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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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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공예가
    태구련(太九連)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도공(刀工). 일명 태귀련(太貴連). 칼을 잘 만들어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李舜臣) 및 그의 조방장(助防將) 신호(申浩)·박종남(朴宗男) 및 충청도수군절도사 선거이(宣居怡) 등의 환도(環刀)를 동료 언복(彦福)과 함께 만들었다. 그가 만든 이순신의 장검(長劒) 두 자루가 충청남도 아산시 현충사(顯忠祠)에 보존되어 있다.

  • 여인(汝仁)
    정기재(正己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협계(峽溪)
    분류
    항일/국방 > 의병
    태귀생(太貴生)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여인(汝仁)이고, 호는 정기제(正己齊)이다. 본관은 협계(峽溪)이며, 전라북도 남원(南原)에서 출생하였다.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이다. 계략이 담대하였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뛰어났다. 1555년(명종 10) 무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서제(庶弟)인 태천생(太賤生), 아들 태상문(太尙文) 등과 함께 의병과 의곡(義穀)을 모아 군진(軍陣)으로 보내었다. 정유재란 때는 종족 및 수십 명의 종들을 이끌고 남원성(南原城)에 들어가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과 더불어 성을 사수하다가 아우 태천생과 함께 전사하였다. 이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 소요(逍遙)
    시호
    혜감(慧鑑)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2(명종 17) - 1649(인조 27)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태능(太能)에 대하여

    1562년(명종 17)∼1649년(인조 27). 조선 중기의 고승. 성은 오씨(吳氏). 호는 소요(逍遙). 전라남도 담양 출신. 어머니가 신승(神僧)으로부터 대승경(大乘經)을 받는 태몽을 꾸었으며, 태어나면서부터 살갗이 선명하고 골격이 씩씩하였다. 어려서부터 탐욕을 싫어하고 도훈(道訓)을 듣기를 즐겨하였으며, 베풀기를 좋아하고 자비심이 많아 마을사람들이 성동(聖童)이라고 불렀다. 13세에 백양산(白羊山)에 놀러갔다가 뛰어난 경치를 보고 곧 세속을 떠나기로 결심하여 진대사(眞大師)로부터 계(戒)를 받았다. 그때 부휴대사(浮休大師)가 속리산과 해인사로 다니면서 교화를 폈는데, 그 밑에서 경률(經律)의 깊은 뜻을 익혔다. 부휴의 문하에 수백의 제자들이 있었으나, 오직 태능·충휘(沖徽)·응상(應祥)만이 법문(法門)의 삼걸(三傑)이라 불렸다.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이 왜적을 물리치고 돌아가는 길에 해인사에 머무르다가 그의 단아함을 보고 크게 칭찬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가 묘향산에서 교화를 편다는 말을 듣고 찾아가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 달마대사가 천축국에서 중국으로 온 뜻이 무엇인가를 묻는 話頭)를 물었다. 서산대사는 한번 보고 곧 건당(建幢)을 시켜 의발(衣鉢)을 전한 뒤 3년 동안 지도하였다. 그리고 다시 개당설법(開堂說法)을 하게 하였는데 청중이 그 문에 가득 찼다. 그뒤 얼마 안되어 서산대사는 그에게, “그림자 없는 나무를 베어와서, 물 위의 거품에 모두 살라버린다. 우스워라, 저 소를 탄 사람. 소를 타고서 다시 소를 찾는구나(斫來無影樹 燋盡水中漚 可笑騎牛者 騎牛更覓牛).”라는 법게(法偈)를 주었다. 그는 이 법게를 가지고 남방으로 내려와 여러 스승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뜻을 알고 해석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서산대사에게 다시 와서 물었다. 비로소 무생(無生)의 이치를 깨닫고 자성(自性)에 맡겨 소요하였고, 가는 곳마다 도(道)를 배우려는 자가 모여들어 임제종풍(臨濟宗風)을 크게 떨쳤다. 30세 되던 해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산과 유정(惟政)이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가자, 그는 폐허가 된 빈 절을 지키며 불전(佛殿)을 수리하고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하여 기도를 올렸다. 1624년(인조 2) 조정에서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축조하려 할 때 그에게 서성(西城)을 보완하게 하여 이를 완수하였다. 그뒤 지리산의 신흥사(神興寺)와 연곡사(燕谷寺)를 중건하였는데, 태능의 도력에 감화된 사람들의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공사를 끝마쳤으며, 그가 법(法)을 설하면 짐승들과 이류(異類)들까지도 감복하였다고 한다. 1649년 11월 21일 열반(涅槃)이 가까웠음을 알고 제자들에게 설법하다가, 임종 때에는 붓을 찾아 “해탈이 해탈 아니거늘 열반이 어찌 고향이겠는가! 취모검(吹毛劒)의 빛이 빛나고 빛나니 입으로 말하면 그 칼날 맞으리(解脫非解脫 涅槃豈故鄕 吹毛光爍爍 口舌犯鋒鎚).”라는 임종게(臨終偈)를 남기고 나이 87세, 법랍 75세로 입적하였다. 그때 붉은 무지개가 하늘에 뻗치고 이상한 향기가 방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화장하는 날, 영골(靈骨)이 불 밖에 튀어나오고 사리(舍利)두개는 축원(祝願)에 응하여 공중에 솟아오르는 신이(神異)를 보였는데, 연곡사·금산사(金山寺)·보개산(寶蓋山) 세 곳에 이를 나누어 모시고 부도(浮屠)를 건립하였다. 평소 태능의 도(道)를 듣고 흠모한 효종은 1652년(효종 3) 혜감선사(慧鑑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경석(李景奭)을 시켜 비명(碑銘)을 지어 금산사에 세우게 하였다. 그는 선(禪)과 교(敎)를 일원이류(一源異流)로 보는 전통적 견해를 취하였다. 이러한 사상과 경향은 서산대사와 일맥상통하는 흐름이다. 그는 서산대사의 법맥계승자로 〈소요당집서 逍遙堂集序〉에는, “소요선사는 서산청허조사(西山淸虛祖師)의 뛰어난 제자이다. 조사의 문중(門中)에서 선사와 편양사(鞭羊師)를 선종이라 하고, 송운사(松雲師)를 교종이라 하였는데 같은 시대에 모두 우뚝하였다.” 하였고, 《소요당집》에서는 오직 태능만이 선지(禪旨)를 통달하였다고 하였다. 그의 선사상을 요약하면, ① 본래청정(本來淸淨)하고 자재하며 완전한 일물(一物)이 있다는 것, ② 이 일물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밖으로부터 얻어 가질 수 있는 것도 아닌 우리의 자성(自性)이라는 것, ③ 이 자성은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 속에서 모든 사물에 작용하면서도 그 스스로는 초월적이라는 것, ④ 이 자성이 나의 참된 주인공인 동시에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 것, ⑤ 이 참 주인공을 철두철미하게 자각(自覺)한 사람은 무위진인(無位眞人)으로서 아무 것에도 의존하거나 결점이 없는 온전한 주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 등이다. 특히, 선사상이 실참실수(實參實修)를 통한 체험에 있음을 실감하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는 상징적인 비유를 즐겨 사용하였다. 즉, 상징적인 비유를 통하여 개념적인 지식을 초월하여 바로 그 실상(實相)을 실감하도록 하는 선종의 방법으로 제자들을 깨우치려 하였으며, 철두철미하게 불교를 주체적으로 깨닫도록 하고자 노력하였다. 후세의 학자들은 그를 평하여, 우국진충(憂國盡忠)의 뜻에서는 유정과 자취를 같이 하였으나, 선적풍격(禪的風格)에 있어서는 유정보다 뛰어난 것이 있었다고 하였다. 뛰어난 제자로는 현변(懸辯)·계우(繼愚)·경열(敬悅)·학눌(學訥)·처우(處愚)·천해(天海)·극린(克璘)·광해(廣海) 등이 있으며, 그밖에 소요파(逍遙派)로 불리는 수백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저서로는 《소요당집》 1권이 있다.

