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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호변(虎變)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41(중종 36) - 1624(인조 2)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대호(姜大虎)에 대하여

    1541년(중종 36)∼1624년(인조 2).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호변(虎變).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하여 서울에서 자랐다. 증조부는 대사간 강경서(姜景敍)이고, 조부는 강공망(姜公望)이다. 아버지는 예조참의(禮曹參議) 강욱(姜昱)이고, 장인은 주부 이은(李殷)이다. 이은이 소세양(蘇世讓)의 사위이니, 강대호는 소세양의 외손서(外孫壻)가 된다. 1564년(명종 19)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5위에 합격하였고, 음서(蔭敍)로 관직에 올라 1597년(선조 30)에 평안부서윤(平壤府庶尹)이 되었다. 이 때 고을을 잘 다스려 떠도는 백성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 송사(訟事)를 잘 해결하여 칭송이 있었다. 한산군수(韓山郡守)를 지냈고, 환갑을 넘긴 1603년(선조 36)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1604년(선조 37)애는 상주목사(尙州牧使)로, 1605년(선조 38)에는 임천군수(林川郡守)로 나갔는데, 1607년에는 임천군수로서 초하룻날 공상지(供上紙)에 봉표(封標)와 서명을 하지 않은 충청도의 당차 각관(當次各官)을 추고하는 차사원(差使員)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1610년에 판결사(判決事)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거상(居喪)을 예(禮)대로 극진히 하였다. 그리고 여러 번 군읍(郡邑)을 다스렸는데 자못 성적(聲績)이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효행으로 정려(旌閭)되었다. 청음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만사(挽詞)에 이르기를, “양대토록 집안 우의 서로 통하여 정은 마치 골육 친족 사이 같았네[兩世通家誼 情同骨肉親]” 하였으니, 청음 집안과는 아버지 대부터 가깝게 지낸 듯하다. 묘소는 파주군 교하면 다율리에 있으며, 신도비는 교하면 동패 4리 산 12-1에 있다.

  • 여중(汝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0(명종 15) - 1627(인조 5)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강덕룡(姜德龍)에 대하여

    1560년(명종 15)∼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진주. 자는 여중(汝中). 일찍이 무예를 익혀 정기룡(鄭起龍)·주몽룡(朱夢龍) 등과 함께 무용(武勇)으로 ‘삼룡(三龍)’이라는 칭을 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 김성일(金誠一)의 조처에 따라 가관(假官)으로서 함창현감(咸昌縣監)이 되어 제1차진주성전투 때 군기관리(軍器管理)를 맡아 왜병 격퇴에 공을 세웠다. 1593년(선조 26) 명나라 군사가 상주·대구 등지에 주둔하고 있을 때 양료차관(糧料差官)으로 활약하였으며, 그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정기룡을 도와 성주(星州)의 화원현(花園縣), 고령(高靈)의 안림역(安林驛), 삼가(三嘉) 등지의 전투에 참전하여 승전한 공으로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올랐다. 임진년 1년간 12회에 걸친 대소전투에 참가하여 모두 이겼으며, 함창가관(咸昌假官)으로 있는 동안 군민(軍民)을 개유(開諭)하여 단합하게 하였을 뿐 아니라 군량조달에도 공헌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양(晉陽)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덕복(姜德福)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본관은 진양(晉陽)이다. 은렬공(殷烈公) 강민첨(姜民瞻: ?∼1021)의 후손이다.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인재를 발탁할 때에, 남원부(南原府)에서 추천하여 감정(監正)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에 가동 100여 명을 거느리고 수성령(宿星嶺)에서 왜적 60여 명을 사살한 뒤에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순절하였다. 아내 양씨(梁氏)는 진중(陣中)으로 달려가 염습을 마친 뒤에, 널 옆에서 순절(殉節)하였다. 이에 가동 충남(忠男)이 두 사람의 관과 궁검(弓劍)을 거두어 수성령 아래에 장사지냈다. 후세 사람들은 그곳을 궁장동(弓藏洞)이라고 부른다.

