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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상∼1172년(명종 2). 1170년(의종 24) 9월 정중부(鄭仲夫)의 난 때 강경파로서 이고(李高)와 함께 의종을 시해(弑害) 하려다가 양숙(梁淑)의 권유로 그만두었다. 같은해 명종이 즉위하자 장군이 되고 양숙과 함께 공신(功臣)에 책봉되었다. 1172년 이고와 함께 이의방(李義方)을 비난한 것이 탄로되어 오히려 이의방에게 살해되었다.
1895년(고종 32)∼1974년. 광복군(光復軍). 본관은 평강(平康). 일명 채형세(蔡衡世). 호는 거평(居平). 평안남도 영원 출신. 병묵(秉默)의 아들이다. 향리의 의명소학교(義明小學校)를 졸업하고, 1910년 서울의 오성학교(五星學校)에 입학하였으나 학교폐쇄로 군사학을 배우고자 조선보병대(朝鮮步兵隊)에 들어가 4년간 복무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 적극적으로 가담한 뒤, 탈옥 도주하여 만주 유하현 삼원보(柳河縣三源堡)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훈련책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통의부(統義府) 대표로 김창환(金昌煥)·심용준(沈龍俊) 등과 함께 상해(上海)로 파견되어 국민대표자대회에 참석하는 한편, 임시정부지령으로 중국 뤄양육군강무학교(洛陽陸軍講武學校)에 파견되어 한국인 유학생의 지도책임을 맡았으며, 중국의 직봉전쟁(直奉戰爭)에 참가하여 실전경험을 쌓았다. 1925년 임시정부로부터 육군대위로 임명되었으며, 임시의정원 평안대의원(平安代議員)에 피선되었다. 1926년 임시정부로부터 참의부군무위원(參議府軍務委員)에 임명되고, 1927년 황포군관학교(黃埔軍官學校)에 파견되어 유학생을 지도하다가, 1930년 이후 중국육군제59사 작전참모, 중국육군제2사 참모처장, 교도단장, 중국제19집단군 총사령부 작전참모, 중국육군제78사 참모장 등 중국군의 작전관계 요직을 두루 거치다가, 1942년에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장에 취임하였다. 1944년 광복군 제1지대장으로 전임하여 초모활동·대적선전공작·정보수집·유격전전개 등에 온 정열을 쏟다가 조국의 광복을 맞았으며, 교포의 재산보호 및 안전귀환에 노력하다가 1946년 12월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9년 육군사관학교 3기특과(三期特科)를 나온 뒤 연대장·사단장을 거쳐 1950년 준장으로 예편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수여되었다.
1599년(선조 32)∼1660년(현종 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창(伯昌), 호는 호주(湖洲). 진사 충연(忠衍)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문재에 뛰어났으며, 17세에 생원이 되고, 1623년(인조 1) 개시문과(改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에 보임되고, 사가독서(賜暇讀書)를 거친 뒤 교리·지평·이조좌랑·응교를 역임하고 사간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집의로서 인조를 호종하였다. 김류(金瑬) 등의 강화천도 주장을 반대하고 주화론에 동조하였다가 구금되었고, 1638년 석방되었다. 1641년 광해군이 제주도에서 사망하자 예조참의로서 호상(護喪)을 맡아보았으나 행상(行喪)할 때 담군(擔軍)에게 백건(白巾)을 쓰게 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병을 빙자하여 사임하였다. 중년 이후 술을 좋아하여 때때로 주실(酒失)을 저질러 인조의 눈밖에 났으나, 1646년 이조참의로서 지제교가 되어 누구도 싫어하는 강빈폐출사사교문(姜嬪廢黜賜死敎文)을 지어 다시 현용(顯用)되었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강빈사건에 반대견해를 취하였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 소장하고 있던 교문을 짓는 데 필요한 사륙전서(四六全書)를 모두 불태워버릴 만치 후회하였다고 한다. 이어 대사간을 거쳐 병조참의로 별시문과 초시의 시관이 되었으나, 부정이 있다고 하여 한때 파직되었다. 1647년 동부승지를 거쳐 부제학·대사성·대사간을 역임하고, 다시 이조참의가 되었다. 효종이 즉위한 뒤에도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상작남상(賞爵濫觴)을 경계하였으며, 1652년(효종 3) 이조참판에 오르고, 이듬해에는 대제학으로서 《인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여 가자(加資)되었다. 이후 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역임하고, 여러 차례 대사헌을 거친 뒤 1657년 대제학으로서 《선조수정실록》 편찬의 책임을 졌으며, 곧이어 예조판서·우참찬에 승서되었다. 