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영역 열기

krpia

도움말
도움말 검색 도움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미숙(美叔)
    매고당(梅古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주원(姜柱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자는 미숙(美叔), 호는 매고당(梅古堂). 증조부는 강석하(姜錫夏)이고, 조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강석리(姜錫履)이며 아버지는 국와(菊窩) 강계부(姜啓溥)이다. 어려서 문명(文名)을 떨쳤다고 하나 요절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주재(姜周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목종(穆宗) 1년(998)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현종(顯宗) 1년(1010)에는 기거랑(起居郞)으로서 거란(契丹)에 동지(冬至)를 하례(賀禮)하기 위하여 거란(契丹)으로 파견되었다.

  • 망약(望若)
    삼희당(三稀堂)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1(숙종 27) - 1778(정조 2)
    본관
    진산(晋山)
    분류
    기타 > 은사
    강주제(姜柱齊)에 대하여

    1701년(숙종 27)∼1778년(정조 2).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망약(望若), 호는 삼희당(三稀堂). 조부는 강석지(姜錫祉)이며, 부친 강덕부(姜德溥)는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아산(牙山) 장희하(蔣熙夏)의 딸이다. 아버지인 강덕부는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서 학업하였다. 강주제는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 1702∼1772)과의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조(英祖) 50년, 그가 74세 되던 해에 영조의 노인 우대 명(命)으로 입시(入侍)하여 응선문(應選文)을 외울 기회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장릉참봉(章陵參奉)에 임명되었다.

  • 대려(大呂)
    용호(龍湖)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4(고종 31) - 1978()
    본관
    진양(晉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주행(姜珠杏)에 대하여

    1894년(고종 31)∼1978년. 현대 유학자이다. 자는 대려(大呂), 호는 용호(龍湖), 본관은 진양(晉陽), 출신지는 경상남도 진주시(晉州市) 대곡면(大谷面) 설매리(雪梅里)이다. 증조는 만울(晩蔚) 강우온(姜宇蘊), 조부는 죽오(竹塢) 강헌(姜{金+憲}), 부친은 설림(雪林) 강성조(姜聖祚)이다. 외조부는 하동(河東) 정지효(鄭知孝)이며, 처부는 김녕(金寧) 김윤권(金潤權)이다. 6세에 모친이 죽자, 부친에게 더욱 효성을 다하여 극진히 모셨다. 아버지가 병이 들자, 그의 형 강선항(姜璿杭)과 함께 여러 달 동안 시탕(侍湯)하며 간호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공부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틈틈이 경서를 공부하거나 의서(醫書)를 배웠다. 근검절약하여 집안 살림이 조금 윤택해지자, 외롭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춘궁기에 곳간을 열어 도와주었다. 종친이나 동리 일을 많이 주관하여 선을 권하고 악을 징계하는 규약을 만들거나, 사재를 털어 진양강씨세감록(晉陽姜氏世監錄)을 간행하였다. 고향 문묘에 전교(典校)로 재임할 때는, 매사에 공명 성실하여 향인들로부터 칭송이 높았다. 만년에 남곡(南谷) 이태하(李泰夏), 묵재(黙齋) 하정근(河貞根), 소계(小溪) 이보영(李寶榮), 농암(聾菴) 이태덕(李泰德) 등과, 봄과 가을에 회합하여 논문을 토론하거나 자연을 유람하며 지냈다. 향년 85세에 사망하였다. 자녀는 2남 1녀을 두었는데, 아들은 강병준(姜炳焌), 강병포(姜炳炰)이다. 묘지는 설매리 후록(後麓) 침해원(枕亥原)이다. 시문집으로 1989년 용호계(龍湖契)에서 발행한 《용호유집(龍湖遺集)》이 있다.

