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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금성일기(錦城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성일기(錦城日記)」는 이지헌(李志憲 ; 1840∼1898)의 시문집인『송애집(松厓集)』권 3에 실려져 있다. 정축년(1877년) 10월 5일에 금성지방으로 출발하여 30일에 도착하기까지 26일의 여정을 기전체의 형식으로 기록하였다. 이동경로와 주요사건을 기록한 뒤에 날짜를 표기하고 있다. 특이한 것은 매 이동지마다 거리를 표시하고 있어 지리적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이지헌의 자는 만첨(萬瞻), 호는 송애(松厓), 본관은 함평(咸平)이다. 아버지는 민희(敏喜)이고, 어머니는 밀양박씨(密陽朴氏)로 이석(履錫)의 딸이다. 장인 박치윤(朴致潤)에게 수학하여 문예에도 능했으나 과거에는 뜻이 없었다. 오직 노친에게 효를 다하며 여가로 독서와 수양에 힘쓸 뿐이었다.
  • 제목
    기성왕환록(基城往還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기성왕환록(基城往還錄)」은 이복(李馥 ; 1626∼1688)의 문집인『양계집(陽溪集)』 권 7에 수록되어 있다. 기해년(1659년) 5월 7일 풍기에 갔다가 20일 다시 안동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것이다. 여행의 목적은 시제(試製)를 위해 떠나간 것이다. 8일 날 예천군에 도착했지만 인조대왕의 기일이여서 백일장이 열리지 않아 풍기로 향하게 된다. 이때 학사(鶴沙) 김응조(金應祖 ; 1587~1667)가 예조참의로 제수되어 사은숙배를 위해 도성으로 가는 중이어서 동행을 하게 된다. 동행중에 김응조가 편집한 『사례문답(四禮問答)』에 관한 것을 묻자 김응조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복으로 하여금 교정을 봐 달라는 청을 하고 있다. 안동으로 돌아올 때는 비가 연이어 내려서 말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길이 움푹 파였으며 이런 수재(水災)는 일찍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복의 자는 면여(勉餘), 호는 양계(陽溪), 본관은 성산(星山)이다. 이복의 아버지는 상규(尙規)이며, 어머니는 덕산황씨로 하징(河徵)의 딸이다. 그는 이구(李坵)에게 경사(經史)를 배우고 궁리치지에 힘썼다. 1651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54년 명경(明經) 갑과에 급제하여 사옹원(司饔院) 직장(直長)이 되었다. 1658년 안동교수(安東敎授)에 임명되고 1660년 전적(典籍)을 거쳐 감찰(監察)이 되고 이어 예조정랑이 되었다. 1679년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올라 형조참의가 되었으나 반대당의 무고로 삼영(三水)에 유배되고 1686년 흥양(興陽)에 이배(移配)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 제목
    기소호행(記蘇湖行)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기소호행(記蘇湖行)」은 병인년(1806년) 1월 14일과 15일 이틀간의 상황을 적어 놓은 일로, 서활(徐活 ; 1761∼1838)의 문집인『매야집(邁?集)』 권 4에 실려져 있다. 사촌(沙村)에 갔다가 소호(蘇湖)에 살고 있던 면암(?庵) 이우(李? ; 1739~1810)가 섬으로 유배 간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소호로 찾아가서 작별인사를 고하고 무사히 다녀오라는 내용을 적은 것이다. 내용을 보면 고매한 인품을 지닌 분이 유배를 가게 되어 안타깝고 70의 연로한 나이라서 건강이 걱정된다는 작별의 말을 전한다. 이에 이장은 모든 것은 조정에서 정한 일이니 조금도 개의치 않고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라고 대답하고 있으니 이장의 고매한 인품을 엿볼 수 있다. 서활의 자는 청여(淸如), 호는 매야(邁?),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권렴(權濂)의 문인으로 성장하여 김종덕(金宗德)에게 수학하였다. 관직에는 뜻이 없어 오로지 위기지학(爲己之學)의 학문에 열중하였다. 만년에 매야정사(邁?精舍)를 지어 후진교육에 힘썼다. 이우는 본관이 한산(韓山)이며, 자는 치춘(稚春), 호는 면암(?庵), 이광정(李光靖)의 아들이다. 과거에 불운하여 마을 부로들의 추천으로 구담서당(龜潭書堂)을 맡아 생도를 가르쳤다. 1792년에 올린 사도세자의 신원을 청하는 영남유림만인소에 소수로 추대되어 대궐로 나아가 의릉참봉에 제수되었다. 이후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시세가 크게 달라져 1805년 소두(疏頭)를 먼 섬에 귀양 보내야 한다는 대신과 대간의 연이은 상소로 인해 이듬해 고금도로 유배를 갔다가 최헌중(崔獻重)의 상소로 4월에 귀양이 풀려 돌아왔다.
