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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덕수(德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의열
    강진기(姜震耆)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수(德叟), 대제학 강회중(姜淮中)의 9대손이다. 아버지는 강익구(姜益九)이고, 장인은 임총(任聰)이다. 아침저녁으로 부모님의 잠자리를 살피고 문안을 드렸으며, 계절에 맞추어 의복을 마련해 드렸다. 부친이 병으로 고생하자 대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가늠하여 탕약을 지어 올리고, 위독해지자 무명지를 잘라 입에 피를 흘려 넣어 효험을 보았다. 1729년(영조 5)에 효행으로 지평(持平)에 추증되고, 정려각(旌閭閣)을 내려 받았다. 묘는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戶法面) 안평리에 있다.

  • 정보(正甫)
    죽헌(竹軒)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0(명종 15) - ?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진문(姜進文)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미상.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정보(正甫), 호는 죽헌(竹軒).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 병조참의(贈兵曹參議) 강세담(姜世潭)의 아들이다. 인조 때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兵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으며, 진무예어정호성일등공신(振武預於亭扈聖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옥구군(沃溝郡) 옥구읍(沃溝邑) 상평리(上坪里) 옥산사(玉山祠)에 배향되었다.

  • 언보(彦甫)
    양성재(養性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5(명종 20) - 1624(인조 2)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진백(姜進伯)에 대하여

    1565년(명종 20)∼1624년(인조 2).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언보(彦甫)이고, 호는 양성재(養性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전라북도 옥구(玉溝)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증 병조참의(贈兵曹參議) 강세담(姜世潭)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주부(訓練院主簿)를 거쳐 전라좌도우후(全羅左道虞侯)·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혜산병마절제사(惠山兵馬節制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오위장(五衛將)를 역임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우고 순절(殉節)하자, 1625년(인조 3)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되었다. 뒤에 옥산서원(玉山書院)에 배향되었다.

  • 형원(亨遠)
    성산(聖山)
    시호

    이칭
    강진원(姜震遠)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1(고종 18) - 1921()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진원(姜振遠)에 대하여

    1881년∼1921년. 의병장. 본관은 진주. 일명 진원(震遠). 자는 형원(亨遠), 호는 성산(聖山). 전라남도 승주 출신. 유년시절에 손오병서(孫吳兵書) 등을 탐독하면서 한문을 수학했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봉기한 의병진에 가담하였으나 전공을 세울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1907년 일본에 의한 고종의 퇴위와 군대의 강제해산조치가 있자, 본격적으로 항일운동에 투신하였다. 마침 1908년 동향의 우국지사인 김명거(金明巨)·김화삼(金化三)·권덕윤(權德允)·김병학(金柄學), 곡성의 김양화(金良化) 등과 창의(倡義)하여 의병의 소모(召募) 및 무기구입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일본측의 동향을 진단하면서 의병부대를 편성하였다. 6월에는 승주군 조계산(曹溪山)에서 진을 치고 실전을 위한 훈련에 들어갔다. 7월에는 결사동지(決死同志) 33명을 가담시키고, 또한 보성과 곡성 등지에서 활약하던 조규화(趙圭和)와 동맹함으로써 그의 휘하에 있던 40여명이 그의 의병부대에 합류하였다. 8월에는 곡성군 석곡면 조지촌(鳥枝村)과 목사동(木寺洞)에서 처음으로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9월 23일 적을 기습하여 3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며, 10월 5일에는 고흥군 과역면 과역리(過驛里) 전투에서 일본군 다수를 사살하고 무기를 노획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10월 9일 여수군 화양면 원포리(遠浦里)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승주군 쌍암으로 회군하였지만, 이후에도 승주·곡성·화순 등지에서 싸웠다. 1909년 1월부터 4월까지는 승주군 서정병참소(西亭兵站所)를 습격하는 한편, 남원까지 진격하였다. 그해 4월말 곡성의 서순일(徐淳一) 의병대가 합류함에 따라 240여명의 병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5월 석곡(石谷)에 있는 병참소 공격에 실패하고 말았다. 더욱이, 6월 11일 승주군 서면 당천리의 색천사정(索川社亭)에서 일본군 앞잡이 김원학(金源學)이 인솔한 일본헌병대의 기습을 받아 참패, 퇴각하였다. 또한, 1909년 일본의 의병초토화작전으로 의병활동이 타격을 받자 그의 의병군도 그해말에 해산되었다. 결국, 8월 중순경 남해의 통영 연내도(蓮內島)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승주로 돌아와 두모리 오성산(五聖山) 동굴에서 10여년간을 은거하였다. 1921년 7월 16일 은신처가 발각되어 쌍암헌병대로 압송된 뒤 순천헌병대로 이송되어 10월에 순국하였다.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강대량(姜大良)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17() - 1991()
    본관
    미상(未詳)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진철(姜晋哲)에 대하여

