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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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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자약(子約)
    계려(溪黎)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7(융희 1) - 1963()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익근(姜益根)에 대하여

    1907년(융희 1) 11월 8일∼1963년 2월 3일.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자약(子約)이고, 호는 계려(溪黎)이며, 일명 강문식(姜文植)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증조부는 강우상(姜宇尙)이고, 조부는 강병규(姜昞奎)이며, 아버지는 강성달(姜聖闥)이다. 외조부는 조균익(曺均翼)이고, 처부는 서재익(徐在益)이다. 박사촌(朴沙村)·회봉(晦峰) 하겸진(河謙鎭)·중재(重齋) 김황(金榥)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아내와 큰아들의 병간호로 가산을 기울였다. 이후 넓은 땅을 유람하며 오랜 회포를 풀라는 친구의 편지를 받고 몇 달간 만주(滿洲)를 유람한 뒤 돌아왔다. 집안의 초상이 연이어 났지만 조금도 원망하는 낯빛이 없었다. 저서로 《계려선생문집(溪黎先生文集)》이 있다.

  • 군우(君遇)
    당암(戇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8(선조 1) - 1647(인조 25)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익문(姜翼文)에 대하여

    1568년(선조 1)∼1647년(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군우(君遇), 호는 당암(戇菴). 합천 출신. 판관 세탁(世倬)의 아들. 1589년에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이듬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의 설서(說書)를 겸하였다. 1609년(광해군 1)에 예조좌랑에 이어 정언·헌납·지평을 역임, 1612년에 문학(文學), 이듬해 장령·사간에 이어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전직했다가, 다시 사간이 되었을 때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그때 정온(鄭蘊)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잘못임을 상소하였다가 대역죄로 몰려 사형이 논의되자, 그는 병을 핑계하여 사직하였다. 1618년 장남 대수(大遂)가 사간원에 있으면서 쟁론하다 유배되자 충원현감으로 좌천되었다. 뒤에 광해군의 난정(亂政)을 항소하다가 그도 역시 유배당하였는데, 인조반정 뒤 1631년 아들 대수의 상소로 풀려나 전적이 되었다. 이듬해 다시 제용감정에 임명되었으나, 왕에게 사은하고 곧 전리(田里)로 돌아가 한가로이 만년을 보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764(영조 40)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익주(姜翊周)에 대하여

    미상∼1764년(영조 40) 2월 4일. 조선 후기 문신. 제주도 안덕(安德)에서 태어났다. 백도(白徒: 과거(科擧)에 응하지 않고 벼슬아치가 됨)로서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를 지냈으며 기상이 굳건하여 강별장(姜別將)으로 불리었다. 그러나 1681년(숙종 7) 사헌부(司憲府)에서는 그가 평소 흉도와 교제하였으며 역적 윤휴(尹鑴)가 채벌(採伐)을 금지한 소나무를 가질 수 있도록 앞장서서 도와주었다 하여 관직을 삭탈할 것을 청하였다. 1763년(영조 39) 조영집(趙榮集)·조영철(趙榮喆)·심양복(沈陽復)의 역모에 연루되어 국문(鞠問)을 받고 두 차례의 엄중한 형신(을 당한 후, 황해도 종성부(鍾城府)로 종신 유배되었다. 이후 끝까지 불복하다가 1764년(영조 40) 2월 4일에 장형(杖刑)을 받고 죽었다. 딸은 관기(官妓) 월중매(月中梅)이며 같은 역모에 연루되어 1763년(영조 39) 흑산도(黑山島)로 유배되어 노비가 되었다. 아들 강덕윤(姜德潤) 또한 1764년(영조 40) 3월에 국문(鞫問)을 당하였으며 적당(賊黨)과 친밀하게 지낸 것이 증명되었다 하여 사형이 내려졌다.

  • 극수(克修)
    남음(濫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8(선조 1)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인(姜繗){2}에 대하여

    1568년(선조 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극수(克修), 호는 남음(濫蔭). 함양 출신. 아버지는 위로(渭老). 1603년(선조 36)에 함양의 유생·생원 등과 함께 정인홍(鄭仁弘)의 편에 서서 양홍주(梁弘澍)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1608년 어모장군행충무위사과(禦侮將軍行忠武衛司果)가 되었으며, 그뒤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찰방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5년에 정언·사서·지평·헌납 등을 역임하였고, 1617년에 장령, 1618년에 교리·부수찬·함경도어사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이후 정인홍의 일당으로 지목되어 추방되었다.

