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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7년(숙종 23)∼1731년(영조 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장문(長文), 호는 존재(存齋). 찬성 희맹(希孟)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천주(天柱)이다. 한원진(韓元震)·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1723년(경종 3)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영남안무사 박사수(朴師洙)의 종사관으로 수행, 안동에 이르러 경상도 사민(士民)을 모아 군대를 편성, 군사의 조련을 담당하였다. 한편, 관찰사 황선(黃璿)과 수시로 내왕하며 작전에 관하여도 상의하였다. 이때의 공으로 이듬해 장릉참봉(章陵參奉)이 제수되었다.
1565(명종 20)∼1598년(선조 31). 조선 중기 무신. 자는 경중(敬仲)이고, 호는 구헌(龜軒)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현손(玄孫)이며 아버지는 생원 강항(姜恒)이다. 지략과 인품이 뛰어나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서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2년(선조 25) 한산도대첩에서 흥양통장(興陽統將) 전 현감(前縣監) 최천보(崔天寶)와 함께 적선을 쫓다가 유탄(流彈)에 맞아 순절하였다. 전라남도 화순(和順) 동복면(東福面) 주산리(舟山里)에 초혼장을 지냈으며,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올랐다.
1526년(중종 21)∼1576년(선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백실(伯實), 호는 취죽(醉竹). 우의정 희맹(希孟)의 4대손. 아버지는 사용(司勇) 복(復)이며, 어머니는 김안국(金安國)의 딸이다. 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53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3년 뒤 다시 중시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처음 예문관에 뽑혔다가 곧 홍문관정자로 옮겼으며, 1555년에는 김귀영(金貴榮)·이량(李樑) 등과 함께 사가독서한 뒤 이듬해 부수찬에 올랐다. 이어 문학·지평·부교리·교리·부응교·장령·사간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했으며, 1563년 검상·사인을 거쳐 군자감정에 올랐다. 그러나 이러한 관직생활은 당시 권세를 잡고 전횡하던 이량을 추종한 결과였으며, 사신(史臣)들은 그를 이량의 무리였기 때문에 청현직(淸顯職)을 역임할 수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1564년 이량이 축출당하자 계속적인 대간의 탄핵으로 파직당하였으며, 1574년 조정에서 파직된 그의 재서용 논의가 시작되어 대간의 반대가 있기도 했지만, 과거급제자인 점이 고려되어 다시 관직에 나가 제용감정(濟用監正)을 거쳐 장단도호부사를 지냈다. 행신(幸臣) 이량과의 친분으로 많은 비난과 역경을 겪었다. 사가독서 때 사온(賜醞)에 취해 있다 해질녘에 깨어나 겨우 지어 바친 시로 명종으로부터 찬탄과 함께 말 한필을 하사받는 영광을 누렸으며, 널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888년∼1960년. 독립운동가. 함경남도 정평 출신. 1916년 함흥중학교 2학년 재학중 학생사건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1919년에 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대첩에도 참여하였다. 1921년 군정서 사관(軍政署士官)으로 활동했으며, 시베리아에서 자유시 참변을 겪었으며, 이르쿠츠크사관학교의 교관을 지냈다. 1922년 공산주의 반대투쟁을 벌이다가 잡혀 1년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43년 만주 명월구(明月溝) 애국동지회의 청년훈련 교관으로 있으면서 훈련생들에게 독립사상고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86년(고종 23)∼미상. 독립운동가. 3·1운동 때 48인 중의 한 사람. 자는 춘곡(春谷), 호는 덕재(德齋). 3·1운동 당시에 보성법률상업학교(普成法律商業學校) 학생으로 김성득(金性得)·김형기(金炯機)·김문진(金文珍)·김원벽(金元壁) 등과 함께 각 학교 학생들의 시위참여에 대한 일체의 임무를 맡고, 주로 서북친목회를 중심으로 동지규합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갑성(李甲成)으로부터 독립선언문 1천5백장을 받아 각 학교에 배부하고 학생간의 연락책임을 맡았다. 또한, 3월 4일 배재고등보통학교 기숙사에서 각 전문학교 학생 지도급 대표와 장채극(張採極)·전옥결(全玉玦)·강우열(康禹烈) 등 중등학교 대표들이 모여, 서울학생 제2차시위계획을 세우고 김원벽과 함께 제2차운동의 최고 선도자로 추대되었다. 3월 5일 아침 시위를 주도하다가 경찰에 잡혀 1년 6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월남하여 초대함경남도지사 및 함경남도민회장, 건국대학교 초대이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6·25때 납북되었다.