  • 성원(聖源)/형중(馨仲)
    용재(慵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68(현종 9) - 1749(영조 25)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덕부(姜德溥)에 대하여

    1668년(현종 9)∼1749년(영조 25).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성원(聖源), 형중(馨仲), 호는 용재(慵齋). 진사(進士) 강석항(姜錫恒)의 아들이며, 강혜부(姜惠溥)의 형이다. 1721년(경종 1) 신축(辛丑)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3등 64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으로, 후에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슬하에 강주진(姜柱震), 강주제(姜柱齊), 강주후(姜柱厚), 강주남(姜柱南) 4형제가 있으며, 4권 2책의 《용재선생문집(慵齋先生文集)》이 전한다.

  • 택지(擇之)
    괴암(槐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93(정조 17) - 1831(순조 31)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도(姜導)에 대하여

    1793년(정조 17)∼1831년(순조 31).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택지(擇之), 호는 괴암(槐庵). 잠은(潛隱) 강흡(姜恰)의 후손으로 강경(姜澃)의 아들이다. 1819년(순조 1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4위로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持平)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문집 1책이 전한다.

  • 여천(汝天)
    선다(仙茶)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16(순조 16) - ?
    본관
    진주(晉州)
    분류
    예능/체육 > 서예가
    강도순(姜道淳)에 대하여

    1816년(순조 16)∼미상. 조선 후기 서예가. 자는 여천(汝天)이고, 호는 선다(仙茶)이다. 현재 남제주군 대정읍(大靜邑)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강대유(姜大囿)이다. 1840년(헌종 6)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윤상도 옥사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유배 초기 김정희는 포교 송계순의 집에 머물렀으나, 몇 년 후 강도순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 강도순은 김정희에게 글과 글씨를 배웠다. 그는 글씨와 그림에 재능이 뛰어났는데, 특히 난초 그림이 유명하였다. 현재 전해지는 작품은 김현우(金鉉禹)가 소장하고 있는 ‘〈귀사야야(歸思夜夜)〉’, ‘〈부진전우(府陣田遇)〉’ 등이다. 그의 집은 1948년 제주도 4·3사건 때 불타버리고 빈 터만 남았는데, 1984년 그의 증손의 고증에 따라 다시 지어, 추사적거지(秋史適居地)로 지정되었으며, 대정읍성 동문 자리 안쪽에 위치하고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63(철종 14) - 192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천주교인
    강도영(姜道永)에 대하여

    1922년∼1944년.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통영 출신. 1939년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박효준(朴孝濬)·이태길(李泰吉)·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는 문예활동을 표방하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발족시켰는데, 그 운동방침으로는 비밀 엄수, 매주 토요일에 회합하여 작품을 감상, 비판할 것 등이었다. 전후 9회의 회합을 통하여 민족문화 존중과 반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1년에는 문예부의 기관잡지인 《학생》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선양에 힘썼다. 한편, 긴박한 국제정세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때를 맞이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임굉(林宏)·이무수(李茂洙)·이태길 등과 함께 1941년에 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뒤 자신의 하숙집에서 수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가 된 뒤에 우수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장차 독립될 때에 지도적 인물로 양성하는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졸업 후, 경상남도 창녕 대합국민학교(大合國民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 앙양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여름에 대구사범학교의 비밀 대중교양지인 《반딧불》이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발각됨으로써, 그해 7월에 체포되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25() - 1986()
    본관
    진양(晋陽)
    분류
    교육/사상 > 학자
    강동진(姜東鎭)에 대하여