  • 인경(仁卿)
    시암(是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5(명종 10) - 1634(인조 1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인(姜絪){1}에 대하여

    1555년(명종 10)∼1634년(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인경(仁卿), 호는 시암(是庵). 아버지는 우의정 사상(士尙)이다. 천거되어 왕자사부에 제수되었고, 여러 고을의 수령을 지낸 뒤 1594년(선조 27)에 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영유현령(永柔縣令)이 되고 선정하였다 하여 승직되어, 1602년 선천군수(宣川郡守)에 올랐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왕을 호종한 공으로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3등에 녹훈되고, 진창군(晋昌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홍주목사가 되고 1610년(광해군 2) 상주목사를 역임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 때는 회답사(回答使)로 적진에 내왕하여 적정을 비밀리에 탐색하였다. 1632년 한성부좌윤, 1634년 한성부우윤을 역임하였다. 일찍이 선천군수로 있을 때 30여리의 관개수로를 팠는데, 백성들이 이것을 ‘강공제(姜公堤)’라 불렀다.

  • 성숙(成叔)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1(영조 27) - 1816(순조 16)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인득(姜仁得)에 대하여

    1751년(영조 27)∼1816년(순조 16).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성숙(成叔)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 가선대부(贈嘉善大夫) 한성부우윤 겸 도충부부총관(漢城府右尹兼都摠部副摠管) 강수복(姜壽福) 아들로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 겸 오위장(同知中樞府事兼五衛將)에서 가의대부(嘉義大夫) 행 가리포진관 고금도수군첨절제사(行加里浦鎭管古今島水軍僉節制使)에 올랐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인문(姜引文)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고려 때의 문인이며 관리이다. 아버지는 박사(博士) 강계용(姜啓庸)으로, 부자가 모두 유학(儒學)으로 명성이 있었다. 강계용이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日本)에 통신사로 갈 때 인문도 함께 갔었다.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 길을 잘 안다고 해서 다시 서장관으로 천거되었는데, 바닷길이 험하고 전쟁을 치르던 때라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고 전한다. 본국에 돌아와서 다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손에게도 벼슬에 나가지 말 것을 경계했다. 이 때문에 아들 감찰어사 강사첨(姜師瞻)과 손자 문하시중 강창귀(姜昌貴)가 아전으로서 벼슬길에 나아갔고, 증손자 강성민(姜性敏)은 학문을 좋아하여 다시 선비로서 과거에 올라 벼슬이 재상(宰相)에 이르렀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궁인
    강인부(姜仁富)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말과 조선초의 환관. 공양왕 때 술이 취해 간언하는 이염(李恬)을 대호군 김정경(金鼎卿)과 함께 붙잡아 물리쳤다. 1392년(공양왕 4) 6월 조선이 개국할 때 이성계의 반대파로 몰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탄핵을 받아 전판삼사사(前判三司事) 우현보(禹玄寶), 종실 남평군(南平君) 화(和) 등 20여명과 함께 유배되었다. 뒤에 기용되어 1398년(태조 7)에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가 되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넷째아들인 방간(芳幹)의 처의 아버지라 하여 1400년(정종 2) 제2차왕자의 난 때 유배당하였다.

  • 응지(應趾)
    월당(月塘)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인상(姜麟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장. 자는 응지(應趾), 호는 월당(月塘).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태자태사(太子太師)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부친은 찰방(察訪) 강근(姜瑾)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지절(志節)이 강개하였다. 1576년(선조 9) 병자(丙子) 진사(進士)에 합격한 뒤 효행(孝行)으로 천거되어 참봉(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에 아들 판관(判官) 강희원(姜希元)·통덕랑(通德郞) 강희복(姜希復)과 장사를 모집하여 종질(從姪)이 있는 절단성아(節丹城衙)로 가서 방비책을 세웠는데, 마침 그곳에 온 홍의장군(紅衣將軍) 곽재우(郭再祐)가 듣고는 감탄하였다. 그는 사천(泗川)·곤양(昆陽)·하동(河東)·산음(山陰)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부다현(富多縣: 현재 함안과 진주의 경계지역)에 매복해 있다가 많은 왜적을 참획하였다. 1593년(선조 26)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그를 종사관(從事官)에 임명하니 휘하 병력을 두 아들에게 주어 조카 강희보(姜希輔)·강희열(姜希悅)과 진주성을 사수하게 하였다. 1597년(선조 30) 다시 정유재란이 터지자 의려(義旅)를 모집하여 수성령[宿星嶺]에서 왜적을 막다가, 남원성(南原城)으로 들어가 정기원(鄭期遠)·이복남(李福男)·임현(任鉉) 등과 분전하였으나 순절(殉節)하였다.


