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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신라 말기의 지방호족. 잡간(迊干)의 관등으로서 금관고성(金官高城: 지금의 김해)을 공격하여 취하고 성주장군(城主將軍)이 되었다. 이때 아간(阿干) 영규(英規)라는 자가 충지의 위세를 빌려 수로왕릉(首露王陵)의 묘향(廟享)을 빼앗아 함부로 제사를 지내던 중 단오에 향사(享祀)를 지내다가 우연히 대들보가 부러져 깔려 죽었다. 이에 충지는 놀랍고 두려워 3척(尺)비단에 수로왕의 진영을 그려서 벽상에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촛불을 밝혀 정성을 다하여 모셨다. 3일이 지나자 진영의 두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땅 위에 고이니 거의 한 말이나 되었다. 충지는 더욱 두려워 그 진영을 내려 밖으로 나가 불태우고 수로왕의 후손 규림(圭林)을 불러 종전대로 왕의 후손인 그에게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충지는 907∼911년(효공왕 11∼15) 경 이전의 김해지방의 최고지배자였던 소율희(蘇律熙)였고, 또 위의 일은 수로왕에 대한 제사를 둘러싼 전통적인 주제권자(主祭權者)인 수로왕의 후손과 그 주제권을 탈취하려는 쪽과의 분규 사실이 일부 설화화된 기록이라는 설도 있다.
1226년(고종 13)∼1292년(충렬왕 18). 고려시대 선승(禪僧). 수선사(修禪社) 제6세(世). 성은 위씨(魏氏). 속명은 원개(元凱). 본래의 법명은 법환(法桓), 뒤의 법명은 충지. 자호는 필암(宓庵). 전라남도 장흥 출신. 1. 가계와 유년시절 아버지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 호소(號紹)이며, 어머니는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郞) 송자옥(宋子沃)의 딸이다. 9세에 처음으로 취학하였는데 그 총명함이 뛰어나 경서(經書)와 자사(子史)를 쉽게 외웠으며, 17세에는 사원시(司院試)를 마쳤다. 2. 구도와 승적 19세에는 춘위(春闈)에 나아가 장원을 하였는데, 그뒤 영가서기(永嘉書記)에 부임하자 곧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뛰어난 시재(詩才)와 문장(文章)을 떨쳤고, 벼슬이 금직옥당(禁直玉堂)에 이르렀다. 어려서부터 선림(禪林)에 나아가 득도하기를 원하였지만 양친의 허락을 얻지 못하여 관직에 몸을 담고 있었으나, 29세에 선원사(禪源社)의 원오국사(圓悟國師)문하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비구계를 받은 지 오래지 않아 남쪽의 여러 지방을 순력하였는데, 이는 항상 도를 얻고자 53선지식(善知識)을 찾아다닌 《화엄경》 속의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본받고자 함이었다. 그가 머문 곳마다 절은 확장되었고 때때로 방장(方丈)이 될 것을 권유받았으나, 오직 선적(禪寂)에 잠기거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그러나 1266년(원종 7) 여름에 원오국사의 교유(敎諭)와 조지(朝旨)로 인하여 부득이 경상남도 김해군의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되었다. 1269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고, 다시 3년 후에는 감로사를 떠나 승주군의 수선사로 옮겼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는 보조국사(普照國師)로부터 시작된 수선사의 법통을 이어받을 기미가 없었고, 오히려 선(禪)보다는 교(敎)에 더 치중하였다. 3. 원나라 세조의 부름을 받다. 그리고 생존하던 시기가 고려를 정복하려는 원나라에 오래 저항하다가 굴복한 때였고, 감로사와 수선사에 머물렀던 때는 흉년이 계속되었으며, 수선사에 온 이듬해인 1274년 고려의 장군 김방경(金方慶)과 원나라 장수 흔도(炘都)가 탐라(耽羅)를 정벌한 해였다. 