    1925년∼1986년. 국사학자. 본관은 진양(晋陽). 경상남도 진주 출신. 치섭(致燮)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이성원(李聖源), 아내는 한영순(韓英順)이다. 1943년 진주공립중학교를 졸업, 1951년 서울대학교 법학부 행정학과를 졸업하였다. 1951년 9월 이후 부산상업고등학교 교사를 거쳐 1955년 수도여자사범대학 강사·부교수, 1958년부터 건국대학교의 교수로 재직중 1971년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년 이후 동경대학 문학부 외국인 연구원을 거쳐 1977년 이 대학 일본사연구과에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문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뒤 1979년부터 쓰쿠바대학(筑波大學)에서 외국인 교수로 재직하던 중 사망하였다. 일생동안 다수의 논문과 6권의 저서 등을 남겼는데, 주로 일본의 조선식민지지배에 관한 연구였다. 대표적인 논문으로는 〈일제지배하의 한국노동자의 생활상〉·〈원산총파업에 대한 고찰〉·〈일제지배하의 노동야학〉·〈식민지통치기의 대조선동화정책론〉·〈갑신정변에 대한 일본의 자유민권운동계 신문의 논조〉 등이 있다. 또, 저서로는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사연구》·《한국노동조합운동사》·《한국농업의 역사》·《일제언론계의 한국관》·《일본언론계와 조선》·《일본근대사》 등이 있다. 특히, 《일본의 조선지배정책사연구》는 3·1독립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에 있어서 이른바 문화정치를 상세하게 연구한 것으로, 민족운동에 대한 억압정책을 문화정치의 이념 및 통치수법의 검토를 통해서 해명하고, 그것이 민족운동에 끼친 영향을 구체적으로 논술하였다.

  • 영찬(榮粲)
    오당(五堂)/초연재(超然齋)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86(고종 23) - 1963()
    본관
    진주(晉州)
    분류
    문신/관료 > 관료
    강동희(姜東曦)에 대하여

    1886년(고종 23)∼1963년. 일제강점기 관리. 자는 영찬(榮粲)이고, 호는 오당(五堂) 또는 초연재(超然齋)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김제(金堤)에서 출생하였다. 은렬공 강민첨(姜民瞻: ?∼1021)의 후손이고, 아버지는 강희순(姜禧淳)이다. 이정직(李定稷: 1840∼1910)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다. 구한말에 군주사(郡主事)에 임명되었고, 1910년(융희 4)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군서기(郡書記)를 하였다. 이후 전라북도 도회의원(道會議員), 동진수리조합(東津水利組合) 평의원(評議員), 만경금융조합장(萬頃金融組合長)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강병선(姜丙善)과 강병철(姜丙喆)이 있다. 그의 저술 《초연재유고(超然齋遺稿)》는 현재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데, 1986년 손자 강재균(姜齋均)이 한글로 번역하여 《초연재미정고(超然齋未定稿)》로 간행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22() - 194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두안(姜斗安)에 대하여