  • 백서(白棲)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9(고종 6) - 193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인수(姜寅秀){1}에 대하여

    1869년(고종 6)∼1932년. 독립운동가. 호는 백서(白棲). 경상북도 안동 출신. 한학자 영숙(永淑)의 아들이다. 1894년 강원도관찰부의 주사로 등용되어서 근무하다가 1899년에 사직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상경하여 동지들을 규합, 동우회(同友會)를 결성하여 항쟁을 전개하였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 이후 노령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좌진(金佐鎭)과 항상 행동을 같이하면서 청산리전투에도 비전투원으로 참전하여 물자보급 및 교포의 선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신민부(新民府)가 결성되자 김좌진의 고문 겸 참모로 활동하였으며, 신민부의 검사원(檢查院)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그로부터 심화병(心火病)에 걸려 고생하다가 1932년에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강역고 疆域考》·《한말년통사 韓末年痛史》·《자서전》 등이 있다. 1982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김팔수(金八壽)/김양검(金楊儉)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0(광무 4) - 199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인수(姜人壽){2}에 대하여

    1900년∼1992년. 독립운동가. 이명은 팔수(八壽)·양검(楊儉). 경상남도 밀양 출신. 김원봉(金元鳳)이 조직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10월 중국군 간부 양성학교인 황푸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 제4기 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뒤 중국군 장교로서 교관(敎官)·배련영장(排連營長)·부단장주임(副團長主任) 등을 역임하면서 대일전(對日戰)에 참여하였다. 1940년 7월부터는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과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 특파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광복군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의 명령으로 광복군의 각 지대에서 일본군 점령지역에 군사특파단을 파견하도록 독려하였다. 동시에 일본군 내에 한국국적을 가진 사병을 접수하여 1945년 10월 중순부터 10월말까지 잠편지대(暫編支隊)를 전방에서 각각 조직하 였으며, 이때 광둥(廣東) 지역 잠편지대에 참모로 배속되어 지대장 최덕신(崔德新) 등과 함께 탈출하였다. 1951년 중국군 육군소장으로 복무하다가 1965년 퇴역한 뒤 대만(臺灣)에서 거주하였다. 1980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성중(聖仲)

    시호

    이칭
    강중식(姜重植)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예능 > 기악가
    강인식(姜寅植)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철종·고종 때에 활약한 거문고의 명인. 본관은 진주. 일명 중식(重植), 자는 성중(聖仲). 순종 때 가전악(假典樂)이었던 강순태(姜淳泰)의 큰아버지이다. 1860년(철종 11)에 가전악, 1868년 진찬(進饌) 때 대오전악(隊伍典樂), 1873년 진작(進爵) 때 집사악사(執事樂師)를 지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인유(姜仁裕)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공민왕 때 찬성사(贊成事)로 있으면서 여러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372년(공민왕 21) 8월에도 남경(南京)에 가서 채단(綵緞)을 보내준 것에 대해 사례하고, 다음해 7월에 돌아왔다. 1377년(우왕 3) 8월에는 계품사(啓禀使)로서 북원(北元)에 파견되어 “원나라의 승상 나하추(納哈出) 등이 정료위(定遼衛)를 치려고 고려의 내원(來援)을 기다린다.”고 알려왔으나, 고려에서는 계절이 적절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거절하였다. 1385년에는 이미 정혼한 딸을 우왕에게 납비하여서 안비(安妃)로 봉하게 하였다. 1388년 우왕이 폐위되자 유배되었으나, 곧 방면되었다. 1391년(공양왕 3) 낭사 허응(許應) 등으로부터 기강을 문란하게 하였다는 이유로 풍주(豊州)로 귀양갔으나, 조선 건국 이듬해인 1393년(태조 2) 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63(철종 14) - 1899(광무 3)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인호(康仁鎬)에 대하여

