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영역 열기

krpia

도움말
도움말 검색 도움말

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금산기행(錦山紀行)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금산기행(錦山紀行)」은 이교문(李敎文 ; 1878~1958)의 문집인『지재유고(止齋遺稿)』권 5의 잡저에 수록되어 있다. 금산은 세칭 소금강이라 일컫는다. 자신의 집에서 금산까지 300리가 안되었다. 그래서 자신의 회갑년인 1938년 윤7월 11일에 금산으로 유람을 떠나 도착한 날을 8월 7일로 기록하고 있으니 27일이 걸린 셈이다.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 사람은 성재 정계석과 치당 심상복이었는데, 정계석은 집안일 때문에 함께 길을 떠나지 못한다고 해서 적벽에서 이별하고 심상복과 길을 떠났다. 가는 곳마다 그동안 친분을 맺은 집에 들러서 술과 음식을 대접받고 좋은 경치도 구경했음을 서술하고 있다. 여행에서 돌아오자 금산의 경치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어 그동안 기록해 놓은 유람기를 보여주면서 '모든 것은 여기에 있습니다. ' 하면서 일기를 끝맺고 있다. 이교문의 초명은 교관(敎?)이며, 자는 명선(鳴璇), 호는 지재(止齋),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희란(熙란)의 아들로 진주(晋州)에서 살았다. 삼형제 중에서 둘째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큰형을 도와 일체의 잡무를 도맡아 하여 아우가 안심하고 공부에 전념하도록 뒷받침하였다. 이리하여 가계가 윤택해지고 아우의 학업이 성취되자 정사(精舍)를 세워 독서와 수양에 힘썼다. 향내의 사우들을 초청하여 학문을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 제목
    남궁일록(南宮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궁일록(南宮日錄)」은 류지(柳? ; 1626~1701)의 문집인 『괴애선생문집(乖厓先生文集)』권 3의 잡저 부분에 실려져 있다. 그가 1674년에 10월 8일 춘조랑(春曹郞)에 임명된 후 10월 26일 서울로 향하여 11월 6일 서울에 도착하여 이듬해 2월 8일까지의 재임 4개월 동안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이다. 서울에 머물면서 덕망이 있고 지체가 높은 사람들을 만난 내용과 상사(喪事)에 조문간일 등 일상적인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2월 8일은 양지(陽智)의 여러 친족들이 과거에 응시하러 서울에 왔기에 서로 기쁨을 나누고, 낮에 이하경(李夏卿), 이영지(李泳之), 심문숙(沈文叔), 이우정(李宇鼎), 민희(閔熙), 민점(閔點), 민종도(閔宗道), 강백년(姜栢年)을 만났고, 또 허목(許穆)을 배알하였으며, 저녁 늦게 돌아왔는데 일수(逸?)가 밤늦게 멀리서 찾아와 함께 잤다는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류지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중오(重梧), 호는 괴애(乖厓)이다. 아버지는 희잠(希潛)이며 어머니는 안동금씨 사인 원(元)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재지(才智)가 특출하여 종형인 백졸암(百拙庵) 류직(柳?)의 문하를 좇아 배우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1624년(인조 24)에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 유학하였으며, 1624년(효종 5)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조좌랑(禮曹佐郞)ㆍ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ㆍ경주부윤(慶州府尹) 등을 역임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강직(剛直)한 성품에다 공정지치(公正之治)를 행하여 세인들의 중망을 받았다.
