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경제(景濟), 호는 구포(鷗浦). 황(滉)의 아들이다. 1539년(중종 34)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저작(承文院著作)으로 있을 때 을사사화가 일어났는데, 윤임(尹任)의 일파인 계림군(桂林君) 유(瑠)와 동서인 관계로 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1564년(명종 19)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 같은해 동래부사를 역임하고 홍문관부제학에 이르렀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사람으로 뜻이 굳세고 정직하였다. 남경(南京: 현 서울) 서기로 있을 때, 주인의 권세를 믿고 사람을 함부로 해치던 김의문(金義文)의 하인을 때려 죽여, 사람들의 인망을 샀다. 하급관리로 있을 때, 중국의 단수실(段秀實) 고사(古事)를 예로 들며, 자기는 홀이 아닌 자기로 된 술잔으로 청렴치 못한 관리의 이마를 치겠다고 하며, 입으로 손가락을 물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부정한 관리가 창피하여 몰래 모임에서 빠져 나갔다고 한다. 후에 낭중 이원로(李元老)가 이 일을 가지고 희롱하였다고 한다. 원외랑(員外郞: 상서성의 정 6품 벼슬)을 역임하였다.
1498년(연산군 4)∼미상. 조선 중기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로 전라북도 김제(金堤)에서 태어났다.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후손이며 문간공(文簡公) 최철(崔哲)의 9세손이다. 아버지는 생원(生員) 최간상(崔幹常)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용맹하며 고금의 병서(兵書)에 정통하였다. 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올랐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조정이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자 종제(從弟) 최홍원(崔弘遠)과 함께 의병 5백여 명과 종 수십 명을 이끌고 올라갔다. 그러나 도중에 화친(和親)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와 여생을 마쳤다.
1043년(정종 9)∼1122년(예종 17). 고려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국로(國老). 평민출신이었으나 학문에 힘써 과거에 급제하고 문행(文行)으로 알려졌다. 습유(拾遺)·보궐(補闕)이 되었다가 지평주사(知平州事)가 되어 혜정이 있었다. 1101년(숙종 6)에 예부상서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고 이어 이부상서로 옮겼다가 이듬해 상서우복야 겸 삼사사(尙書右僕射兼三司使)가 되었다. 1103년에 서북면병마사 겸 지중군병마사가 되었다. 이듬해 추밀원사 겸 태자빈객으로서 비서감(祕書監) 정문(鄭文)과 함께 사은사(謝恩使)로 송(宋)나라에 갔는데, 그때 송인들로부터 예절이 법도에 맞다는 칭찬을 받았고 송나라의 황제는 금폐(金幣)를 하사하는 등 후하게 대접하였다.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된 뒤 1105년에 검교태위수사도(檢校太尉守司徒)·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 태자태보(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兼太子太保)·판상서예부사 수국사(判尙書禮部事守國史)가 되었다. 그해 문하시랑동평장사가 되고 뒤이어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에 봉해졌다. 1106년(예종 1)에는 문덕전대학사 상주국(文德殿大學士上柱國)이 되었다. 1107년에 문하시랑평장사로서 권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權判尙書吏部事監修國史)가 되었으며, 그해 왕에게 서경(西京)의 용언(龍堰) 옛터에 새로 궁궐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1109년 9성(城) 환부에 대한 논의가 일자 이를 지지하였으며,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 등이 여진에게 패배한 죄를 극론(極論)하였다. 이듬해 판이예부사(判吏禮部事)가 되었다. 1111년에 수태부(守太傅)가 되고 이듬해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치사(致仕)하였다. 청렴하였으나 관용이 적다는 평을 들었다. 시호는 정경(貞敬)이다.
미상∼1229년(고종 16). 고려의 문신. 한림학사를 거쳐 1201년(신종 4) 예부시랑, 1205년(희종 1) 판예빈성사(判禮賓省事), 1210년 추밀원부사를 지냈으며, 3차에 걸쳐 동지공거(同知貢擧)·지공거(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하였다. 진각국사(眞覺國師) 및 이규보(李奎報)와도 교분이 있었으며, 고종 때 평장사(平章事)에 올라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경문(景文)이다.