  • 제목
    기축이건시일기(己丑移建時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기축이건시일기(己丑移建時日記)』는 기축년(1709년) 서원을 이건할 당시의 자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영당(影堂)의 땅이 좁고 재실(齋室)이 누추하여 이건할 계획을 하였다. 9월에 예를 올리고 장로들과 사림들이 합의하여 참봉을 지낸 김태중(金台重)을 도유사(都有司)로 삼고, 김세용(金世鏞)ㆍ류석두(柳碩斗)를 재임(齋任)으로, 류맹휘(柳孟輝)ㆍ김세중(金世重)을 성조도감(成造都監)으로, 김귀중(金龜重)ㆍ류현시(柳顯時)를 도청(都廳)으로, 김원중(金遠重)ㆍ류형시(柳亨時)ㆍ권이신(權以信)을 벌목유사(伐木有司)로, 김중망(金重望)ㆍ남붕만(南鵬萬)ㆍ김세록(金世錄)ㆍ조명징(趙明徵)을 부판유사(浮板有司)로, 김항중(金恒重)ㆍ김세정(金世鋌)ㆍ류혜화(柳惠和)ㆍ김경렴(金景濂)ㆍ김리중(金履重)을 번와유사(燔瓦有司)로 삼아서 이건 공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그해 11월 8일에 개기향례를 올린 후 본격적인 공사에 착수하였다. 이듬해인 1710년 3월 21일까지는 공사 진행과정에 대해서 언급하였으며, 3월 22에서 7월까지는 공사가 매우 바빠서 일기를 기록하지 못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8월 11일부터 다시 기록하여 마지막 기록날짜는 1710년 10월 8일이다. 10월에 5일에 고사를 지냈는데 봉안문은 밀암(密菴) 이재(李栽 ; 1657~1730)가 작성하였다. 10월 8일에는 서원의 명칭을 두고 사빈(泗濱)ㆍ양계(陽溪)ㆍ봉림(鳳林) 세 가지로 추천되었는데, 결국서원의 명칭을 사빈서원(泗濱書院)으로 정하였다. 결국 이 일기는 사빈서원을 건립할 당시의 상황을 일기로 기록하고 있어 사빈서원 건립과정을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자료이다.
  • 제목
    기축일록(己丑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기축일록(己丑日錄)」은 이의윤(李宜潤 ; 1564∼1597)의 문집인 『무첨당선생문집(無添堂先生文集)』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기축년(1589년) 6월 5일 한강 정구(鄭逑)의 문하에 들어가 『심경(心經)』을 배운 과정과 학문에 관하여 문답한 내용을 적은 것이다. 조부인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에 가서 주변의 누대와 정사 등에 관하여 스승인 정구와 묻고 답한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일기는 6월 24일 까지만 기록되어 있고 그 이후의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이의윤의 자는 수연(?然), 호는 무첨당(無添堂)이며, 본관은 여주(驪州)이다. 이언적(李彦迪)의 손자요, 응인(應仁)의 아들이다. 일찍이 정구(鄭逑)의 문인이 되어 자못 그 추장(推奬)을 받았던 인물이다. 관직을 가져 본일 없이 다만 독서와 효행으로 짧은 인생을 보냈던 사람인데, 사림에서 그를 추도하여 사원을 세워 그를 흠향하였다고 한다.
