍)을 도운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대장군에 올랐다. 1269년 임연이 왕의 폐립(廢立)을 꾀하여 안경공(安慶公) 창(淐)을 세우고 원종을 용암궁(龍巖宮)에 유폐시킬 때, 이미 왕을 배반했으나 원종이 곧 복위하여 원나라에 가게 되자, 임연의 심복이 되어 스스로 왕을 호종, 돌아와 상장군에 올랐다. 세자 심(諶)이 고관의 자제를 이끌고 원나라에 갈 때 왕의 폐립사건 때문에 뽑히지 않았으나 자의로 원나라에 가서 개체(開剃: 몽고머리)하고, 귀국한 뒤에는 스스로 원나라의 사신처럼 행세하며, 왕을 보고도 절을 하지 않았다. 왕이 노하였으나 제어할 수가 없었고, 유사(有司)도 감히 힐난하지 못하였다. 원나라에 있을 때 홍다구(洪茶丘)에게 아부하여, 고려에는 많은 군량의 저축이 있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원나라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량을 독촉하게 하였다. 1275년(충렬왕 1)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랐는데 그 신분이 천예출신이라 하여 감찰사(監察司)의 탄핵으로 면직되었으나, 곧 응양군상장군(鷹揚軍上將軍)이 되었고, 이어 밀직부사(密直副司)에 올랐다. 1279년 대장군 김자정(金子廷)과 함께 사패(賜牌)를 사칭하여 많은 민전을 빼앗다가 발각되어 신흥창(新興倉)에 몰수당하였으며, 1283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