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1517년(중종 12)∼1575년(선조 8).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경숙(敬叔), 호는 이재(頤齋). 증조부는 차보인(車寶仁)이고 조부는 차계성(車繼成)이며 아버지는 차광운(車廣運)이다. 외조부는 최지(崔漬)이고 이계원(李繼元)의 딸과 결혼하였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문학(文學)으로 이름이 들어났으며 효행이 있었다. 1543년(중종 38)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에 갑과(甲科) 2위로 급제하여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1574년(선조 7) 평해군수(平海郡守)로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죽었다. 경사(經史)에 밝았고, 열심히 독서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아들은 차천로(車天輅)이다.
생몰년 미상. 고려 충렬왕 때의 재상. 본명은 홀대(忽䚟). 본관은 연안(延安).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가 시집올 때 겁령구(怯怜口)로 따라왔다. 본래 고려인이었으나 일찍이 원나라에 잡혀가 연경(燕京: 北京)에서 살았다고 한다. 제국대장공주의 겁령구가 된 것은 그의 어머니가 공주의 유모가 된 데 연유한다. 1277년(충렬왕 3) 원나라에 가서 호피(虎皮)를 바치고 왔으며, 이듬해 충렬왕이 그의 집에 이어(移御)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엄청나게 치부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290년에 상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공녀(貢女) 17인을 바치고 돌아왔으며, 그뒤 밀직사를 거쳐 시랑·찬성사에 올랐다. 1308년(충선왕 즉위) 검교사도자정원사(檢校司徒資政院使)에 올랐다가 곧 첨의찬성사 판의조사(僉議贊成事判儀曹事)에 이르렀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근(公謹), 호는 사촌(沙村).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교수(敎授)가 되었다. 효행(孝行)이 지극하여 임금이 효자차신식리(孝子車愼軾里)를 돌에 새겨 마을 입구에 두도록 명령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공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西北面)에 침입하여 경성(京城: 開京)이 점령되고 왕이 남천(南遷)할 때, 판사복시사(判司僕寺事)로서 왕 및 공주·태후를 모시고 임진강을 건너 남행하여 수종하였다. 이 공으로 1363년 신축호종 1등공신에 서훈되었다.
미상∼1204년(신종 7). 고려의 장군. 본관은 연안(延安). 직사관(直史官) 거수(擧首)의 아들이다. 일찍이 아버지가 예언하였던 대로 형 약춘(若春)은 문관으로 입신(立身)하였고, 약송은 장군이 되었다. 금위에 들어가서 명종초에 낭장(郞將)을 거쳐 장군이 되었으며, 내시다방(內侍茶房)을 겸직하였다. 이것이 무관이 내시다방을 겸직하게 된 시초가 되었다. 신종초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수사공 참지정사(守司空參知政事)에 이르렀다. 기홍수(奇洪壽)와 더불어 중서성(中書省)에 앉아서 공작과 모란 기르는 문답을 하였으므로 이때 사람들이 “재상의 직책은 도(道)를 논하고 나라를 경륜함에 있는데, 다만 화조(花鳥)를 논하고 있으니 어찌 백관의 의표(儀表)가 되겠느냐.”라고 조롱하였다. 수태위중서평장사(守太尉中書平章事)에 이르러 죽었다.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의사(義士).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여명(汝明), 호는 풍천(風泉). 선천 출신. 충량(忠亮)의 동생이다. 《춘추좌씨전 春秋左氏傳》에 밝았다. 병자호란 후 과거를 단념하고 고향에 숨어서 의주(義州)의 용사 최효일(崔孝一)과 함께 청태종을 살해하고 명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을 것을 모의하였다. 논밭과 집을 팔아 큰 배를 사서 최효일을 등주(登州)에 보내어 제장(諸將)을 설득하여 심양(瀋陽)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심양에 들어가 친구이자 명나라 도독 심세괴(沈世魁)의 편장(偏將) 관귀(管貴)와 함께 그곳에 숨어서 최효일과 내외로 협공하려 하였다. 그러나 최효일의 누이 아들인 장후건(張厚健)이 청나라 사자(使者)의 속임수에 빠져 개혁이 사전에 누설되어 관귀와 함께 살육당하였다. 숙종 때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가 다시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의주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되었다.
