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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창서(姜昌瑞)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1211년(고려 희종 7)에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한편 《고려사(高麗史)》 〈선거지(選擧志)〉에 따르면 당시 지공거(知貢擧)는 문하시랑(門下侍郞) 이계장(李桂長)이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대사성(大司成) 조충(趙冲)으로, 강창서 외에 진사시에서는 38인이 합격하였고, 명경과에서는 5인이 뽑혔다고 한다.


  • 창산(蒼山)
    시호

    이칭
    정명희(鄭明熙)/여순지(呂順之)/강동욱(姜東郁)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광무 2) - 1965()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창제(姜昌濟)에 대하여

    1898년∼1965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정명희(鄭明熙)·강동욱(姜東郁)·여순지(呂順之) 등 여러 가명을 썼다. 호는 창산(蒼山). 평안북도 창성 출신. 아버지는 시홍(時洪)이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뒤 상해로 망명하여 1922년에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기자로 활약하였고, 1924년에는 임시정부의 회계검사원과 검사관을 거쳐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독립운동자금 공급과 위임통치문제로 물의를 일으킨 임시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을 결의하였다. 1925년 임시정부 내무부의 참사 겸 경무국장서리에 취임하고, 노병회(勞兵會) 이사에 선임되었다. 1926년 나창헌(羅昌憲)·고준택(高俊澤) 등과 협의하여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였으며, 그 산하단체로 정위단(正衛團)을 조직한 뒤 총무 겸 전략참모로 활약하였다. 병인의용대의 활동으로 상해 한국동포사회의 치안은 확보되고 일제의 앞잡이들은 거의 근절되어 임시정부의 권위는 크게 제고되었다. 1928년에 장쑤성(江蘇省) 경찰학교의 교관을 지냈고, 이듬해에는 안창호(安昌浩)·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 등이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0년에는 상해에 있는 프랑스 정보학교에 가서 교육을 받았으며, 1932년에는 상해 둥난대학(東南大學)을 3년 중퇴한 뒤 장쑤성정부 민정청 경무고문으로 초빙되었다. 1934년 병인의용대장에 선임되고 한국독립당 중앙이사 겸 조사부장을 역임하였으며, 다음해에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한국독립당·의열단(義烈團)·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등 5개 단체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 겸 조사부장에 피선되었다. 1937년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지청천(池靑天)·현익철(玄益哲)·최동오(崔東旿) 등과 같이 조선혁명당을 조직하고 중앙감찰위원에 선임되었다. 중일전쟁 발발 후 임시정부는 일본군의 중국침입으로 근거지를 상해에서 전장(鎭江)·창사(長沙)로 차차 이동해야만 하였다. 이때 창사에서 임시정부의 내분으로 야기된 창사사건(長沙事件)으로 한때 체포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그뒤 중화민국 군사위원회 정보부 심사과장에 취임하고, 1944년 홍진(洪震)·유동열·이연호(李然皓) 등과 같이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조직하고 그 중앙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국민장을 받았다.

  • 인원(仁元)
    잠곡(潛谷)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7(고종 24) - 1946()
    본관
    진주(晉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창희(姜昶熙)에 대하여

    1887년(고종 24)∼1946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인원(仁元), 호는 잠곡(潛谷).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 1430∼1500)의 15세손이다. 품성이 순후(純厚)하고 몸가짐은 공손하고 단정하며, 처세를 신중히 하여 사림의 존경을 받았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정치
    강척(康滌)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1102년(고려 숙종 7) 여름 4월에 을과에 급제를 하였다. 1137년(인종 15)에는 상서좌승(尙書左丞)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지공거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중(李仲)과 함께 진사 이신(李信) 등 28인을 선발하였다. 1141년(인종 19)에 예부상서첨서추밀원사(禮部尙書簽書樞密院事)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4(고종 31) - 194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철구(姜銕求)에 대하여