  • 수천(受天)
    옥천(玉泉)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54(영조 30) - 1821(순조 21)
    본관
    진주(晋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주호(姜周祜)에 대하여

    1754년(영조 30)∼1821년(순조 21). 조선 말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수천(受天), 호는 옥천(玉泉).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만보(晩輔)이며, 어머니는 경주김씨로 우정(禹鼎)의 딸이다. 강시환(姜始煥)과 강한(姜瀚)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783년(정조 7)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젊었을 때 전국의 명산을 두루 구경하고 〈유금강산록 遊金剛山錄〉·〈유태백산록 遊太白山錄〉·〈유속리산록 遊俗離山錄〉 등의 많은 기행문을 썼다. 중년에는 서숙(書塾)을 열어 후진양성에 전념하면서 《심경 心經》·《근사록 近思錄》에 대하여 깊이 연구하였으며, 심성설(心性說)과 이기설(理氣說) 등의 논설과 〈귀신변 鬼神辨〉에 대한 변론까지도 잡저로 남겨놓았다. 제자로는 강건수(姜健秀)·강영호(姜永浩)·장상환(張相煥) 등을 들 수 있으며, 저서로는 그의 아우 주우(周祐)와 함께 저술한 《옥천연방고 玉泉聯芳稿》 3권이 있다.

  • 덕수(德綏)
    국농(菊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1(순조 1) - 1875(고종 12)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준형(姜峻馨)에 대하여

    1801년(순조 1)∼1875년(고종 12).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수(德綏), 호는 국농(菊農). 고조는 강필태(姜必泰), 증조는 강세주(姜世柱), 조부는 강철흠(姜喆欽)이다. 아버지 강우영(姜虞永)은 호가 위은(渭隱)이며 문망(文望)이 있었다. 어머니는 청주(靑州) 사취석(史就錫)의 딸이다. 순조(純祖) 원년 파릉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와 큰형이 죽은 후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것을 소임으로 알고 강의를 열고 학계(學契)를 만들어 후학을 길러내는데 힘썼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8() - 199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체육 > 체육/무용인
    강준호(姜俊鎬)에 대하여

    1928년∼1990년. 체육인. 황해도 해주 출신. 1949년 함경남도 원산에 있는 복싱체육관에 입관, 박순원(朴順源)의 지도를 받았다. 1950년 5월 북조선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에 출전, 페더급에서 우승하였으며, 그뒤 6·25 때 월남, 수도사단에 현지입대하여 13년 동안 군에 복무하였다. 1952년 4월 임시수도 부산에서 열린 제15회 헬싱키올림픽대회 파견 최종선발전에서 강호 박금현(朴今鉉)과 대접전 끝에 밴텀급대표로 선발되어 그해 헬싱키올림픽대회에 출전, 준준결승전에서 세계챔피언인 미국의 무어(Moor, D.)에게 압승하고 동메달을 획득하였다. 그뒤 1954년 제2회 마닐라아시아경기대회와 1958년 동경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였으나 메달을 따지 못하자 지도자의 길을 택하였다. 1963년 육군에서 제대한 뒤 1967년 5월부터 1년간 당시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朴鐘圭)가 운영하던 삼청동 골든 올림피아 짐(Golden Olympia Gymnasium)에서 후배들을 지도하다가 태릉선수촌에서 코치로 활약하였다. 1968년 제19회 멕시코올림픽대회에 코치로 참가하여 라이트플라이급 지용주(池龍珠, 2위)와 밴텀급 장규철(張奎喆, 3위)이 입상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며, 1972년 제20회 뮌헨올림픽대회에도 코치로 참가하였다. 그밖에 1974년 제10회 테헤란아시아경기 대회와 1975년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열린 아시아아마추어복싱선수권대회(AABC), 1977년 타이 방콕에서 개최된 제3회 킹스컵국제복싱대회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개최된 제8회 아시아 아마추어복싱 선수권대회에 지도자로 참가하여 활약하였다.

  • 백원(百源)
    삼명(三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68(영조 44)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준흠(姜浚欽)에 대하여

    1768년(영조 44)∼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 자는 백원(百源), 호는 삼명(三溟). 아버지는 세정(世靖), 어머니는 권세억(權世檍)의 딸이다. 1794년(정조 18)에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지평·교리 등을 지냈다. 1805년(순조 5)에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죽음을 알리는 고부사(告訃使)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13년에 수안군수로 있을 때 군적(軍糴)의 폐단을 논하고 새로운 화폐의 주조를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어 부사직을 거쳐 1817년에 사간이 된 뒤 승지에 이르렀다. 벽파(僻派)의 일원으로 1801년 윤행임(尹行恁)의 축출에 앞장섰으며, 1813년 정약용(丁若鏞)의 석방을 반대하였다. 또,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비난하였다. 시무에 밝아 여러 번 어사 물망에도 올랐다. 서예에 능하여 금석문을 많이 썼다.