    1917년∼1991년. 역사학자. 구명은 대량(大良). 경상남도 함안 출신. 내수(乃秀)의 아들이다. 경성제일공립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뒤 잠시 회사원으로 근무하다가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강사 겸 사학과 교수조무원(敎授助務員)으로 일하였다. 1948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조교수로 승진하였으나, 6·25 발발과 더불어 일신상의 이유로 교수직을 사임하였다. 1954년 다시 동아대학교 부교수로 취임한 이후 숙명여자대학교·고려대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재직하는 동안 동아대학교에서는 문리과대학장(1959∼1961), 숙명여자대학교에서는 도서관장(1966∼1967), 고려대학교에서는 박물관장(1970∼1976)을 역임하였고, 1962년부터 1969년까지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으며, 1978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3년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의 교수직에서 정년퇴임한 뒤 전주대학교와 아주대학교의 대우교수로서 교편생활을 계속하였으며, 연구에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처음 학문적 관심의 주대상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관계의 작용에 관한 것으로, 1948년 《사해 史海》 제1집에 발표한 〈고려 초기의 대거란관계(對契丹關係)〉가 그것이다. 그러나 한국사의 이해를 위한 보다 중요한 과제는 그와 같은 외세와의 관계가 아니라, 한국사회의 발전을 추진시킨 내재적 요인을 구명하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되어, 토지문제 특히 고려시대의 토지지배관계 및 이에 관련된 문제들을 해명하는 작업을 주제로 선정하였으며, 이후 연구생활도 거의 이 문제로 일관하였다. 1963년 〈고려 초기의 군인전〉과 1965년 〈고려 전기의 공전·사전과 그 차율수조(差率收租)에 대하여〉를 발표하였다. 같은해 《한국문화사대계 II》에 발표된 〈한국토지제도사〉의 신라와 고려시대 부분은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당시까지의 연구를 집성한 최초의 연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1980년 《고려 토지제도사연구》라는 저서를 내놓았는데,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와 공전·사전의 제유형 및 조세·공부(貢賦)·역역(力役) 등을 다룬, 이 방면에 관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문서이면서 동시에 개설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 공로로 월봉저작상(月峰著作賞)·아카데미상을 수상하였다. 그뒤 1989년 신라의 녹읍(祿邑), 고려 후기의 농장과 지대(地代), 그리고 진전(陳田)과 사전개혁(私田改革) 등을 연구한 《한국중세토지소유연구》를 출간하여 역시 그 공로로 이듬해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하였다. 한편, 죽은 다음해인 1992년 생전에 기획하여 두었던 대로 시대구분과 정체성의 문제 등 몇몇 과제에 대한 연구물이 《한국사회의 역사상(歷史像)》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발간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3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진해(姜鎭海)에 대하여

    1896년∼1933년.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단천 출신. 1919년 단천에서 3·1운동을 전개한 뒤 만주로 망명하였다. 1926년 만주에서 조직된 항일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 가입하여 서란총관(舒蘭總管)으로 활동하였으며, 1931년 한국독립군의 별동대장(別動隊長)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池靑天)이 중국구국군총사령 왕덕림(王德林)과 한중연합군 편성계획을 협의할 때 한국독립군의 대표로 영안현(寧安縣)에 파견되어 교섭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였다. 1933년 한중연합군이 동경성(東京城)과 대전자령(大甸子嶺)을 공격할 때 별동대장으로 참전하여 일본군과 만군(滿軍)을 크게 격파하였다. 1933년 9월 다시 동녕현(東寧縣) 진공작전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다가 전사하였다.