미상∼1135년(인종 13). 고려의 무신. 자는 영여(令如). 직산최씨(稷山崔氏)의 시조이다. 무인의 가문에 태어나 젊어서 기절(氣節)을 숭상하여 말타기를 좋아했으며, 음보(蔭補)로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었다.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女眞)정벌에 큰 공을 세웠는데, 여진정벌 때 부처에게 맹세한 일이 있어 돌아온 뒤 개국사(開國寺)에 대장당(大藏堂)을 창건했다. 1113년 전중감(殿中監)으로서 요(遼)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1116년에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서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원수(元帥) 김인존(金仁存)과 더불어 금(金)나라의 군대를 물리쳐 포주(抱州: 義州)를 회복하고 또 의주성(義州城)을 쌓아 그 공으로 동지추밀원사가 되었다. 1120년 형부상서, 1122년 추밀원사판삼사사(樞密院使判三司事)가 되었다. 이해에 인종이 즉위하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는데 이때 이자겸(李資謙)에게 당부(黨附)하여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한안인(韓安仁), 합문지후 이중약(李仲若) 등을 죽였다. 이듬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다. 1124년 지위가 높아져 위력과 권세를 부리다가 이자겸에게 의심을 받아 승주(昇州: 전라남도 순천) 욕지도(褥地島)로 귀양갔다. 이자겸이 제거된 뒤 다른 사람들은 곧 소환되었으나 그는 이자겸에게 붙어 한안인 등을 죽인 죄로 소환되지 않다가 1128년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었다. 1131년에 참지정사가 되어 궁궐 중수의 감독을 맡았다. 그해 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고 뒤이어 좌리공신(佐理功臣)에 봉해지고 검교태부(檢校太傅)가 되었다. 이듬해 평양 궁궐수리의 감독을 맡았다. 귀양가 있는 동안 가산(家産)이 탕진되었다 하여 벼슬을 팔았다가 1134년에 간관(諫官) 최유청(崔惟淸)에게 탄핵을 받아 수사공우복야(守司空右僕射)로 좌천된 뒤 문하시랑평장사가 되어 치사(致仕)하였다. 시호는 양숙(襄肅)이다.
1506년(명종 15)∼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덕여(德輿). 최윤범(崔尹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최천부(崔天符)이고, 아버지는 최경운(崔慶雲)이다. 1591년(선조 24)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사간원정언으로 있으면서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주역(周易)》을 강(講)하였다. 또한 당시 치러진 무과시험의 파행에 대하여 병조당상과 그 실무담당자를 문책할 것을 건의하였다. 1601년(선조 34) 울산판관(蔚山判官), 1605년(선조 38) 전라도사, 이듬해에는 병조정랑과 예조정랑를 지냈으며, 그 뒤 정언·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636년(인조 14)∼1702년(숙종 2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탐진(耽津). 자는 수회(壽會). 보성 출생. 고려시대 문하시중 사전(思全)의 후손으로, 남진(南振)의 아들이다. 1679년(숙종 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각 조(曹)의 낭관 등을 역임하다가 1689년 기사환국 때 화를 당하여 관직을 버리고 향리에 돌아와 은거하였다. 1694년 갑술옥사로 남인(南人)이 몰락하자 성환도찰방(成歡道察訪)에 기용된 뒤 음죽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취소되었다. 당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천문·지리·역상(易象)에도 정통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의 무신. 예종 즉위초에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여진정벌에 참여하고, 1108년(예종 3) 여진이 웅주(雄州)를 포위하자 도순검사(都巡檢使)로 27일 동안 버티다가 문관(文冠)·김준(金晙) 등의 구원으로 적을 격퇴하였다. 이듬해 승선으로 행영병마별감(行營兵馬別監)이 되어 병마사 이부상서(兵馬使吏部尙書)로 있던 문관과 더불어 여진추장들로부터 충성할 것을 서약받고, 길주(吉州)에서부터 차례로 9성의 전구(戰具)와 자량(資糧)을 내지에 거두어들이니 오랑캐가 기뻐하여 그들의 우마로 우리 백성들을 돌려보내고 한 사람도 살상함이 없었다. 1111년에 급사중(給事中)이 되고, 다음해 서북병마사(西北兵馬使)가 되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유생.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세하여 직곡산장(直谷山莊)으로 은퇴하자 1875년(고종 12) 6월 영남유생으로서 경기도 유생 조충식(趙忠植), 전주유생 조병만(曺秉萬) 등과 함께 흥선대원군을 고종이 직접 가서 모셔와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로 인하여 서소문(西小門)밖에서 참형(斬刑)을 당하게 되었으나 당시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김병학(金炳學)과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홍순목(洪淳穆), 박규수(朴珪壽) 등이 연차상소(聯箚上疏)하여 참형중지를 거듭 주장하였다. 그 결과 나주목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
1548년(명종 3)∼1617년(광해군 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사고(士固). 부친은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최안세(崔安世)이다. 부인은 유경심(柳景深)의 딸이다. 1589년(선조 22) 외숙인 이축(李軸)이 안악군수(安岳郡守)로 있을 당시, 질병으로 온천을 하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조정에 알려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봉해졌다. 그리고 어모장군(禦侮將軍)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에 임명되었다. 이후 벼슬을 사양하고 은거하였으며, 1617년(광해군 9) 향년 70세로 타계했다. 사후 이조참찬(吏曹參贊)으로 증직되었다. 묘는 남양주 호평동 천마산 자락에 있다. 아들 최몽량(崔夢亮)은 1612년(광해군 4) 임자식년사마시(壬子式年司馬試)에 진사(進士) 2등으로 합격하였고, 1617년(광해군 9) 정사알성문과(丁巳謁聖文科)에 병과(丙科) 3등으로 급제하여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미상∼1555년(명종 10).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흥해(興海). 자는 문원(文源). 계동(繼潼)의 아들이다. 1528년(중종 2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1540년 고성현령 재직시 농민들의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여 선정을 베푼 공으로 상을 받았으며, 1542년 고성에 기근이 들자 별도로 음식을 장만하여 굶주린 사람을 살리는 데 정성을 다하여 표창을 받았다. 1555년(명종 10) 남치근(南致勤)이 전라도방어사로 부임할 때 나주목사로 있으면서 병으로 환영하지 못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장살당하였다.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갈 때 청렴결백하게 일을 처리하여 조정에서 그의 현명함을 알고 더욱 애석하게 여겼다.
