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1857년(철종 8)∼1938년. 일제강점기 시인. 자는 경찬(敬贊)이고, 호는 난석(蘭石)이다.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고조는 강사의(姜思義), 증조는 강학종(姜學宗), 조부는 강의문(姜宜文)이다. 부친 강필화(姜必和)와 모친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에서 3남 중 막내로 태어났다. 외조부는 유후연(柳厚淵)이다. 부인은 김정백(金正百)의 딸 김녕김씨(金寧金氏)이다. 19세에 거창(居昌)에 가서 향시(鄕詩)를 쳤는데, 그 지역의 김정백이 그의 용모가 단정하고 바르며 재주까지 갖추고 영민한 것을 보고 둘째 딸을 시집보냈다. 타고난 자질이 남달랐으며 매우 총명하였다. 말과 행동 모두 그가 큰 그릇이 될 것임을 짐작하게 해 주었다. 7세에 족대부(族大夫) 신주하(申周廈)에게서 공부를 하였는데, 책을 읽어주면 그 자리에서 외웠다. 1년도 안되어 《소학(小學)》의 구두(句讀)를 정확하게 떼어 소리 내 읽었으며, 문의(文義)를 보면 바로 깨달아 함께 공부하는 학생들이 따라갈 수가 없었다. 13세에 통사(通史)와 사서(四書)를 마쳤으며, 15세에 삼경(三經)을 통달하였다. 17세 이후에는 오직 술작(述作)에 힘썼다. 그는 국가는 비록 크고 작은 것이 같지 않더라도 그 근본이 모두 가정에 있다는 생각으로 자녀 교육에 힘썼다. 8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다. 2남은 강보현(姜普鉉)과 강용석(姜龍錫)이고, 2녀는 김용휴(金容休)와 신순균(申順均)에게 출가시켰다. 묘소는 시곡(詩谷) 선영(先塋)에 자리하고 있다. 《난석유고(蘭石遺稿)》는 아들 강용석(姜龍錫)의 발문이 붙어 전해지고 있으며, 4권 1책 가운데 3권에 약 450수 가량의 시(詩)가 실려 있어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고종 때 판소리의 명창. 충청남도 금산 출신.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고 〈춘향가〉를 잘하였는데, 특히 ‘어사또 서리 역졸 분발하는 대목’을 잘하였다. 그의 소리는 동편제의 법통을 이은 소리였다 한다.
1839년(헌종 5)∼1891년(고종 28). 조선 후기 무신. 자는 자경(子景). 정의현감(旌義縣監) 강이진(康履鎭)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 1869년(고종 6) 명월진만호(明月鎭萬戶), 1875년(고종 12)에는 오위장(五衛將), 1880년(고종 17)에는 충익위장(忠翊衛將) 등을 지내고, 1880년(고종 17) 대정현감(大靜縣監)에 부임하였다. 1882년(고종 19)에는 대구영장(大丘營將)이 되었다. 그러나 1883년(고종 20) 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佐道暗行御史) 이도재(李道宰)가 ‘전 대구영장 강재오는 사나운 군졸은 아래에서 위세를 부리며 더러 경죄수를 함부로 죽이고, 교활한 장교는 중간에서 농간을 부려 죽을 죄를 지은 자가 달아났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을 보면, 그는 지방 행정에 뛰어나지 않았던 것 같다.
생몰년 미상. 독립운동가. 호는 송석(松石). 경상북도 안동 출신. 한말에 평해군수를 지냈으며, 육군호위영관(陸軍護衛領官)으로 근무할 때인 1907년 일제에 의하여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되자, 강기동(姜基東) 등과 의병을 일으켜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그러나 전라남도 장성에서 일본군에 패전한 후 산중에 은거하였다가 그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곳에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참교(參敎)·지교(知敎)를 역임하였으며, 무장항일단체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가입,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였다. 뒤에 일본군경에 붙잡혀 옥사하였다.
1689년(숙종 15)∼1756년(영조 32).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구지(久之), 호는 입재(立齋). 춘양 출신. 아버지는 우(鄅)이며, 어머니는 진성이씨(眞城李氏)로 세준(世俊)의 딸이다. 7세 때 《십구사략 十九史略》을 배우는데 십여장을 보고 그 뜻을 알았다. 처음에는 큰아버지 찬(酇)밑에서 배웠고, 다음에는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으며, 윤동원(尹東源)·권구(權絿)·신익황(申益愰) 등과 교유하면서 강마(講磨)하기도 하였다. 1735년(영조 11) 학행으로 천거되어 장작감감역(將作監監役)에 임명되었고, 이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경조부주부(京兆府主簿)·회인현감(懷仁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회인현감으로 있을 때 청(淸)·신(愼)·근(勤)세 글자를 지침으로 삼고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겼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윤증의 〈획일도〉와 이이의 〈위학지방도〉를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경전·제자백가·천문·지리·술수 등에 모두 통하였으며, 이기(理氣)·성명(性命)·음양·사생·합산(合散)·치란(治亂) 등에 관하여 많은 잡저를 남겼다. 저서로는 《입재유고》 20권이 있다.