1884년(고종 21)∼1911년. 의병장. 본관은 진주. 본명은 기주(基周). 서울 출신. 1907년 대한제국군 기병부위(騎兵副尉)로 있다가 군대가 해산되자 해산군을 규합하여 의병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뒤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위장귀순하여 장단 고랑포 일본헌병보조원으로 종사하였다. 이때 각지의 의병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면서 거사 기회를 노렸다. 당시 헌병대에는 사형선고를 받고 형 집행을 기다리고 있던 10여명의 동지와 많은 포로의병들이 있었는데, 그는 숙직을 기하여 이들을 석방하고 그들과 함께 무기 및 탄약을 탈취하여 의병운동을 재개하였다. 의병활동지역은 경기도 포천·양주 등지와 강원도 금성·회양·통구 등지로 그 규모는 1백명 내외였다. 1908년 3월에 의병장 이은찬(李殷瓚)이 서울탈환작전에 실패하여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분개하여 강원호(姜元浩)·남학서(南鶴西)·오수영(吳壽泳)·임명달(任明達) 등과 더불어 결사토적할 것을 맹약한 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 1908년 겨울에는 창의한북대장(倡義韓北大將) 연기우(延基羽) 의진과 합세하여 200여명의 의진을 거느리고 포천 송우(松隅)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수일 후 그곳에서 일본헌병대와 교전하던 중 왼쪽다리에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연기우 의진의 도움으로 위기를 면했다. 그뒤 일본헌병사령부에서 체포하기 위하여 현상금 500원을 걸고 체포에 열을 올렸다. 1911년 2월 12일 원산에 나타나 일본인이 경영하던 오처루(吾妻樓)에서 술을 마시다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해 2윌 17일에 서울로 이송, 경무총감부에 수금되었는데 팔다리에 태극기와 극기(克己)라는 글자를 묵자하고 옥중항쟁을 하다가 용산 일본군 행형장에서 총살당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1869년(고종 6)∼1931년. 조선 말기 문장가·교육사업가. 자는 문효(文孝)이다. 본관은 곡산(谷山)이고, 전라북도 옥구군(沃遘郡) 임피면(臨陂面)에서 출생하였다. 판서(判書) 강윤복(康允富)의 16세손이다. 조부는 대호군(大護軍) 강희로(康熙老)이고, 아버지는 강인철(康寅喆)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문장이 뛰어나 일찍부터 문명(文名)이 높았다. 1908년(융희 2) 고향의 보흥학교(普興學校)와 흥영학교(興瀛學校)를 병합하여 임영학교(臨瀛學校)를 설립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군산지방금융조합(群山地方金融組合) 설립에 기여하였다.
1822년(순조 22)∼1868년(고종 5).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공규(公圭)이고,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아버지는 강유빈(姜愈彬)이다. 1852년(철종 3) ‘김정적려유허비(金淨謫廬遺墟碑)’의 건립을 제주목사(濟州牧使)에게 건의하였다. 1853년(철종 4) 왕명이 내려지자, 김정(金淨: 1486∼1520)이 제주도에 귀양 가서 살았던 적소(謫所)에 제주의 유생들과 함께 적려유허비(謫廬遺墟碑)를 세웠다. 1858년(철종 9)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에 생원(生員) 3등 70위로 합격하였다. 제주향교의 도훈장을 지냈다. 당시 제주도로 유배 온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문하생으로 사숙하였으며, 1873년(고종 10) 11월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제주도로 유배 오자 교유하였다.
