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생몰년 미상. 고려의 관인. 983년(성종 2) 왕융(王融)이 지공거가 되어 시행한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이 우복야(右僕射)에 이르렀다. 그의 딸은 성종의 후비인 연창궁부인(延昌宮夫人)이며, 그 소생이 원화왕후(元和王后: 현종의 비)가 됨으로써 상서좌복야로 증직되었다.
미상∼1230년(고종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우봉(牛峰). 충헌(忠獻)의 아들이며, 우(瑀)의 동생이다. 왕족 항(沆)의 딸에게 장가들어 보성백(寶城伯)에 봉하여졌고, 벼슬은 참지정사(參知政事)에 이르렀다. 1219년 아버지가 병이 들자 대장군 최준문(崔俊文), 상장군 지윤심(池允深), 장군 유송절(柳松節), 낭장 김덕명(金德明) 등 4인이 형 우를 물리치고 후계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우에 의하여 장인 항, 처남 사도(司徒) 종(琮) 등과 함께 섬으로 귀양갔다가 장인과 처남은 소환되고, 그는 홍주(洪州: 洪城)로 이배되었다. 1230년 홍주에 귀양가 있을 때 우에게 원한을 품고 난을 일으켜 홍주부사 유문거(柳文柜), 판관 전양재(全兩才), 법조(法曹) 이종(李宗) 등을 죽이고 인근 주군(州郡)에 격문을 돌려 반란에 호응하게 하는 한편, 창고를 열어 곡식을 자기의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큰 소란을 벌이다가 병마사 채송년(蔡松年), 지병마사 왕유(王猷) 등에게 패하여 자살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잡혀 옥사하였다. 뒤에 죄가 용서되었다. 시호는 대장(戴莊)이다.
미상∼1592년(선조 2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현령 한조(漢祚)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사도첨사(蛇島僉使)로 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병사를 따라 왕을 호종, 임진강에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 하였는데 그의 종 충복(忠福)이 적병이 추격해옴을 알리면서 빨리 피하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나라의 은혜를 입고 왕사(王事)를 위하여 죽는 것이 신하된 도리라 하여 혼자 분전하다가 생포되어 죽으니 종이 시체를 거두어 묻었다. 난이 끝난 뒤 반장(返葬)되고, 의주의 귀암사(龜巖祠)에 제향되었다.
1905년∼1977년. 장로교 목사·독립운동가·군인. 평안북도 선천 출신. 어려서 만주로 이주하여 성장하였으며 1923년부터 만주 화흥학교(化興學校)교사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24년 항일무장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 참여하였고 1927년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뒤 개신교에 입교하여 목회자가 되기를 결심하고 귀국하였으며, 1935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8월 평북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37년 장로회 총회에서 만주선교를 결의하였을 때 선교사로 임명되어 길림성(吉林省) 쌍양현(雙陽縣)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하여, 남만주지역 선교에 커다란 성과를 올렸다. 광복 후 귀국하여 1948년 육군사관학교 특별 7기로 임관되어, 1960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할 때까지 감찰활동 및 군종업무 지원활동을 하였다. 예편 후 예수교장로회 평양노회장을 역임하고 은성교회를 설립하는 등 활발한 신앙활동을 하였다.
1563년(명종 18)∼1640년(인조 1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계승(季昇), 호는 인재(訒齋). 아버지는 심(深)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희좌(熙佐)의 딸이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도처에서 공을 세웠고, 1598년 그 공으로 원릉참봉(元陵參奉)이 되었다. 1606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08년 예문관대교에 제수되었다. 같은해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로부터 《은자대학연의소대전 銀字大學衍義昭代典》을 받았고, 1612년(광해군 4) 실록청 겸 춘추관에 들어가 《선조실록》 편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후 홍문관수찬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예부종사관을 거쳐 형조참의·부제학·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1627년 횡성사람 이인거(李仁居)의 모반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투옥되었으나 왕의 특명으로 곧 석방되었다. 숙종 때 선산의 송산서원(松山書院)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인재집》이 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간(定簡)이다.