  • 제목
    낙강범주록(洛江泛舟錄)
    발급년
    193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낙강범주록(洛江泛舟錄)」은 박이곤(朴履坤 ; 1730~1783)의 문집인『지촌선생문집(芝村先生文集) 』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신묘년(1771년) 4월 10일 6ㆍ7명과 함께 배를 띄워 18일 낙동강에 도착하여 유람을 즐긴 과정을 기록한 유람기이다. 그는 당시의 흥취를 소동파의 적벽 아래에서의 범주 놀이와 비교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열흘간의 범주 놀이를 마치고 20일에 집에 도착하였다. 박이곤의 자는 성광(聖光), 호는 지촌(芝村), 본관은 고령(高靈)이다. 박이곤은 돈성(惇誠)의 아들로 영덕(盈德)에서 살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유한(申維翰)을 사사하였고, 뒤에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여러 번 향시(鄕試)에는 합격하였으나 회시(會試)에는 실패하였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근사석의(近思釋義)』와 『정서류요(程書類要)』,『주서류요(朱書類要)』등의 저술을 남겼다.
  • 제목
    난중기사(亂中記事)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난중기사(亂中記事)」는 만휴당(晩休堂) 황귀성(黃貴成 ; 1538~1605)의 문집인 『만휴당문집(晩休堂文集)』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임란 발발 후부터 이듬해 계사년 10월까지 주요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뒤에는 소실되어 빠져 있고, 정유년에 사건이 조금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아 당시의 전말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무신의 입장에서 당시의 사건의 주요대목만이라도 전하고자 하는 일면이 엿보인다. 황귀성은 본관이 평해(平海)이며, 초명은 귀영(貴榮), 자는 치장(致章), 호는 만휴당이다. 고려조 태조검교(太子檢校) 온인(溫仁)의 후예이며, 아버지는 희손(熙孫)이다. 임란 시에 류성룡(柳成龍)의 추천으로 선조를 호종하여 2등 공신에 책록되고 정략장군(定略將軍)에 제수되었다. 무술년(1598년) 이순신이 순국함에 류성룡(柳成龍)의 명으로 조문하고, 이순신의 조카인 완(莞)과 함께 장사를 치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귀향하여 독서로 여생을 보냈다.
  • 제목
    영영장계등록(嶺營狀啓謄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영영장계등록(嶺營狀啓謄錄)』은 감사의 임무를 맡으면서 감영 내에서 일어난 일들을 조정에 장계를 올리기 위해 자세하게 적은 글이다. 등록은 신미년(1751년) 6월 15일자에 울산 앞바다에 왜선이 출현했다는 사실로부터, 임신년(1752년) 3월 19일 사도세자의 죽음을 두고 애통해하는 마음을 담아 올리는 글까지 감영 내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건과 상황을 자세하게 적어서 기록해 둔 것으로, 당시의 사회상과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신미년 9월 6일자를 보면, 병충해가 심해서 벼이삭이 잘려져 나가는 등 피해가 심하여 남녀노소가 떨어진 낱알을 주워 모아도 광주리 채우기도 어려울 정도였음을 언급하면서 농민의 고통을 대변하는 글을 기록하였다.