  • 망이(望而)
    서암(西菴)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486(성종 17) - 1536(중종 31)
    본관
    영순(永順)
    분류
    문신/관료 > 문신
    태두남(太斗南)에 대하여

    1486년(성종 17)∼1536년(중종 31).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영순(永順). 자는 망이(望而), 호는 서암(西菴). 발해국왕 대조영(大祚榮)의 후손으로, 효정(孝貞)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재(奇才)가 남달랐으므로, 김양진(金揚震)이 그를 데려와 기르고 훈회(訓誨)하였다. 1513년(중종 8)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같은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형조좌랑·정랑과 개령현감·경상도도사·사예·사도시첨정·전라도암행어사 등을 역임하였다. 그뒤 장령·남원부사·선산부사, 직강·사섬시정(司贍寺正)·집의 등을 지냈다. 1536년 종부시정(宗簿寺正)이 되어 춘추관편수관을 겸임하였다. 이때 권신 김안로(金安老)의 미움을 산 스승 김양진의 장례를 정성껏 보살폈다가 미움을 받아 성주목사로 좌천되어 재직중 51세로 죽었다. 담론을 잘하였으며, 시문에 뛰어났다. 옥천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쇄언 瑣言》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의료/기술 > 기술자
    태량미태(太良未太)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백제 위덕왕 때의 사원(寺院) 기술자. 588년(위덕왕 35) 백제는 왜(倭)의 법흥사(法興寺) 건축을 위하여 승려와 더불어 많은 사원기술자를 파견하였다. 이때 사공(寺工)인 태량미태는 문고고자(文賈古子) 등과 함께 왜에 파견되어 법흥사 창건에 관여하였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904(광무 8) - 1979()
    본관
    미상(未詳)
    분류
    예능 > 기예능보유자
    태명준(太命俊)에 대하여

    1904년∼1979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 〈수영야류 水營野遊〉의 범 및 담보역 기예능보유자. 부산 출신. 수영사립보통학교를 4년 졸업하고 어려서부터 〈수영야류〉명인이었던 조두영(趙斗榮)·최한복(崔漢福)에게 〈수영야류〉 탈놀이를 배웠다. 오랫동안 〈수영야류〉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70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개인상을 받은 바 있다. 부산대학교·부산대동고등학교 등 여러 학교 민속반 학생들에게 〈수영야류〉를 지도하였다.

  • 진옥(振玉)
    삼현정(三縣亭)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협계(峽溪)
    분류
    항일/국방 > 의병
    태상문(太尙文)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진옥(振玉)이고 호는 삼현정(三縣亭)이다. 본관은 협계(峽溪)이며 전라북도 남원(南原)에서 태어났다.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다. 조부는 수문장(守門將) 태윤민(太潤民)이고, 아버지는 주부(主簿) 태귀생(太貴生)이다. 말타기와 활쏘기가 뛰어났으며 정유재란 때 아버지 태귀생, 숙부(叔父) 태천생(太賤生)과 함께 남원성(南原城)에 들어가 성을 사수하였다. 전사한 아버지와 숙부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 밖에서 매장하고 돌아오자 성은 이미 함락되고 말았다. 그 후 무과에 급제하고 1642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서제(庶弟) 태팔회(太八回)와 조카 태복련(太福連)과 함께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그의 후손들이 지금도 전라북도 남원군 대산면(大山面)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녹훈(錄勳)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증직되었다.

  • 군실(君實)
    공북제(拱北齊)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본관
    협계(峽溪)
    분류
    항일/국방 > 의병
    태색(太穡)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 의병.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공북재(拱北齋)이다. 본관은 협계(峽溪)이며, 전라남도 남원(南原)에서 출생하였다. 판서(判書) 태응진(太應辰)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참봉(參奉) 태응천(太膺天)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아버지의 병환이 위독하여 싸움터에 나가지 못하자, 조카 태귀생(太貴生), 육촌 형제와 태귀생의 아들 태우(太竬), 태시경(太時慶), 서질(庶姪)인 태천생(太賤生) 등을 불러 싸움터로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또 한편으로 가산을 털어 군량미 300 가마니를 마련하여 명나라의 군량으로 보냈다. 이후 조정에서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을 제수(除授)하였고, 그의 네 조카들이 모두 전쟁터에서 순절하였으므로 향민(鄕民)들은 이들을 칭송하여 ‘일문오절(一門五節)’이라고 하였다.


  • 함명(函溟)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24(순조 24) - 1902(광무 6)
    본관
    밀양(密陽)
    분류
    종교 > 불교인
    태선(太先)에 대하여

    1824년(순조 24)∼1902년. 한말의 승려. 밀양박씨(密陽朴氏). 호는 함명(函溟). 화순 출신. 아버지는 양구(陽九)이며, 어머니는 오씨이다. 어려서부터 지혜가 빼어나고 눈빛이 별과 같았다. 14세에 만연사(萬淵寺)로 출가하여 풍곡(豊谷)을 의지하다가 다음해 득도(得度)하였으며, 백양사의 도암(道庵)화상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뒤에 선암사의 침명(沈溟)을 찾아가 5년 동안 널리 삼장을 섭렵하였으며, 침명이 감탄하여 대계(大戒)를 전하였다. 1849년(헌종 15) 서석암(瑞石庵)에서 건당(建幢)하여 풍곡의 법등(法燈)을 이었고, 이로써 임제(臨濟)의 적전(嫡傳)이 되었다. 선암사로부터 청을 받아 남북의 두 암자에서 경을 강하니, 와서 수학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다. 1866년(고종 3) 익운(益運)에게 법을 전한 다음 30여년 동안 더욱 정진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진불(眞佛)이 출세하였다.”고 하였다. 하루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불교 3,000년에 다만 소승의 교리만 행하여 불지(佛旨)로써 세상의 운세에 참여한 즉, 대승의 종지(宗旨)는 500세(世) 뒤에 응창(應昌)하지 못하나니, 부처님의 원력(願力)이 무공(無功)하여 능히 대지(大地) 범중(凡衆)으로 하여금 원만히 정각(正覺)을 이루지 못한다.”고 하였다. 선교(禪敎)외에도 유학과 성리학에 통달하여, 유가의 지인용(知仁勇)은 곧 불가의 비지원(悲智願)이라 하고 또, 불교의 삼보(三寶)는 증전(曾傳)의 삼강령(三綱領)에 가깝다고 하는 등 이들의 비슷함을 지적하였다. 저서로는 《치문사기 緇門私記》 1권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백제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족
    태아랑왕(太阿郞王)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왜에서 활약한 백제의 왕족. 《속일본기 續日本紀》 790년(연력 9)조에 의하면, 백제 태조 도모대왕(都慕大王)부터 백제 후예왕인 인정(仁貞)의 조상들에 이르기까지의 계보가 적혀 있다. 이에 의하면 태아랑왕은 근구수왕의 증손자이며, 진손왕(辰孫王)의 아들이다. 그리고 그의 후손들은 일본열도에서 크게 번성하였다. 왜정권내에서 그의 직책은 근시(近侍)인데 그의 자손들도 궁중에 복무하며, 글에 밝았다. 이러한 것은 고구려 사신이 까마귀깃에 적어온 묵서(墨書)를 그의 후손인 왕진이(王辰尔)가 해독한 일화에 잘 반영되어 전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870(고종 7) - 1908(융희 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의병
    태양욱(太陽郁)에 대하여