    1863년(철종 14)∼1899년(고종 36). 조선 말기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조부는 강이진(姜履鎭)이고, 부친은 대정현감(大靜縣監) 강재오(康在五)이다. 1888년(고종 25) 7월∼1889년(고종 26) 4월까지 제주판관(濟州判官)을 역임하고, 1889년(고종 27) 10월∼1890년 5월까지 재임용되었다. 1896년∼1899년까지 정의군수(旌義郡守)를 지냈다. 정의군수(旌義郡守)로 재임 중에 정의군의 정당(政堂)인 일관헌(日觀軒)과 의두정(依斗亭)을 중수하였다.

  • 성심(聖心)
    일심당(一心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93(정조 17)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일선(姜一善)에 대하여

    1793년(정조 17)∼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심(聖心), 호는 일심당(一心堂). 아버지는 돈녕부도정 강달주(姜達周)이다. 천성이 온후하고 효성이 지극하였는데, 아버지가 병으로 눕게 되자 수개월 동안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고, 돌아가신 후에는 한결같이 고례(古禮)에 맞게 장사를 지냈다. 상중에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도 부친의 시신을 모신 곳에는 빗물이 전혀 튀지 않아 조문객들이 ‘효성이 지극하여 하늘도 감동한 징조’라고 칭송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를 하였는데, 굴건제복을 벗은 적이 없었고, 눈·비에도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였다. 일찍이 글공부를 멀리한 일을 한하여 서당을 열고 자손들에게 학문에 힘쓰도록 독려하고, 밖으로는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치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휼하는 등 선행을 쌓았다. 1844년(헌종 10)에 효자정문을 하사 받고, 다음 해에는 종3품 통훈대부 예식원좌장례 행 효력부위 부사맹을 증직 받았다. 1904년(광무 8)에 건립한 정려문(旌閭門)이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마전리에 남아 있다. 증직한 시기와 관련해서는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으니, 《조선왕조실록》에는 1905년(광무 9) 10월 9일자 기사에, ‘고(故) 학관(學官) 강일선에게 정3품 통훈대부 예식원좌장례를 증직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효행이 특별하여 증직한 것이다.

  • 사옥(士玉)
    증산(甑山)
    시호

    이칭
    강증산(姜甑山)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1(고종 8) - 1909(융희 3)
    본관
    진주(晋州)
    분류
    종교 > 증산교인
    강일순(姜一淳)에 대하여