1559년(명종 14)∼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만리(萬理), 호는 창주(滄洲). 증조부는 차계생(車繼生)이고 조부는 차광운(車廣運)이며 아버지는 차식(車軾)이다. 외조부는 이계천(李繼天)이고 이공(李恭)의 딸과 결혼하였다. 1583년(선조 16) 계미(癸未) 알성시(謁聖試)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고 1589년 전의현감(全義縣監)을 지내고,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을 거쳐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문장이 뛰어났고 시(詩)와 글씨에 능했다.
미상∼1467년(세조 13). 조선 전기 무신. 자는 홍기(洪器)이고, 호는 쌍청당(双淸堂)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전라남도 순천(順天) 출신이다. 1467년(세조 13)에 이시애(李施愛) 등이 길주(吉州)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군관(軍官)으로 정휴명(鄭休明)·조규(曺糾)·박성장(朴成章) 등과 함께 적진에 들어가 적들을 교화시켰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마운령(磨雲嶺)에서 적을 막다가 붙잡혀 정휴명과 함께 모두 단천(端川)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뒤에 적개공신(敵愾功臣)에 기록되었다. 저서로 《쌍청당선생실기(雙淸堂先生實記)》가 있다.
1320년(충숙왕 7)∼미상. 여말 선초의 학자·화가.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사평(思平), 호는 운암(雲巖). 지방어사(知防禦使) 종로(宗老)의 아들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한 이후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당대의 대학자인 정몽주(鄭夢周)·이색(李穡) 등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유학자로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수습할 수 없음을 알고 관직을 사퇴한 뒤 평산(平山)의 수운암동(水雲巖洞)에 은거하였다. 이성계(李成桂)가 요동(遼東)을 공격하게 되어 그 계략을 묻자 출병을 반대하였다. 뒤에 위화도회군으로 조선이 개국하였을 때 태조가 공신으로 책록하려 하였으나 굳이 사퇴하고, 이어 정언·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등의 벼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찍이 정도전(鄭道傳)·하륜(河崙) 등이 차씨(車氏) 외손의 서속(庶屬)이었음을 사실대로 족보에 기재하여 그들의 원한을 받아오던 중 평산으로 돌아가려고 송원(松原)에 이르렀을 때, 숙적 하륜 등이 보낸 자객에게 가족 및 일당 80여인과 함께 살해되었다. 당시 고려에 충성을 다하던 두문동 72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림을 잘 그렸으며, 특히 매화에 뛰어났다. 세종 때 황보 인(皇甫仁)의 청원으로 신원되어 시중에 추증되고, 순천의 운암사(雲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선장(善長). 다른 이름은 차인량(車仁亮)이다. 1637년(인조15)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끝나자 사촌 차예량(車禮亮), 의주(義州)의 최효일(崔孝一) 등과 함께 명나라 수복을 계획하였다. 전답과 가옥 등을 모두 팔아 큰 배를 사서 최효일을 등주(登州)에 보내어 여러 장수들을 규합하여 심양(瀋陽)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심양에 들어가 친구인 명나라 도독(都督) 심세괴(沈世魁)의 편장(偏將) 관귀(管貴)와 함께 거사(擧事)하여 안팎으로 협공하기로 계획을 추진했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관귀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숙종 때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그 뒤 다시 호조판서에 가증되었다.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고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무신. 자는 여빙(汝憑)이고, 호는 일제당(日躋堂)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1592년(선조 25) 9월 별장(別將)으로 황주목사(黃州牧使) 김진수(金進壽)와 함께 요로(要路)에 매복하였다가, 평양을 공격하는 왜적 5백여 명과 전투하여 공을 세웠으며, 청도군수(淸道郡守)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에 경기도 호위군으로 종형(從兄) 차은진(車殷軫)과 함께 선발되었다. 《선무원종록(宣武願從錄)》과 《절의록(節義錄)》에 기록되었다.
