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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겸지(謙之). 아버지는 관찰사 자평(子平)이며, 대사간 형(詗)의 아우이다.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1485년 호조좌랑이 되어 진휼에 힘쓰지 않는 경기도내 수령을 적발하였다. 그뒤 예조좌랑을 거쳐 1489년 직강이 되고, 이어서 지평·경연시독관·병조정랑·장령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이목(李穆)·허반(許磐)과 함께 김일손(金馹孫)과 내통했다 하여, 국문을 받은 뒤 장 1백에 가산을 적몰당하고 강계로 유배되어 1504년 능지처사당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신원되고 가산이 환급되었다.
1443년(세종 25)∼1510년(중종 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문(子文), 호는 초당(草堂). 아버지는 순민(舜民).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77년(성종 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가 되고, 1489년 홍문관교리로서 전라도암행어사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중시에 병과로 급제, 사헌부집의가 되고 이듬해 무오사화로 결장(決杖) 1백, 유(流) 3천리, 봉수군정 노우정역(烽燧軍庭爐于定役)의 처벌을 받아 회령에 유배되었다. 1501년 방환되어 직첩이 환급되었으나, 당시에는 대간·홍문관에는 서용(敍用)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뒤 대사간으로서 사간 김당(金璫), 헌납 김숭조(金崇祖)와 더불어 시정(時政)을 논하면서 납간(納諫)·친현사(親賢士)·흥학교(興學校) 등 12개항을 건의하였다. 그는 남효온(南孝溫)·권경유(權景裕) 등과 더불어 사장(詞章)·정사(政事)·절의·효행 등으로 이름이 높았다. 저서로는 《초당집》이 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신천(信川). 강경선의 자는 원경(元景)이며, 일설에는 원경(元卿)이라고 한다. 호는 극재(克齋)이다. 아버지는 이성현감(利城縣監), 창원도호부사(昌原都護府使)를 지낸 강의(姜顗)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헌납(獻納) 정사걸(鄭士傑)의 딸이다. 천성(天性)이 효우(孝友)스럽고 제행(制行)이 매우 높았으며, 아우인 주천(舟川) 강유선(姜惟善)과 더불어 위기지학(爲己之學: 성리학)에 종유(從遊)하였다. 이른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지만, 가문의 화를 만나서, 당시 훈구파가 득세하는 정치적 상황에 마음을 상하여 시와 술로 세월을 달래며 지냈다고 한다. 한편 그의 동생인 강유선 역시 형과 더불어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나, 명종(明宗) 대 이홍윤(李洪胤)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1907년∼1943년. 현대 여류소설가. 황해도 송화 출신. 어릴 때 부친을 여읜 뒤 모친의 개가로 일곱살에 장연으로 이주하였다. 1925년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했으나 중퇴하고, 서울의 동덕여학교에 편입하여 약 1년간 수학하였다. 이 무렵 문학적인 재질을 높이 평가한 양주동(梁柱東)과 동거했으나 곧 헤어졌다. 1932년에 장하일(張河一)과 결혼하고 간도에 가서 살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한때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나, 차츰 나빠진 건강으로 1942년 남편과 함께 간도에서 귀국하여 요양하던 중 죽었다. 1931년 《조선일보》에 단편소설 〈파금 破琴〉을, 그리고 같은 해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혜성》(1931)과 《제일선》(1932)에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여, 단편소설 〈부자〉(1933)·〈채전 菜田〉(1933)·〈지하촌〉(1936) 등과 장편소설 〈소금〉(1934)·〈인간문제〉(1934) 등으로 1930년대 문단에 독특한 위치를 확보한 작가이다. 어려운 살림살이와 병고, 그리고 중앙문단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준열한 작가정신으로 식민지 한국의 빈궁문제를 작품화하는 데 힘썼다. 일련의 작품 가운데서도 특히 〈인간문제〉와 〈지하촌〉은 특이한 작가의 한 사람으로 지목하게 한 문제작이다. 전자는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는 여인의 비극적 생애를 그린 것으로서, 후자는 극한적인 빈궁 속에서 사람의 삶이 얼마만큼 비참해질 수 있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었다. 이렇듯 당시의 극한적인 빈궁상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특히 그 나름의 사실적 기법으로 상세히 묘사한 점에서 그의 작품세계는 누구도 넘보지 못할 1930년대 문학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밖에 주요작품으로는 단편 〈축구전 蹴球戰〉(1933)·〈유무 有無〉(1934)·〈모자 母子〉(1935)·〈원고료이백원〉(1935)·〈해고 解雇〉(1935)·〈산남 山男〉(1936)·〈어둠〉(1937) 등이 있다.