    1894년∼1943년. 독립운동가. 충청남도 부여 출생. 1917년 대종교신도로 만주에 건너가 동간도의 천영학교(天英學校) 교사가 되어 제2세 민족교육에 정열을 쏟았다. 1920년 1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총재 서일(徐一)과 뜻을 같이하여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총재비서로서 활동하였다. 이해 4월 재무국장 윤정현(尹廷鉉)의 명령으로 국내에 잠입, 부여의 갑부 박창규(朴昌奎)·박남규(朴南奎)·강석민(姜錫民) 등으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조달해가지고 돌아와 서무부 김택(金澤)에게 전달하였다. 1922년 6월에는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 확충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공채 3만5천원을 가지고 입국하여 함경북도 회령에서 김동진(金東鎭), 청진에서 김동순(金東純), 서울에서 문용섭(文龍燮), 부여에서 문장섭(文章燮)·김재설(金在卨) 등의 동지를 포섭하는 데 성공하였다. 공채처분을 마치고 만주로 건너가려고 준비 중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23년부터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가서 대종교를 통해 교포의 지도 및 계몽에 진력하였다. 1942년 만주 동경성(東京城)에 천전(天殿)을 세우기로 계획하고 준비하던 중 재만 항일거물로 지목되어 그해 11월 19일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뒤 혹독한 고문을 당한 나머지 1943년 목단강성(牡丹江省) 자무쓰형무소(佳木斯刑務所)에서 순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 농은(農隱)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0(철종 11) - 1947()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철호(姜哲鎬)에 대하여

    1860년(철종 11)∼1947년. 일제강점기 항일운동가. 호는 농은(農隱)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제주도 대정(大靜)에서 태어났다. 제주 대정상무사(大靜商務社)의 중심인물중 한 사람으로 채구석(蔡龜錫)·송희수(宋希洙) 등과 함께 학문에 몰두하였다. 1910년(융희 4)에 일제에 의해 나라의 주권이 빼앗기자 제주의 유생들과 함께 나라를 구할 뜻을 세우기도 하였다. 1930년 대정면 어업조합장이 되었다. 그 뒤 제주 영주음사(瀛州吟社)의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6년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이 배향된 대정향교의 직원으로서 향교 중수에 힘을 기울였다.

  • 공신(公信)
    죽월헌(竹月軒)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9(명종 14) - 1611(광해군 3)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첨(姜籤)에 대하여

    1559년(명종 14)∼1611년(광해군 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공신(公信), 호는 죽월헌(竹月軒). 아버지는 영의정 운상(雲祥)이다. 1576년(선조 9)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91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1592년 병조좌랑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충청·경상도의 운량어사(運糧御史)가 되어 군량조달에 힘썼다. 1595년 지평이 되고 이어서 사서(司書)를 겸하였으며, 경연에 나가 《주역》을 강론하였다. 1600년에 수찬(修撰)이 된 뒤, 교리·형조정랑·장령·검상·사예·사인·사복시정·전한·홍문관응교를 거쳐, 1603년에 사간이 되어 최영경(崔永慶)·정철(鄭澈) 등을 탄핵하였다. 1604년에 부승지가 되고, 1606년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장예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이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 이조참의·좌부승지·경상도관찰사를 역임하고, 1610년에 대사헌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고 소인을 멀리하였으며, 관부(官府)에서나 가정에서 최선을 다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92(고종 29) - 1918()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춘근(姜春根)에 대하여

    1892년(고종 29)∼1918년 1월 6일. 조선 말기 항일운동가. 제주도 오라(吾羅)에서 태어났다. 평소에 법정사(法井寺)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1918년 10월 5일 법정사 승려인 김연일(金蓮日)·강창규(姜昌奎) 등이 주도한 항일운동에 참가하였다. 김연일은 포교 활동 중에 신도들에게 항일의지를 고취시키고, 도대장(都大將) 박명수(朴明洙)는 일본인을 축출하기 위한 군대를 조직하여 각 고을에 동참을 권하는 격문(格文)을 돌렸다. 이들은 1918년 10월 7일 통신선을 끊고 일본 경찰관과 일본 상인들을 폭행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체포된 사람들은 1919년 2월 4일 첫 재판에서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광주감옥소 목포분감에서 가혹한 고문을 받다가 재판까지 가지 못하고 1918년 1월 6일에 사망하였다. 1996년 12월 20일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2004년 준공된 의열사(義烈祠)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58(철종 9) - 1913()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춘삼(姜春三)에 대하여