    1922년∼1944년. 독립운동가. 경상남도 통영 출신. 1939년 대구사범학교 재학중 박효준(朴孝濬)·이태길(李泰吉)·문홍의(文洪義)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표면상으로는 문예활동을 표방하여 대구사범학교 문예부를 발족시켰는데, 그 운동방침으로는 비밀 엄수, 매주 토요일에 회합하여 작품을 감상, 비판할 것 등이었다. 전후 9회의 회합을 통하여 민족문화 존중과 반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1941년에는 문예부의 기관잡지인 《학생》을 발간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정신 선양에 힘썼다. 한편, 긴박한 국제정세를 통하여 한국의 독립이 목전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그때를 맞이하여 민족의식을 앙양하고 실력배양을 목적으로, 임굉(林宏)·이무수(李茂洙)·이태길 등과 함께 1941년에 연구회를 조직하고 문예부의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뒤 자신의 하숙집에서 수차례 비밀회합을 갖고,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사가 된 뒤에 우수한 아동들을 대상으로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장차 독립될 때에 지도적 인물로 양성하는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졸업 후, 경상남도 창녕 대합국민학교(大合國民學校) 교사로 부임하여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민족의식 앙양 및 항일운동을 전개하던 중, 1941년 여름에 대구사범학교의 비밀 대중교양지인 《반딧불》이 일본경찰의 손에 들어가게 되어 대구사범학교 비밀결사의 전모가 발각됨으로써, 그해 7월에 체포되었다.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 천희(天希)
    남천(藍川)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두운(姜斗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천희(天希), 호는 남천(藍川).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증조부는 선무랑(宣務郞) 강심(姜深)이고, 조부는 병조판서(兵曹判書) 강덕룡(姜德龍)이며, 부친은 승사랑(承仕郞) 강유윤(姜有胤)이다. 기국(器局)이 괴걸(魁傑)하고 지기(志氣)가 강개(慷慨)하며 용기가 뛰어났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당시 옥과현감(玉果縣監)의 의막(義幕)에서 운량관(運糧官)으로 종군하였는데 수운(輸運)이 민첩하였다. 청주(淸州)에 주둔할 때 성(城)이 무너지자, 동결지책(凍結之策)으로 성벽을 축조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그의 지모가 민활(敏豁)함을 탄상(歎賞)하였다. 강화(講和)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고 귀향하여 ‘숭정일민(崇禎逸民)’ 4자로 당호(堂號)를 짓고 두문자정(杜門自靖)하고 시주자오(詩酒自娛)하며 임천(林泉)에 일생을 마쳤으니 그 내용이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와 《장흥구지(長興舊誌)》에 기술되어 있다. 또한 1991년 발행한 《화순의 옛 시》에 〈적벽제영(赤壁題詠)〉 한 수가 실려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두필(姜斗弼)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1909년 9월부터 1910년 6월 무렵까지 통천군(通川郡)·안변군(安邊郡)·회양군(淮陽郡)·평강군(平康郡) 등 강원도 일대에서 헌병분견소를 습격하는 항일운동을 하였다. 1910년 6월 22일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함께 강원도 이천군(伊川郡) 내고산역의 남쪽에 있는 동방산(東方山)에서 의병 90명을 인솔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여, 헌병분견소의 헌병과 일본인 5명을 사살하였다.



  • 시호
    안정(安靖)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신천(信川)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득룡(康得龍)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본관은 신천(信川). 아버지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이고, 누이동생은 조선 태조(太祖)의 계비(繼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이다. 고려 공민왕조(恭愍王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우사(三司右使)를 지냈다. 조선이 건국되면서 관직을 버리고 관악산 연주암(戀主庵)에 은거하며 매일같이 연주대(戀主臺)에 올라 송도(松都)를 바라보며 고려의 멸망을 애도하였다고 한다. 태조 때 안릉부원군(安陵府院君)에 봉해졌고, 좌리공신(佐理功臣) 첨의정승(僉議政丞)에 녹훈(錄勳)되었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과천시 중앙동(현 정부제2종합청사 뒤)에 있으니, 주산(主山) 관악산(冠岳山) 남쪽 줄기로 뻗어 내린 곳으로 해좌사향(亥座巳向)인데, 금계포란형(金鷄抱卯形)의 명당으로 일컬어진다. 재령강씨(載寧康氏)의 중조(中祖)가 되니, 봉지인 안릉(安陵)은 재령(載寧)의 옛 이름이다.

  • 여향(汝香)
    안재(安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71(선조 4) - 1592(선조 25)
    본관
    진주(晉州)
    분류
    항일/국방 > 의병
    강란복(姜蘭福)에 대하여

    1571년(선조 4)∼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여향(汝香), 호는 안재(安齋)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전라북도 고창(高敞) 출신이다. 감찰어사(監察御使) 강사첨(姜師瞻)의 10세손이며, 부친은 진사(進士) 강곤수(姜坤壽)이다. 천성(天性)이 온후하고 강직했다. 무장(茂長)에서 금산(錦山)으로 이사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의 창의격문을 보고 조헌의 수하로 들어가 용맹을 떨쳤다. 금산 전투에서 고군분투하다가 7백 의사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 기중(期中)
    표운(豹雲)/정은(貞隱)
    시호
    익헌(翼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09(순조 9) - 1887(고종 24)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로(姜㳣)에 대하여