1862년(철종 13)∼1947년. 일제강점기 유학자. 자는 형여(炯汝)이고, 호는 학계(鶴溪)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경상남도 고성(固城) 출신이다. 증조부는 최필홍(崔必鴻)이고, 조부는 최백진(崔百鎭)이며, 아버지는 순국지사(殉國志士)인 서비선생(西扉先生) 최우순(崔宇淳: ?∼1911)이다. 형은 운계(雲溪) 최정모(崔正模)이다. 배운 것을 지키고 실천하였으며 아버지의 뜻을 숭상하고 이어받았다. 저서로 시문집인 《학계유집(鶴溪遺輯)》이 있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호는 묵재(黙齋)이다. 본관은 전주(全州)로 전라북도 무주(茂朱)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고궁당(固窮堂) 최수손(崔秀孫)이고 아버지는 최계성(崔繼成)이다. 중년에 두 형을 잃자 명리를 따르는 세상의 풍조를 개탄하며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산속에서 여러 해를 보내며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탐독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학문을 듣고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에 제수(除授)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과거(科擧)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송일홍(宋一洪)은 그를 한(漢) 나라의 곽임종(郭林宗)에 견주기도 하였다. 1835년(헌종 1) 수분와(守分窩) 김단(金湍), 신재(新齋) 채달주(蔡達周)와 함께 현재 전라남도 부안군(扶安郡) 부안읍(扶安邑) 옹중리(瓮中里) 387-2의 옹정서원(瓮井書院)에 배향되었다.
1208년(희종 4)∼1229년(고종 16). 고려의 관인. 본관은 철원(鐵原). 자는 소우(昭于). 고종 때 10여년간 총재(冢宰)의 지위에 있었던 종준(宗峻)의 차남이며, 집정자 최의(崔竩)의 정권계승에 주요 역할을 담당한 장군 영(瑛)의 동생이다. 고종 때 문음(門蔭)으로 양온령동정(良醞令同正)에 취임하고, 이어 경선점녹사(慶仙店錄事)가 되었으나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추밀부사 홍진(洪縉)의 장인이며, 원종 때의 문하시중 이장용(李藏用)이 처남이다.