이때 원나라 세조는 탐라에 총관부(總管府)를 두고 우리나라의 전지공안(田地公案)과 별고노비천적(別庫奴婢賤籍)을 관장하게 하며 수선사에서 군량미 명목의 전세(田稅)를 거두었다. 이에 그는 세조에게 〈상대원황제표 上大元皇帝表〉를 올려 빼앗겼던 전답(田畓)을 되돌려받았다. 청전표(請田表)를 올려 되돌려받은 전답은 옛적 임금이 내린 근읍(近邑)의 토지였다. 이 표에서는 새벽에는 죽 먹고 낮에는 밥 먹기가 어려운 실정인데도 군량미를 거두어갔던 그때의 어려운 서민생활, 또 흉년이 들어 전국의 승려들이 구름 모이듯 찾아와도 받을 수 없는 실정을 간절하게 호소하고 있어 당시의 사원경제가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알 수 있다. 특히, 이 표는 당시의 나라 사정을 아는 데에도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이 표문을 받아본 세조는 그를 흠모하여 청하는 사신을 고려에 보냈다. 고려 조정은 이를 승낙하여 1275년(충렬왕 1) 3월 그를 개경으로 불렀다. 그러나 출가하면서부터 서울에 받을 들여놓기를 꺼렸기 때문에 조정의 부름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거듭되는 조정의 부름을 사양하지 못하고 개경을 향하다가 충청도 웅천(熊川)에 이르러 병을 이유로 상경할 수 없다고 상서(上書)한 뒤 청주(淸州)로 갔다. 당시 청주목(淸州牧) 상서(尙書) 이오(李敖)는 그의 가장 친한 벗이었는데, 그를 반갑게 맞아 가까운 화정사(華井寺)에 머무르게 하였다. 화정사에서 여름 안거(安居)를 지내자 조정에서는 다시 불러 원나라에 가도록 하였다. 원경(元京)에 도착하자 세조는 그의 덕을 칭송하면서 빈주(賓主)와 스승의 예로 대하였으며, 원나라 백성은 그의 덕을 칭송하였다. 귀국할 때 세조는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과 흰 불자(拂子)한 쌍을 내렸다. 4. 대선사로서 입적하다. 귀국한 이듬해 충렬왕은 충지를 대선사로 보하였다. 그해 겨울 안거를 청주의 현암사(玄巖寺)에서 보낸 뒤, 청주 진각사(眞覺寺), 충청남도 개태사(開泰寺) 등지를 순력하였다. 1283년 11월에는 대중을 거느리고 조계산을 출발하여 원오국사가 선원사에서 수선(修繕)하여 수선사로 옮기던 거란본대장경을 도중에서 맞이하여 나누어 지고 왔고, 〈단본대장경경찬소 丹本大藏經慶讚疏〉와 시를 지었다. 1284년 수선사를 떠나 지리산 상무주암(上無住庵)으로 옮겨 선정을 닦고 있던 중 1286년 2월에 원오국사가 그를 수선사의 사주(社主)로 추천하는 장문(狀聞)을 왕에게 올리고 입적하였다. 장문을 받은 충렬왕은 원외시랑(員外侍郞) 김호담(金浩淡)을 시켜 그로 하여금 6월 16일에 개당(開堂)하게 함에 따라 수선사의 제6세가 되었다. 그뒤 계속 수선사에 머무르다가 1271년 여름 합단적(哈丹賊)의 난을 피하여 고흥군 불대사(佛臺寺)에 잠깐 머물렀다. 1292년 1월 10일 삭발 목욕한 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生死)가 있는 것은 인생의 일이다. 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 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정오가 지나자 분향하고 축원을 올린 뒤 선상(禪床)에 앉아 ‘설본무설(說本無說)’이라 설하고, 문인들이 청하는 바에 따라 “돌아보니 세상살이 67년인데, 오늘 아침 모든 일을 마쳤네.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탄연하여 평탄하고, 노두가 분명하니 어찌 길을 잃으랴. 손에는 겨우 하나의 대지팡이뿐이지만, 가는 길에 다리가 피로하지 않을 것이 또한 기뻐라(閱過行年六十七 及到今朝萬事畢 故鄕歸路坦然平 路頭分明未曾失 手中纔有一枝笻 且喜途中脚不倦).”라는 게송(偈頌)을 남기고 입적하였다. 법랍 39세였다. 5. 사상의 조류 불교의 삼장(三藏)에 이해가 깊었을 뿐 아니라 사림(詞林)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문장과 시는 당대의 유림에서도 추앙을 받았다. 