    1870년(고종 7)∼1908년. 조선 말기의 의병. 함경남도 풍산 출신. 1907년 8월 풍산에서 차도선(車道善)과 함께 거의(擧義)하여 그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일진회원 등 친일파를 처단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어 같은해 11월 이후 홍범도(洪範圖)·차도선 두 사람의 휘하에서 활동하면서, 같은달 16일 일진회 회원이며 친일주구인 북청군 안평면장 주도익(朱道翼)을 진목동에서 총살하였으며, 19일 역시 일진회 회원이던 안산면장 이쾌년(李#쾌03年)과 그 아들을 처단하였다. 그리고 11월 22일부터 연3일간 후치령에서 일본군을 수차에 걸쳐 기습공격한 이후 1908년 2월까지 혜산진·북청·갑산·삼수 일대에서 활발한 항전을 벌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1908년 3월 일본군의 교활한 유인작전에 걸려 홍범도의병을 제외한 차도선 휘하에 있던 약 200명의 의병이 함께 붙잡힐 때 이에 항거하다가 총살당하여 순국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남악(南岳)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 - 1732(영조 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태우(泰宇)에 대하여

    미상∼1732년(영조 8). 조선 후기의 고승(高僧). 호는 남악(南岳). 전라도 용성(龍城) 출신. 자세한 전기는 전하지 않으나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이덕수(李德壽)와 매우 친하였고, 이덕수는 그를 호남의 종승(宗乘)이라 평하였다. 청허(淸虛)의 6세 법손인 추붕(秋鵬)의 법을 이었으며, 앉아서 입적(入寂)하자, 서기가 나타나며 사리(舍利)가 나왔으므로 부도를 금산(金山)에 세우고 비를 세웠다. 문인에는 재초(在初)·응상(應祥)·팔오(八悟)·획성(獲成)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남악집》 1권이 있다.



  • 시호

    이칭

    시대
    남북국시대 > 발해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자/공주
    태원(太元)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발해유민들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의 왕자. 대원(大元)이라고도 한다. 991년 여진사신을 통하여 중국 송나라에 글(表)을 보냈다. 그러나 정안국의 멸망을 986년, 즉 오현명(烏玄明)의 오씨정권이 붕괴되는 시기로 보는 견해에서는 991년 태원이 송나라에 글을 보낸 사실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거란이 2차에 걸쳐 실시한 압록강의 여진에 대한 경략은 곧 정안국의 공략일 것으로 간주하여 제2차경략(986)때 이미 정안국의 정권은 무너졌다. 그러므로 이는 정상적인 정안국 조정의 사신파견이 아니고, 다만 이러한 거란의 압록강 여진경략에도 불구하고, 일부 피해를 받지 않은 지역에 살던 대씨후손이 잠시 정안국의 이름을 빌려 외교적 활동을 벌인 결과가 곧 태원이 글을 보낸 기록이라는 것이다.


  • 월파(月波)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95(숙종 21) - ?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태율(兌律)에 대하여

    1695년(숙종 21)∼미상. 조선 후기의 승려. 성은 김씨(金氏). 속명은 종건(從建). 호는 월파(月波). 전주 출신. 15세에 출가할 뜻을 세워 묘향산 불지암(佛智庵) 삼변장로(三卞長老)에게 나아가 《사기 史記》를 배웠다. 1년 뒤 아버지가 죽자 장례를 치르고 다시 출가하여 운봉(雲峰)을 은사로 삼아 득도하였다. 그뒤 혜월(慧月)·환암(幻庵) 등 여러 스승을 찾아 사교(四敎)·사집(四集)의 경론어록을 수료하여 그 명성이 점점 알려졌다. 29세에 묘향산 안심암(安心庵)에 머물던 중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일대사(一大事)인연을 결단하려는 뜻을 굳히고 안릉(安陵)의 원적암(圓寂庵)으로 굉활선사(宏闊禪師)를 찾아가 《기신론 起信論》·《반야경》 등을 배웠다. 그뒤 도반(道伴) 3인과 함께 영남과 호남의 여러 절을 순방하며 무각(無覺)·남악(南岳)·호암(虎巖)·암영(巖影)·상월(霜月) 등으로부터 《화엄경》·《원각경》·《능가경》·《선문염송》을 배웠고 호암의 법을 이었다. 그뒤 묘향산을 중심으로 하여 30여년 동안 교화하였으며, 사람들이 향산(香山)제일의 장로라고 불렀다. ‘불도(佛道)야말로 대장부의 할 일’이라 하여 기개를 보여주는 등 교화에 힘썼으나 뛰어난 제자를 배출하지는 못하였다. 입적시기는 불명하나 팔순에 가까웠으리라고 추정된다. 저서로 《월파집》 1권이 있다.


  • 금오(金烏)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대한민국
    생졸년
    1896(건양 1) - 1968()
    본관
    미상(未詳)
    분류
    종교 > 불교인
    태전(太田)에 대하여

    1896년∼1968년. 현대의 고승(高僧). 동래정씨(東萊鄭氏). 속명은 태선(太先), 호는 금오(金烏).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는 용보(用甫)이며, 어머니는 조씨(趙氏)이다. 어릴 때부터 서숙(書塾)에서 유서(儒書)를 공부하였으며, 1912년 3월 금강산 마하연사(摩訶衍寺)로 출가하여 도암선사(道庵禪師)의 제자가 되었다. 그때부터 화두(話頭)를 잡고 마하연선원에서 선을 닦다가, 안변 석왕사(釋王寺) 내원암(內院庵)으로 옮겨 용맹정진하였다. 1921년 오대산 월정사(月精寺)에서 안거(安居)하다가, 같은해 8월 범어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서 일봉율사(一峰律師)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통도사 보광선원(普光禪院)과 천성산 미타암(彌陀庵) 등지에서 정진하였다. 1928년 3월 예산 보덕사(報德寺)의 보월선사(寶月禪師)를 찾아가, “시방세계를 투철하고 나니 없고 없다는 것 또한 없구나. 낱낱이 모두 그러하기에 아무리 뿌리를 찾아봐도 없고 없을 뿐이다(透出十方界 無無無亦無 個個只此爾 覓本亦無無).”라는 오도송(悟道頌)을 올리자, 오도를 인가하여, 그 밑에서 제자의 도리를 다하면서 보임(保任)하였다. 그러나 건당식(建幢式)을 하지 못한 채, 1924년 12월 보월선사가 죽자 보월선사의 스승인 만공선사(滿空禪師)가 1925년 2월 덕숭산 정혜사(定慧寺)에서 건당식을 베풀어주고 전법게(傳法偈)를 주었다. “덕숭산맥 아래 무늬 없는 인(印)을 지금 전하노라. 보월은 계수나무에서 내리고 금오는 하늘 끝까지 날아가네(德崇山脈下 今付無文印 寶月下桂樹 金烏徹天飛). ” 그뒤 10여년 동안 전국을 다니면서 보임하였다. 특히 태안 안면도의 백사장에서 몇 명의 승려들을 데리고 걸식하며 고행한 일이나 하심(下心)을 기르기 위하여 2년 동안 행한 거지생활, 만주의 수월선사(水月禪師)를 찾아 1년 동안 함께 수행한 일화 등은 수행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1935년 김천 직지사(直指寺) 선원의 조실로 있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이어서 안변 석왕사, 도봉산 망월사(望月寺), 지리산 칠불선원(七佛禪院), 서울 선학원(禪學院)의 조실 및 회주(會主)로 있으면서 선풍(禪風)을 선양하였다. 제자들을 지도함에 있어 ‘불법(佛法)을 향하여 목숨을 던지는’ 자세로 공부할 것을 강조하였고, 언제나 앞장서서 용맹 정진하고 운력(運力)하여 모범을 보였다. 1954년 5월 불교정화운동이 시작되자 전국비구승대회 추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불교계의 정화를 위하여 헌신하였다. 1955년에는 대한불교조계종 부종정(副宗正), 1956년 봉은사(奉恩寺) 주지, 1957년 구례 화엄사 주지, 1958년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하였으며, 1961년 캄보디아에서 열린 제6차세계불교도대회 한국수석대표로 참석하였다. 만년에는 전국의 여러 선원을 다니면서 선풍을 떨치고 중생제도에 힘을 쏟았으며, 1967년 속리산 법주사 주지로 취임하여 종풍(宗風)을 선양하다가 1968년 10월 8일 “무로써 종을 삼는다(無念爲宗)”는 말을 남기고 나이 72세, 법랍 57세로 입적(入寂)하였다. 제자로는 월산(月山)·범행(梵行)·월남(月南)·탄성(呑星)·혜정(慧淨)·월탄(月誕) 등 50여명이 있으며, 저서로는 《금오집》이 있다.