  • 자서(子舒)
    호계(壺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진휘(姜晋暉)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서(子舒), 호는 호계(壺溪). 아버지는 학유(學諭) 종경(宗慶)이다. 성혼(成渾)의 문인으로, 총명하여 문장을 잘하고 시에 능하여 권필(權韠)·구용(具容) 등과도 교유하였다. 정원에 대나무가 있었는데, 그를 따르는 자가 그 대를 얻으면 여러 사람에게 그를 만났음을 은근히 자랑할 정도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시골 부로들이 모집한 향병(鄕兵)을 지휘하여 왜적들과 싸웠는데, 주위에서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려 하였으나 나이가 어림을 이유로 사양하였다.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참봉·선전관 등을 역임하였다. 1620년(광해군 12) 선전관으로 있을 때, 과거시험장에서 낙방한 강무생(姜戊生)을 급제한 것으로 기록한 것이 발각되어 관직에서 쫓겨났다. 나이 30세로 요절하자, 그의 스승 성혼은 천지의 맑은 기운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난세의 기한(飢寒)에 시달려 죽었다 하여 슬퍼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637(인조 15)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충신
    강진흔(姜晋昕)에 대하여

    미상∼1637년(인조 15).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충청수사(忠淸水使)를 지냈다. 청나라에서 강화도를 함락시키겠다고 하자 이를 호언장담으로 여기면서도 조정에서는 강화유수(江華留守) 장신(張紳)을 주사대장(舟師大將)으로 삼아 각도의 수군을 징발하도록 하였다. 이 때 강진흔이 가장 먼저 도착하여 월곶(月串)의 연미정(燕尾亭)을 지키고, 장신은 광성진(廣成津)을 지켰다. 1637년(인조 15) 1월 22일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의 월곶과 광성진의 사이에 있는 갑곶진(甲串津)으로 건너오니, 강진흔은 휘하의 병선 7척과 수군 200명을 거느리고 갑곶으로 가 적선 3척을 침몰시키는 등 분전하였으나, 그가 탄 전선(戰船)도 탄환을 맞는다. 다행히 광성진에서 장신의 수군이 올라왔으나, 장신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다가 청군의 공격을 받자 후퇴해 버린다. 이때 강진흔이 “네가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어찌 차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너를 베어 죽이겠다.”며 장신을 질타했으나, 장신은 돌아오지 않고 갑곶 방어선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해 9월에, “조수(潮水)를 따라 내려가지 않은 죄”를 지었다 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함락 당시에 대군(大君)으로서 강화도에 있었던 효종으로부터는 ‘싸우지도 못하였거니와 달아나지도 못하였다.’는 억울한 평가를 받았다.

  • 기백(起伯)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12(광해군 4) - 1672(현종 13)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유생
    강진흥(姜晋興)에 대하여

    1612년(광해군 4)∼1672년(현종 13). 조선 중기 유생. 자는 기백(起伯).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백석(白石)과 유집(柳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병자호란 당시 스승 유집이 의병을 일으카자, 스승을 따라 상경하는 도중. 청나라와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에, 세상을 등지고 시를 지으며 지냈다.


  • 청운(菁雲)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51(철종 2) - 1919()
    본관
    진주(晋州)
    분류
    예능/체육 > 화가
    강진희(姜璡熙)에 대하여

    1851년(철종 2)∼1919년. 서화가. 본관은 진주. 호는 청운(菁雲). 1886년 일본공사접응관차(日本公使接應官差)를 거쳐, 1887년 주미공사수원(駐美公使隨員)으로 미국에 다녀온 뒤 법부주사(法部主事)를 지내고, 1905년에는 학부위원(學部委員)을 역임하였다. 1911년에 설립된 서화미술회(書畵美術會)의 교수진에 조석진(趙錫晋)·안중식(安中植) 등과 참여하여서 글씨와 전통화법을 가르쳤다. 1918년 민족서화가들의 단체로 서화협회(書畵協會)가 창립될 때에는 13명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글씨는 전서와 예서에 능했고, 그림에서는 매화를 즐겨 그렸으나 전하는 작품이 별로 없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35(헌종 1)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의원
    강진희(姜震熙)에 대하여

    1835년(헌종 1)∼미상. 조선 후기의 의원. 강진희(姜震熙)는 1835년(헌종 1)에 영흥도에서 출생했으며, 증(贈) 정3품 벼슬인 종사랑승통정대부(從仕郞承通政大夫)에 올랐다. 1903년(고종 41)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역임하였다. 그의 묘지는 외리(外里) 다돌(多突)에 있다.