이듬해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을 8년 동안 겸하고 있었으나 여러 차례 사직상소를 올렸다. 형조판서로 옮겼다가 다시 예조판서가 되었으나 술에 취하여 실의(失儀)하였다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현종이 즉위하자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효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1659년(현종 즉위) 성절사(聖節使)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9월 다시 대사헌에 올랐으나 유계(兪棨)의 탄핵으로 사임하고, 공조참판·내국재조(內局提調)를 거쳐 다시 대사헌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 죽고 난 뒤 실록편찬의 공으로 숭정대부(崇政大夫)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술 때문에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문재에 뛰어나 중용되었다. 작품으로는 시조 2수가 전하며, 저서로는 《호주집》이 있다.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양오(養吾), 호는 반구당(伴鷗堂). 진사 채효범(蔡孝範)의 아들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학행(學行)으로 안동교수(安東敎授)를 제수 받았다.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와 친하여 벼슬하려는 뜻이 없어 그의 동생 채윤구(蔡允龜)와 모두 함께 연산군 때에 은거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로 조광조가 죽자 합강정(合江亭) 위에서 통곡하고 시를 지었다.
1529년(중종 24)∼미상, 본관은 인천. 자는 군서(君瑞), 호는 송담(松潭)·탄은(灘隱). 두문동(杜門洞) 72현의 한 분인 다의당(多義堂) 채귀하(蔡貴河)의 후예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에게서 학문을 전수받았다. 1555년(명종 10) 을묘(乙卯)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 1등 4위로 합격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사우(師友)하여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이 일시(一時)에 추앙되었으며, 사림(士林)에서 그의 덕행을 숭모하여 유호서원(柳湖書院)에 배향하였다. 성품이 총영(聰穎)하고 기상이 빼어났다. 문예가 뛰어나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지만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보고는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수신(修身)에 힘썼고 경학과 성리학을 궁구하였으며, 강호(江湖)의 즐거움에 심취되어 금호강변(琴湖江邊)의 왕옥산(王屋山) 기슭에 소유정(小有亭)과 압구정(狎鷗亭)을 지어 명유(名儒)들과 시를 읊으며 속세를 벗어난 삶을 누렸다. 현재 소유정은 없어지고 압구정은 대구시(大邱市) 북구(北區) 검단동(檢丹洞)에 현존하고 있다. 압구정 기문(記文)은 그의 외증손(外曾孫) 이원정(李元禎)이 지었다.
1689년(숙종 28)∼1754년(영조 30).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치숙(致叔), 호는 지수재(止水齋). 조부는 채시경(蔡時鏡)이고 아버지는 채봉장(蔡鳳章)이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게 수학했다. 아들은 채위하(蔡緯夏)이다.
1879년(고종 16)∼1915년. 한말의 의병장. 평안남도 성천 출신. 대한제국의 육군보병부교로 근무하다가, 1907년 군대강제해산을 당하자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고자 이진룡(李鎭龍)의병진의 부장(副將)이 되어 평안남도·강원도·함경남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1908년 황해도 안평(安平)의 일본순사주재소와 수안(遂安)헌병분견소를 습격하여 무기를 다수 노획하였다. 1910년 4월 강두필(康斗弼)과 함께 의병 30명을 인솔하여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마전동 순사주재소와 황해도 선암(仙巖)헌병파견대를 습격하고, 원산으로 이어지는 수십개의 전주를 베어버렸다. 또한, 같은해 6월에는 85명의 의병을 인솔하여 강원도 남산역(南山驛)·고산역(高山驛)헌병분견소를 공격하였다. 