  • 약천(若天)

    시호
    신성(神聖)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전기
    생졸년
    877(헌강왕 3) - 943(태조 26)
    본관
    개성(開城)
    분류
    왕실 > 왕
    태조(太祖) 왕건(王建)에 대하여

    877년(헌강왕 3)∼943년(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943년. 본관은 개성(開城).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 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 지금의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왕건은 궁예의 명령으로 군대를 이끌고 군사활동을 하여 큰 공을 세웠다. 즉, 900년에는 광주(廣州)·충주·청주(靑州: 지금의 淸州) 및 당성(唐城: 지금의 南陽)·괴양(槐壤: 지금의 槐山) 등의 군현을 쳐서 이를 모두 평정, 그 공으로 아찬(阿飡)이 되었다. 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이를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부근 10여개 군현을 쳐서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이를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 이해에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달려가 구하여주었다. 이와같은 과정을 통하여 왕건은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다. 이해에 그동안 쌓은 전공으로 알찬(閼飡)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飡)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 그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하여야만 하였다.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 등의 반역사건 등이 그것이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강대한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만 하였던 것이다. 이와같은 어려운 과제에 기민하고 탄력성있게 대처해나감으로써 난국을 극복하여나갔다. 태조가 즉위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이래 크게 문란하여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제도적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그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와 동시에, 신라 말기 이래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나갔다. 각 지방의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하였으며, 각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 태조는 후삼국시대의 지배세력인 궁예나 견훤에게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역량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하여 친화정책을 썼다. 이해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후백제와 고려는 서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후백제와 결전하여 이기기 위하여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초기에는 후백제와의 관계에 있어서 화전(和戰)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에 대하여 군사적 압박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려로서도 이 지역을 사수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지방)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 935년 후백제의 왕실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하였으며, 또 같은해 10월에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하여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친히 저술하여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준수하여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는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하여 그의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이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 중결(仲潔)/군진(君晋)
    송헌(松軒)
    시호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35(충숙왕 복위 4) - 1408(태종 8)
    본관
    전주(全州)
    분류
    왕실 > 왕
    태조(太祖){2}에 대하여

    1335년(충숙왕 복위 4)∼1408년(태종 8). 조선 제1대왕. 재위 1392∼1398년. 본관은 전주(全州). 이름은 성계(成桂). 자는 중결(仲潔), 호는 송헌(松軒). 등극 후에 이름을 단(旦), 자를 군진(君晋)으로 고쳤다. 화령부(和寧府: 영흥) 출생. 자춘(子春)의 둘째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씨(崔氏)이다. 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계비는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담대하였으며, 특히 궁술(弓術)에 뛰어났다. 그의 선조 이안사(李安社)가 원나라의 지배 아래 여진인이 살고 있던 남경(南京: 간도지방)에 들어가 원나라의 지방관이 된 뒤로부터 차차 그 지방에서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이안사의 아들 행리(行里), 손자 춘(椿)이 대대로 두만강 또는 덕원 지방의 천호(千戶)로서 원나라에 벼슬하였다. 이자춘도 원나라의 총관부(摠管府)가 있던 쌍성(雙城)의 천호로 있었다. 이자춘은 1356년(공민왕 5) 고려의 쌍성총관부 공격 때에 내응, 원나라의 세력을 축출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비로소 고려의 벼슬을 받았다. 1361년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임명되어 동북면(東北面) 지방의 실력자가 되었다. 이성계는 이러한 가문의 배경과 타고난 군사적 재능을 바탕으로 하여 크게 활약함으로써 점차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1361년 10월에 반란을 일으킨 독로강만호(禿魯江萬戶) 박의(朴儀)를 잡아 죽였으며, 같은해 홍건적의 침입으로 수도가 함락되자 이듬해 정월 친병(親兵: 私兵) 2,000명을 거느리고 수도탈환작전에 참가, 제일 먼저 입성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1362년 원나라 장수 나하추(納哈出)가 수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원 지방으로 쳐들어와 기세를 올리자 그는 동북면병마사에 임명되어 적을 치게 되었다. 여러 차례의 격전 끝에 마침내 함흥평야에서 적을 대파, 격퇴시켜 명성을 크게 떨쳤다. 1364년 최유(崔濡)가 원제(元帝)에 의하여 고려왕에 봉하여진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원병(元兵) 1만명을 인솔, 평안도 지방에 쳐들어오자, 최영(崔瑩)과 함께 수주(隋州) 달천(獺川)에서 이들을 섬멸하였다. 이무렵 여진족은 삼선(三善)·삼개(三介)의 지휘 아래 동북면에 침범, 함주까지 함락시켜 한때 기세를 올렸으나, 그는 이들을 크게 무찔러 격퇴함으로써 동북면의 평온을 되찾았다. 이해에 밀직부사의 벼슬과 단성양절익대공신(端誠亮節翊戴功臣)의 호를 받았다. 그뒤 동북면원수지문하성사(東北面元帥知門下省事)·화령부윤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77년(우왕 3) 크게 창궐하던 왜구를 경상도일대와 지리산에서 대파하였으며, 1380년에 양광·전라·경상도도순찰사가 되어, 아기바투(阿其拔都: 阿只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운봉(雲峰)에서 섬멸하였다. 그 전과는 역사상 황산대첩(荒山大捷)으로 알려질 만큼 혁혁한 것이었다. 1382년 여진인 호바투(胡拔都)가 동북면일대를 노략질하여 그 피해가 극심하자, 동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이듬해 이지란(李之蘭)과 함께 출진, 길주에서 호바투의 군대를 궤멸시켰다. 이어서 안변책(安邊策)을 건의하였다. 1384년 동북면도원수문하찬성사(東北面都元帥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함주에 쳐들어온 왜구를 대파하였다. 138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이 되었으며, 최영과 함께 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을 주살하였다. 이해 명나라의 철령위(鐵嶺衛)설치문제로 두 나라의 외교관계가 극도로 악화, 요동정벌이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우군도통사가 되어 좌군도통사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정벌군을 거느리고 위화도까지 나아갔으나, 끝내 회군을 단행하였다. 개경에 돌아와 최영을 제거하고 우왕을 폐한 뒤 창왕을 옹립, 수시중(守侍中)과 도총중외제군사(都摠中外諸軍事)가 됨으로써 정치적·군사적 실권자의 자리를 굳혔다. 이듬해 다시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뒤 수문하시중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전국의 병권을 장악하였으며, 곧 이어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무렵 그는 신흥정치세력의 대표로서 새 왕조 건국의 기반을 닦기 시작하였다. 1391년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가 되었으며, 조준(趙浚)의 건의에 따라 전제개혁(田制改革)을 단행,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마저 박탈하였다. 마침내 1392년 7월 공양왕을 원주로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즉위초에는 국호를 그대로 ‘고려(高麗)’라 칭하고 의장(儀章)과 법제도 모두 고려의 고사(故事)를 따를 것임을 선언하였으나, 차차 새 왕조의 기틀이 잡히자 고려의 체제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우선, 명나라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쓰면서, 명나라의 양해 아래 새 왕조의 국호를 ‘조선(朝鮮)’으로 확정, 1393년(태조 2) 3월 15일부터 새 국호를 쓰기로 하였다. 다음에는 새 수도의 건설이 필요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왕사(王師) 무학(無學: 自超)의 의견에 따라 한양(漢陽)을 새 서울로 삼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393년 9월에 착공, 1396년 9월에 이르기까지 태묘·사직·궁전 등과 숙정문(肅靖門: 北門)·흥인문(興仁門: 東大門)·숭례문(崇禮門: 南大門)·돈의문(敦義門: 西大門)의 4대문, 광희문(光熙門)·소덕문(昭德門)·창의문(彰義門)·홍화문(弘化門)의 4소문(小門) 등을 건설하여, 왕성의 규모를 갖추었다. 한편으로 법제의 정비에도 노력하여, 1394년 정도전(鄭道傳)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과 각종 법전이 편찬되었다. 또한, 숭유척불정책(崇儒斥佛政策)을 시행하여 서울에 성균관, 지방에는 향교를 세워 유학의 진흥을 꾀하는 동시에 불교를 배척하는 정책을 쓰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그는 새 왕조의 기반과 기본정책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왕자 사이에 왕위계승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졌다. 태조 즉위 후에 세자책립문제로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계비 강씨의 소생인 방석(芳碩)을 세자로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방원(芳遠: 신의왕후 소생)의 불만은 대단하였다. 1398년 태조의 와병중에 방원은 세자인 방석을 보필하고 있던 정도전·남은(南誾) 등이 자신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제거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병을 동원, 그들을 살해하였으며, 곧이어 방석·방번(芳蕃) 마저 죽여 후환을 없앴다. 새 세자는 방원의 요청에 의하여 방과(芳果)로 결정하였다. 태조는 방석·방번 형제가 무참히 죽은 데 대해서 몹시 상심하였다. 그는 곧 왕위를 방과에게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1400년(정종 2)에 방원이 세자로 책립, 곧 이어 왕위에 오르자, 정종은 상왕이 되고, 태조는 태상왕(太上王)이 되었다. 형제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에 대한 태조의 증오심은 대단히 컸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 태조는 한때 서울을 떠나 소요산(逍遙山)과 함주(咸州: 지금의 함흥) 등지에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특히, 함주에 있었을 때에 태종이 문안사(問安使)를 보내면, 그때마다 그 차사(差使)를 죽여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어디에 가서 소식이 없을 경우에 일컫는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태조의 태종에 대한 증오심이 어떠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된다. 태조는 태종이 보낸 무학의 간청으로 1402년(태종 2) 12월 서울로 돌아왔다. 태조는 만년에 불도(佛道)에 정진하였다. 덕안전(德安殿)을 새로 지어 정사(精舍)로 삼고 염불삼매(念佛三昧)의 조용한 나날을 보냈다. 1408년 5월 24일 창덕궁(昌德宮) 별전(別殿)에서 죽었다. 시호는 지인계운성문신무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고, 묘호(廟號)는 태조(太祖)이며, 능은 건원릉(健元陵: 현재 경기도 남양주군 구리읍 인창리)이다.