1894년(고종 31)∼1970년. 국어학자·국어운동가·교육자. 호는 외솔. 경상남도 울산 출신. 1. 수학 서당에서 한문을 배운 뒤 고향의 일신학교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1910년 상경하여 한성고등학교(漢城高等學校: 뒤에 경성고등보통학교로 개칭됨.)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하였다. 그해 일본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廣島高等師範學校)문과에 입학하여 1919년 졸업하고, 1922년 4월에 일본 경도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문학부 철학과에 입학, 교육학을 전공하여 〈페스탈로치의 교육학설〉이라는 논문으로 1925년 졸업, 계속하여 그 대학원에서 수학하였다. 2. 사회활동 1926년 4월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1938년 9월 흥업구락부사건으로 파면당할 때까지 재직하였다. 1941년 5월 연희전문학교에 도서관 직원으로 복직하였으나, 그해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사임, 1945년 광복까지 4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1945년 9월부터 1948년 9월까지, 1951년 1월부터 1954년 1월까지 문교부 편수국장에 두차례 재직하였다. 1954년 연희대학교 교수로 취임하여 문과대학 학장과 부총장을 역임하고 1961년 정년퇴임으로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로 추대되었다. 1964년 3월부터 2년간 부산 동아대학교 교수로 재직한 일이 있다. 1954년 학술원 회원에 뽑혔고 이어 임명회원·부회장을 맡았다. 1955년 연희대학교에서 국어학 연구와 그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밖에 1949년 한글학회 이사장에 취임하여 20년간 계속하여 한글학회를 이끌어왔으며, 1949년 한글전용촉진회 위원장, 1957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부회장·대표이사 등으로 국어운동의 중심적인 인물로 활동하였다. 이러한 여러 방면에 걸친 활동과 공로로 1955년 제1회학술원공로상, 1967년 5·16민족상 학예부문 본상을 수상하였고, 1970년 3월 죽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3. 주요 업적 국어학의 연구, 국어정책의 수립, 그리고 교육학의 연구와 국어운동의 추진에 전념하여 그와 관련한 20책에 이르는 저서와 100편에 이르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국어학의 연구는 1910년 봄, 일요일마다 보성중학교에서 열리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周時經)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싹튼 것이라 한다. 이 분야의 업적은 《우리말본》과 《한글갈》로 집약된다. 《우리말본》은 1929년 《우리말본 첫째매 소리갈》, 이어 1937년 온 책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주시경 이래의 문법연구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20세기 전반기의 문법연구를 집대성한 저술이다. 전반적인 체계는 중학교 교재로 편찬된 《중등 조선말본》(1934)에 이미 나타나 있었으나, 이를 보완하고 확대하였는데 인용된 자료의 해박함, 설명의 논리정연함, 체계의 정연함에 있어서 아직 이것을 능가할만한 문법서가 없다고 하여도 지나치지 않는다. 《한글갈》(1941)은 한글 연구의 체계화를 추구한 업적인데, 역사편과 이론편으로 되어 있다. 역사편은 한글제정의 동기와 경위, 한글문헌에 대한 해설, 한글 연구의 역사를 다루고, 이론편은 한글창제 이후 없어진 글자를 주로 다루어서 그 음가를 추정한 것이다. 국어정책의 수립과 국어운동에 대한 집념과 활동도 대단하여 항상 최선봉에서 그 운동을 추진하고 그에 대한 이론투쟁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글자의 혁명》(1947)·《한글의 투쟁》(1958)·《한글 가로글씨 독본》(1968)·《고희기념 논문집》(1968)·《한글만 쓰기의 주장》(1970) 등 단행본으로 한글전용과 풀어쓰기의 이론을 발표하여, 그 운동의 이론적인 지침서가 되었다. 