국권침탈 후에도 부하 300∼400명을 거느리고 의병장이 되어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지에서 일제에 대한 무력항쟁을 계속하였으며, 1913년 6월 3일 황해도의 대동리 헌병파견소를 공격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일본헌병들과 교전하여 적에게 큰 두려움을 주었다. 1915년 평안남도 성천군 백년산(百年山) 일대를 근거로 하여 항일유격전을 계속하던 중 7월 5일 붙잡혔다. 1915년 9월 21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평양감옥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평강(平康). 부친은 별좌(別坐) 채시흠(蔡時欽)이다. 1689년(숙종 15) 5월에 어영초관(御營哨官)으로서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할 때 여러 군문(軍門)의 장교와 삼청동(三淸洞)에서 만나 서로 언약하고 상소하려고 하였는데, 대장(臺長)이 듣고 그만두게 하였다. 이에 그 사실을 들어 검토관(檢討官) 심계량(沈季良)이 왕에게 “장교의 무리가 사사로이 모이는 것은 전에 있지 않았던 것이니, 중하게 다스림이 마땅합니다.”고 아뢰어 엄히 문초 당했다. 이 일로 그 해 6월에 그의 주장(主將) 윤이제(尹以濟)를 파면하려다 민암의 연백(筵白)으로 중지하였다. 좌의정(左議政) 목내선(睦來善)이 “채이장은 무부(武夫)로 처음에는 여러 군교와 의논하여 장차 상소하려고 하였으나 도리어 주장에게 금지를 당하니 참으로 모인 일이 없다”고 아뢰었다. 그리고 이미 형신(刑訊)이 있으니 그 죄만 다스림이 마땅하다고 아뢰니 왕이 먼 변경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1683년(숙종 9)에 6품으로 천전(遷轉)되었지만 1694년(숙종 20) 금전과 군포를 모으는 무리에 또 연루되었다. 그러나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홍수헌과 장령(掌令) 안세징(安世徵)·김흥정이 그의 무고함과 심계량의 잘못을 논하였다. 1700년(숙종 26) 장흥부수재(長興府守宰)를 거쳐, 1707년 영흥부사(永興府使)를 역임했고, 1713년(숙종 39)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를 지냈다. 묘는 남양주 진건면 배양리에 있다.
1596년(선조 29)∼1666년(현종 7).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여구(汝久), 호는 오봉(五峰). 함창 출신. 아버지는 증참의 천서(天瑞)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로 국신(國臣)의 딸이다. 인조반정 후 이괄(李适)의 난과 정묘호란 때 행재소(行在所)로 인조를 찾아가 배알하였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동지들과 의병을 모아 경상우병사 민영(閔泳)과 감사 심연(沈演) 등을 도왔으나 화의가 성립되자 향리로 돌아가 대청(對淸)복수책을 상소하였다. 그뒤 척화신으로 청나라의 미움을 사 1640년 김상헌(金尙憲)·조한영(曺漢英) 등과 함께 심양(瀋陽)에 잡혀갔다가 1643년에 돌아왔다. 1648년 그의 충의를 높이 사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제수되었고, 이어 내자시주부(內資寺主簿)·목천현감·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소촌찰방(召村察訪)·군자감주부 등을 역임하고, 1661년(현종 2) 석성현감(石城縣監)이 되어 치적과 진휼(賑恤)에 힘쓴 공으로 포상되었다. 그뒤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를 거쳐 평시서영(平市署令)에 이르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경헌(景憲)이다.
미상∼1303년(충렬왕 29). 고려 말기의 문관. 본관은 평강(平康). 평장사(平章事) 정(禎)의 아들이다. 원종초 우승선이 되고, 1273년(원종 14) 추밀사로서 우정(于禎)이 주살(誅殺)될 때 연루되어 영흥도(靈興島)에 유배되었다. 1289년 다시 기용되어 밀직사사를 지내고, 이어 도첨의중찬(都僉議中贊)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1303년 치사 재상으로서 전 밀직부사만호 김심(金深) 등과 함께 오잠(吳潛)의 치죄를 주청하는 등 활동하였다. 시호는 양정(良靖)이다.
1460년(세조 6)∼미상. 조선 전기 무신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옥구군(沃溝郡) 임피(臨陂) 출신이다. 평장사(平章事) 채송년(蔡松年)의 후손이며, 증조부는 영호군(領護軍) 채왕택(蔡王澤)이고, 아버지는 삼도해운사(三道海運使) 채담(蔡潭)이다. 중종 초기에 선전관(宣傳官)으로 군공(軍功)이 있어 어안구마(御鞍廐馬)를 특별히 받았고, 월환진 병마수군첨절제사(月患鎭兵馬水軍僉節制使)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향리로 돌아와 생을 마쳤다.