  • 시호

    이칭

    시대
    삼국시대 > 고구려
    생졸년
    47(민중왕 4) - 165(차대왕 20)
    본관
    미상(未詳)
    분류
    왕실 > 왕
    태조왕(太祖王)에 대하여

    47년(민중왕 4)∼165년(차대왕 20). 고구려 제6대 왕. 재위 53∼146년. 국조왕(國祖王) 또는 태조대왕(太祖大王) 등으로도 표기되어 있다. 이름은 궁(宮), 아명은 어수(於漱). 유리왕의 아들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와 부여 출신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어나면서부터 능히 볼 줄을 알았고 어려서부터 영리하였다고 한다. 53년에 모본왕이 살해되자 여러 관리들이 재사를 왕으로 추대하였으나, 재사가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양하므로 즉위하였다. 즉위 당시 나이가 7세에 불과하여 태후(太后)가 섭정하였다. 56년(태조왕 4) 동옥저를 정복하여 성읍으로 삼음으로써 동으로는 동해,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확장하였고, 68년에는 부여의 망명세력인 갈사국(曷思國)을 병합하였으며, 72년에는 관나부(貫那部)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보내어 조나(藻那)를 공격하여 그 왕을 사로잡았고, 74년에는 환나부(桓那部) 패자 설유(薛儒)로 하여금 주나(朱那)를 공격하게 하여 그 왕자 을음(乙音)을 사로잡는 등, 주변소국으로 세력을 확대해나갔다. 98년의 8개월에 걸친 책성(栅城)의 순수, 102년의 책성 안무(安撫), 114년의 남해(南海) 지방순행 등을 통하여 확보된 영역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시켜나갔다. 한편 대외관계에 있어서는 고구려의 성장을 저지하려는 후한(後漢)에 대하여 때로는 사절을 파견, 평화공세를 펴기도 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투쟁을 통하여 그들의 압력을 극복하고 서방진출을 꾀하기도 하였다. 즉, 55년 요서지역에 10성을 쌓게 하여 후한의 침공에 대비하는 한편, 105년에는 후한의 요동군(遼東郡)을, 111년과 118년에는 예맥과 더불어 현도군(玄菟郡) 및 낙랑군 소속의 화려성(華麗城)을 공격하는 등 적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그리하여 121년 1월 후한의 유주자사(幽州刺史) 풍환(馮煥), 현도태수 요광(姚光), 요동태수 채풍(蔡諷)의 침공을 받았지만, 겉으로는 항복하는체하면서 오히려 요동·현도를 공격하고 현도군 소속의 후성(候城)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렸다. 4월에는 요동의 선비족과 더불어 요동군 소속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태수 채풍을 살해하였고, 12월과 이듬해인 122년에는 마한·예맥과 더불어 현도군·요동군을 공격하였다. 146년에는 요동군의 신안거향(新安居鄕)과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여 대방현령(帶方縣令)을 살해하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생포하는 등, 후한과 낙랑과의 교통로를 위협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태조왕은 재위기간 동안 후한의 압력차단과 서방진출 기도를 통하여 고구려의 국가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편 68년에는 투항해온 갈사왕(曷思王)의 손자 도두(都頭)를 우태(于台)로 삼았고, 74년에는 공파한 주나의 왕자 을음을 고추가에 임명하는 등, 주변소국의 지배세력들을 왕권하에 흡수함으로써 전제왕권적 지배체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또 계루부(桂婁部)에 의한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후한 유주자사 풍환의 침입을 격파하면서 점차 권력을 장악한 동생 수성(遂成)이 왕위까지 노리자 좌보(左輔) 고복장(高福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46년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에서 은거하다가, 165년 나이 119세로 죽었다. 이때 신대왕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태조왕이 죽은 해에 대해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모두 165년이라고 한 반면에, 《후한서》에는 121년이라고 되어 있다. 만약 《후한서》에 따른다면 재위도 121년에 끝나므로 122년 이후의 사실은 태조왕의 업적이 아닌 것이 되기에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 유덕(遺德)