    1809년(순조 9)∼1887년(고종 24).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기중(期中), 호는 표운(豹雲)·정은(貞隱). 현감 이구(彛九)의 아들이다. 1837년(헌종 3) 진사시를 거쳐 1848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1850년(철종 1) 정자(正字)가 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1857년 사간원대사간이 되었다. 원래 북인계열로서 노론 중심의 세도정치 아래 중용되지 못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이 집정한 후 남인계와 북인계를 많이 기용함에 따라 1866년에는 병인양요로 피폐해진 강화도에 위유사(慰諭使)로 나가게 되었다. 그뒤 대원군이 계속 중용하여 1871년 병조판서를 거쳐 이듬해 좌의정이 되었다. 1873년 대원군을 탄핵한 최익현(崔益鉉)의 처벌을 주장하였다가 고종이 친정하게 되면서 우의정 한계원(韓啓源)과 함께 파직당하였다. 1874년 재기용되어 판중추부사를 지내던 중 1878년 효휘전(孝徽殿)의 참례(參禮)에 불참한 죄로 평안남도 삼화(三和)에 잠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었다. 이듬해 일본의 인천항 개항요구에 반대하였으며 판중추부사로 치사하여 봉조하(奉朝賀)로서 기로소에 들어갔다. 1883년 대원군파로 몰려 임오군란 때 난도(亂徒)와 작당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경상남도 안의로 유배되고, 이듬해 풀려나와 1887년 사면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

  • 자장(子章)

    시호
    문경(文景)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10(태종 10) - 1461(세조 7)
    본관
    진주(晋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강맹경(姜孟卿)에 대하여

    1410년(태종 10)∼1461년(세조 7).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 자는 자장(子章). 아버지는 지창녕현사(知昌寧縣事) 우덕(友德), 어머니는 지보주사(知甫州事) 이혜(李惠)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429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사인·지승문원사·집의를 지냈다. 1451년(문종 1) 우부승지에 임명되고, 이듬해 도승지가 되었다. 1453년(단종 1) 이조참판으로서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수양대군을 도왔고, 뒤이어 예문관제학·의정부우참찬을 역임하였다.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의 왕위를 수선(受禪)하는 일에 협력한 공으로 좌익공신(佐翼功臣) 2등에 책정되고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에 봉해졌다. 1456년(세조 2) 좌찬성을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오르고,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8년 좌의정을 거쳐 이듬해 영의정에 승진되었다. 신숙주(申叔舟)가 비명(碑銘)을 지었다.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 위석(渭石)
    시호

    이칭
    강복원(姜復元)/강승원(姜承園)/강양원(姜陽園)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6(건양 1) - 1983()
    본관
    진주(晋州)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강명규(姜明奎)에 대하여

    1896년∼1983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진주. 호는 위석(渭石). 복원(復元)·승원(承園)·양원(陽園) 등의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황해도 봉산 출신. 경성사립오성학교(京城私立五星學校)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 상과에 재학중에 3·1운동에 참가하고, 대일무력항쟁을 계획하려다 비밀이 누설되어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1922년 나석주(羅錫疇)·이성(李成, 일명 景材)·송호(宋虎, 일명 虎聲)·김기덕(金基德) 등과 함께 중국 한단육군군관강습소(邯鄲陸軍軍官講習所)에 입소하여 군사학을 수학하였고, 이어 1923년에는 바오딩육군공병단훈련소(保定陸軍工兵團訓鍊所)에 입소하여 공병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이에 앞서 1921년 상해임시정부의 정원의원이 되었으며, 1924년에는 통의부(統義府) 군사부의 의용군사과장 겸 지도부장에 임명되어 봉천성 흥경현 왕청문 이도구(奉天省興京縣旺淸門二道溝)에서 군사훈련에 헌신하였다. 같은 해에 통의부지휘부가 있는 흥경현 북전자(北甸子)를 기습한 일본군과 싸우다가 부상하였다. 1925년 정의부(正義府) 중앙심판원 겸 생계부(生計部) 이재과장(理財課長), 1927년 백산학교(白山學校) 교원, 1928년 동광학교(東光學校) 교원, 1929년 신민부(新民府) 중앙위원, 1930년 대한농민당 중앙위원, 1931년 대한독립군 참모장, 1932년 신한농민당 위원, 1933년 대한혁명당(大韓革命黨) 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같은해 5월에는 중국구국군총사령(中國救國軍總司令)인 이두(李杜) 등과 연합하여 횡도하자(橫道河子)·석도하자(石道河子)·해랑강(海浪江) 등지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1939년 구국동지회 회장, 1945년 광한단(光韓團) 부단장 등을 역임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중앙감찰위원, 반민특위조사관(反民特委調查官)을 역임하고 육군보병학교를 거쳐 육군대위를 지냈다. 1963년에 건국훈장국민장이 수여되었다.