    1871년∼1909년. 증산교의 창시자. 본관은 진주. 자는 사옥(士玉), 호는 증산(甑山). 일반적으로 증산, 또는 강증산으로 불린다. 전라북도 고부 출신. 아버지는 흥주(興周)이다. 증산교의 경전인 《대순전경 大巡典經》에 의하면, 그의 어머니인 권씨의 태몽에 갑자기 하늘이 남북으로 갈라지며 큰 불덩어리가 내려와서 몸을 덮고 하늘과 땅이 밝아짐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잉태하게 되어 13개월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출산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두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산모를 간호하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는데, 이상한 향기가 온 집안에 가득하고 밝은 기운이 집을 둘러 하늘로 뻗쳐올라 7일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가난한 농가의 2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그의 선조들이 이조참의와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낸 것으로 보아 그는 몰락한 양반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학문적인 소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인 빈곤 때문에 일찍 학업을 중단하고 14, 15세 때에는 다른 지방으로 가서 남의집살이와 나무꾼생활도 하였으며, 21세에 결혼한 후 처가에서 훈장생활도 하였다. 1894년에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사람들에게 “이 혁명은 실패할 것이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고 한다. 동학혁명 후에 나타난 사회적 혼란과 참상을 보고서 인간과 세상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를 세울 결심을 하게 된 그는, 이러한 혼란에서 벗어나는 길은 기성종교나 인간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으며 오직 하늘과 땅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유·불·선 등의 기성종교의 교리와 음양·풍수·복서·의술 등을 연구하는 한편, 신명(神明)을 부리는 도술과 과거·미래를 알 수 있는 공부를 하고 1897년부터 3년간 세상을 보다 널리 알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이 기간에 충청도 비인(庇仁)사람인 김경흔(金京訢)으로부터 증산교의 중요한 주문이 된 태을주(太乙呪)를 얻었으며, 연산(連山)에서는 당시 《정역 正易》을 저술한 김일부(金一夫)를 만나 정역에 관한 지식을 얻게 되었다. 1901년 모악산에 있는 대원사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던 중, 그해 7월 하늘과 땅의 원리를 깨닫게 되고 인간의 욕심과 음란·성냄·어리석음의 네가지를 극복함으로써 성도(成道)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원사에서 성도한 그는 집으로 돌아와 그해 겨울 증산교 교리의 핵심인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였는데, 1902년부터 1909년까지 7년간 모악산 근방을 중심으로 하여 포교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이외에도 전주·태인·정읍·고부·부안·순창·함열 등 전라북도 각 지역에서도 활동하였다. 그는 자신이 세운 종교를 “만고(萬古)에 없는 무극대도(無極大道)”라고만 하였을 뿐, 증산교라는 명칭은 훗날 그의 호를 따서 일컬어진 것이다. 1907년 추종자 20여명과 함께 고부경무청에 의병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추종자들은 15일 만에, 강일순은 40여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1909년 갑자기 자신의 죽음을 미리 예고하여 사방에 흩어져 있던 추종자들을 모이게 한 뒤 세상에 있는 모든 병을 대속하고 죽었다고 한다. 그가 죽은 뒤, 추종자 몇 사람이 남아 장례식을 치렀는데 그뒤 강일순의 교단은 다시 부흥하게 되어 민족항일기에는 한때 6백만 신도를 호칭하던 보천교 등으로 계승되었으며, 현재에도 수십개의 교파로 이어져내려오고 있다. 그는 후천세계에 관해서 예언한 《현무경 玄武經》을 남겼으며, 증산교에서는 교단의 창시자일 뿐만 아니라 신앙대상으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 시호

    이칭
    강일용(姜日用)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일용(康日用)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일명 강일용(姜日用). 고려 예종(睿宗) 때의 문신이다. 1122년(예종 17)에 임금이 사루(紗樓)에 나아가 모란(牡丹)을 완상할 때, 수행한 문신 56명에게 촛불을 밝히고 각촉부시(刻燭賦詩)의 규정에 따라 시를 짓게 하였다. 이 때에 강일용은 촛불이 다 탔을 무렵에야 “백발의 취한 늙은이는 궁전 뒤에서 구경하고, 눈 밝은 늙은 유신은 난간 가에 기대 있구나.〔頭白醉翁看殿後 眼明儒老倚欄邊〕”라는 일련(一聯)만 겨우 지어 이 초고(草藁)를 소매 속에 넣고 궁궐 안의 개울에 엎드려 있었다. 임금이 그의 시재(詩才)를 보고 감탄하며 상을 내렸다고 한다. 《역옹패설(櫟翁稗說)》에 따르면, 국자좨주(國子祭酒) 임유정(林惟正)과 함께 옛사람의 시구(詩句)를 모아서 시를 짓는 백가의(百家衣) 시체(詩體)에 능하였다고 한다. 임유정의 시는 최우(崔瑀)가 유편(遺篇)을 찾아 《백가의집(百家衣集)》을 간행한 데 비해 강일용의 시는 남아 있는 게 없다. 다만, 이 일화를 가지고 쓴 시가 한두 수 보이는데, 권제(權踶)의 ‘강일용(姜日用)이 모란을 부(賦)한 고사를 써서 한원에게 부침[用姜日用賦牧丹故事寄呈翰苑]’라는 시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 있다. 간혹 성씨를 혼동하여 강(康)을 강(姜)으로 기록한 자료도 있다.

  • 국균(國鈞)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30(세종 12) - 1486(성종 17)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자평(姜子平)에 대하여