1852년(철종 3)∼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조선 후기 궁중 악공(樂工)이다. 1852년(철종 3) 서울에서 태어났다. 1867년(고종 4) 16세라는 어린 나이로 장악원(掌樂院)의 악공으로 임명되었다. 해금(奚琴)과 아쟁(牙箏)을 매우 잘 다뤘는데 특히 해금에 뛰어났다고 전한다. 악사로서 고종 때에 이름이 높았다. 〈여민락(與民樂)〉을 잘 연주해 오묘한 경지를 터득하였다고 전한다. 1913년 아악수(雅樂手)로 임명되었다.
미상∼1006년(고려 목종 9). 자는 휴우(休祐). 고려 사람이나 중국에서 활동한 문신이다. 출신은 고려의 신주(信州) 영녕(永寧)이다. 아버지는 강윤(康允)이다. 강전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흘승(紇升)이 거란(契丹)과 교전을 벌일 때에 그는 아버지 강윤과 함께 목엽산(木葉山) 아래에서 싸웠다. 전투중에 화살 두 대를 맞았으나 얼굴빛이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 뒤 거란에게 함락되자 흑두령(黑斗嶺)으로 도망쳐 살았으며, 다시 황룡부(黃龍府)에 이르러 고려로 돌아갔다고 하며 이때에도 아버지 강윤은 고려에 살아 있었다. 송나라 태조 시절에 강윤이 강전을 사행하는 데에 따라 가도록 하니 중국에 들어가 국학에 입학했다. 그 뒤에 송나라에서 관직을 역임하며 문명(文名)을 떨쳤다. 1006년(목종 9)에 죽으니, 송나라 진종(眞宗)이 특별히 아들 강희령(康希齡)을 태상시봉례랑(太常寺奉禮郞)으로 삼고, 녹봉을 주어 강전의 장례를 마치게 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유생. 자는 운서(雲瑞), 호는 해은(海隱). 진양(晉陽)이다. 금재(琹齋) 강한(姜漢)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강선호(姜善昊)이다. 영조(英祖) 때 함양(咸陽)에서 율촌(栗村) 봉전(鳳田)으로 이거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시대의 도술가(道術家)이다. 통일신라말의 승려 도선(道詵)에게 도법(道法)을 배워 묘청(妙淸)과 백수한(白壽翰)에게 태일옥장보법(太一玉帳步法)을 전수하였다고 전한다. 태일옥장보법은 사물과 사람의 위치를 자유로이 바꾸는 선도(仙道)의 술법 중 하나라고 전한다.
1741년(영조 17)∼1816년(순조 16).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계승(季昇), 호는 전암(典庵). 칠원(漆原: 현재의 咸安郡 漆原面) 무기리 출신. 아버지는 장릉참봉(章陵參奉) 주제(柱齊)이며, 어머니는 전주최씨(全州崔氏)로 진망(震望)의 딸이다. 김원행(金元行)의 문인으로서 17, 18세에 문예(文藝)가 성취되었고, 식견이 해박하였으며, 스승이 심시(尋是)라는 두 글자를 써주고 격려하였다. 성리학에 밝아 이에 대한 저술이 여러 편 있으며, 이직보(李直輔)·김이안(金履安) 등과 학문을 토론했다. 한편, 향시에 응시하였을 때 시권(試券)을 보고 “이같이 훌륭한 문장이 빛을 보지 못한것은 유사(有司)의 과실이다.”라 하고, 특별히 수선(首選)에 올려놓았다. 또, 응제(應製) 때 정조가 그의 문사(文詞)를 칭찬하고 붉은 보자기로 시권을 싸서 집에 소장하게 했다. 정조가 영남 선비 중 문장에 능한 자를 선발하여 규장각 강의(講義)를 교정하라는 영(令)을 내리자, 도신(道臣)이 그를 추천하였다. 이 일을 마치자 왕은 쌀과 종이 및 붓을 상으로 주었다. 그는 《심경 心經》·《근사록》·《주자대전》 등을 강론하면서 후진양성에 전념하였으며, 이황(李滉)의 〈천명도 天命圖〉를 토대로 〈심성도 心性圖〉와 〈대학강령도 大學綱領圖〉 등 고금의 성리설에 관한 많은 도식과 차록(箚錄)을 만들어 성리학에도 이바지하였다. 저서로는 《전암문집》 8권이 있다.