이밖에 국어정화를 주장하면서 일본어의 잔재를 몰아내는 등 우리말도로찾기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의 이론적인 근거는 《우리말 존중의 근본뜻》(1953)에 나타나 있다. 국어 정책에 대한 그의 주장은 전후 6년에 걸친 문교부 편수국장 재직중에 교과서에서 실행되었다. 이에 대한 시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지만, 현행 각종 교과서에서 한글만으로 가로쓰는 체재를 확립한 일은 그의 업적이다. 4. 애국운동 교육학적인 연구는 대학의 졸업논문으로 비롯되는데, 민족주의적인 국민 계몽사상을 고취한 《조선민족 갱생(更生)의 도(道)》(1930)가 공개된 최초의 업적이다. 이 책에는 일생을 일관한 애국·애족의 사상이 뚜렷이 나타난다. 먼저 우리 민족의 성격상의 결함과 질병을 진단하여 그 역사적인 원인을 구명하고서, 민족이 되살아날 원리를 말하고 이어 그 원리를 실천하고 노력할 것을 역설한 것이다. 이 책에 나타난 그의 정신은 광복 이후에 확대, 발전되어 《나라 사랑의 길》(1958)과 《나라 건지는 교육》(1963)으로 간행되었다.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정신을 고취하여 부강한 자유국가와 훌륭한 자주민족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국어운동의 추진에 있어서는 지나치게 급진적인 점도 없지 않으나, 국어문법 체계를 확립한 국어학자로서, 국어와 한글운동의 이론가이며 실천가로서, 민족의 중흥과 민주국가 건설을 외친 교육자로서 남긴 업적과 공로는 크다. 민족의 수난기에 살면서도 고난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간 그 의지는 민족사의 한 귀감이 된다. 그의 학문과 유지는 한글학회를 중심한 학자들에 의하여 계승되고 있으며, 그의 사상을 기리는 모임인 외솔회가 1970년에 창립되어 기관지 《나라사랑》을 발간하며, 해마다 국학연구와 국어운동에 뛰어난 사람에게 외솔상을 시상함으로써 그의 정신을 이어가려 하고 있다.
1902년∼1973년. 서예가. 호는 계전(桂田). 경상북도 월성 출신. 대구고등보통학교(大邱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문학부에서 수학하였다. 대구고등보통학교 재학시절에 서병오(徐丙五)에게 사사하였으며, 이때 스승의 글씨 바탕을 이루는 당나라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을 익혔다. 광복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서예부문에서 제1∼3회 때에 입선하였고, 제4∼7회 때에 특선한 이래로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주로 향리에 머물면서 지방작가로 활동하였다. 특히, 글씨는 행서와 초서를 잘 썼는데, 안진경 글씨의 골격을 잃지 않으면서 부드러운 필치를 구사하였다.
1814년(순조 13)∼1866년(고종 3). 조선 말기 천주교 순교자. 세례명 베드로. 충청남도 공주 출신. 서울 남문 밖에 살면서 어려서부터 부모의 가르침으로 입교하였는데, 동생 방제(方濟)는 김대건(金大建)·최양업(崔良業)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에 유학하였으나 사제수업중 병사하였고, 형 수(燧)는 1866년에 절두산(切頭山)에서 순교하였으며, 큰누이는 일생 동안을 수정(守貞)하였다. 이렇듯 독실한 천주교가정에서 자라나 모방(Maubant, P.)신부의 입국 후로는 신부의 복사(服事)가 되어 그의 전교활동을 도왔으며,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뒤로는 목수일을 하여 묵주 만드는 일과 교회서적 출판을 도왔다. 베르뇌(Berneux, S. F.)주교의 입국 후에는 주로 교회서적 출판의 책임자가 되어 교회서적 보급에 큰 공적을 남겼다. 1866년 베르뇌주교가 체포되고 그때 압수된 교회서적들이 최형이 인쇄한 것이라는 이선이(李先伊)의 밀고로 그도 체포되어, 3월 9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동료 전장운(全長雲) 등과 함께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에 올랐다.