  • 제목
    영천초천일기(榮川椒泉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영천초천일기(榮川椒泉日記)」는 이충민(李忠民 ; 1588∼1673)의 문집인『모암집(慕巖集)』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기사년(1629년)에 병을 치료하기 위해 영천의 초천(椒泉)에 다녀온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7월 4일 출발하여 7일 영천에 도착해서 10일간 머무르고, 17일 날 부석사로 갔다가, 21일 다시 영천에 가서 제를 올린 것을 고하고, 24일 집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기술하고 있다. 7일 영천 초천에 도착해서 영주 부석사에 제를 올리기 위한 허가증을 받기까지 10일 동안 무려 35번이나 목욕을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고질병에는 적합하지만 이질병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고질적인 피부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간 듯하다. 이충민의 자는 여직(汝直), 호는 모암(慕巖),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정구(鄭逑)와 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과거를 단념하고 받들어 모시기를 낙으로 삼았다. 또 우애가 지극하여 형의 죽음을 슬퍼하기를 친상과 같이 하였으며, 조카형제가 재질이 둔했으나 성심껏 교육하고 전토(田土)를 나누어주어 생계를 돕게 하였다. 수직(壽職)으로 부호군(副護軍)이 되어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 제목
    영해기행(榮解紀行)
    발급년
    190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영해기행(榮解紀行)」은 이양오(李養吾 ; 1737∼1811)의 문집인『반계선생문집(磻溪先生文集)』 권 5에 수록되어 있다. 계사년(1773년) 8월 8에 영주(榮州)를 떠나 11일 영천(永川)에 도착했다가, 12일 의성, 13일 안동, 14일 연미사, 15일 오천을 지나 23일 도산서원에 도착해서 24일에는 서원주변을 유람하고, 25일 다시 의성으로 가서, 26일 신녕을 지나, 27일 영천에 도착했다가 30일 다시 영주로 돌아오는 과정의 일을 기록한 것이다. 여행의 목적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아 알 수가 없다. 영주 땅을 벗어난 20일간의 기록이지만, 마음의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특히 도산서원을 유람하였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다. 이양오의 자는 용호(用浩), 호는 반계(磻溪), 본관은 학성(鶴城)이다. 아버지는 의채(宜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 지탁(之鐸)의 딸이다. 영남 울산지방에서 두문독선(杜門獨善)한 처사로 성리학(性理學) 뿐만 아니라 음양(陰陽), 병농(兵農), 산경(山經), 지지(地志)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 제목
    예안일기(禮安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예안일기(禮安日記)』는 누가 기록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생원ㆍ진사ㆍ훈도 등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배알을 하였으며, 땅을 사고 노비를 샀다는 기록으로 보아 예안의 지체 높은 분임을 알 수 있다. 정사년 1월 4일에서 10월 8일까지 기록되어 있다.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1월 4일은 매매(賣買)일 때문에 상경하였고, 2월 9일은 도산향사가 있었으며, 2월 19일은 아들 각이 한질(寒疾)이 있어 총주탕(蔥酒湯)을 보냈지만, 땀을 내지 않아서 효과가 없었음을 언급하고 있고, 2월 26일은 아들 숙(琡)과 함께 가동(?洞)으로 가서 밭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사동(砂洞) 뒤의 언덕이 장사지낼 수 있는지를 살펴보았다. 3월 20일에는 적(?) 아이의 장사일 때문에 사동언덕에 가서 벌목을 하였음을 언급하고 있다.
  • 제목
    오대조고일록(五代祖考日錄)
    발급년
    19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오대조고일록(五代祖考日錄)』은 김두흠(金斗欽 ; 1804~1877)의 신해년(1851년)에서 정묘년(1867년)에 걸쳐 기록한 것이다. 내용을 보자면, 사(四)권은 신해년(1851년) 3월부터 임자년(1852년) 계축년(1853년) 7월까지를 쓴 것으로 월일과 간지 및 날씨를 쓰고 평소의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주로 집안의 대소사와 동료나 친지들이 방문한 일, 향교와 서원 등의 행사에 출입한 내용들과 집안의 임산부가 입덧을 하고 출산한 일, 친지들의 사망과 제사, 아들과 친지의 자식들이 과거시험을 보러가는 일, 족보 발간과 관련하여 유연당(悠然堂)에서 종회를 여는 일 등등의 집 안 일과 안동 태사묘에 있는 숭보당 등의 향회에 참석한 일, 영양 일월산에 산적이 출몰했다든지 청도에 사는 아무개가 숭재별검(崇齋別檢)에 제수되는 등의 지우들이 관직에 제수되는 일 등등의 풍문으로 들은 이야기와 순조(純祖)의 존호(尊號) 행사에 참석하는 등의 사회에서 활동한 행적들도 자세히 기록하였다. 뒤 겉표지에는 집안의 제삿날이 기록되어 있다.