1870년(고종 7)∼1922년. 조선 말기 유생. 자는 사국(士國), 초성(初醒).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 1430∼1500)의 15세손이다. 학문과 덕행으로 알려졌으며, 강시형(姜時馨: 1850∼1928)의 글을 모아 《농은집(聾隱集)》을 편찬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명원(明遠), 호는 백석(白石). 아버지는 인의(引儀) 응청(應淸)이다. 1549년(명종 4) 생원시와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6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여러 고을의 수령을 거쳐 영덕현감을 지내고, 이조정랑(吏曹正郞)이 되었다.
미상∼1863년(철종 14). 조선 후기 농민봉기 주도자. 제주 안덕면(安德面) 서광리(西廣里) 출신이다. 1862년(철종 13) 9월부터 11월까지 제주도에서는 경제적 수탈 및 육지 민란 등의 영향으로 모두 세 차례의 민란이 일어났는데, 강제검(姜悌儉)은 2차와 3차 봉기 때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2차 봉기는 10월 6일부터 며칠 동안 계속되었는데, 제주읍 세 곳에서 1만여 명이 넘는 민중들이 패랭이를 쓰고 몽둥이를 가지고 성안을 급습하여 부패 관리 5명을 직접 타살하려고 하였으나, 목사가 그들을 국법에 따라 다스리겠다는 답을 받고 해산하였다. 3차 봉기는 11월 15일부터 12월 9일까지 이어졌는데 지난 번 국법에 따라 부패 관리를 처벌해주겠다던 목사의 약속이 지켜지지 않자, 더 이상 목사와 타협할 수 없다며 관아를 점거하였다. 이때 민중의 수는 수만 명이 넘었다. 이에 목사는 화북포(禾北浦)로 피신을 갔다가 11월 25일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그 후 김석한(金錫翰)·김성수(金性洙)·이일성(李日成)·김종주 등은 민중들에 의해 맞아죽었고, 김석룡(金錫龍)은 자결하였다. 이 민란은 1863년(철종 14) 제주도로 파견된 제주방어사(濟州防禦使) 정기원(鄭岐源)이 2월 29일 대중들을 경계시키기 위해서 강제검 등 22명을 효수(梟首)하고, 같은 해 4월 안핵사(按覈使) 이건필(李建弼)이 목사 임헌대(任憲大)를 함경도로 유배시키는 등 총 17명의 관리들을 처벌하면서 끝이 났다. 당시 민중들이 불태운 집이 141채나 되는 등, 재물 피해가 수만 냥이나 되었다. 제주도 북제주군 구좌읍(舊左邑) 김녕리(金寧里)에는 정기원의 선정을 기리는 ‘목사정공기원선정비(牧使鄭公岐源善政碑)’가 있는데, 비석 후면에 ‘정기원은 재임중 강제검(姜悌儉), 김흥채 등의 난(亂)을 진압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또한 세율을 개정하여 평역미(平役米)를 감해 금전으로 배정하는 등 청렴 정직하고 매사에 위엄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다.