1873년(고종 10)∼1962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영오(永五)이고, 호는 우석(遇石)이다. 본관은 삭녕(朔寧)이며, 전라남도 남원군(南原郡) 사매면(巳梅面) 계수리(桂壽里)에서 태어났다. 영의정(領議政) 최항(崔恒)의 15대 후손이다. 조부는 통덕랑(通德郞) 최석준(崔錫俊)이며, 아버지는 최우정(崔遇廷)이다.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시서(詩書)와 예학(禮學)에 밝았다. 일제하에서 망국(亡國)의 한을 품고 향리에서 은거하며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시문에 뛰어나 그의 애국시(愛國詩)는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膾炙)되었다.
1825년(순조 25)∼1901년(광무 5). 조선 후기의 유학자로, 자는 주서(周瑞)이고, 호는 추계(秋溪)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출신지는 경상북도 성주군(星州郡) 지산리(池山里)이다. 고조부는 증 좌승지(贈左承旨) 최수대(崔壽垈), 증조부는 최광렬(崔光烈), 조부는 최육우(崔陸羽)이고, 아버지는 최운학(崔雲鶴)이다. 외조부는 평산(平山) 신주호(申周虎)이며, 처부는 인동(仁同) 장두원(張斗元)이다. 그는 8, 9세 때에 《소학(小學)》을 읽었으며 책에서 배운 대로 저녁에는 잠자리를 정하고 새벽에는 문안을 드리는 등 부모를 섬기는 도리를 실천하였다. 삼종형(三從兄) 추사(秋史) 최남식(崔南植)에게 배우면서 문예를 크게 이루었다. 1846년(헌종 12) 부친상과 1866년(고종 3) 모친상 때는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따라 3년 상을 치렀다. 그는 맏형 최안식(崔安植)과 함께 살았다. 후에 아들이 없이 죽었으며 장형 최안식의 여섯째 아들 최병오(崔炳五)로 후사를 삼았다. 묘소는 충청북도 영동군(永同郡) 황금면(黃金面) 사부리(沙夫里) 괴정(槐亭) 마을에 있다. 그의 문집으로 《추계선생문집(秋溪先生文集)》이 있다.
미상∼1504년(연산군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영암(靈巖). 자는 탁경(卓卿). 생원 영원(永源)의 아들이다. 1480년(성종 11) 진사가 되고, 148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484년 전교서정자(典校署正字)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사간원헌납이 되고, 이해 4월 장령으로 있을 때 지평 신복의(辛服義)와 더불어 평안도절도사 전림(田霖), 우후(虞候) 권현령(權玄齡)이 변방의 장수로서 평화스러운 때에 병사들을 훈련시키지 않고 머물러 있게 한 죄를 탄핵하였다. 1503년 영암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갑자사화 때 궁궐 앞에서 대죄(待罪)하다가 굶어 죽었다. 문장에 뛰어났으며, 김일손(金馹孫)·성현(成俔) 등과 교유하였다.
1591년(선조 24)∼1662년(현종 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적(子迪), 호는 유하(柳下). 부사 기남(起南)의 아들이며, 영의정 명길(鳴吉)의 아우이다. 1613년(광해군 5)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며, 1623년 인조반정 때 형 명진과 더불어 반정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책록되려 하였으나 한 집안에 여럿을 공신으로 할 수 없다 하여 책거(册去)되고 공조좌랑에 특제되었으며, 그뒤 세자익위사 익찬(翊贊)이 되어 1625년(인조 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듬해 사간원정언이 되어 이유도(李有道)를 탄핵하였다가 송화현감으로 나갔으나 곧 돌아와 이조좌랑·홍문관수찬·사헌부지평·사간·홍문관교리 등을 거쳐 1635년 승지가 되었고, 1638년 병조참의·대사간을 거쳐 도승지가 되었다. 이어서 1641년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왕세자와 함께 심양(瀋陽)에 있다가 용골대(龍骨大)의 청병(淸兵)과 동행, 귀국하였다. 1644년 동지 겸 세폐사(冬至兼歲幣使)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고, 이듬해 대사헌이 되었다. 1648년 이조참판이 되었으며 효종의 즉위와 더불어 도승지가 되어 측근에서 왕을 보살폈다. 1650년(효종 1) 경기도관찰사·이조참판을 거쳐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이조참판 때 전형(銓衡)에 실정(失政)이 많았음을 이유로 간원(諫院)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653년 영해부사로 복직되어 곧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55년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때 기근으로 백성들의 굶주리는 처참상을 보고하고 해서연변(海西沿邊) 열읍(列邑)의 창곡(倉穀) 300∼400석을 이무(移貿)하여 기민진구(飢民賑救)에 협조하여줄 것을 상소하여 왕의 윤허를 받았다.