1897년∼1944년. 독립운동가. 함경북도 회령 출신. 1920년 구춘선(具春先)이 이끄는 국민회(國民會)에 참가하여 활동하였다. 1920년 5월경 만주 화룡현(和龍縣)에서 국민부 제일남부지방 경호부장 장성순(張成順) 휘하의 송언지회(松堰支會) 경호원이 되었다. 활동은 독립군과 독립운동자금 모집, 밀정색출 작업이 주류를 이루었다. 1920년 7월 장성순의 지휘 아래 간도일대에서 국민회를 중심으로 활동할 독립군 모집에 나섰고, 40여 명을 모집하여 본부로 보내는 데 공을 세웠다. 이어서 9월초에는 장성순·함경준(咸京俊)·장여극(張汝極) 등과 함께 일본경찰의 앞잡이였던 이덕선(李德善)·윤달수(尹達壽)·김덕기(金德基) 등 밀정 3명을 색출하여 총살하는 데도 참가하였다. 또 같은 9월초에 함경북도 회령군 화풍면(花豊面) 일대에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앞장서서 수백원을 모금하는 성과를 올렸다. 그리고 9월말에는 고진홍(高鎭洪)·신언규(申彦奎)와 함께 화룡현 사대사(四對社)·증봉동(甑峰洞)·무릉기동(武陵基洞) 부근에서 헌병보조원 출신인 남성률(南聖律)을 체포하여 징치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하여 체포된 그는 강도·살인 등의 죄목으로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1년 3개월 동안 옥고를 치르었다.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1876년(고종 13)∼1954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낙언(樂彦)이고, 호는 난파(蘭坡)이다. 본관은 신천(信川)이다. 호남의 거유(巨儒) 참판(參判) 기정진(奇正鎭)의 손자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이후 후진 양성에 힘써 많은 문인들을 배출하였다. 저서로는 2권 1책으로 된 《난파유고(蘭坡遺稿)》가 있다.
1903년∼1955년. 독립운동가. 제주도 출신. 1927년 4월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할 목적으로 제주 삼덕리에서 고병희(高秉禧) 등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 문고(文庫)를 설치하고 주민들을 대상으로 계몽운동을 실시하였다. 이와 함께 그해 10월에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항하고자 소비조합을 조직, 운영함으로써 일인상품 불매운동도 전개하였다. 그뒤 1929년 9월에는 인근의 여러 마을에다 야학교를 세워 주민들에게 민족정신과 항일의식을 고취시키는 교육사업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 결과 1930년 6월 일제경찰에 잡혀 2년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980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813년(순조 13)∼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방숙(芳叔). 악흠(嶽欽)의 손자이며, 노영(魯永)의 아들이다.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철종조에 들어와 홍문관 부교리·부수찬을 거쳐 1860년(철종 11)에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861년에는 왜역관(倭譯官)으로 재직하면서 사서(私書)를 등전(騰傳)한 혐의를 받아 파직, 문경에 유배되었다. 그뒤 고종조에 들어와 다시 기용되어 좌부승지·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사헌부대사헌 등을 두루 역임한 뒤 1873년 형조판서에 올랐으며, 1875년에는 청나라의 목종이 죽자 진위 겸 진향정사(陳慰兼進香正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한편, 1872년 상시관(上試官)으로 있을 때 당년 과거시험장의 기강이 해이해져 사회적인 물의가 일어나자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사헌부대사헌으로 있던 1876년에는 언사(言辭)를 함부로 하여 체모를 실추시킨 죄로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곧 한성부판윤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그뒤 1879년에는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900년(광무 4)∼미상. 민족항일기에 활약한 판소리와 남도소리의 명창. 전라남도 무안 출신. 판소리는 김창환(金昌煥)과 박유전(朴裕全)에게서 배웠다. 1920년대 원각사와 광무대(光武臺)를 중심으로 활약하였고, 창극단·연예단 등의 순회공연에서 남도잡가와 판소리를 불렀다. 강산조(江山調)의 법통을 이어받았고, 판소리 다섯마당을 두루 잘 불렀으며 그 중에서도 〈박타령〉에 뛰어났다. 신연옥(申蓮玉)·신옥란(申玉蘭)·신진옥(申眞玉)과 함께 〈삼남(三南)염불〉·〈화초사거리〉·〈삼남새타령〉·〈육자배기〉·〈흥타령〉·〈자진육자배기〉·〈성주풀이〉·〈삼산반락〉·〈삼남개고리타령〉 등의 음반을 취입하였고, 가야금병창 단가 〈죽장망혜 竹杖芒鞋〉·〈대장부가 大丈夫歌〉가 음반으로 전한다.