1891년(고종 28)∼미상.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창성 출신.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힌 일이 있으며, 그뒤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이동녕(李東寧)·안창호(安昌浩) 등과 연결되어 연통제(聯通制)의 국내책임을 맡아 국내외를 행정적으로 연결하는 업무를 위임받았다. 1920년 1월에 창성군의 군감(郡監)이 되어 강창을(姜昌乙)·선우황(鮮于晃)·강제은(康濟殷)·강이달(姜利達)·강용철(姜容澈)·김홍빈(金洪斌) 등 수십명을 창성군의 연통제 조직원으로 포섭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등과 협의하고 중요한 임무를 전달받아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 창성군일대를 순회하면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이 군자금을 연통제 조직을 통해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앞으로 송달하였으며, 임시정부의 활동상황을 창성군민에게 알려 민심을 안정시켰다. 또한, 1920년 2월 이후에는 국내조사원으로 임명되어 활동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 獨立新聞》이나 《한일관계사 韓日關係史》 등 홍보자료 수십권을 인수하여 국내에 배포하다가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1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미상∼1010년(현종 1). 고려의 무신. 황해도 지방의 토성(土姓)이나 본관은 분명하지 않다. 목종 때 중추사 우상시(中樞使右常侍)로서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1. 김치양의 음모 1009년(목종 12) 김치양(金致陽)이 목종의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와 사통하여 낳은 아들을 왕으로 세우려고 난을 일으킬 때, 목종의 명을 받고 궁궐수비를 위해 개경으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개경에 도착하기 전 동주(洞州)의 용천역(龍泉驛)에 이르렀을 때 죄를 저질러 조정에서 쫓겨난 뒤 항상 화난을 일으키려고 벼르고 있던 내사주서(內史注書) 위종정(魏從正)과 최창회(崔昌會)가 거짓으로 전한 개경소식을 듣고, 자신이 천추태후에 의한 함정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여 서둘러 본영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마침 천추태후는 군사들이 오는 것을 꺼려 내신을 보내어 절령(岊嶺)을 막고 사람의 내왕을 차단하였다. 이러한 사태를 걱정한 아버지는 종을 승려로 변장시켜 죽장(竹杖)속에 서신을 보내 아들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개경에 와 국난을 평정하도록 하였다. 이 편지를 받자 목종이 세상을 떠난 줄 알고 부사(副使)인 이부낭중(吏部郞中) 이현운(李鉉雲) 등과 함께 갑졸(甲卒) 5천인을 거느리고 황해도 평주에 이르렀으나, 왕이 세상을 떠나지 않은 사실을 알고 군사이동을 멈추게 하였다. 그러나 여러 장수들이 이제 와서 주저할 수 없다고 하자, 목종을 폐하고 새 왕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개경으로 들이닥쳤다. 궁궐을 점령한 뒤 황보유의(皇甫兪義)와 김응인(金應仁)을 시켜 김치양 일파에 의해 신혈사(神穴寺)로 쫓겨나 있던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을 데려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보내 도망간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庾行簡) 등 7인을 죽이고, 천추태후의 친속 30여인을 귀양보냈다. 또한, 목종은 폐위시켜 태후와 함께 충주로 보내는 도중 상약직장(尙藥直長) 김광보(金光甫)를 시켜 시해하게 함으로써 대권을 쥐었다. 2. 대권쟁취의 노력 그뒤 새로운 국가기강을 위해 실시한 관제개혁에서 은대(銀臺)와 중추(中樞) 남북원(南北院)을 일시에 혁파하고 대신 중대성(中臺省)을 설치하여 세 관청의 기무를 이에 소속시켰다. 혁파된 은대와 중추원은 국왕의 측근보좌기구임과 동시에 그동안의 정치가 모두 이 기관을 통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이러한 조처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계속된 관직개편에서 자신은 중대사(中臺使)에 오르고 중대부사(中臺副使)에 이현운, 직중대(直中臺)에 채충순(蔡忠順), 상서우승 겸 직중대(尙書右丞兼直中臺)에 윤여(尹餘)를 임명하였다. 이러한 인사조처는 국왕 측근직의 단일화를 꾀하는 것이나 실제는 군사권을 배경으로 한 자신의 권력집중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더욱이 1009년(현종 즉위) 3월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知政事)가 되어 당시 제일의 실력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거란의 침입으로 그의 대권은 제대로 행사하지도 못하고 좌절되었다. 3. 거란의 칩입과 대권확보 실패 즉, 1010년 11월, 거란의 성종(聖宗)은 목종을 죽인 죄를 묻겠다는 표면적인 이유를 내세워 쳐들어왔다. 그러나 근본적인 이유는 지난 993년(성종 12) 제1차침입 때 강동육주(江東六州)의 영유권을 고려에 넘겨주었다는 것과 고려가 송나라와 화친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데 있었다. 이에 그는 행영도통사(行營都統使)가 되어 거란군과 맞서 싸웠다. 즉, 양규(楊規)와 이수화(李守和)의 용전으로 흥화진(興化鎭) 전투를 단념하고 통주(通州)로 내려온 거란군을 맞아 대승을 거두었다. 당시 통주성 남쪽까지 와서 물을 사이에 두고 세 군데 진을 치게 하고 거란군이 중앙을 찌르면 양쪽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번번이 승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무기인 검차(劒車)를 만들어 거란군을 대파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승리에 자만심이 쌓여 거란군이 공격해온다는 보고를 듣고도 경계를 하지 않다가 결국 같은해 11월 수많은 적군이 들이닥치자 대항할 겨를도 없이 패하고 말았다. 이때의 패전으로 많은 병사가 죽고, 부장(副將) 이현운, 도관원외랑(都官員外郞) 노전(盧戩), 감찰어사(監察御史) 노의(盧顗), 양경(楊景), 이성좌(李成佐) 등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포로가 되어 자신의 신하가 되어달라는 거란 성종의 권유에, “나는 고려사람인데 어찌 너의 신하가 되겠는가?” 하며 단호히 거절하여 고려인의 늠름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현운이 성종의 신하가 되겠다고 하자 발길로 차면서 고려인의 긍지를 잃지 말라고 나무랐다는 일화를 남기고 최후를 마쳤다.