    1858년(철종 9)∼1913년. 의병장. 황해도 해주 출신. 1894년 동학당(東學黨)에 입당하여 보부상접주로 종사하였으며, 군대해산 뒤 해주·평산 등지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의 부대는 박기섭(朴箕燮) 의병부대의 중대장인 심노술(沈魯述)이 거느린 의병들과 더불어 평산군 서쪽부터 해주군 사이에 걸쳐서 크게 활약하여 전과를 거두었다. 그가 활약하던 황해도일대 의병의 수는 600∼700명에 달하였으며, 다시 여러 개의 소부대로 분리되어 있었다. 그 주력부대는 박기섭의 의진이었으므로, 상호 연결관계를 맺고 활약하였다. 1910년 해주 근처 여묵(餘默)의 원야(原野)에서 적에게 크게 타격을 주었고, 또 그해 가을 해주 동촌(東村) 청단시(靑丹市) 쟈라기벌판 전투에서 대접전을 벌여 공훈을 세웠다. 그뒤 1913년 5월 일본헌병의 불의의 습격을 받고 붙잡혀 청단시 학곡(鶴谷)에서 총살당하였다. 1977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족
    강충(康忠)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왕건의 4대조. 《고려사》에 실린 김관의(金寬毅)의 《편년통록 編年通錄》에 기록된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의하면, 성골장군(聖骨將軍) 호경(虎景)이 백두산으로부터 내려와 부소산(扶蘇山) 좌곡(左谷)에 이르러 장가를 들어 살았다. 집은 부자였지만 자식이 없었다. 하루는 마을사람 아홉명과 함께 평나산(平那山)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호랑이로 변신한 산신을 만나 부부가 되었다. 그러나 옛부인을 잊지 못해 밤마다 항상 꿈처럼 와서 교합하여 그를 낳았다 한다. 체모가 단정, 근엄하고 재주가 많았다. 예성강 서쪽 영안촌(永安村)의 부자집 딸 구치의(具置義)에게 장가를 들어 오관산(五冠山) 마가갑(摩訶岬)에서 살고 있었다. 그때 패강진(浿江鎭)의 두상대감(頭上大監)인 김팔원(金八元)이 풍수지리를 잘하여 부소군에 왔다가 말하기를, “만약에 군(郡)을 산의 남쪽으로 옮기고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드러나지 않게 하면, 삼한(三韓)을 통합하는 자가 태어나리라.”고 하였다. 이에 군인(郡人)들과 함께 산의 남쪽으로 옮겨 살며 소나무를 온 산에다 심고 송악군(松嶽郡)이라 이름을 고치고 군의 상사찬(上沙粲)이 되었으며, 마가갑의 집을 영업지(永業地)로 삼아 왕래하였다. 집에 천금(千金)을 축적하고 두 아들을 낳아, 끝의 아들을 손호술(損乎述)이라 하였다가 보육(寶育)이라 이름을 고쳤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기타 > 은사
    강취정(康就正)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1115년(예종 10) 7월에 강취정(康就正) 은 진사(進士) 김단(金端)·진유저(甄惟底)·조석(趙奭)·권적(權適)과 함께 송(宋)나라의 태학(太學)에 유학을 갔다. 이때 이미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17년에는 김단(金端), 조석(趙奭), 권적(權適)은 급제를 하였으나, 강취정(康就正)은 진유저(甄惟底)와 함께 송에서 죽었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 - 1469(예종 1)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치성(康致誠)에 대하여

    미상∼1469년(예종 1).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 아버지는 판관 기(耆)이다. 1468년(세조 14)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고, 검열을 거쳐 홍문관저작이 되었다. 이듬해 춘추관기사관으로 《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이때 춘추관에 재직한 자들에게 모두 사초(史草)를 바치게 하였는데, 민수(閔粹)는 자신이 소신껏 쓴 사초가 문제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몰래 꺼내다 주어 고치게 한 사실이 발각되어, 민수와 사인(舍人) 성숙(成俶)과 함께 참형당하였다.

  • 여달(汝達)
    광재(光齋)
    시호

    이칭
    강규(姜逵)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665(현종 6)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탁(姜逴)에 대하여