1881년(고종 18)∼1945년. 독립운동가. 일명 서입환(徐立煥). 호는 동암(東岩). 평안북도 선천 출신. 1907년 평양 숭실중학교(崇實中學校)를 졸업한 뒤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평안도에서 대성학교(大成學校)를 경영하면서 인재육성에 진력하였다. 1910년 12월 일제가 날조한 105인사건으로 1911년 1월에 잡혀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1운동 때 향리에서 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4월 상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고 독립신문사(獨立新聞社)의 기자로 활약하였다. 같은해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에 선임되었고, 1928년 3월 민족진영 독립지사의 단결을 공고히 구축하기 위하여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고 그 주요 실무간부로 선임되었다.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홍보선전책자로 〈한보 韓報〉·〈한성 韓聲〉 등을 발행, 배포하는 등 당의 기본강령의 실천과 그 이념 전파에 진력하였다. 1933년 항저우(杭州)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대일투쟁의욕 진작에 노력하였고, 임시의정원 부의장으로도 활약하였다.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에 의한 5당(義烈團·新韓獨立黨·朝鮮革命黨·韓國獨立黨·美洲大韓人獨立黨) 통합을 통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이 조직될 때 5당 통일에 주도적인 임무를 담당한 김원봉(金元鳳)·김두봉(金枓奉) 등 의열단계가 임시정부의 폐쇄를 강력히 주장하여 임시정부가 다시 곤경에 처하였으며, 더욱이 임시정부국무위원 중 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 5명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담하게 되어 임시정부 자체가 존폐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때 송병조(宋秉祚)와 함께 김구(金九)·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김붕준(金朋濬)·양묵(楊墨)·이동녕(李東寧)·안공근(安恭根)·엄항섭(嚴恒燮) 등과 협의, 임시정부를 고수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 계승, 발전시켰다. 1935년 2월 임시정부 국무위원회를 개최하여 주석에 이동녕을 선출함으로써 국무위원회(國務委員會)를 조직하였는바, 그때 비서장(祕書長)에 선출되어 1945년까지 그 직책을 고수하면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가 충칭(重慶)에서 죽었다. 1947년 김구의 주선으로 유해가 운구되어 서울 효창원에 이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01년∼1922년. 독립운동가. 경기도 화성 출신. 1919년 4월 3일 차희식(車喜植) 등과 함께 화성군 장안면·우정면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지휘하였다. 고향인 수촌리 이장 백낙렬(白樂烈)로부터 장안면사무소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사실을 전하여듣고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다. 장안면장 김현묵(金賢默)이 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고, 차병혁(車炳爀)·정서송(鄭庶松) 등이 인솔하는 2,000여명의 선두에 서서 우정면사무소로 행진하여 건물을 파괴하고, 집기류와 공문서를 파기하는 데 앞장섰다. 이어 석포리 이장 차병한(車炳漢)의 제안으로 군중을 인솔하여 화수리에 있던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방화하였다. 이때 주재소 안에서 일본순사 가와바타(川端豊太郞)가 권총을 발사하며 뛰쳐나와 도망하자, 차희식·정서송 등과 함께 추격하여 격살하는 등 격렬하게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중 옥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이 추서되었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고려의 충신으로 고려가 망한 후 숨어 살며 벼슬을 하지 않았다. 족형(族兄) 시중(侍中) 차원부(車原頫)가 죽고 연좌(連坐)되어 선산(善山)으로 귀향 갔다.
1881년(고종 18)∼1947년. 장로교 목사.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05년 기독교인이 되었고, 1906년 세례를 받았다. 1910년 선천 신성중학교를 졸업하였고, 1911년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언더우드(Underwood, H. G.)에 의하여 발탁되어 조사(助事)가 되었다. 1916년 평양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경충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1917년 경충노회장에 피임되었으며, 1920년에는 새문안교회 목사로 초빙받아 그해 12월부터 목회를 시작하였다. 목회활동에 있어 신앙의 체계화, 교회행정의 기구화에 중점을 두었는데, 이러한 행정능력으로 1928년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권의 편집을 맡기도 하였다. 1929년 제18회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교회행정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하였다. 또한, 교회연합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21년에는 예수교장·감연합협의회 부회장을, 1924년에는 예수교연합공의회 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1938년 신사참배문제로 평양장로회신학교가 폐교된 뒤 채필근(蔡弼近)·김영주(金英珠)·김대현(金大鉉) 등과 함께 1939년 3월에 조선신학교 설립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생몰년 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증조부는 차신식(車愼軾)이다. 1614년(광해군 6) 명나라가 후금(後金)을 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하였는데 강홍립(姜弘立: 1560∼1627)을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출정시켰다. 이때 동생 차재중(車載重), 차예중(車禮重), 차임중(車任重) 차치중(車致重)과 아들 차경량(車敬f亮)과 함께 참여하였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은 부차(富車)에서 대패였다. 그는 형제, 자식과 함께 순국하였다. 뒤에 함께 의주(義州)의 현충사(顯忠祠)에 제향(祭享)되었다.