1152년(의종 6)∼1213년(강종 2). 고려 제22대왕. 재위 1211∼1213##.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숙(璹)·정(貞)·오(祦), 자는 대화(大華). 명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광정태후 김씨(光靖太后金氏), 비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柳氏)이다. 1171년(명종 1) 관례를 올리고, 1173년 태자에 책봉되었다. 1197년 부왕과 함께 최충헌(崔忠獻)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갔다가, 1210년(희종 6)에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책봉되었다. 같은해 12월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폐위된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최씨 무단정치로 실권이 없었다. 왕의 생일을 광천절(光天節)이라 정하고, 왕모 의정왕후(懿靖王后) 김씨(金氏)를 광정태후로 추존하였다. 또한, 원자 진(瞋: 뒤의 高宗)을 태자에 책봉하고, 왕비 유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하였다. 시호는 원효(元孝)이며, 장지는 후릉(厚陵: 개풍군 현화리)이다.
1543년(중종 38)∼1580년(선조 1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중업(仲業), 호는 매서(梅墅) 또는 청서(靑墅). 아버지는 사인(舍人) 극성(克誠)이며, 어머니는 창녕성씨(昌寧成氏)로 치운(致雲)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한번 본 것은 평생동안 잊지 아니하였다. 글씨를 잘 써 당대에 명필로 꼽혔다. 1570년(선조 3)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서 학문을 닦았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등용되었다. 그뒤 성균관학유가 되었으나 윗사람들과 의견이 맞지 아니하여 물러났다. 당시 학자들과 친교가 많았으며, 특히 성혼(成渾)과는 의기가 서로 맞아서 사이가 두터웠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고 복을 마치자마자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슬픔이 지나쳐 여막(廬幕)에서 병들어 죽었다. 의(醫)·복(卜) 등 모르는 것이 없었으나, 특히 역학(易學)에 밝아서 자기의 죽음을 예측하였다고 한다.
1544년(중종 39)∼미상. 조선 중기 의인(義人). 자는 비승(丕承). 본관은 진주(晉州).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 1430∼1500)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강중호(姜仲虎)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정의로써 정릉참봉(靖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미상∼1441년(세종 23).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아버지는 무(), 부인은 참판 이염(李恬)의 딸이다. 1423년(세종 5) 명나라에 천추사를 파견할 때 상호군(上護軍)으로 수행한 바 있고, 1431년에 예조·병조·이조의 참의와 예조참판을 거쳐, 이듬해 이조좌참의와 한성부윤, 중추원부사·이조우참판을 역임하고, 1434년 이조참판·공조참판·동지중추원사·인수부윤(仁壽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1432년 이조좌참의로 있을 때 사간원으로부터 상피법(相避法)을 어겼다는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세종은 어긴 것이 아니라고 다시 불러내어 한성부윤을 제수하였다. 1437년 다시 동지중추원사를 지내고, 1441년 인수부윤을 지냈다.
1567년(명종 22)∼1650년(효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사고(師古), 호는 채진자(采眞子)·죽창(竹窓). 아버지는 운상(雲祥). 1585년(선조 18) 진사가 되고, 1595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조정랑을 지냈다. 1604년 집의로 장흥병영(長興兵營)을 이전할 때, 뇌물을 받았다는 죄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곧 석방되었다. 즉, 강진에 있던 전라병영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지리의 편리에 따라 장흥으로 옮기자, 다시 강진으로 이전하기 위하여 장태백(張太伯)이란 사람을 시켜 뇌물을 보내왔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한 것이다. 이것이 말썽이 되어 3년 동안 억울하게 구금되어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다. 그뒤 누명이 벗겨지고 왕의 특명으로 석방되어 벼슬을 하지 않고 있다가, 1623년 인조반정 후에 다시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시문·초서·예서 및 서예에 뛰어났다. 저서로는 《죽창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