1575년(선조 8)∼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강화(江華). 자는 사함(士涵). 아버지는 최선계(崔善繼)이다. 1612년(광해군 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16년(광해군 8)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광해군대에 성균관직강·사헌부지평으로 있으면서 폐모론을 주도하였다. 그 뒤 장령·사예(司藝) 등을 지내면서 1620년(광해군 12)에는 무과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뒤에는 이이첨(李爾瞻)의 문객(門客)이라 하여 과방(科榜)에서 이름을 삭제당하는 한편, 파직되어 위리안치되었다.
생몰년 미상. 고려의 학자. 1042년(정종 8) 동경부유수(東京副留守)로 왕명에 의하여 판관 나지열(羅旨說), 사록(司錄) 윤렴(尹廉), 장서기(掌書記) 정공간(鄭公幹)과 더불어 《한서 漢書》·《당서 唐書》를 새로 출판하였다. 이것은 불교서적 이외에 최초로 간행된 전적으로, 그 공로로 포상(褒賞)되었다. 1045년 《예기정의 禮記正義》 80권, 《모시정의 毛詩正義》 40권을 간행하였다.
1536년(중종 31)∼1597년(선조 30). 조선 중기의 무신.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고, 1576년(선조 9) 무과중시에 장원하였다. 여러 관직을 거쳐 1594년에 함경도병마절도사가 되었는데 야인들의 감파보(甘坡堡)침입을 막지 못한 데 대한 견책을 받았고,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는 홍가신(洪可臣)과 함께 주장(主將)이 되어 홍산(鴻山)·임천(林川) 등지에서 난적을 소탕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원균(元均)과 함께 패사하였다. 1604년 이몽학의 난 평정에 세운 공로로 청난공신(淸難功臣) 2등에 추록되고, 1615년(광해군 7) 찬집청(撰集廳)의 주청으로 임난공신록에도 추록되었다.
1854년(철종 5)∼미상.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윤직(允直)이고, 호는 덕초(德樵)이다.본관은 전주(全州)이며, 봉림(鳳林)의 자택에서 태어났다. 고조부는 최운준(崔雲峻), 증조부는 최명득(崔明得), 조부는 최광택(崔光澤)이며, 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추증(追贈) 된 최낙복(崔洛福)이다. 어머니 정부인 개성왕씨(開城王氏)는 왕학득(王學得)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자질과 기품이 온아하고 단정하였다. 성품이 민첩하고 빠르게 이치를 터득하였다. 5, 6세에 이미 책을 좋아하여 나름대로 뜻을 표출하였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의병. 자는 익지(益之)이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의 현손이고 판관(判官) 최득린(崔得麟)의 아들이다. 학문이 뛰어났으며 관직은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냈다. 1636년(인조 14) 운암(雲岩) 이흥발(李興浡)이 척화(斥和)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린 뒤 낙향하였다는 격문(格文)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하여 활을 매고 의병청(義兵廳)으로 들어가 척화를 주장하였다. 이후 의병을 일으켜 청주(淸州)까지 진격하였으나 강화를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되돌아갔다.