1529년(중종 24)∼1603년(선조 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언명(彦明), 호는 월담(月潭). 한양 출신. 아버지는 군수 여주(汝舟)이며, 어머니는 한세륜(韓世倫)의 딸이다. 이중호(李仲虎)의 문인이다.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72년(선조 5) 학유를 거쳐 검열이 되었고, 사국(史局)에 뽑혀 직필로써 김성일(金誠一)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그뒤 공조·형조의 좌랑, 정언, 해운판관을 지내고, 경상도도사가 되어서는 군적(軍籍)을 잘 다스렸다. 1576년 수안군수로서 선정을 베풀어 고을사람들이 송덕비를 세웠으며, 그 이듬해 함경도암행어사로 나가 그 지방의 기한(饑寒)과 국방대책 8조를 상소하였다. 그뒤 집의·사간·예조참판·대사간·이조참판·한성판윤·대사헌 등을 거쳐 1590년 이조판서가 되었다. 그간에 1583년에는 성절사로, 1589년에는 사은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평난(平難)·광국(光國)공신에 각각 3등으로 녹훈되고 해성군(海城君)에 봉하여졌다. 1592년 임진왜란 때에는 평양까지 선조를 호종하였으며, 왕비와 세자빈을 배종(陪從), 희천에 피난하였고, 이듬해 검찰사(檢察使)가 되어 왕과 함께 환도하여 좌찬성·세자이사(世子貳師)로 지경연사를 겸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783년(정조 7)∼1874년(고종 11). 조선 말기의 유학자.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국보(國輔), 호는 구암(苟菴). 아버지는 군수 언헌(言憲)이며, 어머니는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영소(榮素)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비범하여 사서를 읽고 제가(諸家)의 주석을 변정(辨正)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하였다. 20세에 반시(泮試)에 합격하여 1823년(순조 23)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처음 임명되고, 이어 사재봉사(司宰奉事)에 승진되었다. 1834년 사옹원봉사(司饔院奉事)를 거쳐 익위사시직(翊衛司侍直)이 되었다. 일직(日直) 때에 헌종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개설한 서연(書筵)강의에 입시하여 시강하였다. 그해 11월에 헌종이 즉위하자 계방참하관(桂坊參下官)에 임명되었다. 1835년(헌종 1) 산릉도감낭청(山陵都監郞廳)이 되었으며, 이어 의영고주부(義盈庫主簿)와 의금부도사를 역임한 뒤에 산청현감에 임명되었다. 그뒤 면천군수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가 1844년 다시 거창부사 등을 거쳐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이 되었다. 박영원(朴永元)·조봉진(曺鳳振)·홍경모(洪敬謨)·박기수(朴祺壽)·정원용(鄭元容) 등과 어릴 적부터 두터운 교유가 있었다. 성품이 결백하고 지조가 강건하며, 해박한 지식의 소유자로 경사에 통달하고 시문에도 조예가 깊었다. 만년에는 집에 국화를 심고 은일하며 시작(詩作)과 저술에 힘썼다. 저서로는 《구암부묵 苟菴副墨》 16권, 《제자초략 諸子抄略》 12권, 《시총 詩叢》 6권, 《역예초록 易禮抄錄》·《간재연보 艮齋年譜》 등이 있다고 전하나 그 소장처를 확인할 수 없다.
1608년(선조 41)∼1671년(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성허(聖許), 호는 하산(何山). 상고(尙古)의 아들이다. 1623년(인조 1) 사마시에 합격, 1630년 능참봉(陵參奉)으로 등용되고, 1634년 봉사(奉事)에 이어 1636년 직장이 되었다. 그해 병자호란을 만나 왕을 남한산성으로 호가(扈駕)하였으며, 이듬해 주부가 되었다가 곧 감찰로 승직되었다. 1638년 용안현감으로 나갔다가 1642년 병으로 사직하였고, 이듬해 금오랑(金吾郞)으로 등용되고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그해 익산부사가 되었으며, 164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뒤 춘추관편수관이 되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아부할 줄을 몰랐으며, 문장과 시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하산집》이 있다.
1140년(인종 18)∼1218년(고종 5).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문신. 본관은 한남(漢南).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최함(崔諴)의 손자이다. 재신(宰臣) 김영윤(金永胤)의 문하에서 수학, 과거에 급제하여 중화현(中和縣)에 출보(出補)하였고 1178년(명종 8) 도교서령 겸 군부참모(都校署令兼軍府參謀)가 되어 북변(北邊)을 순시, 방어체제를 점검하기도 하였다. 이후 태복승(太僕丞)·추밀원당후관(樞密院堂後官)·시어사(侍御史)·기거사인(起居舍人)·경상우도안찰사·중서사인(中書舍人)·호부시랑·국자좨주(國子祭酒)·추밀원지주사·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등을 지냈으며, 벼슬이 추밀원사 예부상서에 이르렀다. 1203년(신종 6) 국자좨주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를 맡아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였다. 성격은 청렴하고 함부로 교유하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1786년(정조 10)∼1870년(고종 7).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치선(穉善), 호는 지헌(止軒). 상주 출생. 아버지는 통덕랑 식(湜)이며, 어머니는 진주정씨(晋州鄭氏)로 종로(宗魯)의 딸이다. 외할아버지 정종로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동래부사 이휘령(李彙寧), 어사 박규수(朴珪壽)와 임응준(任應準) 등이 번갈아 천거하여 1860년(철종 11) 장릉참봉(莊陵參奉)에 임명되고, 그뒤 돈령부도정(敦寧府都正)을 거쳐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에는 사교(邪敎)를 극렬히 배척하는 주장을 폈다. 성리학과 예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유치명(柳致明)을 비롯하여 이병하(李秉夏)·이돈우(李敦禹)·이휘령·이원조(李源祚)·손양술(孫亮述) 등 영남의 석학들과 학문적인 교유가 있었다. 성리학에 있어서는 학통을 이어받아 주리론(主理論)의 입장을 취하였으며, 음양역리학에 대하여도 남다른 조예가 있었다. 저서로는 《지헌집》 15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