1876년(고종 13)∼미상.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제주도 서귀포(西歸浦) 월평동(月坪洞)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다, 1938년 부산(釜山)으로 건너가 잠시 머무를 때, 고향 출신 인사들과 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중일전쟁’에서 일본이 불리해질 것이라고 한 말이 일본 관헌에게 알려 검거되어 송치되었다. 1939년 1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1804년(순조 4)∼1877년(고종 14).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동진(東鎭)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회현면(澮縣面) 대정리(大政里)에서 출생하였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1021)의 후예이고, 호부사공(戶部事公) 강원전(姜元鐫)의 13세손이며, 아버지는 강수덕(姜守德)이다. 가정의 교훈을 잘 계승하여 익혔으며 효제에 힘을 썼고 성품이 청아하고 문장이 좋았다. 속류를 벗어나 유업을 고수하고, 깨끗하게 처신하여 존경을 받았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진주(晋州).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진주강씨(晋州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의 중시조(中始祖)이다. 문과에 급제한 후 국자박사(國子博士)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으며, 1274년(원종 15)에는 통신사 김방경(金方慶)과 함께 서장관(書狀官)의 직위로 일본에 다녀왔다. 원나라가 일본을 공격할 때 서장관으로서 길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여러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까닭에 이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789년(정조 13)∼1856년(철종 7). 조선 후기 문신. 자는 내경(乃敬) 또는 철보(喆甫)이고, 호는 수암(水庵)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조부는 강흥망(姜興望)이고, 조부는 강도훈(姜道勛)이며, 아버지는 강여조(姜汝朝)이다. 외조부는 김도겸(金道兼)이다. 1815년(순조 15) 을해(乙亥) 정시(庭試)에 병과(丙科) 17위로 급제하였다. 1850년(철종 1) 성학(聖學)과 급히 시정해야 할 폐단 10개 조항을 상소하였다. 이에 병조참지(兵曹參知)로 발탁되었다.
생몰년 미상. 신라시대의 장인(匠人). 신라 육촌(六村)의 하나인 본피부(本彼部) 출신이다. 흔히 강고내말이라고도 하나, 이는 잘못이고 관직을 말한다. 내말은 16관등 중 제11품인 나마(奈麻)에 해당한다. 《삼국유사》 권3 황룡사종·분황사약사·봉덕사종조에 의하면, 755년(경덕왕 14)에 구리로 분황사의 약사여래상을 주조하였다고 전한다. 이 상의 무게가 30만 6,700근이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매우 거대한 상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이 분황사 약사상이 만들어진 경덕왕 때는 그 전해인 754년에 황룡사종을 주성한 것과도 관련하여, 활발한 불교 조상활동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분황사에는 금동약사여래입상이 있으나, 강고내말이 만들었다고 하는 상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된다.
1411년(태종 11)∼1484년(성종 15). 조선 초기의 무신. 본관은 신천(信川). 어려서부터 무술을 익혀 무과에 급제, 내금위(內禁衛) 소속 무장으로, 1452년(단종 즉위) 수양대군이 단종의 고명사은사(誥命謝恩使)로 명나라에 갈 때 수행하였다. 이듬해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가담하여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록되고 행호군(行護軍)이 되었다. 1455년 상호군이 되고, 이해 세조가 즉위하자 첨지중추원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중추원사에 오르고 신천군(信川君)에 봉해졌다. 1457년(세조 3) 인수부윤(仁壽府尹) 재임시 성절 겸 천추사(聖節兼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9년 충청도도절제사를 지냈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 때 공을 세워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책록되고 전라도절도사가 된 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74년에 영안남도절도사(永安南道節度使)로 부임, 혜산진 등 도내 진보(鎭堡)의 성곽을 개축하도록 하고 민폐를 제거하였다. 1476년 다시 지중추원사가 되었다. 성품이 청렴, 강직하여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시호는 공양(恭襄)이다.