  • 제목
    남유기행(南遊紀行)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유기행(南遊紀行)」은 배재헌(裵在憲)이 임자년(1912년) 3월 23일에 친구 이태현(李泰鉉)과 함께 남쪽으로 유람을 가서 보고 느낀 점과 주요여행경로를 기록한 것으로, 그의 문집인『국재유고(菊齋遺稿)』 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간지표기를 고갑자로 표기하고 있다. 이른바 '현익(玄?)'은 천간의 '임(壬)'에 해당되고, '곤돈(困敦)'은 지지의 '자(子)'에 해당한다. 따라서 기록한 연도는 임자년이 되는 것이다. 흥해에 도착해서는 아름다운 산수경치의 모습에 매료되어 마치 신선세계에 들어온 것은 느낌이 들었음을 표현하고 있다. 또 경주를 거쳐 언양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의 산세(山勢)가 내려갈수록 더욱 높게 느껴지고, 물소리는 들어갈수록 더욱 길게 느껴졌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양산통도사는 강량의 해인사보다 품격이 떨어짐을 말하고 있다. 다시 금정의 온천을 둘러보고, 광활한 부산 앞바다를 보았을 때는 말로 형언하기가 어려울정도로 기분이 좋았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들이 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와서 집에 도착한 날이 4월 14일이니, 모두 22일간 770리를 여행한 것이다. 마지막부분에 유람에 대한 감상으로 자신에 관련되는 것은 이태현의 기행록에 실려 있고, 이태현에게 관련되는 것은 자신의 기행록에 실려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 제목
    남유록(南遊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유록(南遊錄)」은 유영희(柳泳熙 ; 1890~1960)가 1956년 7월 22일부터 8월 1일까지의 여행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농포문집(農圃文集)』 권 5에 실려져 있는 내용이다. 병신년 7월 22일 우연히 정인택의 집에 갔는데 마침 환갑이여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그 다음날 김연식, 배동환을 찾아갔다가 복통이 나서 다시 정인택의 집에서 요양을 하는데, 족질인 성팔이와 중인이 와서 진료해 주었다. 성팔은 대명동 제인당 약방에 가서 약을 지어 먹으라고 했고, 중인은 여행을 하는 것이 치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마음을 먹고 25일 3천환의 여비를 가지고 남쪽으로 기차여행을 떠나게 된다. 위천교를 지나 고령을 거쳐 진주, 마산 등을 돌아보고 안동으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특히 각 지역별 명승지를 일일이 소개하고 역사적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자신의 감회를 피력하고 있어 지역의 명승지를 이해하는데 좋은 참고 자료가 될 만하다. 유영희의 자는 성춘(聖春), 호는 농포(農圃),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효직(孝植)이며, 조부는 석락(錫洛), 증조부는 정진(鼎鎭)이다.
  • 제목
    남유록(南遊錄)
    발급년
    1937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유록(南遊錄)」은 박시찬(朴時燦 ; 1842∼1905)의 문집인 『연계문집(蓮溪文集)』 권 3에 실려져 있다. 이웃마을에 사는 김귀환(金龜煥)과 함께 동래(東萊)를 유람하고 기록한 것이다. 주요 경로는 주왕산을 둘러보고 장사(長沙)를 거쳐 경주, 울산, 금정을 지나 18일에 동래에 도착해서 부산일대를 둘러보고 밀양의 영남루, 청도, 영천을 거쳐 집에 도착한 날이 9월 2일이었다. 거의 1개월간의 여행이었으며 천리에 가까운 거리를 유람한 것이다. 특히 울산 치술령에 도착하여서는 박제상이 바다로 가서 돌아오지 않자 이를 기다리던 부인이 바위로 변한 고사를 인용하고 있다. 금정(金井)에 이르렀을 때는 금정산은 온수(溫水)가 나오기 때문에 이름 붙여졌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줄어들지 않음을 언급하고 있다. 박시찬의 자는 자중(子中), 호는 연계(蓮溪),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아버지는 내만(來蔓)이며, 어머니는 수안 김씨이고 약련(若鍊)의 딸이다. 어려서는 안동석(安東錫)에게 배웠고, 뒤에 심진운(沈鎭運)을 사사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하였다. 만년에는 『심경』, 『근사록』을 깊이 연구했으며, 신재석(申在錫), 류진성(柳晋成), 배경봉(裵慶鳳), 권병호(權秉好) 등과 교유하였다. 평생을 고요하고 겸손하여 저술 발표하기를 즐기지 않았고, 혹 문장으로 나타낸 것이라도 기교를 부리지 않아 평담하고 간결하였다.