자신을 가리켜 “황해(黃海)의 파강(簸糠)에 미치지 못하여 부끄러우나 단하(丹霞)의 전초(剗草)를 본받았고 남순(南詢)의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도를 닦음에 있어서 육조(六祖) 혜능(慧能)이 오조(五祖) 홍인(弘忍)에게서 법을 인가받은 파강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지만, 단하천연(丹霞天然)과 같이 처음 유가(儒家)에 몸을 담아 벼슬길에 나갔으나 뒤에 출가하여 선총(禪叢)에 몸담게 된 것을 큰 다행으로 생각하며 만족하고 있다. 그러나 수선사 제1세였던 지눌의 순수선시대와는 달리 유학사상과 상교(相交)하는 선풍(禪風)을 풍기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사(儒士)들처럼 천명을 믿고 운명에 안주하는 유선조화(儒禪調和)의 사상조류를 보였고, 상제상천(上帝上天)의 신앙을 통하여 유도이교(儒道二敎)를 불교 속에 수용하기도 하였다. 또한, 스스로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즐겨, 세상 밖의 초연함에 빠진듯한 느낌과 세속의 번뇌를 싫어한 인상을 풍기지만, 그의 생활은 언제나 수행승이나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백성들과 함께 하였다. 다만 주술적 미신에 빠져 있던 당시 불교의 구복적(求福的) 세태 속에서 오로지 수선(修禪)의 교화생활에만 몰두하며 수선사의 전통을 계승하는 데 그 뜻을 두었다. 그의 선풍은 무념무사(無念無事)를 으뜸으로 삼았고, 지관(止觀)의 수행문 중 지(止)를 중시하였으며,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여 지눌의 종풍(宗風)을 계승하였다. 부도(浮屠)는 송광사 남암(南庵)의 옛터 북쪽에 있으며, 입적 후 22년 만인 1314년(충숙왕 1)에 문인 정안(靜眼)·진적(眞寂)·신열(神悅) 등이 원감국사비를 세웠으나 그뒤 병화(兵火)를 입어 파괴되었고, 약 200년 전에 시안(時安)·찬현(贊玄) 등에 의하여 그 자리에 중건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 《원감국사집 圓鑑國師集》 1권이 남아 있으며, 《동문선》에도 시와 글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충렬왕은 원감국사(圓鑑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보명(寶明)이라는 탑명(塔名)을 내렸다.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의 관리. 935년(태조 18)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왕위계승의 내분으로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탈출할 때, 태조의 명을 받아 소원보(小元甫) 향예(香乂)·오염(吳琰) 등과 해로로 견훤을 맞아 고려의 수도인 개경까지 안내하였다.
1315년(충숙왕 2)∼1344년(충혜왕 복위 5). 고려 제28대 왕. 재위 1330∼1332, 복위 1339∼1344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정(禎), 몽고식 이름은 보탑실리(普塔失里). 충숙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명덕태후(明德太后) 홍씨(洪氏)이다. 비는 원나라 관서왕(關西王) 초팔(焦八)의 딸인 덕녕공주(德寧公主: 충목왕의 생모)와 찬성사 윤계종(尹繼宗)의 딸 희비 윤씨(禧妃尹氏), 평리(評理) 홍탁(洪鐸)의 딸 화비 홍씨(和妃洪氏), 상인(商人) 임신(林信)의 딸 은천옹주(銀川翁主) 임씨(林氏)가 있다. 1328년 세자로 원나라에 갔다가 1330년에 충숙왕의 전위(傳位)를 받고 귀국하여 즉위하였다. 1332년 원나라에 의하여 전왕인 충숙왕이 복위하였으므로 다시 원나라로 갔다. 1339년 충숙왕이 죽자, 심양왕(瀋陽王) 고(暠)를 옹립하려는 조적(曺頔) 등이 음모를 꾸며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충혜왕이 복위하였다. 그는 본성이 호협방탕하여 주색과 사냥을 일삼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후궁만도 100여명에 이를 정도였다. 