미상∼1217년(고종 4). 고려 무인집권기의 문관. 음성의 이속출신으로 학문에 힘써 문과에 급제하였고, 동도(東都: 지금의 경주)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국학학정(國學學正)이 되었는데 7재(齋)의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신종 때에는 진양목사에 올랐고, 동도와 영천 지방에 난이 일어나 안무사(安撫使)를 보내고자 하였으나 그 적임자를 얻기 어려웠는데, 그가 동도유수부사(東都留守副使)가 되자 난적(亂敵)이 스스로 해산, 안정되었다. 1211년(희종 7) 대사성으로 국자감시를 관장하였고, 1214년(고종 1)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역임하였다. 고종 초에 서도유수(西都留守)로 보직되었다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에 이르러 사직하였다. 적도(賊徒)를 평정한 공으로 나라에서 장사를 지냈다.
미상∼1271년(원종 12). 고려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무인으로 문하시랑평장사에 오른 송년(松年)의 아들이다. 음보(蔭補)로 벼슬에 올라 1260년 우부승선이 되고 1263년 추밀원부사·어사대부(御史大夫)를 거쳐 1265년 좌복야(左僕射)로 책봉사(册封使)가 되어 김준(金俊)을 해양후(海陽侯)에 봉하였다. 원종이 몽고에 갈 때 호종한 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올랐다. 1269년 세자인 심(諶: 충렬왕)이 몽고에 갈 때 승선(承宣) 임유간(林惟幹) 등과 함께 호종하였으나 나이가 많다고 하여 먼저 귀국하였다. 1270년 참지정사로서 강도(江都)를 유수(留守)하다가 삼별초의 난으로 도망쳐 나왔다. 1271년 문하시랑평장사로 죽었다. 1276년(충렬왕 2) 원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선(靖宣)이다.
1872년(고종 9)∼1953년. 장로교 목사. 평안남도 중화 출신.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1897년 한국 최초의 개신교 세례교인 중 한 사람인 이성하(李成夏)와 최일형(崔鎰亨)의 전도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1898년에 세례를 받았고 1900년부터는 조사(助事)가 되어 북장로회 리(Lee, G.) 선교사와 함께 중화·대동·곡산 등지를 순회하며 목회활동을 하였다.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김찬성(金燦星)이 인도하는 300여 학생들이 참석한 숭덕학교(崇德學校) 기도회에서 솔선하여 통회자복하였으며, 이로 인하여 장로교와 감리교의 학생들 사이에 부흥운동이 확산되는 한 계기를 만들기도 하였다. 1911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여 그해 독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중화읍교회에 부임하였다. 이후 목회활동을 계속하다가 1934년 은퇴하여 평양노회 공로목사로 추대되어 일선목회 현장에서는 떠났으나, 신신학과 사회복음주의 및 사회주의의 이론을 비판하는 등 보수신앙을 수호하는 글을 통하여 활동을 계속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일제로부터 주기철(朱基徹)·이기선(李基宣) 등과 함께 강경파로 지목되어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1947년 월남하였으며, 1948년에는 선거가 주일에 실시될 계획임을 알고 이에 대한 반대운동을 펴 결국 선거일자를 바꾸게 한 사실도 있었다. 6·25동란중인 1950년 12월 대구로 피난하였고 이후 사회와 교회에 대한 충고로 바쁜 생활을 보냈는데, 특히 편지를 통하여 지도급 인사들에 대한 경고 및 격려를 하였다. 이처럼 말년에는 한국교회를 향하여 회개를 외치던 노선지자(老先知者)로 지내다가 죽었다.