1887년(고종 24)∼1942년. 공산주의운동가. 경상남도 진주 출생. 6세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였으며, 3·1운동 때 농민과 청년의 선두에서 지도하다가 투옥되어 1년6개월간 복역하였다.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가하였으며, 1924년 4월 조선노농총동맹 결성과 함께 중앙위원에 피선되었다. 1925년 4월에는 조선공산당 결성과 함께 당원으로 가입하였으며, 11월에 일어난 신의주사건으로 제1차 조선공산당이 와해되자 1926년초 제2차조선공산당 책임비서로 선임되었다. 그가 속한 당의 정치목표는 공산당의 영도하에 사회·민족 진영을 통합하여 국민당을 조직하는 것이었다. 그는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만의 대회를 만주지방에서 소집하여 국민당을 조직하고, 그 본부를 해외에, 지부를 국내에 두고 공산당원을 이 조직체에 투입, 운영하는 반일민족통일전선조직을 구상하였다. 그는 순종의 인산을 기하여 제2의 3·1운동을 일으키려는 6·10만세운동을 은밀히 주동적으로 진행하다가 계획이 탄로되어 제2차조선공산당은 와해되었다. 1926년 7월 서울 본정(本町, 명동)에서 아이스크림·바나나 장사꾼으로 변장하고 다니다가 체포되어 6년형을 선고 받고 복역중 옥중에서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이상증세를 일으켜 1934년에 출옥하였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죽었다.
1890년∼1954년. 갱정유도(更定儒道)의 제1대 교조. 전라북도 순창 출생. 농부인 덕진(德津)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17세에 혼인하여 농사에 종사하였다. 빈한한 농가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세기말 변혁의 기운과 전근대적 농촌사회의 운명적인 침체상을 경험한 그는 종교체험을 통한 득도의 경지를 꿈꾸었다. 처음 수도생활을 시작한 곳은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진삼동이며, 그곳에서 수도를 시작한 이유는 차경석(車京石)의 보천교(普天敎)가 그곳에 본거지를 두고 전라도 일원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그때 이름을 기동(基東)이라 했다. 그뒤 다시 순창군 쌍치면으로 돌아와 오낙중(吳洛中)으로부터 《음부경 陰符經》을 빌려보면서 본격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39세 때, 순창군에 있는 회문산(回文山) 금강암(金剛庵)에 처자와 함께 기거하면서, 득도를 위한 고행과 정진에 전념하였다. 1929년 마침내 천지를 뒤엎는듯한 이상한 현상들이 일어남과 동시에, 그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 종국적인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그의 생애를 일관되게 기록한 자료는 없으나 그의 종교수련과 관련하여 인격형성의 과정을 미루어보면, 정서적 기질이 남달리 특출한 것 같다. 그는 처, 그리고 아들인 용학(龍鶴) 등과 동거하면서 이른바 누건수(漏巾水)교리를 터득했는데, 교리의 내용은 세 사람이 만민의 죄를 속죄하여 흘린 눈물을 받아서 서로 나누어 마심으로써 인류의 구원을 성취했다고 하는 뜻이다. 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는 죽은 처의 시체와 동거하면서 본인, 죽은 처, 아들의 삼부부자(三夫婦子)가 영혼을 엇바꾸는 생사교역(生死交易)을 성취했다고 한다. 여광여취(如狂如醉)의 상태에서 신천지의 도래를 선언하고, 병을 치료하는 등의 일을 했으나, 민족항일기말에 일제 당국의 간섭과 주변 사람들의 적대시하는 환경에서 본격적인 포교활동은 펼칠 수가 없었다. 갱정유도 교리의 근간인 소박한 구제론과 종말관은 이른바 ‘누건수’의 종교체험에서 나온 것이며, 광복 후 본격적인 교단의 창설과 포교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1954년 이른바 중흥국(中興國)을 건설한다는 정치적 구호의 여파로 인하여 당국으로부터 단속을 받았다.