기거주(起居注) 이담(李湛)의 충고와 전 군부판서(前軍簿判書) 이조년(李兆年)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방탕한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유신들과 반목이 심하였다. 그는 관제를 개혁하여 과거의 고시관(考試官)을 다시 지공거(知貢擧)로, 정승을 중찬(中贊), 평리를 참리(參理)로 고쳤다. 1331년에는 종래의 은병(銀甁) 통용을 금하고 한개가 오종포(五綜布) 15필에 해당하는 소은병(小銀甁)을 통용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나라에게 쌍성(雙城: 지금의 영흥)·여진·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유입한 고려인의 쇄환(刷還)을 요청하였다. 그해 이학도감(吏學都監)을 설치하였으며, 5도에는 염장도감(鹽場都監)을 설치하였다가 얼마 뒤에 폐지하였다. 1342년에는 식화(殖貨)에 힘써 의성창(義城倉)·덕천창(德泉倉)·보흥창(寶興倉)의 포 4만8000필을 풀어 시장에 전포를 열게 하였다. 1343년에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삼현(三峴)에 새로 궁궐을 지었는데, 개성에서는 “왕이 민가의 어린이 수십명을 잡아 새 궁궐의 주춧돌 밑에 묻고자 한다.”는 소문이 돌아 집집마다 아이를 안고 도망하고 숨는 등 소란이 일었다. 충혜왕은 영특하고 슬기로운 재능을 좋지 못한 데 사용하였고,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하여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하여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는 등 실정이 많았다. 이에 원나라에 가 있던 이운(李芸)·기철(奇轍) 등이 왕의 실정과 횡포함을 그곳의 중서성(中書省)에 알림으로써 원나라에 끌려가서 게양현(揭陽縣)으로 귀양가다가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다. 시호는 헌효(獻孝)이고, 원나라의 시호는 충혜이며, 능은 영릉(永陵)으로 지금의 개성에 있다.
생몰년 미상. 남성시(南省試: 국자감시)의 부장원(副壯元)으로 뽑혀 내시(內侍: 고려 시대 숙위 또는 근시의 일을 맡아보던 벼슬)가 되었으나, 뒤에 세상을 피해 송광사(松廣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최자(崔滋)의 《보한집(補閑集)》에 따르면, 진양공(晋陽公) 최이(崔怡 : 崔瑀)가 차와 향을 보내며 서신 왕래할 것을 청하자, 자신은 세속과 연을 끊었기 때문에 서신 왕래를 할 수 없다고 하였음에도, 최이(崔怡)는 다시 시를 써서 보내니, 어쩔 수 없이 차운한 시가 있다고 한다.
생몰년 미상.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따르면, 신라 723년(성덕왕 22) 또는 정완비문(貞菀碑文)에 따르면 742년(신라 효성왕 6), 신라의 대사(大舍: 신라 17관등 중 12위) 딸 정완(貞菀)과, 나마(奈麻: 신라 17관등 중 11위) 천승(天承)의 딸 포정(抱貞)을 당 현종(玄宗)에게 바쳤다고 한다.
생몰년 미상. 신라 내해이사금 때의 대신. 220년(내해이사금 25) 3월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죽자, 이벌찬에 임명되어 군사(軍事)를 겸장(兼掌)하였다. 222년 10월 백제의 군대가 우두주(牛頭州: 지금의 춘천)에 침입하여 민호(民戶)를 노략질하자 군사 5,000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다가 웅곡(熊谷)에 이르렀으나 백제군에게 패하여 단기로 도망쳐 돌아왔다. 이에 벼슬이 떨어져 진주(鎭主)에 임명되고 대신 연진(連珍)이 이벌찬에 임명되었다.
미상∼1613년(광해군 5). 조선 중기의 선승(禪僧). 호는 운곡(雲谷). 일선(一禪)의 제자로 시에 매우 능하였다. 당대의 문장가인 이안눌(李安訥)·이수광(李睟光)·장유(張維) 등과 교유하며 수많은 시를 지었다. 해인사·백련사(白蓮社) 등지에 오래 있었다고 하나 자세한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저서로는 1633년에 적멸암(寂滅庵)에서 발간한 《운곡집》 1권이 있다.