  • 문숙(文淑)
    창헌(昌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72(고종 9) - 1956()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준희(姜俊熙)에 대하여

    1872년(고종 9)∼1956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문숙(文淑), 호는 창헌(昌軒).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 1430∼1500)의 15세손이다. 타고난 성품이 너그럽고 남의 과실을 질책하지 않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56(공민왕 5)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중경(姜仲卿)에 대하여

    미상∼1356년(공민왕 5). 고려 말기의 무신. 공민왕이 1352년(공민왕 1) 연저수종공신(燕邸隨從功臣)을 정하여 토지와 백성을 내릴 때 상호군으로서 이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다음해 상호군 김성보(金成寶)와 함께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웅고피(熊羔皮)를 바쳤다. 1354년 밀직부사를 거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다. 1356년 반역을 꾀한 기철(奇轍)일파를 숙청할 때 공을 세웠다. 평리(評理) 인당(印璫)과 함께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압록강 서쪽의 8참(八站)을 공격할 때 인당보다 뒤에 도착하여 취기를 부리다 인당의 부사(副使)인 사윤(司尹) 신순(辛珣)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1359년 기철일당을 제거한 공을 정할 때 녹권(錄券)을 받고 그 부모도 작위를 받았으며 자손에게는 음직이 수여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중상(姜仲祥)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말의 문신. 1354년(공민왕 3)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졌다. 1356년 제주인들이 난을 일으켜서 도순문사(都巡問使) 윤시우(尹時遇), 목사 장천년(張天年), 판관 이양길(李陽吉) 등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전라도도순문사에 임명되어 이를 수습하였다. 2년 뒤 전라도만호로 있을 때, 정주부사(靜州副使) 주영세(朱永世)와 함께 왕을 내알했다가 당시 홍건적의 침입 등으로 국가가 다난한 때 함부로 임지를 이탈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다. 뒤에 곧 풀려나와 도첨의평리가 되고, 1361년(공민왕 10)에 경상도도순문진변사로 나갔다. 1371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73년에 다시 경상도도순문사가 되었다.

  • 자도(子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59(세조 5) - 1520(중종 15)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중진(康仲珍)에 대하여

    1459년(세조 5)∼1520년(중종 1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도(子鞱). 아버지는 교위(校尉) 상(愓)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생질이자 문인이다. 1480년에 진사가 되고, 1495년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풍저창직장(豊儲倉直長)이 되었다. 이어 홍문관저작·성균관전적·형조좌랑을 거쳐 외직인 의흥(義興)·영동(永同)의 현령을 역임하다가,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시강원문학이 되었다. 1506년 사간원헌납에 올라 언론활동을 전개하다가, 곧 예빈시첨정으로 전직되었다. 사헌부장령과 군기시·내자시·봉상시부정을 역임하였고, 밀양부사와 성주목사를 지냈다. 1511년 제포(薺浦)에서 왜인의 변란이 일어나자, 제용감정(濟用監正)으로 대마도경차관을 겸직하여 왜구를 토벌하였으며, 특히 안골포(安骨浦)에서 왜란 진압에 공을 세워 군공일등(軍功一等)으로 보고되었으나, 대간에서 무예를 모르는 자가 군공일등이 될 수 없다고 상계하여 많은 논란이 일어났다. 그뒤 군기감·선공감정을 거쳐 승문원판교가 되었다가 기묘사화로 장류(杖流)되었다.

  • 인부(仁父)
    송재(松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중호(姜仲虎)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인부(仁父), 호는 송재(松齋),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강승(姜昇: 1430∼1500)의 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을 모집하고 적을 토벌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 시호
    문경(文敬)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1(선조 4) - 1619(광해군 11)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즙(姜楫)에 대하여

    1571년(선조 4)∼1619년(광해군 1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晋州). 할아버지는 강중현(姜仲賢)이고, 아버지는 강세봉(姜世鳳)이다. 어머니는 승사랑(承仕郞) 박용(朴容)의 딸이고, 부인은 이제(李瑅)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글 잘한다는 이름이 있었으나 번번이 과거에 낙방하자 낙향하여 자신을 위한 학문에 힘썼고, 효성이 지극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7월 10일 양근(陽根)의 상심리(賞心里) 집에서 향년 49세로 죽어, 그해 9월 남중면(南中面) 성덕동(聖德洞)에 장사지냈다. 아들 강여재(姜與載)는 1624년(인조 2) 갑자식년사마시(甲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3등으로 합격하였고, 1631년(인조 9) 신미별시문과(辛未別試文科) 병과 7등으로 급제하여 관직이 보덕(輔德)에 이르렀다.