  • 군석(君錫)

    시호

    이칭
    강명휘(姜命徽)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7(영조 13) - 1801(순조 1)
    본관
    순천(順天)
    분류
    의료/기술 > 한의사
    강명길(康命吉)에 대하여

    1737년(영조 13)∼1801년(순조 1). 조선 후기의 의관. 본관은 순천. 초명은 명휘(命徽). 자는 군석(君錫). 1768년(영조 44)에 식년의과(式年醫科)에 급제, 이듬해 내의원의관이 되었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있을 때부터 총애를 받아 의약에 대한 자문에 응하였으며, 1794년(정조 18)에는 내의원수의(內醫院首醫)가 되었다. 1799년에 왕명으로 《제중신편(濟衆新編)》 8권을 편찬하였으며, 그밖에 《통현집 通玄集》 5권이 초본으로 전한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방서(方書)의 하나인 《제중신편》은 《동의보감》의 번잡함을 피해 간략하게 요약한 것으로 일반의가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수의로 봉직하면서 양주목사와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으며, 숭록대부(崇祿大夫)에까지 이르렀다. 1801년 정조의 병을 잘못 치료하였다 하여 64세로 죽음을 당하였다.

  • 덕수(德壽)
    소치자(笑癡子)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32(인조 10) - 1708(숙종 34)
    본관
    진주(晋州)
    분류
    기타 > 은사
    강명세(姜命世)에 대하여

    1632년(인조 10)∼1708년(숙종 34). 본관은 진주(晋州). 자는 덕수(德壽), 호는 소치자(笑癡子). 1678년(숙종 4) 무오(戊午)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44위로 생원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아버지는 강문재(姜文載)이며, 강원후(姜元厚), 강겸후(姜謙厚), 강관후(姜寬厚), 강인후(姜仁厚) 4형제를 두었다. 문집으로 《소치재유고(笑癡齋遺稿)》가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49(헌종 15) - 1882(고종 19)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군인
    강명준(姜明俊)에 대하여

    1849년(헌종 15)∼1882년(고종 19). 조선 말기의 하급군인. 임오군란 주동자 중의 한 사람. 홍복(弘卜)의 아들이다. 서울 청파(靑坡)동에 살았다. 1882년 6월 5일 선혜청(宣惠廳) 도봉소(都捧所)에서 무위영(武衛營) 소속의 구 훈련도감 군병들에게 군료(軍料)를 지급할 때,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 등과 함께 선혜청고직(宣惠廳庫直)과 무위영영관(武衛營營官)을 구타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6월 9일 김장손(金長孫)·유춘만(柳春萬)이 이끄는 군민들의 포도청 습격에 의하여 풀려나, 다음날 김장손·유춘만 등과 함께 군민을 이끌고 창덕궁에 들어갈 때 입궐을 선창하였다 한다. 7월 16일 청나라군사의 이태원 습격 때 체포되어 혹독한 심문을 받고, 8월 24일 김장손 등 다른 군병 7인과 함께 군기시(軍器寺) 앞길에서 능지사(凌遲死)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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