    칠(七)은 무오년(1858년) 정월 1일부터 기미년(1859년) 12월 30일까지를 기록하였다. 지우나 친지들 간에 오고간 이야기, 편지를 주고받은 것, 여행할 때에도 숙식한 곳까지 상세히 기록하였다. 父子가 같이 여행하며 모친 제사에 참석치 못하는 아쉬움이나 정자나 서원 등의 유숙한 곳도 상세히 기록하였으며, 계룡산(鷄龍山), 태고정(太古亭), 침류정(枕流亭) 등을 유람하면서 기이한 절경이나 자연경관을 보고 느낀 소감을 기록하고 계곡물의 발원지나 유래를 소개하기도 하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경전 외에도 『창주집(滄洲集)』, 『일봉집(一峯集)』 등을 읽고 문장의 훌륭함에 감탄하고 소감을 쓰기도 하고, 『수호전(水滸傳)』, 『봉신연의(封神演義)』, 『서상기(西廂記)』, 『삼국지』 등을 읽고 감상문을 쓴 것을 보면 독서의 폭이 얼마나 넓은가를 알 수 있다.
    팔(八)은 경신년(1860년) 1월 1일부터 신미년(1861년), 임술년(1862년) 12월 30일까지를 기록하였다. 친지들의 방문이나 지우들에게 편지를 주고받은 일, 출생이나 상사(喪事) 등의 일도 상세히 기록하였다. 손자의 삼가례(三加禮)를 치르고 손부(孫婦)의 근행(覲行)이나, 막내삼촌이 말에서 떨어진 일과, 파초를 심고 화분을 가꾸는 일 등의 일상생활과 부석사(浮石寺), 소수서원(紹修書院)의 경렴정(景濂亭), 백운동(白雲洞) 등을 유람하고 공자 영정 및 안자, 증자 등의 영정을 대하는 소감, 퇴계선생이나 선현들이 쓴 현판이나 필적 등을 대하고 느끼는 소감을 기록하기도 하였다. 향교나 유림의 회의에 참석하고 창의록 간행과 관련한 회의 등에도 참석하여 의견을 제의한 것 등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글씨가 작고 초서로 쓰여 있어 읽기에 어려움이 있다. 겉표지 안쪽 2장과 뒤표지 안쪽 3장에는 서간문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시구의 주를 달아놓았다.
    구(九)는 저자 계해년(1863년) 정월부터 정묘년(1867년) 2월 11일까지를 기록하였다. 월
  • 제목
    옥서일록(玉署日錄)
    발급년
    193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옥서일록(玉署日錄)」은 박상범(朴尙範 ; 1855~1913)이 신축년(1901년) 12월 7일 홍문관시독(弘文館侍讀)에 제수되어 업무를 보는 과정을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 『가은선생문집(稼隱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홍문관시독에 제수된 날로부터 이듬해 12월 그믐까지 약 1년간 홍문관에서 있었던 일이나 자신의 업무에 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옥서(玉署)는 홍문관의 별칭이며, 옥당(玉堂) 혹은 영각(瀛閣)이라고도 부른다. 홍문관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 때문에 자주 왕에게 조정의 옳고 그름을 논하거나 간언하는 입장이었는데 사헌부와 사간원의 합계(合啓)에도 왕이 그 간언(諫言)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홍문관을 합하여 3사가 합계로 간언하였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 1506년(중종 1)에 복구하였고, 1894년(고종 31)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하였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쳐서 칙임관(勅任官)의 대학사(大學士)ㆍ학사ㆍ경연관(經筵官), 주임관(奏任官)의 부학사(副學士), 경연관ㆍ판임관(判任官)의 시독(侍讀)을 두었다. 박상범의 초명은 제원(悌源), 자는 계순(繼舜), 호는 가은(稼隱), 본관은 춘천(春川)이다. 아버지는 진수(鎭壽), 어머니는 함양오씨 한근의 딸과 고령신씨 증도의 딸이다. 1890년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국정이 문란해지자 고종임금에게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흥학교(興學校 : 학교를 진흥시킬 것)ㆍ수군정(修軍政 : 군정을 개수할 것)ㆍ절재용(節財用 : 재정을 절약할 것)ㆍ택민목(擇民牧 : 목민관을 잘 뽑을 것)ㆍ균부세(均賦稅 : 세금을 균등하게 부과할 것)의 5개 조목을 진상할 만큼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달랐다.