    시호
    성덕신공문무광효(聖德神攻文武光孝)/예철성렬(睿哲成烈)/공정(恭定)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전기
    생졸년
    1367(공민왕 16) - 1422(세종 4)
    본관
    전주(全州)
    분류
    왕실 > 왕
    태종(太宗)에 대하여

    1367년(공민왕 16)∼1422년(세종 4). 조선 제3대 왕. 재위 1401∼1418년. 본관은 개성(開城). 이름은 방원(芳遠). 자는 유덕(遺德).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이고, 비는 민제(閔齊)의 딸 원경왕후(元敬王后)이다. 1. 성장과정 성균관에서 수학하고 길재(吉再)와 같은 마을에 살면서 학문을 강론하기도 하였으며, 일시 원천석(元天錫)을 사사하였다.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고, 1388년(창왕 즉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 요청의 사명을 띠고 명나라에 파견된 정사 문하시중 이색(李穡)의 서장관이 되어 남경(南京)에 다녀왔다. 1392년(공양왕 4) 3월에는 이성계(李成桂)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은 것을 기화로 수문하시중 정몽주(鄭夢周)가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으로 하여금 공양왕에게 상소하게 하여 정도전(鄭道傳) 등 이성계파의 핵심인물을 유배시키고 이성계까지 제거하기를 도모할 때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으로 하여금 정몽주를 격살하게 함으로써 대세를 만회하였다. 같은해 정도전 등과 공작하여 도평의사사로 하여금 이성계 추대를 결의하게 하고, 왕대비(王大妃: 공민왕비 안씨)를 강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키게 한 뒤 이성계를 등위하게 하였다. 조선이 개국되자 1392년(태조 1) 8월에 정안군(靖安君)으로 책봉되었을 뿐, 강비(康妃: 태조의 계비)·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과 개국공신책록에서 제외되고 세자책봉에서도 탈락되었다. 1394년 명나라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요청해 옴에 따라 남경에 가서 명나라 태조와 회견하고 생흔(生釁)·모만(侮慢) 문제에서 비롯된 입명문제 등 대명관계를 타결하고 귀국하였다. 2. 즉위과정 1398년 정도전 일파에 의하여 요동정벌 계획이 적극 추진되면서 자신의 마지막 세력기반인 사병마저 혁파당할 단계에 이르자, 평소의 불만을 폭발시켜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과 세자 방석(芳碩) 등을 제거한 뒤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정변 직후에는 여러 사정을 감안하여 세자로의 추대를 사양하였으며, 단지 정안공(靖安公)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우군절제사와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를 겸하였다. 또한 정사공신(定社功臣)을 논정하여 1등이 되었고, 이어 개국공신 1등에도 추록되었다. 1399년(정종 1)에 새로 설치된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으며, 강원도 동북면의 군사를 분령(分領)하였다. 1400년 방간(芳幹)과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박포(朴苞) 등이 주동이 된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한 뒤 세자로 책봉되면서 내외의 군사를 통괄하게 되었다. 세자로 책봉되자 병권장악·중앙집권을 위하여 사병을 혁파하고 내외의 군사를 삼군부로 집중시켰으며,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고치어 정무를 담당하게 하고 중추원을 삼군부로 고치면서 군정을 담당하도록 하였다. 이어 1400년 11월에 정종의 양위를 받아 등극하였다. 3. 왕권강화책 태종은 왕권의 강화와 중앙집권 확립을 위하여 공신과 외척을 대량으로 제거하였다. 1404년에는 3년 전에 있었던 이거이(李居易) 난언사건을 들추어 이거이 및 이저(李佇)를 귀향조처하였고, 1407년에는 불충을 들어 처남으로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다시 1409년에는 민무구와 관련된 인물로 연계시켜 이무(李茂)·윤목(尹穆)·유기(柳沂) 등을 각각 목 베었다. 그뒤 1415년에는 불충을 들어 나머지 처남인 민무휼(閔無恤)·민무회(閔無悔)형제를 서인으로 폐하였다가 이듬해 사사하였고, 같은 해 이숙번(李叔蕃)도 축출하였다. 이와 함께 1414년에 잔여공신도 부원군으로 봉하여 정치일선에서 은퇴시켜 말년에는 왕권에 견제가 될 만한 신권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를 토대로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를 단행하고 사전(私田)의 일부를 하삼도(下三道)로 이급하였다. 4. 중앙제도의 정비 1401년에 문하부를 혁파하면서 종래까지 의정부 합좌에 참여하였던 삼사·예문춘추관·삼군총제를 제외시키고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국정을 합의하게 함으로써 의정부제를 정립하였다. 또한,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郞舍)를 사간원으로 독립시켰으며,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1405년에는 육조직계제로의 전환기도에 따른 의정부기능 축소와 육조기능 강화책으로 육조장관을 정3품 전서(典書)에서 정2품의 판서로 높였고, 전곡(錢穀)과 군기를 각각 관장하던 사평부와 승추부를 폐지하고 그 사무를 호조와 병조로 이관시켰다. 한편 좌·우정승이 장악하였던 문무관의 인사권을 이조·병조로 이관하였다. 같은해에 대언사(代言司)를 강화하여 동부대언을 증설하고 6대언으로 하여금 육조의 사무를 분장하도록 하였으며, 육조의 각 조마다 세개의 속사(屬司)를 각각 설치하고 아울러 당시까지 존속한 독립관아 중에서 의정부·사헌부·사간원·승정원·한성부 등을 제외한 90여 관아를 그 기능에 따라서 육조에 분속시켜 각각 육조로 하여금 관장하거나 지휘하게 하는 속사제도와 속아문제도(屬衙門制度)를 정하였다. 1414년에는 육조직계제를 단행하여 육조가 국정을 분장하도록 하면서 왕―의정부―육조의 국정체제를 왕―육조의 체제로 전환시켜 왕권과 중앙집권을 크게 강화하였다. 5. 지방제도의 정비 1403년과 1406년에 고려말 이래의 문란된 지방제도를 개편하려 하였으나 시행되지 못하다가 1413년에 이르러서야 개편하였다. 즉, 이해 10월에 완산을 전주, 계림을 경주, 서북면을 평안도, 동북면을 영길도(永吉道), 각 도의 단부관(單府官)을 도호부, 감무(監務)를 현감으로 각각 고치고 아울러 군·현의 이름에 있는 ‘주(州)’자를 ‘산(山)·천(川)’자 등으로 개명하면서 1유도부(留都府)·6부(府)·5대도호부(大都護府)·20목(牧)·74도호부·73군·154현의 지방행정을 정비하였다. 이듬해 경기좌·우도를 경기도로 개칭하고, 1417년에는 평안·함길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를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 도안무사(都安撫使)를 병마도절제사로 개칭하고 풍해·영길도를 황해·함경도로 개칭하면서 8도체제를 확립하였다. 그밖에 1409년에 전라도 임내(任內)를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하면서 혁파하였고, 향·소·부곡도 가까운 군·현으로 이속시켜 점진적으로 소멸시켰다. 6. 군사제도의 정비와 국방의 강화 태종은 군사적인 무력을 배경으로 즉위한만큼 군사에 대한 관심이 극진하였다. 먼저 왕 개인을 위한 군사에 유의하여 즉위하던 해에 수하병을 갑사(甲士)로 편입하고, 의관자제(衣冠子弟) 중에서 무재가 있는 자를 뽑아 별시위(別侍衛)로 편성하였으며, 1404년에는 응양위(鷹揚衛)를 설치하였다. 