1720년(숙종 46)∼1799년(정조 2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번옹(樊翁). 효종 때 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낸 유후(裕後)의 방계 5대손으로, 지중추부사 응일(膺一)의 아들이다. 홍주 출생. 1. 가계와 관력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한 뒤 1743년 문과정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한림회권(翰林會圈)때에 영조의 탕평을 표방한 특명으로 선발되어 청요직인 예문관사관직을 거쳤다. 1751년에는 중인(中人)의 분산(墳山)을 탈취하였다 하여 1년 이상 삼척에 유배되었다. 1753년에 충청도암행어사로 균역법의 실시과정상의 폐단과 변방대비 문제를 진언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나자 문사랑(問事郞)으로 활약하였고, 그 공로로 승정원동부승지가 제수되었다. 이후 이천도호부사·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 列聖誌狀》 편찬에 참여한 공로로 1758년에 도승지로 임명되었다. 2. 정치편력 이해에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악화되어 세자폐위의 비망기가 내려지자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하여 후일 영조는 채제공을 지적하여 “진실로 나의 사심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정조에게 말하였다 한다. 이후 대사간·대사헌·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을 물러나자, 이해 윤5월에 사도세자의 죽음이 있었다. 복상 후 1764년부터 개성유수·예문관제학·비변사당상을 거쳐 안악군수로 재임중 부친상을 당하여 다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1767년부터 홍문관제학·함경도관찰사·한성판윤을, 1770년부터는 병조·예조·호조판서를 역임하고, 1772년 이후 세손우빈객·공시당상(貢市堂上)이 되었다. 1775년 평안도관찰사로 재임시에 서류통청(庶類通淸)은 국법의 문제가 아니므로 풍속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상소로 인하여 서얼출신자에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후 영조의 깊은 신임으로 약방제조로 병간호를 담당하기도 하였고,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한 뒤에는 호조판서·좌참찬으로 활약하였다. 1776년 3월에 영조가 죽자 국장도감제조에 임명되어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작업에 참여하였다. 이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책임자들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고, 정조특명으로 사노비(寺奴婢)의 폐를 교정하는 절목을 마련함으로써 정1품에 이르렀다. 이 사노비절목은 점차로 그들의 수효를 감소시킴으로써 1801년(순조 1)의 사노비 혁파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후 규장각제학·예문관제학·한성판윤·강화유수를 역임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소론계 공신인 서명선(徐命善)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에 대한 신원의 과격한 주장으로 정조 원년에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의 연관, 그들과 동일한 흉언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집중공격을 받아 이후 8년간 서울근교 명덕산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고, 이때 황극(皇極)을 세울 것, 당론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권력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의 6조를 진언하였다. 이후 1790년 좌의정으로서 행정수반이 되었고, 3년간에 걸치는 독상(獨相)으로서 정사를 오로지 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이조전랑의 자대제(自代制) 및 당하관 통청권의 혁파, 신해통공정책 등을 실시하였으며, 반대파의 역공으로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였으므로,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3. 학문적 견해와 경제 사회관 문장은 소(疏)와 차(箚)에 능하였고, 시풍은 위로는 이민구(李敏求)·허목(許穆), 아래로는 정약용(丁若鏞)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또한, 학문의 적통(嫡統)은 동방의 주자인 이황(李滉)에게 시작하여 정구(鄭逑)와 허목을 거쳐 이익(李瀷)으로 이어진다고 하면서 정통 성리학의 견해를 유지하였다. 그래서 양명학·불교·도교·민간신앙 등을 이단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상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측면에서 선용할 수 있다면 포용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천주교〔西學〕에 대해서도 패륜과 신이적 요소를 지닌 불교의 별파로서, 이적(夷狄)인 청나라 문화의 말단적인 영향이라고 인식하였다. 그러나 서학을 믿는 자에 대하여 역적으로 다스리라는 요구를 당론이라 배척하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척사(斥邪)를 내세우면서도 교화우선원칙을 적용하려 하였다. 자신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로 생각하였으나, 제도개혁보다는 운영의 개선을 강조하여, 중간수탈제거, 부가세 폐단의 제거들을 추진하고 간리(奸吏)의 작폐를 없앰으로써 국가재정 부족을 타개하는 것을 급선무로 생각하였다. 상업활동이 국가재정에 필요함을 인식하였으나 전통적인 농업우선정책을 지켰다. 또한,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사족(士族)우위의 신분질서와 적서(嫡庶)의 구별을 엄격한 의리로서 지켜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영조년간 청남(南人淸流)의 지도자인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채팽윤(蔡彭胤)과 이덕주(李德胄)에게서 시를 배웠다. 친우로는 정범조(丁範祖)·이헌경(李獻慶)·신광수(申光洙)·정재원(丁載遠)·안정복(安鼎福) 등이 있고, 최헌중(崔獻中)·이승훈(李承薰)·이가환(李家煥)·정약용 등이 그의 정치적 계자가 된다. 4. 사후 상황 순조 때 유태좌(柳台佐)가 청양(靑陽)에 그의 영각(影閣)을 세웠고,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허목·채제공을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세워졌다. 저서로는 《번암집》 59권이 전하는데, 권두에는 정조의 친필어찰 및 교지를 수록하였다. 그는 《경종내수실록》과 《영조실록》, 《국조보감》 편찬작업에도 참여하였다. 1799년 1월 18일에 사망, 3월 26일에 사림장(士林葬)으로 장례가 거행되었고, 묘는 경기도 용인에 있다. 1801년 황사영백서사건(黃嗣永帛書事件)으로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 영남만인소로 관작이 회복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1567년(명종 22)∼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선여(善餘), 호는 송촌(松村). 아버지는 승지 낙(洛)이고, 어머니는 찰방 김훈(金壎)의 딸이다. 1610년(광해군 2) 진사가 되었으나 조정에서 폐모론이 일자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청주의 상당산(上黨山)아래에 살면서 독서를 하였다.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희릉재랑(禧陵齋郞)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여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200인을 모병하여 행재소(行在所) 공주로 달려가 인조가 상경하는 것을 호가(扈駕)한 공으로 6품직을 제수받았다. 주부·감찰 등을 지낸 뒤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갔다가 다시 수령에 천거되어 구례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의 명을 받기 전에 죽어 부임하지는 못하였다.