미상∼1183년(명종 13). 고려 명종 때의 승려. 의종의 아우인 현오국사(玄悟國師)에게 득도(得度)하였다. 1178년 흥왕사(興王寺)에 있을 때 승려들과 역모를 모의한다는 밀고가 있어 조사를 받았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180년에 태후가 유종(乳腫)이 생겨 그를 불러 시탕(侍湯)하게 하였다. 그때 궁녀들과 난행(亂行)하고 또 공주와 사통한다는 추문이 외부에 자자하였으므로 우사간(右司諫) 최선(崔詵)이 소를 올려 간하자 왕은 형제간을 이간한다고 하여 최선을 파면하였다. 그뒤 직언을 하는 자는 없어지고 그에게 아부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1183년에 죽었으며,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
생몰년 미상. 신라 무열왕 때 백제와의 전투에서 용맹을 떨친 승려. 성씨는 미상, 법명은 도옥(道玉). 경주 사량부(沙梁部)사람으로, 나마(奈麻) 취복(聚福)의 둘째아들이다. 일찍이 승려가 되어 실제사(實際寺)에 머무르고 있었다. 무열왕 때 백제군이 신라와 백제 양국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던 조천성(助川城: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陽山)을 침공하여오매 무열왕이 군사를 일으켜 대전하였으나 결말을 보지 못한 상황에 있을 때, 승복을 벗고 출전하였다. 출전하면서 법명을 버리고 ‘취도’라고 이름을 고쳤는데, 이는 ‘달려가 무리〔徒〕가 된다. ’는 뜻에서였다. 삼천당(三千幢)에 소속되어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뒤에 그의 형 부과(夫果)와 동생 핍실(逼實)도 나라를 위하여 싸우다 죽었으므로, 이들의 용맹에 탄복한 신문왕에 의하여 모두 사찬(沙飡)으로 추증되었다.
생몰년 미상. 신라 태종무열왕 때의 관리.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 관등은 나마(奈麻)에 이르렀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맏아들 부과(夫果), 둘째아들 취도(驟徒), 막내아들 핍실(逼實) 등은 모두 국가를 위하여 용감히 싸우다 죽었다.
생몰년 미상. 한말의 승려. 호는 혼성(混性). 묘향산 보현사(普賢寺)의 극락전에 주석(駐錫)하여 찾아오는 학인을 지도하였다. 타고난 바탕이 호방하고 거침이 없어 사소한 예절에 구애받지 않았으며, 경(經)·율(律)·논(論) 삼장(三藏)은 물론, 오교와 오도(五道)에까지 박통하였다. 사산선원(四山禪苑)에서 강석을 열자 비연(祕演)·관천(觀天) 등이 찾아와 제자가 되었고, 이동환(李東煥)·안기선(安箕仙) 등이 법석(法席)에 참가하였다. 도반으로는 구월산의 하은(荷隱), 금강산의 낙파(洛波), 조계산(曹溪山)의 허주(虛舟), 고령사(古寧寺)의 환공(幻空) 등이 있다.
1720년(숙종 46)∼1789년(정조 13). 조선 후기의 선승(禪僧). 성은 여씨(余氏). 호는 괄허(括虛). 어려서부터 매우 영민하여 한번 배우면 모두 외웠다고 한다. 14세 때 문경 사불산(四佛山) 대승사(大乘寺)에서 능파(凌波)를 은사로 하여 삭발하였고, 진속선사(眞俗禪師)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그뒤 환암(幻庵)에게 선을 배우고 담숙(曇淑)의 법을 이었다. 그뒤 영남의 여러 사찰을 순방하면서 법을 가르치고 가람을 중수하는 등 불교의 중흥에 힘을 기울였다. 법을 이은 제자로는 척전(陟詮) 등이 있다. 나이 69세, 법랍 57세로 경상북도 운봉사(雲峯寺) 양진암(養眞庵)에서 임종게를 남기고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괄허집》 1권이 있다.
미상∼451년(질지왕 1). 금관가야의 제7대 왕. 질가(叱嘉)라고도 하였다. 재위 421∼451년. 아버지는 좌지왕(坐知王)이며, 어머니는 대아간(大阿干) 도녕(道寧)의 딸 복수(福壽)이다. 비는 각간(角干) 진사(進思)의 딸 인덕(仁德)이다. 질지왕(銍知王)의 아버지이다. 451년 2월 3일에 죽었다.