    1430년(세종 12)∼1486년(성종 1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국균(國鈞). 증판서 휘(徽)의 아들이다. 1453년(단종 1) 소과(小科)에 급제하고, 외할아버지의 문음(門蔭)으로 돈령부부승(敦寧府副丞)이 되었다. 1455년(세조 1)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1457년 돈령부승으로서 별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우필선(世子侍講院右弼善)에 초천(超遷)되었다. 이어 장령·통례문부지사(通禮門副知事)·종친부전첨(宗親府典籤)·성균관사성·종부시정 등을 역임하였다. 1466년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우부승지를 거쳐 이듬해 좌부승지가 되었다가 전명(傳命)을 소홀히 한 사건으로 파직, 1469년(예종 1) 대사간에 복직되었다. 1470년(성종 1) 권맹희(權孟禧)가 구성군(龜城君) 준(浚)이 국왕이 될만하다고 한 말을 들었으나, 이를 고변하지 않은 일로 의금부의 국문을 받고 진해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고 그 이듬해 고신(告身)을 환급받았다. 1473년 순장(巡將)으로 복직 성주목사로 파견, 1475년에 첨지중추부사 겸 오위장으로 입조, 다시 진주목사로 나갔다. 이어 형조참의·대사간·우부승지·좌부승지를 거쳐 1483년 우승지에 올랐으나, 또다시 전명을 소홀히 한 일로 충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으며, 이듬해 형조참의에 서용되고, 1485년 충청도관찰사, 곧 전라도관찰사로 옮겼으며, 이듬해 공조참의에 제수되어 입조하다가 죽었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1482년 연산군의 생모 윤비 폐출 때에 승지로서 인수대비(仁壽大妃)의 윤비폐출 교지를 윤비에게 보였다고 추죄(追罪)되어 직첩을 몰수당하였다. 중종의 즉위와 함께 직첩을 환급받았고, 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9(융희 3) - 1962()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성악가
    강장원(姜章沅)에 대하여

    1909년∼1962년. 판소리의 명창. 전라남도 함평 출생. 여류명창 임유앵(林柳鶯)의 남편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하다가 16세 때 김창환(金昌煥)밑에서 판소리공부를 시작하였다. 재주도 평범하였고 음성도 곱지 못하였으며 성량(聲量)도 부족하였으나, 김창환에게 2년간 배운 뒤 깊은 산의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5년여의 수련으로 좋은 목청을 얻어 일가를 이루었다. 1930년에 서울에 올라와 당대의 명창 이동백(李東伯)에게 다시 판소리수업을 시작하였다. 1933년의 명창대회에 참가하여 첫무대에서 〈적벽가 赤壁歌〉 중 ‘삼고초려(三顧草廬)’를 불러 이름을 떨쳤다. 그는 판소리의 법통을 고수한 사람이었으나, 창극공연에도 참가하여 전국에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광복 이후에는 판소리에만 전념했다. 1955년부터 국립국악원의 국악사로 있으면서 후계자 전수에 주력하였다. 특히 〈흥부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적벽가〉 중의 ‘삼고초려’는 압권이었다. 김연수(金演洙)·임방울(林芳蔚)과 함께 3대명창으로 꼽히기도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37() - 196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강재구(姜在求)에 대하여

    1937년∼1965년. 군인. 인천 출신. 인천중학교와 서울고등학교를 거쳐 1960년 육군사관학교 제16기로 졸업, 육군소위로 임관되었다. 이후 육군보병학교, 수도사단 제1연대 소대장, 1군 하사관학교 수류탄교관 등을 역임하였다. 1965년 한국군 1개 사단의 월남파병이 결정됨에 따라 8월 29일 맹호부대(수도사단의 별칭) 제1연대 제10중대장에 보직되었다. 10월 4일 오전 10시경 파월을 앞두고 대원의 수류탄투척훈련을 실시하던 중 중대원 이등병 박해천(朴海千)이 실수로 안전핀을 뽑은 수류탄을 중대원들이 모여 있는 곁에 떨어뜨리자 순간적으로 위험을 느낀 그는 몸을 날려 폭발하려는 수류탄 위에 덮쳐 중대원 1백여명의 생명을 구하고 자신은 산화하였다. 육군은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소령으로 1계급 특진시킴과 함께 4등근무공로훈장을 추서하였으며, 그의 위대한 군인정신을 길이 남기기 위하여 생시 그가 소속했던 맹호부대 제1연대 3대대를 그의 이름을 따 ‘재구대대(在求大隊)’라고 명명했다. 그의 모교였던 서울고등학교 교정에 이를 기념하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육군사관학교에는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그가 산화한 강원도 홍천군 북방면 사득리에는 강재구공원이 있다. 그리고 육군에서는 ‘재구상’을 제정하여 매년 육군의 중대장 가운데 모범중대장을 선발하여 시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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