1591년(선조 24)∼1658년(효종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초명은 대진(大進), 자는 면재(勉哉)·학안(學顔), 호는 춘간(春磵)·한사(寒沙)·정와(靜窩). 사간 익문(翼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합천이씨(陜川李氏)이다. 여러 대에 걸쳐 합천에서 살았다.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10년(광해군 2) 생원·진사시를 거쳐 1612년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세자시강원 설서(說書)·사서(司書)를 역임하였고,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4년 광해군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자 정온(鄭蘊)이 간언하다가 유배되었는데, 그는 정온을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평소에 반목하던 정인홍(鄭仁弘)의 모함으로 삭직당하고 회양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영변부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그뒤 호조좌랑·예조정랑에 올랐다. 다음해 사헌부정언·지평·장령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경세(鄭經世)를 따라서 영남에 가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나, 3월에 청나라와 화친하자 돌아와 사간·주부를 지냈다. 1628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1631년 홍문관부수찬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이 되고, 이어 수찬·부교리 겸 경연시독관·군자감정(軍資監正)을 역임하였다. 1637년 부응교를 지내고 1639년 통정대부가 되었으나, 1641년 병을 이유로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 진주에서 살다가 1644년 동부승지 겸 경연참찬관이 되고, 이어 우승지·병조참지·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1651년 전주부윤이 되어 1년 동안 지낸 다음, 관직에서 물러나 여러 차례에 걸친 임금의 소명에도 불구하고 관도에 오르지 않았다. 생시에 학문하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석천서재(石泉書齋)를 지었으며, 또 유학자들을 위하여 이연서원(伊淵書院)과 덕곡서원(德谷書院)을 지었다. 저서로는 《한사집》 7권 3책이 있다. 합천의 도연서원(道淵書院)에 제향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주. 자는 학중(學仲), 호는 구주(𩿨洲). 아버지는 제용감정 익문(翼文)이다. 학행(學行)과 효도로 여러 번 참봉·세마(洗馬)·사부(師傅)·찰방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웠다. 이듬해인 1637년 충효겸전(忠孝兼全)으로 동부승지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구주집》이 있다.
1880년(고종 17)∼1960년. 한말의 의병장. 본관은 진주. 자는 달주(達周). 전라남도 나주 출신. 맹수(孟秀)의 아들이다. 1907년 군대해산 후 함평군 신광면에서 심남일(沈南一)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에 가담하여 후군장으로 활약하였다. 이어서 선봉장 강무경(姜武景)과 격문을 작성, 살포하여 의병을 모아 훈련시켰다. 1908년 3월 강진군 오치동전투에서 일본군 수백명과 접전하여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해 6월 능주전투에서, 10월 해남성내에서 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적과 접전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1909년 5월 보성군 천동에 주둔, 보성의병장 안규홍(安圭洪)에게 통지하여 석호산(石虎山)에서 회동, 서로 협조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뒤 일본군 50여명과 접전 끝에 적 5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 심남일 의진이 석정(石井)에서 적과 접전할 때, 첩자가 능주 일본헌병대에 밀통함으로써 적의 야습을 받아 많은 의병을 잃었다. 그뒤 칙령에 의하여 의병을 해산하고 풍치(風峙)에 피신해 있던 중 붙잡혔다. 1910년 4월 광주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일본관헌의 고문으로 발목 불구가 되었다. 출감 후 나주군의 독립운동에 은밀히 참여하였다. 1983년에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1598년(선조 31)∼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 유학자·효자. 자는 내의(來儀)이고, 호는 운암(雲菴)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강한(姜漢)의 5세손이며, 아버지는 강순(姜純)이다. 경사(經史)와 자집(子集)을 모두 연구 관통하였다. 주변에서 과거 응시를 권유하였으나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서 과거를 보지 않았다. 상을 당해서는, 3년을 초상(初喪) 때처럼 슬퍼하였고, 평생을 어린아이처럼 부모를 사모하였다. 이런 아름다운 행실이 조정에 알려서 효종(孝宗)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애 추증(追贈)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양필(良弼)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조선 중기의 의병으로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의 7세손이다.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휘하에서 싸운 의병장 강창국(姜昌國)이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고 영특하여 일찍부터 글을 깨우쳤다. 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를 따라 의병운동에 가담하여 운량관(運糧官)으로 활약하였다. 100여 석의 쌀과 사재를 털어 군량미를 보충하는 등 의병 활동을 벌이다, 금산성(錦山城)이 함락될 때, 아버지와 함께 전사하였다. 후에 이러한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고종(高宗) 대에 충신정려를 하사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