1407년 내상직(內上直)을 내금위(內禁衛)로 개편하면서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인물을 특지(特旨)로써 기능을 헤아려 서용하였다. 1409년 내시위(內侍衛)를 설치하였으며, 10사(司) 중 9사를 시위사(侍衛司)로 개편하였다. 군사의 지휘체제에 있어서는 1401년 삼군부를 승추부로 개편하여 왕명출납과 군기를 장악하게 하였고, 1403년 삼군부를 삼군도총제부로 부활시키면서 승추부는 군기를, 도총제부는 군령을 나누어서 장악하게 하였다. 1405년 승추부를 병조에 귀속시켜 병조가 군사지휘권까지 장악하게 하였고, 1409년에는 삼군진무소(三軍鎭撫所)를 설치하여 다시 병조는 군정을, 진무소는 군령을 담당하게 하다가 곧 삼군진무소를 의흥부(義興府)로 개칭하였다. 그뒤 1412년에 의흥부를 혁파하고 병조가 군정을 전장하게 하였다. 한편, 지방군은 1409년 11도(道)에 도절제사를 파견하였고, 1415년경까지 해안을 중심한 영진군(營鎭軍)·수성군(守城軍)을 정비하였으며, 1410년경부터는 군역에서 제외된 향리·공사노·교생 등으로 잡색군(雜色軍)을 조직하여 유사시에 내륙을 수호하게 하였다. 수군은 시위패(侍衛牌)의 일부를 수군으로 충당하여 강화하였고, 1403년에는 각 도마다 경쾌소선 10척씩을 만들어 왜구에 대비하게 하였고, 1410년부터 1412년까지 병선 200여척을 새로 만들었으며, 1413년부터 1415년까지는 거북선(이순신의 그것과는 구조가 다름.)을 개발하기도 하였다. 1412년과 1417년에는 선저(船底)에 석회를 발라 충해를 방지하는 축선법(畜船法)과 선저를 연기로 그을려서 충해를 방지하는 연훈법(烟熏法)을 채택하도록 하였다. 사법·경찰은 1402년에 고려말 이래의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를 순위부(巡衛府)로 개칭하였고, 1403년에 순위부를 의용순금사(義勇巡禁司)로 개편하여 도적을 방지하면서 반역죄인 등을 사찰, 심문, 처벌하게 하였다. 7. 토지·조세제도의 정비 양전사업으로 1405년부터 이듬해까지 6도를 양전(量田)하고, 1411년부터 1413년에 걸쳐 평안도·함경도까지 양전함으로써 모두 120만여결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군자보충·조운타개·신권억압과 관련하여 사전(私田)의 지배를 강화하여 나갔는데, 1401년에 별사전(別賜田)을 혁파하여 새로 벼슬한 자에게 지급할 것을 정하였고, 이듬해는 과전법을 개정함으로써 종래까지 무세지였던 사원·공신전을 유세지로 편입하였다. 또한, 1405년에 1∼18과의 과전에서 5결씩을 감하여 군자전으로 충속하였으며, 외방거주를 원하는 전직관리의 과전은 5∼10결로 제한하였다. 이듬해에는 고려말의 전제개혁에서 제외되었던 사원전(寺院田)을 혁파하여 5만∼6만결을 새로이 확보하였고, 1409년에 한량관의 군전을 몰수하여 군자전으로 하고 공신전전급법(功臣田傳給法)을 정하여 공·사천인 자손과 기첩(妓妾)과 천첩의 공신전 전급을 금하였다. 1412년에는 원종공신전의 세습제를 폐지하고 외방에 퇴거한 자의 과전을 몰수하였다. 1414년에는 수신전(守信田)·휼양전(恤養田)의 지급을 제한하면서 액수를 감하고, 군자전에서의 과전절급을 중지, 겸직이 없는 검교(檢校)를 폐지하였으며, 평양·영흥 토관(土官)의 수를 반으로 줄이면서 녹과의 3분의 2를 감하였다. 1417년에는 1403년 이래 7차에 걸친 사전의 이급논의를 매듭지으면서 각종 공신전·과전 등 총 11만5340결의 3분의 1을 충청도·경상도·전라도로 이급하고, 이속된 토지는 군자전으로 귀속시켰다. 한편, 조세정책으로 1408년에 공처노비의 신공(身貢)과 제주의 공부(貢賦)를, 1413년에 함경도·평안도의 공부를, 1415년에는 제주의 수조법과 맥전조세법을 정하였다. 그리하여 후반기에는 곡식을 보관할 창고를 대량으로 만드는 등 비축곡의 규모가 1413년에 356만8700석이던 것이 1417년에는 415만 5401석에 이르렀다. 8. 대외정책 1401년 명나라 혜제(惠帝)로부터 고명(誥命)·인신(印信)을 받았으나 성조(成祖)가 계위하자 이듬해 하륜 등을 보내 등극을 축하하고 혜제가 준 고명·인신을 개급하여 줄 것을 요청, 1403년에 새 고명·인신을 받음으로써 대명관계를 정립시켰다. 이후 여진인과 입거 요동인을 둘러싸고 불편한 적도 있었고, 또 1년에 세 차례의 사신파견에 따른 조공과 처녀·환관·말·소 등의 무리한 진헌이 있기도 하였지만, 서적·약재·역서 등의 선진문물을 수입하고 국기를 튼튼히 하는 명분을 얻었다. 한편, 왜인관계에서는 1407년에 흥리왜인(興利倭人)의 무역을 정하고 통교무역자의 입구를 입증하는 행장(行狀)을 발급하였고, 도박소(到泊所)를 부산포와 내이포(乃而浦)로 한정시켜 병비를 정탐하고 난언작폐함을 제약하였으며, 1414년에는 왜인범죄논결법을 정하였다. 1417년 경상도에서의 선박건조를 금하고, 이듬해 염포를 추가로 개방하였지만 왜인제약은 계속하였다. 이와 함께 입국왜인·왜선·체류시일·조어지(釣漁地) 등을 제한하였으며, 거주왜인들은 모두 내륙으로 이주시켜 왜구와의 내통을 근절시켰다.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정벌 등의 강온책을 실시하였지만 크게 성공하지는 못하였다. 1404년에 상경시위제를 실시하고, 1406년에는 경성·경원에 무역소를 개설하였다. 서북국경의 개척은 1403년 강계부, 1413년 갑산군, 1416년 여연군을 각각 설치하면서 압록강까지 진출하였다. 그런데 동북면은 왕 초기에 경원부와 경성성을 축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406년부터 1410년에 걸친 여진의 침입으로 경원부를 경성으로 옮기고 공주에 있는 덕릉(德陵)·안릉(安陵)을 함흥으로 옮겼으며, 1415년에 길주·영흥성을 축조하면서 1417년에야 경원부를 복설하였다. 그밖에 유구(琉球)·자바 등과도 교섭이 있었고, 유구로부터는 왜구에 의해 잡혀간 포로를 송환받기도 하였다. 9. 기타 위와 같이 정치·경제·사회·문화·대외정책과 함께 부수적인 정책사업으로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기고, 창덕궁·덕수궁·경회루·행랑·청계천을 조성하였으며, 별와요(別瓦窯)를 설치하고 초가를 개량하였다. 한편, 《경제육전원집상절 經濟六典元集詳節》·《속집상절 續集詳節》을 수찬하여 통치체제를 정비하였고, 《선원록 璿源錄》을 정비하여 비태조계를 왕위계승에서 제외시켰으며, 법전의 조종성헌존중주의(祖宗成憲尊重主義)를 확립하였다. 또한, 백관녹과를 정비하고, 호구법을 제정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여 호구와 인구를 파악하였다. 그뒤 1418년 무절제와 방탕한 생활을 한 사실을 들어 장자인 세자 제(褆)를 폐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뒤의 세종)을 세자로 삼아 2개월 뒤에 선위하였다. 그러나 선위한 뒤에도 군권에 참여하여 심정(沈泟)·박습(朴習)의 옥을 치죄하였고, 병선 227척, 군사 1만 7,000여명으로 대마도를 공략하는 등 세종의 왕권에 기여하였다. 태종은 이성계를 보필하여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고, 개국초에는 일시 불우하기도 하였으나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고 국권을 장악하였으며, 정종을 계위하여 문물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을 이룩함으로써 세종성세의 토대를 닦았다. 1418년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고, 1421년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이듬해에는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의 시호를 받았고, 1683년(숙종 9)에 예철성렬(睿哲成烈)의 호를 더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공정(恭定)의 시호를 받았다. 슬하에 12남 17녀를 두었는데, 제1자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이고, 제3자가 세종이다. 묘호(廟號)는 태종이며, 능호는 헌릉(獻陵)으로 광주(廣州) 대모산(大母山: 현재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다.