1805년(순조 5)∼1878년(고종 15). 조선 말기 승려. 자는 운환(雲寰)이고, 호는 함홍당(涵弘堂)이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경상북도 영가부(永嘉府) 송천리(松川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계운(金戒雲)이다. 치능(致能)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숙부이자 임제종(臨濟宗) 37세인 송암(松庵) 의탄(義坦)에게 맡겨졌다. 숙부는 그를 김유계(金酉溪)에게 먼저 배우게 하여 경사(經史) 등을 공부시켰다. 이후 그는 숙부를 은사로 하여 출가하였으며, 구담화상(九潭和尙)에게 구족계를 받고 정식으로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다. 당대의 고승들을 두루 찾아다니면서 수행과 학문에 전념하였다. 시허(時虛) 스님을 찾아가 화엄학을 공부한 후, 팔봉선사(八峯禪師)의 문하에서 참선을 수행하였다. 또한 출가 전 갖춘 유학의 소양 및 시서(詩書)의 능력으로 사대부들과의 교유도 활발하였다. 이후 고운사(孤雲寺)에 주석(主席)하면서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또 조선불교 선교양종정사(禪敎兩宗正事)를 지냈다.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丹村面) 구계리(龜溪里) 등운산(騰雲山)의 고운사(孤雲寺) 입구에 행적비가 있으며 법당에 영정이 모셔져 있다. 그의 문집으로 《함홍당집(涵弘堂集)》이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명종 때의 승려. 술법에 능통하였다. 1178년(명종 8) 조정에 건의하여 문무관원 가운데 봉록 20석(石) 이상 받는 사람을 대상으로 10석에 한말씩 떼어 재(齋)의 비용으로 충당하고 기도하면 재난이 소멸할 것이라 하였다. 대신들이 모두 찬성하여 처음으로 기은도감(祈恩都監)을 만들고 그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1862년(철종 13)∼1942년. 근대의 승려. 성은 서씨(徐氏). 호는 해담(海曇). 19세에 출가하여 통도사 춘담화상(春潭和尙)의 제자가 되었으며, 용문사 해주(海珠)에게 불경을 배우고 1894년(고종 31)에 고운사(孤雲寺) 음관화상(音觀和尙)의 법을 이어받았다. 그뒤 통도사 강주(講主)가 되어 학도를 교육하였으며, 1929년 선교양종칠교정(禪敎兩宗七敎正)의 1인으로 추대되었다. 계율을 잘 지켰으므로 율사(律師)의 칭호를 들었으며, 보살계법회(菩薩戒法會)의 수계사(授戒師)로 활동하였다. 1942년 통도사에서 입적하였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증곡집 曾谷集》이 있다.
생몰년 미상. 고구려 유리왕의 후실. 한인(漢人)출신. 서기전 17년(유리왕 3) 왕비 송씨(松氏)가 죽자, 화희(禾姬)와 함께 유리왕의 후실이 되었다. 그러나 서로 왕의 총애를 다투다가, 결국 유리왕이 사냥을 나간 사이에 화희로부터 심한 모욕을 당하고 스스로 왕궁을 떠났다. 이 사실을 안 유리왕이 급히 찾았으나 끝내 돌아오지 않았고, 유리왕은 이를 슬퍼하여 〈황조가 黃鳥歌〉를 지었다.
미상∼631년(진평왕 53). 신라 진평왕 때의 대신. 관등은 이찬(伊飡)에 이르렀다. 631년(진평왕 53) 5월 아찬(阿飡) 석품(石品)과 함께 반란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어 동시(東市)에서 목을 베는 형을 받고 죽었으며, 그의 9족(族)도 함께 처형당하였다.
미상∼385년(침류왕 2). 백제 제15대왕. 재위 384∼385년. 근구수왕의 맏아들이며, 어머니는 진씨(眞氏)로 추정되는 아이부인(阿尔夫人)이다. 아신왕은 맏아들이다. 백제에서 처음으로 불교를 공인한 왕으로, 384년(침류왕 1) 9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 가 동진(東晋)에서 오자, 그를 맞아 궁중에 두고 예로써 받드니 백제에서 불법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또, 다음해 2월 한산(漢山)에 불교사원을 세우고 10명의 승려를 두었다. 이러한 불교공인과 신봉은 그 무렵 뿌리깊은 토속신앙에 젖어 있던 백제사회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을 것이다. 이를테면 법흥왕대의 신라의 경우처럼 전통적인 토속신앙의 처지에서 불교를 이단으로 비난하는 여론이 일어나거나, 그에 따른 지배층 내부의 반발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한 추정은 침류왕의 신변의 변화와도 연결될지 모른다. 한산에 불교사원을 세운 지 9개월 후에 갑자기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고, 그 다음 왕위는 아들이 아니라 동생 진사왕에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