    미상∼1665년(현종 6).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여달(汝達), 호는 광재(光齋). 어렸을 때의 이름은 강규(姜逵)이며, 후에 탁(逴)으로 고쳤다. 아버지는 강응백(姜應伯)이며, 어머니는 함안이씨(咸安李氏)이다. 어머니 이씨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에 절의(節義)를 지켜 정려(旌閭)되었으며, 그 일이 《이강행실(二綱行實)》에 실려 있다. 1618년(광해군 10)에 박사제자(博士弟子)로 선발되었으나, 광해군(光海君) 대에 정치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출사(出仕)하지 않았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대사성(大司成) 정엽(鄭曄)에 의해서 천거되어 학사(學士)가 되었으며, 이원익(李元翼)의 추천으로 광릉참봉(光陵參奉)이 되었다. 후에 인조가 아버지인 원종(元宗)을 추존하면서 과거를 실시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어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예빈시직장(禮賓寺直長),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등을 거쳤으며, 봉화현감(奉化縣監)이 되어서는 법을 공정하게 시행하였다는 명망이 있었다. 임담(林墰)이 그의 사람됨을 보고 산음현감(山陰縣監)에 특별히 제수하였으나, 대신의 미움을 샀던 일로 인하여 대간이 논박을 하고, 마침내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체직하게 되자 다시는 관직에 뜻을 두지 않았다. 1664년(현종 5)에 나이가 80세가 넘어 통정(通政)에 가자되고 부호군(副護軍)을 제수받았다. 아들로는 강석행(姜錫行), 강석명(姜錫明), 진사 강석형(姜錫亨), 강석평(姜錫平)이 있다.

  • 금로(金路)
    농곡(農谷)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8(광무 2) - 1956()
    본관
    진주(晉州)
    분류
    경제/사회 > 사회사업가
    강태관(姜泰灌)에 대하여

    1898년(고종 35)∼1956년. 일제강점기 자선가. 자는 금로(金路)이고, 호는 농곡(農谷)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전라북도 옥구군(玉溝郡) 회현면(澮縣面) 대정리(大政里)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 병부상서(兵部尙書) 태자태사(太子太師)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의 후손이며,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19세손이다. 아버지는 강유선(姜惟善)이다. 농사를 지으며 근검절약하여 부를 이루었고 이를 희사하여 빈민구제에 힘을 기울였다. 춘궁기뿐만이 아니라 흉년에도 무상으로 식량을 나누어 주었으므로 사람들로부터 칭송받았다. 안경렬(安璟烈)이 그의 공덕에 대하여 지은 자선비가 있다.

  • 여회(汝會)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42(헌종 8) - 1922()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태노(姜泰駑)에 대하여

    1842년(헌종 8)∼1922년. 조선 말기 관리·천문학자. 도정(道正) 강유선(姜유선)의 아들이다. 천문(天文)과 복서(卜筮)를 맡은 일관(日官)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 포천현감 겸 양주진관(抱川縣監兼楊州鎭管)을 지냈다.



  • 시호

    이칭
    강석룡(姜錫龍)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9(고종 26) - 1946()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태동(姜泰東)에 대하여

    1889년(고종 26)∼1946년. 독립운동가. 일명 석룡(錫龍). 함경남도 이원 출생.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김구(金九) 등과 같이 붙잡혀 황해도 해주형무소에서 복역한 바 있으며, 향리에서 3·1운동을 주동하여 고문을 받은 바 있다. 이어 그는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가서 독립운동대열에 주도적으로 가담, 내무차장이 되었다. 상해에 와 있던 원로 김가진(金嘉鎭)을 설득, 비밀항일결사인 대동단(大同團)의 단장으로 취임하도록 적극 주선하였으며, 자신도 비밀대동단원으로 국내외를 연결 왕래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의 밀서를 받아가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연락원 이종욱(李鍾郁)과 같이 은밀히 입국하여 대동단의 전협(全協)에게 전달하였다. 이때 띠고 온 사명은 의친왕(義親王: 李堈公)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모셔가는 것이었다. 의친왕을 상해로 탈출시키는 데 있어서 김춘기(金春基)와 같이 한때 정남용(鄭南用)·김중옥(金中玉)·나창헌(羅昌憲)·이을규(李乙奎)와 마찰을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전협일행으로부터 결박을 당해 갇히기도 하였다. 의친왕은 1919년 11월 9일 이천만동포에게 보낼 유고문(諭告文)을 집필하고 수색역에서 경의선 철도를 이용, 안동으로 가던 도중, 신의주에서 체포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에 전협·한기동(韓基東)·송세호(宋世浩)·이신애(李信愛)·이을규 등과 같이 1920년 1월을 전후로 체포, 실형을 선고받았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 - 191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태성(姜太成)에 대하여