  • 시호
    무열(武烈)
    이칭

    시대
    삼국시대 > 신라
    생졸년
    602(진평왕 24) - 661(문무왕 1)
    본관
    경주(慶州)
    분류
    왕실 > 왕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에 대하여

    602년(진평왕 24)∼661년(문무왕 1). 신라 제29대 왕. 재위 654∼661년. 성은 김씨. 이름은 춘추(春秋). 진지왕의 손자로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龍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으로 진평왕의 딸이다. 비는 문명부인(文明夫人)인데 각찬(角飡, 角干) 김서현(金舒玄)의 딸, 즉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 문희(文姬)이다. 김춘추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閼川)을 천거하였으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하여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의 정치적·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으며,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내에서 새로운 신귀족 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 집단의 반발을 받았으며,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진 듯하다. 그러나 642년(선덕여왕 11)에 신라의 서방요충인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이 백제에게 함락되고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 부처의 죽음은 김춘추계에 충격을 주었다. 이 사건은 김춘추로 하여금 대외적인 외교활동을 전개하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대야성에서의 원한을 갚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러 갔다. 그러나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을 위한 이 외교는 진흥왕 때에 신라가 고구려로부터 공취한 한강 상류유역의 영토 반환 문제로 말미암아 결렬되고, 오히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당했다가 겨우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와같은 대야성에서의 패배와 고구려에 대한 외교의 실패 등은 김춘추와 김유신계의 정치적 결합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러한 결합을 바탕으로 김춘추는 647년에 일어난 구귀족 세력인 상대등 비담(毗曇)의 반란을 진압시킬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구귀족 집단의 대표자인 비담이 선덕여왕을 옹립하고 있는 신귀족 집단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으킨 것인데, 오히려 김춘추·김유신계의 신귀족 세력에 의해서 30여명이 숙청당함으로써 분쇄되고 말았다. 이 정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자 신귀족은 구귀족과 일시적으로 제휴하여 진덕여왕을 즉위시키고,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하였다. 비담의 반란 진압과 진덕여왕의 옹립 과정에서 김춘추·김유신계는 정치적 실권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진덕여왕 대에는 김춘추에 의한 새로운 방향으로의 외교활동과 내정개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김춘추는 고구려와의 동맹관계 수립에 실패하자 다시 당나라와의 관계강화를 위하여 648년(진덕여왕 2)에 당나라에 파견되어 적극적인 친당정책을 추진하였으며, 당 태종으로부터 백제공격을 위한 군사지원을 약속받았다. 김춘추에 의한 친당정책은 650년에 신라가 중고시대 전기간을 통하여 계속 사용하여 오던 자주적인 연호를 버리고 당나라 연호인 영휘(永徽)를 신라의 연호로 채택한 데에서 단적으로 나타난다. 한편 김춘추는 귀국 후에 왕권강화를 위한 일련의 내정개혁을 주도하였는데, 649년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의 채택, 651년 왕에 대한 정조하례제(正朝賀禮制)의 실시, 품주(稟主)의 집사부(執事部)로의 개편 등 한화정책(漢化政策)이 그것이다.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하고 왕권강화를 실제적 내용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서의 성격이 짙었다. 친당외교와 내정개혁을 통하여 신장된 신귀족 세력의 힘을 기반으로 하여 김춘추는 진덕여왕이 죽은 뒤에 화백회의에서 섭정으로 추대되었고, 그리고 그와도 일시적으로 제휴하였던 구귀족 세력의 대표인 상대등 알천을 배제시키면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김춘추는 즉위에 있어서 그의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었던만큼 화백회의에 의하여 추대받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귀족으로부터 신귀족으로의 권력이양과 왕위계승의 합법성 내지 정당성을 유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무열왕은 즉위하던 해에 우선 아버지 용춘을 문흥대왕(文興大王)으로, 어머니 천명부인을 문정태후(文貞太后)로 추증하여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조를 개정하는 등의 율령정치(律令政治)를 강화하였다. 그리고 655년(태종무열왕 2)에 원자(元子)인 법민(法敏)을 태자에 책봉함으로써 왕권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아들 문왕(文王)을 이찬으로, 노차(老且, 혹은 老旦)를 해찬(海飡)으로, 인태(仁泰)를 각찬(角飡)으로,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을 각각 이찬으로 관등을 올려줌으로써 자기의 권력기반을 강화시켰다. 65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김인문(金仁問)을 군주(軍主)에, 658년에는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문왕을 집사부 중시(中侍)에 새로이 임명하여 직계친족에 의한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그의 즉위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던 김유신에 대해서는 660년에 상대등으로 임명하여 왕권을 보다 전제화(專制化)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것은 태종무열왕이 즉위하기 이전인 중고시대의 상대등은 귀족회의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존재이거나 왕위계승 경쟁자로서의 자격이 있었던 것에 대하여, 태종무열왕이 즉위한 이후에 왕의 측근세력인 김유신이 상대등에 임명되었다는 사실은 상대등이 귀족세력의 대표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전제왕권과 밀착되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상대등 중심의 귀족세력은 약화될 수 밖에 없으며 신라 중대사회에서는 전제왕권의 방파제 구실을 하는 행정책임자인 집사부 중시의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친당외교를 통하여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내정에서는 측근세력의 정치적 포석을 통하여 왕권을 안정시킨 다음 고구려·백제에 대한 전쟁을 수행하였다. 655년에 고구려가 백제·말갈(靺鞨)과 연합하여 신라 북경지방의 33성을 공취하자 신라는 당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였고, 이에 당나라의 정명진(程名振)과 소정방(蘇定方)의 군사가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또한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하여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진주(眞珠)·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黃山之原〕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泗沘城)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하였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었다. 사비성 함락 이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金仁泰)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尔禮城: 지금의 論山) 등 20여성의 항복을 받고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하여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 주었다. 그리고 항복해 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七重城: 지금의 積城)을 공격해왔고,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惱音信)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술천성(述川城: 지금의 驪州)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冬陁川)이 효과적으로 방어하였으므로 대나마(大奈麻)로 관등을 높여 주었다. 이해에 압독주(押督州: 지금의 慶山)를 대야(大耶: 지금의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阿飡) 종정(宗貞)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재위한 지 8년 만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를 지냈다. 시호는 무열(武烈)이며, 묘호(廟號)는 태종(太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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