1689년(숙종 15)∼1732년(영조 8).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직(聖直), 성해(聖海), 호는 백석(栢石). 진주강씨(晋州姜氏)로 한(漢)나라 금재공(琴齋公)의 후손이다. 증조부는 남탄(濫灘) 강문재(姜文載)이고, 할아버지는 이이당(怡怡堂) 강희세(姜熙世)이고, 아버지는 신곡(新谷) 강지후(姜志厚)이다. 외조부는 임동무(林東茂)이고, 처음 장인은 박만중(朴萬重)이고, 두 번째 장인은 변석지(邊碩祉)이다. 형은 강공보(姜公輔), 강공필(姜公弼), 강공좌(姜公佐)가 있고, 동생은 강공권(姜公權)이다. 서너살 무렵부터 매우 영리하여 종조부인 소치자(笑癡子) 강명세(姜命世)에게 공부하였는데, 한 번 배우고 나면 그대로 외웠다. 1706년(숙종 32)에는 화산(華山) 권집(權)을 따라 화현(花縣)의 가정공(稼亭公)을 성묘할 때 수행하였다. 1721년(경종 1) 신축(辛丑)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69위로 합격하였는데, 아버지의 뜻을 받든 것이었고, 이후로는 관직에 나아갈 생각을 접고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뜻이 풀리지 않으면 책을 놓지 않았다. 1713년(숙종 39)에 처가가 있는 남원(南原) 옥산(玉山)으로 옮겨 가 살았는데, 아버지가 사시는 함양과는 1백여 리나 떨어진 거리를 하루 걸러 문안을 여쭈러 갔고, 귀한 것이나 맛있는 것을 얻게 되면 바로 달려가 드렸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종형 강공량(姜公亮)·강공신(姜公藎)과 함께 도내에 통문을 돌려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곧 난이 진정되었다. 아들로 강영조(姜永祚)와 강철조(姜喆祚)가 있다. 상덕곡(上德谷) 시목정(柿木亭) 뒤 계좌(癸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1968년에 후손 강석호(姜錫浩)가 발행한 《백석유고(栢石遺稿)》가 전한다.
생몰년 미상. 신라말·고려초의 경상북도 풍기 지방의 호족. 선종구산파(禪宗九山派) 가운데 성주산파(聖住山派)의 승려인 여엄(麗嚴)을 후원하였다.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는 지기주제군사상국(知基州諸軍事上國)이었을 때,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소백산에 은거하고 있던 여엄에게 귀의하고, 그를 태조에게 추천함으로써 태조의 부름을 받아 양평의 보리사(菩提寺)에 주석하게 하였다. 927년(태조 10) 9월 견훤이 신라를 습격하여 경애왕이 왕건에게 도움을 청하자, 왕건이 도와주기로 하여 당시 시중이었던 그는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출정하였다. 929년 12월 견훤이 고창군(古昌郡: 지금의 안동)을 포위하자 대상(大相)이던 그는 태조를 따라 이곳을 구원하려고 출정하였다. 이때 홍유(洪儒)와 함께 태조에게 “만약 우리가 싸움이 불리하면 죽령(竹嶺)으로 돌아올 수는 없으니 미리 샛길을 닦아두는 것이 좋겠읍니다.”하고 아뢰었으나, 유금필(庾黔弼)이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은 그대로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진군하여야 한다.”고 반대하여 관철되지 못하였다. 935년 4월 나주의 40여 군(郡)이 후백제에 침략되어 신라와 해로(海路)가 통하지 않자, 태조는 이곳을 진무(鎭撫)할 사람을 천거하게 하였다. 그러자 그가 여러 공경(公卿)들과 함께 유금필을 천거하여 나주지역을 경략하게 하였다. 936년에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할 때 대장군이며, 대상이던 강공훤은 기병 3백인과 군사 1만4700인을 거느리고 출정하여서 신검 등의 항복을 받는 데 공헌하였다.