  • 제목
    왜변일기(倭變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왜변일기(倭變日記)』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점부터 그해 12월 26일까지 안동인근에 출몰한 왜적의 동태와 백성들의 피해상황을 매우 자세하게 적은 일기이다. 작자가 고탄사(高呑寺)로 난을 피했다가 다시 태곡(胎谷)으로 가서 집으로 돌아온 것으로 보아 예안 분천인근에 살면서 당시의 상황을 전해 듣고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왜적이 13일 동래를 함락한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선조임금의 몽진, 임해군ㆍ광해군이 도성을 떠난 사실, 이산해가 평해로 귀양 온 이야기 등도 언급하고 있다. 이숙량(李叔樑)이 의병장이 되어 채간(蔡?)과 박수도(朴守道) 등과 함께 왜적과 맞서 싸워 전과를 올린 기록도 보인다. 따라서 이 일기는 왜란 당시 안동인근의 의병활동상황과 지역일대의 피해상황을 기록하였다.
  • 제목
    숭정일월(崇禎日月)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숭정일월(崇禎日月)』은 각종 기록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앞부분은 갑신년(1824년, 순조 24)에 기록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갑신년 9월 추수한 것을 기록한 파장기(把掌記)도 있다. 또 을유년(1825년) 2월에 지은 의성빙계서원보장제사(義城氷溪書院報狀題辭)도 있고, 경진년(1820년)부터 무자년(1828년)까지 9년간 매년 제사를 담당한 유사(有司)와 참사원(參祀員)의 명단을 적은 것도 있고, 시를 지어 놓은 것도 있고, 10여 가지의 제문을 적어 놓은 것도 있다. 그리고 신묘년(1831년) 7월 하순에 대현서실(大峴西室)에서 써서 진욱문옥(鎭郁文玉)에게 올린다는 말도 있다. 개인이 잊지 않기 위해서 기록해 둔 종합 기록물인 것 같다.
  • 제목
    책문기사(柵門記事)
    발급년
    186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책문기사(柵門記事)」는 남연(南? ; 1598~1664)이 지은 것으로, 영양남씨 집안의 문집인 『신안세고』 권 5 「분망재유고(奮妄齋遺稿)」의 잡저에 실려 있다. 갑신년(1644년) 당시 아사(亞使)로 평양에 있던 남연은 12월 26일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 있던 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심양으로 빨리 오라는 전갈을 받고 책문(柵門)으로 급히 떠나게 된다. 책문에 가서 세자를 접빈하는 접빈사의 임무를 맡은 셈이다. 그래서 이듬해(1645년) 1월 11일에 책문에 도착하여 세자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세자를 모시고 25일 의주를 지나 2월 6일 평양에 도착하게 되는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당시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경계지점으로 오랑캐들이 늘 왕래하면서 물품을 요구하는 지역이었다. 남연의 자는 연부(鍊夫), 융달(隆達)의 아들로 일찍 문예를 이루어 1624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 형조정랑, 대동도(大同道) 찰방을 거쳐 예안현감(禮安縣監)이 되었는데 정사를 엄정히 하였다. 1636년 벼슬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으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경상감사를 따라 종군하였다. 이어 공조정랑, 성균관직강을 거쳐 김세렴(金世濂) 막하의 보조관이 되고, 또 독운사(督運使) 홍무적(洪茂績) 막하의 참모가 되었다. 그 뒤로 벼슬을 거듭하여 봉상시첨정에 이르렀는데 아버지 상(喪)으로 물러나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 제목
    천산지득(天山誌得)
    발급년
    1930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천산지득(天山誌得)』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경오년(1930년)에 쓴 일기와, 그 다음해인 신미년(1931년)의 일기, 임신년(1932년)의 일기인 「존성록(存誠錄)」이 한데 묶여 있다. 신미년의 일기 첫머리에 서문은 있으나 한마디로 함축한 제목은 없다. 경오년과 임신년의 일기 첫머리에 일기 제목의 서문이 있으며, 월일과 간지, 날씨를 간략히 기술하고, 평소 왕래하는 친인척들의 일도 기록하고 집안사람들에게 글씨를 써준 일, 제문, 고유문 등도 기록하였다. 12개국 회의에서 일본만이 반대를 한 일과 연합군을 형성하는 등의 국제 정세와 일본 관리의 암살과 일본 남학생들이 우리나라의 여학생을 길을 막고 놀린 일이 기화가 되어 전국의 학생들이 항의하는 대목들도 기록하였다. 백성들이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여 곡식 값이 폭등한 것과 곡식 값도 낱낱이 기록하고, 백성들의 생활상을 자세히 기술하였다. 일제 치하 백성들의 고통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 제목