  • 언심(彦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66(세조 12) - 1536(중종 31)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징(姜澂)에 대하여

    1466년(세조 12)∼1536년(중종 31). 조선시대의 문신·서예가. 본관은 진주. 자는 언심(彦深). 이행(利行)의 아들이다. 약관으로 사마시에 합격하고,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에 승문원권지(承文院權知)로 보임되고, 다시 예문관검열·홍문관저작이 되었으며, 이어서 부수찬 등을 거쳐 부응교로 승진되었다. 연산군 때 경연관(經筵官)으로 8년 동안 재직하였다. 강학을 할 때는 말이 유창하고 뜻이 깊어 좌우 신하들이 모두 경청하였다. 경연관으로 있을 때 충청도에 있는 요승(妖僧)이 스스로 사람들의 마비된 수족을 요술로 고친다 하면서 백성들을 현혹하므로, 왕명에 따라 그 요승을 문초하여 요망스러운 실정을 밝힌 바 있다.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가 다시 직제학·부제학 등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4년(연산군 10)에 왕에게 수렵을 삼가도록 간하였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낙안(樂安)에 유배되었다. 1506년 유배지에서 복세암(福世庵)을 뜯어옮기는 것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와 옥에 갇혔으나, 그해에 일어난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로 임명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부모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을 자청하여 나가 선정을 베풀었다. 1521년(중종 16) 진하사(進賀使)로 명나라에 갔을 때 황제가 뛰어난 글씨솜씨에 감탄하여 특별한 대우를 하였다. 돌아와서 지중추부사·경주부윤을 거쳐 예조참판이 되었다. 글씨를 잘 써서 중종의 총애를 받았다. 중종은 그를 시켜 옛 명현들의 명언과 시문을 쓰게 하여 홍문관에 걸어놓고 선비들과 백관들이 처신의 거울로 삼도록 하였다. 필법은 당대에 으뜸이었다 한다. 글씨로는 〈정익혜공난종신도비 鄭翼惠公蘭宗神道碑〉·〈예조참의최한정비 禮曹參議崔漢楨碑〉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9(헌종 15) -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찬(姜𧄽){2}에 대하여

    1849년(헌종 15)∼미상. 조선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진주. 세황(世晃)의 5세손으로, 기(𣹡)의 손자이며 준수(駿秀)의 아들이다. 1871년(고종 8) 정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1871년 홍문관부교리와 수찬(修撰)을 거쳐 1872년에는 규장각직각이 되었다. 1874년에는 진하사(進賀使) 이승응(李昇應)을 수행하는 서장관이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으며, 이듬해에도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 강난형(姜蘭馨)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82년에는 검교직각(檢校直閣)으로 고종의 자문에 수시로 응하였다. 1883년 이후에는 예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였으며, 1887년에는 태인(泰仁)으로 귀양을 가기도 하였으나 바로 풀려나 우부승지·사헌부대사헌·이조참판이 되었다. 그리고 1897년 중추원일등의관(中樞院一等議官) 및 칙임관삼등(勅任官三等)에 이르렀으며, 이듬해에는 봉상사제조(奉常司提調)가 되어 전주 자만동비문(滋滿洞碑文)의 서사관(書寫官)이 되기도 하였다.

  • 덕휘(德輝)
    동곽(東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7(명종 12) - 1603(선조 36)
    본관
    금천(衿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찬(姜燦)에 대하여

    1557년(명종 12)∼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금천(衿川).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으로, 증조는 강숙돌(姜叔突)이고, 조는 강뢰(姜賚)로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을, 아버지 강유경(姜惟慶)은 삼등현령(三登縣令)을 지냈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 판관(判官) 권집(權諿)의 딸이고, 처는 광산김씨(光山金氏) 김국광(金國光)의 후손으로,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자녀로는 강석기(姜碩期), 강원기(姜遠期) 등 2남 1녀를 두었는데, 강석기는 백부(伯父) 강돈(姜燉)의 양자가 되었고, 딸은 한응인(韓應寅)의 아들 한신급(韓信及)에게 시집갔다. 의 아버지 김계휘(金繼輝)에게 수학하였고 김장생, 민인백(閔仁伯) 등과 교유하였다. 1582년(선조 15) 임오식년사마시(壬午式年司馬試) 생원·진사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1583년 계미알성문과(癸未謁聖文科)에 병과(丙科) 3등으로 합격하여 가주서(假注書)로 경연에 출입하였다. 그 후 승문원권지정자(承文院權知正字)에 선임된 뒤 검열(檢閱), 승정원주서, 사헌부감찰, 호조좌랑, 이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589년(선조 22) 전라 유생 정암수(丁巖壽) 등이 이산해(李山海), 정인홍(鄭仁弘), 유성룡(柳成龍) 등을 가리켜 역당(逆黨)이라는 상소를 올리자, 선조가 이들 유생을 국문하려할 때 강찬이 사헌부에 있으면서 국문을 반대한 일이 있었는데, 후에 양사(兩司)가 다시 그 당시의 양사를 탄핵하여 강찬은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좌천되었다. 1592년(선조 25) 단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두 왕자가 회령(會寧)에서 적의 포로가 되자 의병을 모아 싸우는 한편, 행재소(行在所)에 결사대를 파견하여 회령 사태를 보고하였다. 1603년(선조 36) 연안(延安)에서 47세의 나이로 병사하여, 금천(衿川)의 관아 남쪽 아방리(鵝房里) 동쪽 선영에 장사지냈다. 1605년(선조 38) 왜적을 토벌한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선무종훈(宣武從勳)에 추록되었다.