1800년(정조 24)∼1850년(철종 1).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성안(性安), 호는 송애(松厓). 고령 출신. 아버지는 공조참판 상원(尙遠)이며, 어머니는 성주도씨(星州都氏)로 상회(尙會)의 딸이다. 큰아버지 상준(尙峻)에게 입양되었으며,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1841년(헌종 7)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박사 등을 거쳐 1843년 성균관전적·예조좌랑·가례도감낭청(嘉禮都監郞廳)을 지냈다. 그뒤 사간원정언으로 있을 때에는 과거의 부조리를 엄단할 것과 시험종목에 현실성이 없는 시(詩)·부(賦) 등을 없애고 경국지문(經國之文)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문교진흥에 힘쓰자는 〈흥학소 興學疏〉와 당시의 정책적인 시폐를 개혁하자는 〈시폐소 時弊疏〉를 올렸다. 봉화현감으로 재직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심이 이미 생긴 뒤에 성이 마음에 갖추어지게 되므로 심이 성보다 앞선다는 심선성후설(心先性後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송애집》 4권 2책이 있다.
1431년(세종 13)∼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초계(草溪). 자는 혼연(渾然). 아버지는 최안지(崔安止)이다. 1453년(단종 1) 증광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고 출사하였다. 1459년(세조 5)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이순지(李純之)와 함께 《기정도보속편(奇正圖譜續編)》을 편찬해 올리고, 다시 1463년(세조 9)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함께 《팔괘도법(八卦圖法)》을 편찬해 올렸다. 1468년(세조 14) 판관(判官)으로서 문과 중시(重試)에 급제하였다. 1479년(성종 10) 경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봉상시정(奉常寺正)을 지냈다. 1484년(셍종 15) 무반 당상계인 절충장군(折衝將軍)에 오르면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임명되고, 오위행호군(五衛行護軍)을 거쳐 문반계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전환되면서, 병조참지(兵曹參知)에 제수(除授)되었다. 이듬해 문과 출신이면서 학술이 부정하고, 음양지리 등을 신봉해 정무직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탄핵되면서 파직되었다. 그리고 다시 천문지리 등을 폐지함은 불가하다는 상서로 인해 논죄되면서, 고신(告身: 관직 임명사령장)을 모두 몰수당하고 외방에 부처(付處)되었으나, 곧 고신을 돌려받고 복직되었다. 1488년(성종 19) 왕명을 받고 세종 때 편찬을 시작했으나 완성을 보지 못한 《태일력(太一曆)》을 편찬해 올렸다. 이후 위장(衛將)에 재직하면서 왕실의 각종 풍수사 등을 관장하였다. 이듬해 위장(衛將)으로서 휘하인 낭장(郎將) 이계희(李季禧)의 불법을 엄폐한 일로 파직되고, 직첩(職牒: 관직 임명사령장)을 몰수당하였다. 1490년(성종 21) 직첩을 돌려받고 곧 복직되며, 1500년(연산군 6) 오위행사직(五衛行司直)으로 치사(致仕: 정년퇴직)하였다가 졸하였다. 정심(精深)한 풍수지리 지식으로 세조와 성종의 총애를 받으면서 풍수지리학의 육성과 국가 및 왕실의 각종 풍수지리사에 크게 기여하였다.
1898년∼1945년.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 출신. 재령의 보명학교(普明學校)를 졸업하였다. 재령군일대의 궁장토(宮庄土)가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로 넘어가 농민들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고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소작료착취가 강화되자, 나석주(羅錫疇)·김덕영(金德永) 등과 함께 이 회사를 상대로 한 항일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뒤 3·1운동이 일어나자 그곳의 청년들과 같이 적극적으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 1924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나석주·김덕영 등의 청년 소작인들과 더불어 이 회사를 상대로 치열한 소작쟁의를 전개하였다. 1920년 한족회(韓族會)와 관련, 나석주·김덕영·최세욱(崔世郁)·이시태(李蒔泰) 등과 함께 사리원을 중심으로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이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평양지방법원 해주지청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감형되어 1927년에 출옥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이, 1977년에 건국포장이 각각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