    천휘록(闡揮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천휘록(闡揮錄)』에는 「임자소청일록(壬子疏廳日錄)」과 「약재기사(葯齋記事)」와 「정원일기초록(政院日記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자소청일록」은 유성한(柳星漢) 등이 사도세자의 신원이 부당함을 알리는 소를 올린 것에 격분한 영남유생들이 세자의 신원을 위해 도성에 도착하여 소를 올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다. 임자년(1792년) 윤4월 16일에 출발하여 5월 27일에 도성에서 나와 전별(餞別)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당시 영남유생들은 면암(?庵) 이우(李?)를 소두로 하여 사도세자를 모함한 유성한(柳星漢) 등을 벌할 것을 청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정조는 비록 자신의 아버지 일이지만 사사로운 감정으로 국정을 천단할 수 없기에 이우를 비롯한 영남유생들을 설득하여 안동으로 내려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하였다. 「약재기사」는 사도세자의 능인 현릉원(顯陵園)을 옮기는 과정에서 빚어진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다. 「정원일기초록」은 조선시대에 왕명(王命)의 출납(出納)을 관장하던 승정원에서 매일매일 취급한 문서(文書)와 사건을 기록한 일기로, 영조 40년 갑신년(1764년) 2월 20일 오시(午時)부터 2월 26일 묘시(卯時)까지 기록되어 있다. 저자가 승정원에 제수되어 당시 임금인 영조의 일상생활과 학문에 대해 문답한 내용, 국정에 관계되는 일 등 하루일과를 하나도 빠짐없이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어 당시의 국정현안과 영조의 개인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제목
    천휘소감 1(闡揮昭鑑 1)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천휘소감(闡揮昭鑑)』1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불운한 죽음과 관련된 기록으로 당시에 세자의 사부(師傅)로서 왕실에서 근무하며 왕과 대신들의 대화내용과 일어난 사건, 세자와 관련된 상소문 등과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글로서, 첫머리에 정조(正祖)가 지은 현릉원지(顯陵園誌)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현구기문(玄駒記聞)이 상ㆍ하로 나뉘어 기록되어 있다. 현릉원지는 정묘어제(正廟御製)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정조가 지은 것으로 보이며 현릉의 위치, 능을 수축한 신하의 이름, 사도세자의 가계가 기록되어 있으며, 이어서 사도세자의 총명함과 영조에게 시를 지어 보여 사랑을 받는 내용들을 기록하였으며, 현구기문 상ㆍ하에서는 나경언(羅景彦)의 상소 등과 사건의 발단 및 전개과정들을 기록하였다.
  • 제목
    첩록(輒錄)
    발급년
    20세기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첩록(輒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정축년(1937년)부터 무인년(1938년)의 「첩록명(輒錄銘)」, 기묘년(1939년)의 「고비록(攷非錄)」, 경진년(1940년)의 「존성록(存省錄)」, 신사년(1941년)의 「일성록(日省錄)」, 임오년(1942년)의 「성성록(惺惺錄)」등 6년간의 일기가 한데 묶여 있다. 첫머리에 그 해 일기 제목의 서문이 있으며, 연, 월, 일과 간지 및 날씨를 간략히 기록하고 이어서 주로 일상생활을 기록하였다. 일제치하에서 연일 병력을 징발해서 차에 태우고는 백성들에게 만세삼창을 시키고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게는 곡식과 말에게 먹일 꼴을 너무 많이 징발해 가서 다음 해에 파종할 종자도 남지 않은 대목 등등 일제치하에서의 감시망과 일반 서민들의 생활상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식량을 공출하고 가구당 배급받는 양도 기록하였으며, 물가도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일반 서민들의 생활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며 유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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