    미상∼1919년. 1919년 4월 5일에 경기도 화성군 팔탄면의 발안(發安)에서 열리는 장날을 이용하여 안상용(安相鎔)·안진순(安珍淳)·안봉순(安鳳淳)·김덕용(金德用)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가, 일본군이 4월 15일 향남면(鄕南面) 제암리(堤岩里) 예배당에서 행한 보복학살로 희생되었다. 발안에는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있고 일본인이 살고 있었는데, 1.5킬로쯤 떨어져 있어 한 동네처럼 왕래하던 곳이다. 당시 1천여 명의 시위 군중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시장을 행진하다가 일경의 무차별 발포로 3명이 부상당하자, 이에 격분한 군중이 돌을 던져 일본인 경찰부장을 죽이고, 근처에 있던 일본 거류민을 응징하여 사상자를 냈다. 다음날부터 수원의 일본 경찰과 헌병대가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고 모진 고문을 가했으나, 제암리 사람들은 모두 부인하여 그대로 풀려 나왔다. 그러나 주재소 경찰 조기창(趙基彰)과 일본 거류민 좌백(佐伯)이 밀고하여, 4월 15일 오후에 일본군 중위 유전준부(有田俊夫)가 군인 20여 명을 지휘하여 제암리를 포위하였다. 일본군은 20세 이상의 남자를 예배당에 모이게 한 후 문을 봉쇄하고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21명을 살해하였다. 강태성의 부인 김씨와 홍원식(洪元植)의 부인 김씨는 남편의 죽음을 보고 통곡하다가 그 자리에서 피살되었다. 부인 김씨와 함께 1968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추서 받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부인 김씨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받았다.

  • 자삼(子三)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79(성종 10) - 1526(중종 21)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태수(姜台壽)에 대하여

    1479년(성종 10)∼1526년(중종 2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삼(子三). 할아버지는 희맹(希孟)이고, 아버지는 장례원사평 학손(鶴孫)이며, 어머니는 평산신씨로 면지(沔之)의 딸이다. 큰아버지 구손(龜孫)에게 입양되었다. 1511년(중종 6) 별시문과에 장원하고, 공조좌랑·예조정랑·교검 등을 지냈다. 생부(生父)가 관노비를 사점(私占)하여 장리(贓吏)로 판정받은 바 있어 관직생활 중 매번 문제가 되었다.



  • 시호

    이칭
    강태영(姜泰英)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1(고종 8) - 1907(순종 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태영(姜泰榮)에 대하여

    1871년(고종 8)∼1907년(순종 1), 다른 이름은 강태영(姜泰英). 어렸을 때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큰집에서 자라면서 명륜당(明倫堂)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의협심이 강하여, 일제가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강요하자, 이에 격분하여 안성 일대에서 의병을 모으고, 1895년 안승우(安承禹)가 이춘영(李春永) 등과 함께 거의(擧義)하자, 안승우 의진(義陣)에 군량미를 제공하며 의병 활동을 도왔다. 1907년 7월 일제가 헤이그 밀사 사건[海牙密使事件]을 구실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매국단체 일진회(一進會)가 요청하여 고종이 일본으로 사과하러 가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하였다. 이에 안성청년회장(安城靑年會長)이었던 그는 김명기(金明起)·임근수(林根洙) 등과 함께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진회 안성사무소를 파괴하고, 평택역(平澤驛)에서 고종이 승차한 열차를 저지시킬 계획을 진행하던 중에 안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었다. 체포 후에도 친일권고에 불응하며 항일의지를 굽히지 않다가 1907년 음력 7월 24일 수원(水原) 서문 밖에서 총살당하였다. 1955년 안성군 안성읍 안성공원 내에 건립된 안성충령탑에 봉안되었고,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받고,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진홍(鎭洪)
    위사(渭史)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0(고종 27) - 1932()
    본관
    진주(晉州)
    분류
    경제/사회 > 사회사업가
    강태우(姜泰于)에 대하여

    1890년(고종 27)∼1932년. 일제강점기 자선가. 자는 진홍(鎭洪)이며, 호는 위사(渭史)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전라북도 옥구(玉溝)에서 태어났다. 초명(初名)은 강봉권(姜鳳權)이다. 아버지는 강낙선(姜洛善)이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도조(賭租: 다른 사람의 전답을 짓고 그 대가로 해마다 내는 소작세)를 싸게 하였고, 춘궁기나 흉년에 많은 굶주린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의 공덕을 칭송하여 지은 전지수(田芝秀) 자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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