  • 자진(子鎭)
    성건재(省愆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47(인조 25) - 1729(영조 5)
    본관
    진산(晋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찬(姜酇){1}에 대하여

    1647년(인조 25)∼1729년(영조 5).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자진(子鎭), 호는 성건재(省愆齋). 아버지는 각(恪)이며, 어머니는 남양홍씨(南陽洪氏)로 욱(勗)의 딸이다. 처음에는 정양(鄭瀁)으로부터 글을 배우다가 윤증(尹拯)의 문인이 되었다. 1727년 수직으로 부호군(副護軍)에 제수되었고, 이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우리나라 제현들의 문적을 분류별로 모아 편찬하였다. 《현인문적 賢人文蹟》 3권을 만들었다. 저서로는 《성건재유고》 4권이 있다.

  • 문윤(文允)
    만우(晩愚)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0(헌종 2) - 1898(광무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찬규(姜纘奎)에 대하여

    1840년(헌종 2)∼1898년(광무 2).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문윤(文允), 호는 만우(晩愚). 고조는 설림재(雪林齋) 강붕운(姜鵬運)이며, 증조는 강몽준(姜夢儁)으로 효행으로 칭송이 있었다. 조부는 강창(姜昌)이며, 아버지는 강우기(姜宇基)이다. 어머니는 함안(咸安) 조한우(趙翰愚)의 딸이다. 일찍이 과업(科業)을 포기하고, 역양산(嶧陽山)에 우거하면서 처사로서 살았다. 특히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과 친분이 두터웠다.

  • 희도(羲圖)
    창계(蒼溪)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58(철종 9) - 1934()
    본관
    진산(晋山)
    분류
    기타 > 은사
    강찬희(姜瓚熙)에 대하여

    1858년(철종 9)∼1934년. 본관은 진산(晋山). 자는 희도(羲圖), 호는 창계(蒼溪). 증조부는 영모정(永慕亭) 강상흠(姜尙欽)이며, 조부는 만회재(晩悔齋) 강용영(姜龍永)으로 문학(文學)으로 덕망이 있었으며 향당(鄕黨)의 추대로 중수작(重壽爵) 부호군(副護軍)이 되었다. 아버지는 강한형(姜漢馨)이며, 어머니는 청주(淸州) 한진각(韓鎭珏)의 딸이다. 14세에 자동(紫東) 이정모(李正模)에게 수업하였다. 이후 산천에 은거하면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문헌을 정리하였으며, 소와(素窩) 허찬(許巑: 1850∼1932), 일산(一山) 조병규(趙昺奎: 1846∼1931), 우경(寓耕) 전상무(田相武) 등과 교류하였다. 1901년 봉에는 덕곡서당(德谷書堂)을 창건하였으며, 이의정(二宜亭)을 중건(重建)하고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叟記言)》을 중간(重刊)하였으며, 석래의절(釋萊儀節)을 상정(商訂)하는데 앞장 섰다. 1923년에는 진주 봉산재(鳳山齋)에서 회합을 가져 진주강씨의 《경향대동보(京鄕大同譜)》를 간행하였으며, 1933년에는 《소와유문(素窩遺文)》을 교정 간행하였다.