1596년(선조 29)∼미상.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용지(用之), 호는 단구(丹丘).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의 아들이다. 1620년(광해군 12) 경신(庚申)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로 합격하였다. 관직은 군수(郡守)에 그쳤다.
1753년(영조 29)∼1809년(순조 9). 조선 후기의 시인.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숙장(叔章), 호는 사명자(四名子). 천로(天輅)의 6대손으로, 윤태(潤泰)의 아들이다. 어머니 백씨(白氏)가 그를 잉태하였을 때 하지장(賀知章)을 꿈에 보아 그의 자와 호를 따라 지었다 한다. 하지장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소식(蘇軾)의 흔적도 많다.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서화나 음률·사예(射藝)에도 뛰어났으나, 특히 시를 잘하였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홍양호(洪良浩)·윤행임(尹行恁)·윤사국(尹師國)·정약용(丁若鏞) 등이 자리를 함께 하여 시를 지을 정도였다. 그러나 재주는 뛰어나지만 관직이 한미하여 만년에 만호(萬戶)라는 무관말직(武官末職)에 머물렀던만큼 세상에 대한 불평의 뜻이 많았다. “살아서는 취향백(醉鄕伯), 죽어서는 수문랑(修文郞)”이라는 그의 시는 시주(詩酒)에 경도되었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 주며, 세세생생(世世生生)이 나라에 태어나고 싶지 않다는 하소연은 제도에 대한 불만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가정적으로도 불행하여 동생과 두 아들이 죽은 뒤 더욱 시주에 탐닉하고 방약무인하였다. 천수경(千壽慶)·장혼(張混)·왕태(王太)·최북(崔北) 등과 함께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를 결성하여 비분과 고뇌를 시로 풀었다. 그의 시는 유재건(柳在建)이 편한 《풍요삼선 風謠三選》과 일본인 아오야마(靑山好惠)가 편한 《명가시집 名家詩集》에도 실려 있으며, 시집으로는 《사명자시집》이 전한다.
1934년∼1979년. 군인·정치인. 서울 출생. 1957년 미국의 포병학교와 1960년 보병학교를 졸업하였다.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1962년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 상임위원을 지냈다. 1963년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6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66년 민주공화당 경기6지구위원장을 지냈다. 1967년 민주공화당 지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이천·광주). 1969년 국회외무위원장을 지냈고, 1971년 8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광주, 민주공화당), 그해 국회내무위원장을 거쳤다. 1973년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성남·여주·광주·이천, 민주공화당), 그해 국회내무위원장을 지냈다. 1979년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金載圭)에 의하여 피살될 때 경호실장으로 현장에 있다가 함께 살해당하였다.
생몰년 미상. 고려 고종 때의 문관. 승선(承宣)·추밀원부사·어사대부(御史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215년(고종 2)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 윤세유(尹世儒)가 최충헌(崔忠獻)에게 의지하여 권세를 잡고, 평소 감정이 있던 우복야 정진(鄭稹)을 제거하기 위하여 왕에게 무고하기를, “정진이 그 아우 숙첨(叔瞻)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려 한다.”라고 하자, 왕이 그를 최충헌에게 보내어 은밀히 타일러 윤세유를 잡아 국문하게 하니 무고죄로 유배되었다. 다음해 거란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침입하여오자 중군이 지원군을 요청하므로, 전군병마사(前軍兵馬使)가 되어 안주 태조탄(太祖灘)에서 적을 막았으나 대패하였다. 일찍이 최충헌에게 붙어 아첨을 잘하여 권세를 천단하다가, 1220년 최우(崔瑀)의 미움을 받아 나주에 유배되었다. 그 뒤 최우가 비밀히 소환하여 추밀원부사·어사대부를 제수하고, 또 자신이 사랑하는 명기 옥기향(玉肌香)을 주어 위로하였다. 죽은 뒤 그의 집으로 봉은사(奉恩寺)를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