생몰년 미상. 신라 상고시대의 인물. 생애에 관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당시 신라에서는 눌지마립간이 즉위하여, 이미 30년 동안이나 왜(倭)에 인질로 억류되어 있던 왕의 아우 미사흔(未斯欣, 美海)을 구출하기 위하여 박제상(朴堤上)을 파견하였는데, 박제상은 처음 왜왕의 환심을 사서 안심시킨 뒤 그들이 방심한 틈을 타서 미사흔을 구출하고, 당시 신라사람으로 일본에 가 있던 강구려로 하여금 미사흔의 환국을 호송하게 하였다. 강구려는 그를 보좌하여 무사히 바다를 건너왔다. 미사흔은 먼저 강구려로 하여금 자신의 환국을 전국에 알리게 하였으며, 이때 눌지마립간은 백관들에게 명하여 미사흔을 마중하게 하였다. 왕은 아우 보해(寶海)와 더불어 남교(南郊)까지 나아가 친히 미사흔을 맞이하고 궁궐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고, 대사면령을 내려 죄인을 풀어주었다.
1450년(세종 32)∼1505년(연산군 11). 조선 성종·연산군 때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용휴(用休). 아버지는 좌찬성 희맹(希孟)이다. 문음(門蔭)으로 군기시주부가 된 뒤 돈령부첨정을 거쳐 1479년(성종 10)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재감정(司宰監正)이 되었고, 이어서 좌통례(左通禮)·사헌부집의·영안도경차관(永安道敬差官)을 거쳐, 1486년 중시(重試)에서 이등으로 급제하여 상주목사로 나갔다. 1492년 장례원판결사가 된 뒤 부제학·이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승정원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497년(연산군 3)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대사헌으로서 추국(推鞫)에 참여하여 김일손(金馹孫) 등 사림파(士林派)의 처벌을 가벼이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해 형조판서, 이듬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며, 1502년에는 진원군(晋原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병조판서로 재임중 세자책봉주문사(世子册封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찬성에 올랐다. 1505년 우의정이 되어 하등극사(賀登極使)로 다시 명나라에 가던 중 평안도에서 병으로 죽었다. 그는 모든 학문에 두루 능통하고 직무에 엄밀하여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오랫동안 이조판서에 재직하였는데, 이를 시기하는 자들로부터 전주(銓注)가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평을 들었다. 연산군이 날로 음탕하고 흉포해지자 폐립(廢立)의 뜻을 품고 있었다. 시호는 숙헌(肅憲)이다.
1939년∼1992년. 양화가·판화가. 본관은 진주(晋州). 경상남도 진주 출생. 1965년 홍익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현대미술운동의 젊은 그룹 ‘논꼴’ 동인으로 참가(1965∼1966), 국제풍 행위예술의 해프닝 〈비닐우산과 촛불〉 등을 발표하여(1967∼1970)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1973년 그 후속의 실험적인 표현행위였던 넓은 천과 동아줄의 묶음, 넓은 골판지 위의 새끼 뭉치 등의 반(反)미술적 연출에 ‘형(形)의 상관’이라는 주제를 붙인 개인전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뒤의 유화작업은 1985년의 개인전 주제였던 〈가락〉의 연작이 보여준 전면적 수직선조(垂直線條)의 공간적 색상형상과 거기에 붙여졌던 ‘빛의 흐름’·‘보라빛 속에서’·‘붉은 노을’ 등의 서정적 표현과 심의(心意)의 발현, 그리고 1989년의 개인전 주제인 〈역사의 빛〉 연작에서 볼 수 있었던 한국사의 구체적 문화찬미와 심의적인 색상구조의 형상적 결합으로 이어졌다. 뒤의 연작에는 신라시대의 불상과 인물상, 토기 등의 윤곽이 역사의 면모로 도입되어 주제의 표상을 명료하게 하였고, 아울러 조형적 구성을 순수하고 독특하게 성립시켰다. 한편, 1975년부터는 판화작품만으로 개인전을 거듭하면서 판화가로서의 활동과 위상을 부각시켰다. 1974∼1976년 ∞(무한대) 동인전, 1975∼1985년 한국현대판화가회전, 1981년 동아일보사 국제판화비엔날레 등에 참가하였고, 국제전으로는 1979∼1985년 ‘대가(大家)’와 청년작가전(파리), 1980∼1984년 살롱 콩파레종(파리), 1981년 상파울루비엔날레 등에 참가하였다. 1980∼1992년 한성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1991년에 제작한 300호 크기의 대작 〈역사의 빛〉이 국회의사당에 걸려 있다.