  • 보일(輔日)
    삼봉(三峰)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592(선조 25)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창국(姜昌國)에 대하여

    미상∼1592년(선조 25) 7월 10일. 조선 중기 의병. 자는 보일(輔日)이고, 호는 삼봉(三峰)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전라북도 순창군(淳昌郡) 팔덕면(八德面)에서 태어났다. 강희맹(姜希孟)의 6세손이고, 성균생원 강덕인(姜德麟)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개가 남다르고 무예에 뛰어났으며 총명하였다. 중봉(重峰) 조헌(趙憲)을 사사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하여 북진하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의 지휘 아래 아들 강대한(姜大漢)및 안영(安暎)·유팽로(柳澎老)와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의군(義軍)이 있는 금산(錦山)으로 가서 싸웠다. 그러나 7월 10일 중과부적으로 전세가 불리하여 마침내 7백 의사와 함께 순절하였다. 처 민씨(閔氏)가 노복을 시켜서 남편의 시신을 찾아오도록 하였으나 찾지 못하여 초혼장(招魂葬)을 치렀다. 임진왜란이 끝난 지 7년 후에 조정에서 금산 전투에서의 공을 기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하였다. 1647년(인조 25) 종용사(從容祠)가 건립되면서 위패를 모셨으며, 1663년(현종 4) 사액(賜額)과 4결(結)의 토지가 내려졌다. 1892년(고종 17)에 부자가 함께 정려(旌閭)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창귀(姜昌貴)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의 박사(博士)인 강계용(姜啓庸)의 증손이다. 아전으로 관직에 나아갔으며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한편 시기는 분명하지 않지만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아들로 봉산부원군(鳳山府院君) 강군보(姜君寶)가 있다.


  • 창원(菖園)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6(광무 10) - 1977()
    본관
    진주(晋州)
    분류
    예능 > 공예가
    강창규(姜昌奎)에 대하여

    1906년∼1977년. 칠(漆)공예가. 특히 건칠(乾漆)의 명인. 본관은 진주. 호는 창원(菖園). 경상남도 함안에서 목공의 아들로 태어나 국민학교를 마친 뒤 16세경에 단신 일본에 유학하여 고학으로 1930년 오카야마공예학교(岡山工藝學校)를 거쳐, 1935년 동경 우에노미술학교(上野美術學校) 칠공과 및 연구과를 졸업하였다. 미술학교 재학중에 제12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시회팔각과자기〉를 첫출품하여 특선, 제19회까지 출품 때마다 여섯 차례 특선을 하여 1940년 추천작가가 되었다. 또, 1935년 일본제국미술전람회에 특선한 이후 여섯 번 계속 특선하였을 뿐만 아니라, 1938년에는 일본천황접견실의 실내장식을 위촉받아 옻칠로 시공하는 등 그의 기예는 일본 작가들을 앞서는 것이었다. 민족항일기에 미술계의 신화적 존재였던 그는 조국 광복 때 일시 귀국하였다가 친일파로 지목되어 출국정지 등 고난을 겪기도 하였다. 1946년에는 ‘창원공예연구소’를 개설, 한때 청진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38선분단 때 월남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국전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제1회·제4회)을 역임, 국전에는 죽을 때까지 19차례 출품하였고, 제22회 때 초대작가상을 받았다. 1956년부터 몇 년간 서라벌예술대학 강사를 한 바 있으나, 끝없는 과음·방랑·칩거 등 무절제한 생활로 가정과 건강 및 작품생활은 점차 희생되었다. 그러나 국전에는 계속 작품을 출품하여 그의 존재를 보여주다가 1970년 중반기에 재기를 결심, 두 차례(1974·1975)의 개인전을 가진 뒤, 1977년 세번째의 개인전 준비 중 작고하여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일본총리대신상(1935)·조선총독부상(1936)·이왕가상(李王家賞, 1936)·조선미술전람회20년공로상(1939)·문교부예술상(1949)·서울시문화상공예상(1956) 등의 화려한 수상경력은 초기의 활약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의 기술은 일본에서 익힌 것이었지만 무늬 표현에서는 일본전통기법인 마키에(蒔繪)를 별로 사용하지 않고 우리나라 전통에 부합되는 자연주제인 포도·석류·나비·물고기·대·보리이삭 등을 자개무늬로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나 그의 특색과 세련미를 잘 나타낸 것은 무문건칠기(無紋乾漆器)로서 특유의 돌출평행선을 기형표면에 무수히 나타내거나 8∼24각면을 기면으로 한 수많은 화병들이다. 이러한 화병·과반·합 등이 작품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자유자재에 가까운 칠색(漆色)구사의 능력 또한 뛰어난 것이었다. 단절 위기에 있던 우리나라 건칠공예를 홀로 끈기 있게 고수하며 현대작품으로 승화시킨 것은 그의 중요한 업적이지만 뚜렷한 후계자를 양성해놓지 못한 것은 애석한 일이다. 1982년 11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강창원건칠작품특별전’이 개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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