  • 시호
    경양(景襄)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1049(문종 3) - 1120(예종 15)
    본관
    영강(永康)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증(康拯)에 대하여

    1049년(문종 3)∼1120년(예종 15). 고려시대의 문신. 본관은 영강(永康). 음보로 양온사(良醞史)가 되어 10년 동안 이역(吏役)을 지냈다. 원래 가세(家世)가 한미하고 별다른 기능은 없었으나, 평소 부지런하고 조심스럽게 일을 보았다. 뒤에 군기주부동정(軍器注簿同正)에 올랐으며, 다시 외직에 임명되어 영인진판관 진명도부서부사(寧仁鎭判官鎭溟都部署副使)로 재직중 여진과 싸워 여러번 공을 세웠다. 특히, 1097년(숙종 2) 동여진(東女眞)의 적선 10척이 동북면 진명현(鎭溟縣)에서 약탈을 자행하자, 동북면병마사 김한충(金漢忠)의 명으로 적과 싸워 배 3척을 노획하고 48인을 베었다. 이어 감찰어사가 되고, 1098년에는 중윤(中允), 1101년 고공낭중 어사잡단(考功郞中御史雜端)으로 승진되었다. 뒤에, 동북면병마판관이 되어 능도(菱島)에서 다시 여진과 싸워 이긴 공으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에 올랐다. 1105년(예종 즉위)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고, 1107년 윤관(尹瓘)의 여진정벌 때는 좌군지병마사(左軍知兵馬事)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으므로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에 올랐다. 1111년에는 서북면병마사, 1112년 어사대부(御史大夫), 1113년 형부상서가 되고, 호부상서 삼사사(戶部尙書三司使)를 거쳐 지추밀원사가 되었다. 1114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추밀원사(樞密院使) 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한 뒤, 1116년에는 수사공(守司空) 참지정사(參知政事)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 겸 태자소부(太子少傅)가 되고,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올라 사직했다. 시호는 경양(景襄)이다.

  • 우여(遇汝)
    적은(迹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56(철종 7) - 1909(순종 2)
    본관
    진산(晋山)
    분류
    기타 > 은사
    강지주(姜趾周)에 대하여

    1856년(철종 7)∼1909년(순종 2),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우여(遇汝), 호는 적은(迹隱). 고조부는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극복재(克復齋) 강효기(姜孝基)이며, 증조부는 수직(壽職) 통정대부를 지낸 경운(鏡雲) 강동망(姜東望)이며, 조부는 강광려(姜光呂), 아버지는 정재(正齋) 강필준(姜必俊)이다. 지방에서 한학을 학업하였으며, 1896년의 갑오경장 이후로는 세상에 뜻을 버리고, 지리산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뜻을 같이 하는 십수명과 누대를 짓고, 봄이면 인근의 학생을 모아 강학을 하였으며, 백록동규(白鹿洞規)에 따라 의례(儀禮)를 행하곤 하였다. 그는 평생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을 외우고 실천하는 일에 힘썼다. 그가 유영(遊詠)하던 부춘대(富春臺)가 경상남도 함양군 휴천면(休川面) 남호리(南湖里)에 남아 있다. 시문집 《적은유고(跡隱遺稿)》는 1963년에 김황(金榥)이 서(序)하고, 자손 강맹혁(姜孟爀)이 발(跋)을 써서 간행되었다.