1905년∼197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인 〈진주검무 晋州劍舞〉의 예능보유자. 경상남도 진주 출신. 최완자(崔完子)로부터 검무를 배웠으며, 1967년 1월에 〈진주검무〉의 예능보유자로 인정되었으며, 성계옥(成季玉)·정필순(鄭畢順) 등을 후계자로 두었다.
1890년(고종 27)∼1971년. 일제강점기 시인. 자는 원장(元章)이고, 호는 남송(南松)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완휴재(玩休齋) 강승(姜昇)의 14세손으로 전라북도 김제(金堤)에서 출생하였다. 성품이 인자하고 온화하였으며, 정직관대(正直寬大)하여 욕심이 없었다고 한다. 특히 시문(詩文)에 능하여 여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중홍(仲鴻), 호는 정전(井田). 학행(學行)으로 명성이 알려서 당시의 여러 도백(道伯)들이 그를 천거하였으나, 여러 차례 사양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러나 후에 숭녕전참봉(崇寧殿參奉), 강릉참봉(康陵參奉)을 역임하게 되었으며, 수직(壽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제수 받았다. 《사서강설(四書講說)》, 《역대편년(歷代編年)》, 《역학전의고(易學傳義攷)》 등을 저술하였다.
1898년(고종 35)∼1927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교육자.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제주시 서귀포(西歸浦) 중문동(中文洞)에서 출생하였다. 1914년 전북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 영명중학교(永明中學校)에 입학하였다. 1919년 중학교 재학 중에, 교사 이두열(李斗悅), 박연세(朴淵世) 등이 주도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 7천 장을 복사하는 등 거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주도했던 교사들이 사전 검속(檢束)되자, 강규인은 양기철(梁基哲), 전세종(田世鍾) 등 다수 학생들과 태극기를 흔들며 군산시내로 행진하였다. 이때 합세한 시민 등 5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군산경찰서(群山警察署) 등 시내 각처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살포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을 받았다. 출옥 후 다시 공부하기 위해 숭실학교(崇實學校)에 입학하였으나 3학년 때 중퇴하고 모교인 영명중학교 교사를 지냈다. 독립운동에 유공이 인정되어 1993년에 대통령표창이 주어졌다.
1874년∼1945년. 장로교 목사. 평안북도 선천 출신. 예수교장로회 선교부가 경영하는 선천 신성중학교(信聖中學校)에서 봉직하면서,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자로 활동하였다. 그때 백낙준·박형룡·정석해 등이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1911년 105인사건에 연루되어 이승훈·양전백 등과 함께 투옥, 2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출감 뒤 복직되기는 하였으나, 일본경찰의 심한 감시 때문에 1914년 사임하고, 선천북교회 전도사로 일했다. 191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평양 산정현교회(山亭峴敎會) 목사가 되어 1936년까지 일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평양일대의 거사를 위해 주도적 구실을 하였으며, 숭덕학교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격려연설을 하여 일본경찰에 체포, 다시 2년간 복역하였다. 그뒤 선천 봉동교회 등에서 일하다가 1945년 4월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