1832년(순조 32)∼1890년(고종 27). 조선 후기 유학자. 자는 자회(子悔)이고, 호는 일재(一齋)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아버지는 채직(蔡溭)이며, 어머니는 현풍(玄風) 곽붕익(郭鵬翼)의 따님이다. 어려서 아버지에게서 수학하였으며, 16세에 장두현(張斗鉉)의 따님과 결혼하였다. 당시 옥계사(玉溪社)에서 그 지역의 많은 선비들과 수학하였다. 과거(科擧)의 폐단을 알고서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에만 정진하였으며, 갑인(甲寅: 1854)에 인근의 선비들과 함께 소암원(嘯巖院)에서 강회(講會)를 열어, 학술의 옳고 그름, 왕도(王道)와 패도(覇道) 그리고 의리(義理)의 분변(分辨), 음양학(陰陽學)과 상수학(象數學)의 미세함에 대해서 강의하였다. 갑술(甲戌: 1874)에 초당을 짓고, 일재(一齋)라고 명명하고서는 태극(太極)과 이기론(理氣論) 등에 대해서 연구하였다. 석전(石田)으로 이거(移居)한 이후에는, 농암(聾巖) 이상석(李相奭: 1835∼1921), 창번(蒼樊) 이이건(李以鍵: 1841∼?) 등과 함께 도의(道義)에 대해서 서로 토론하며 지냈다. 세 번째 얻은 부인인 단양(丹陽) 우참현(禹參鉉)의 따님과의 사이에 아들 채병륜(蔡炳倫)만을 두었다.
1639년(인조 17)∼1689년(숙종 15). 본관은 인천(仁川). 자는 한경(漢卿), 호는 수암(漱菴). 대사헌 채수(蔡壽)의 후손이다. 1681년(숙종 7)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85년(숙종 11) 장원서별검(掌苑署別檢)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일생을 학문에 전심했다.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신석번(申錫蕃) 등에게 사사(師事) 받았다. 글씨에 능했고 주자학(朱子學)에 밝았다.
1380년(우왕 6)∼미상. 조선 전기 문신. 초명은 채지정(蔡知正)이다. 본관은 평강(平康)이고, 전라북도 군산시(群山市) 옥구군(沃溝郡) 임피(臨陂) 출신이다. 평장사(平章事) 채송년(蔡松年)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중랑장(中郞將) 채수(蔡殊)이다. 1405년(태종 5)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1415년(태종 15) 나주목사(羅州牧使)와 형조좌랑(刑曹佐郞)에 부임하였고, 1455년(세조 1)에 수소윤(守少尹)이 되고, 수충위사 동덕좌익공신(輸忠衛社同德佐翼功臣)으로 기록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다. 평강채씨(平康蔡氏) 목사공파(牧使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평강(平康). 1405년(태종 5) 생원으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감찰을 거쳐, 병조좌랑으로 재직하고 있던 1418년(세종 즉위) 강상인(姜尙仁)의 옥사에 관련되어 직첩을 회수당하고 1424년 7월에 외방종편(外方從便)되기까지 7년간 고부(古阜)에 유배당하였다. 그뒤 1439년 우헌납이 되었고, 1455년(세조 1) 수소윤(守少尹)으로 원종공신 3등에 녹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