  • 시호

    이칭
    강재형(姜在馨)/강시형(姜始馨)/이재형(李載馨)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193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지형(姜芝馨)에 대하여

    1881년(고종 18)∼1931년. 다른 이름으로는 강재형(姜在馨)·강시형(姜始馨)·이재형(李載馨) 등이 있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이헌교(李憲敎)·김사국(金思國)·이규갑(李奎甲)·이민태(李敏台)·한남수(韓南洙) 등과 한성오(韓聖五)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한성임시정부 및 국민대회에 관한 방안을 토의할 때 13도 대표 25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 뒤 만주로 건너가 1919년 12월에는 길림성 관전현에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입단하였는데, 대한독립단은 박장호(朴長浩)·조맹선(趙孟善)·백삼규(白三圭) 등이 유허현[柳河縣] 싼위안바오[三源浦]에서 결성한 항일무장 독립운동단체이다. 1920년 1월 독립단의 도총재 박장호로부터 경기도 지단을 조직하라는 명을 받고, 경기도도시찰겸소집전권위원(京畿道都視察兼召集全權委員)이 되어 국내에 잠입하여, 김기한(金起漢)과 함께 서울의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최승한(崔承煥)·홍영전(洪永傳)을 포섭하여 전국 각지의 지단을 설치하기 위해 〈임명장〉·〈사령서〉·〈격고문〉·〈경고 국내경향 각 부호문(警告國內京鄕各富豪文〉·〈경고 동포 왜관리문(警告同胞 倭官吏文)〉·〈군자금 영수증〉 등 각종 유인물을 인쇄하여 배포하였다. 한편으로 군자금을 모금하며 독립단이 국내에 진격할 때 일제히 호응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던 중 이 사실이 일본 경찰에 알려져 체포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을,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진여(進汝)
    대산(對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7(순조 7) - 1858(철종 9)
    본관
    진주(晋州)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강진(姜溍)에 대하여

    1807년(순조 7)∼1858년(철종 9). 조선 말기의 서화가. 본관은 진주. 자는 진여(進汝), 호는 대산(對山). 증조부는 세황(世晃)이다. 1842년(헌종 8) 규장각검서관이 되었고, 이어서 1852년(철종 2)에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나가 읍민을 잘 보살펴 조정으로부터 상을 받았다. 조선 후기에 이름높은 서화가로서 중국에까지 명성을 떨친 증조부 세황의 서화기법을 본받아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동시에 시와 초서(草書)·예서(隷書) 등 글씨에도 뛰어나 사람들은 시·서·화의 삼절(三絶)이라 칭송하였다.

  • 문옥(文玉)
    소석(小石)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84(고종 21) - 1957()
    본관
    진주(晋州)
    분류
    종교 > 기타종교인
    강진구(姜鎭求)에 대하여

    1884년(고종 21)∼1957년. 대종교 중진 중의 한 사람.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자는 문옥(文玉), 호는 소석(小石). 부여 출신. 사교(司敎) 강우(姜𠈌)의 장남이고, 임오십현(壬午十賢) 중 한 사람인 강철구(姜鐵求)의 큰 형이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였고, 1907년 한성무관학교(漢城武官學校)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1909년부터 대종교를 신봉하였으며, 그뒤 부여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9년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과 육영사업에 힘쓰는 한편, 1922년에는 참교(參敎)로 임명되었다. 1946년 지교(知敎), 같은해 8월에 상교(尙敎)로 승질(陞秩)하였다. 1948년과 1949년에 걸쳐 고향인 부여에 천조궁(天祖宮)을 건립하여 단군의 영정인 천진(天眞)을 모셨다. 1950년 정교(正敎)로 승질함과 동시에 대형호(大兄號)를 받았다. 1954년 부여지사(扶餘支司) 전무(典務)로 피임되어 4년간 시무하였고, 1955년에는 남이도본사(南二道本司) 전무로 추천되어 1년간 겸임하였다.

  • 진오(晋五)
    역암(櫟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7(순조 17)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진규(姜晋奎)에 대하여

    1817년(순조 17)∼미상.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 자는 진오(晋五), 호는 역암(櫟庵). 경상도 봉화 출생. 아버지는 필응(必應)이다. 이황을 사숙하였다. 1845년(헌종 11)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성균관박사와 전적(典籍)을 지냈고, 1864년(고종 1) 사헌부장령을 거쳐 예조참판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에도 능하여 금산사(金山寺)·태고사(太古寺) 등 사찰에 관한 내용이 많다. 당시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천주학에 대하여는 강력하게 반대하여 1881년 〈척사소 斥邪疏〉를 올려 사학을 이 땅에서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영남유생들에게 통문을 보내 연합전선을 펴면서 개화정책을 반대하다가 이만손(李晩孫)과 함께 유배되었다. 저서로는 《역암문집》 12권이 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