  • 제목
    남유록(南遊錄)
    발급년
    189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유록(南遊錄)」은 유희문(柳徽文 ; 1773~1832)의 문집인 『호고와선생문집(好古窩先生文集)』 권 17에 등재되어 있다. 임오년(1822년) 4월 5일에 양좌동(良佐洞)으로 향하여 다음날 도착해서 양좌동 일대의 유적지를 두루 다니면서 느낀 점을 기록한 것이다. 양좌동의 산세는 비학동(飛鶴洞)으로부터 마을 뒤까지 '물자(勿字)'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씨와 손씨들이 종횡무진으로 섞여 살고 있었다. 이어 포항 내연동을 거쳐 옥계를 지나 주왕굴을 유람한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유람한 곳의 특이사항과 주변 경관까지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어 여행에 많은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5월 8일에 귀가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산수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를 옛 문헌을 통해 피력하고 있다. 유희문의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공회(公晦)이며, 만휴(萬休)의 아들이다. 유장원ㆍ남한조ㆍ정종로의 문인이다. 1821년에 유장원이 지은 『예서통고』와 고조부 류정원의 『역해참고』를 교정하였다. 1830년 관찰사와 암행어사의 천거로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2년 뒤에 장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이미 죽은 후였다. 저서로 본집 이외에 『주역경전통편(周易經典通編)』, 『율려신서(律呂新書)』, 『창랑문답(愴浪問答)』 등이 있다.
  • 제목
    남유일록(南遊日錄)
    발급년
    1968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유일록(南遊日錄)」은 유연근(柳淵根 ; 1857∼1933)의 문집인『수서집(水西集)』 권 4의 잡저부분에 수록되어 있다. 계해년(1923년) 3월 보름 경에 수곡(水谷)에 가서 금하(琴下)와 함께 전주여행을 약속하고 3월 22일에 비로소 길을 떠나, 만 2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5월 19일 돌아올 때까지의 정황을 기록한 유기이다. 날짜별로 단락을 구분하여 날짜 밑에 날씨를 적고 그 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유연근의 자는 성엽(聖燁), 호는 수서(水西),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아버지는 정호(禎鎬)이며, 어머니는 광산김씨(光山金氏)로 형유(亨儒)의 딸이다. 조용진(趙龍震)에게서 수학하다가 뒤에 김흥락(金興洛)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일차적으로 과거에 응했으나 낙방된 후로는 청운(靑雲)의 뜻을 끊고 경학(經學)에 힘썼으며, 사장(詞章)에도 능하였다.
  • 제목
    남정록(南征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정록(南征錄)」은 김기찬(金驥燦 ; 1748∼1812)이 병오년(1786년) 10월 10일에서 14일까지의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동곽유고(東郭遺稿)』 권 2에 실려 있다. 그는 경차관(敬差官)으로서 진주에 머물러 있다가 촉석루에 가서 18조인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1538∼1593)이 지은 삼장사 시를 읊었다. 병사(兵使) 홍화보(洪和輔)가 김성일의 운에 차운한 시가 있어 베껴갈려고 원운을 보니 절구의 세 번째 구절인 '지수(之水)'가 '만고(萬古)'로 잘못 판각 되어 있어서 당시 진장으로 와 있던 오경(吳暻)을 찾아가서 의논을 하였다. 오경은 천파(天坡) 오숙(吳?)의 증손자이다. 오숙은 자신의 문집에 김성일의 시를 기록해 두었기에 『천파집(天坡集)』을 살펴보니 과연 홍화보가 잘못 판각함을 알 수 있었다. 이에 고쳐야 함을 언급하니 당시 중론이 처음에는 잘못된 시판을 완전히 교체하자는 쪽이었으나, 잘못된 것을 수정했다는 것을 남겨두는 것도 후인들을 위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 두 글자만 바꾸자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남정록 삼장사 시에 대한 전말을 기록해 놓은 것이다. 김기찬은 의성(義城)인으로 자는 덕여(德汝), 호는 동곽(東郭)이고 김성일의 18세손이며 주훈(柱勳)의 아들이다. 정조 정유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장령을 지냈다.
  • 제목
    남정록(南征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정록(南征錄)」은 정백휴(鄭伯休 ; 1781∼1843)의 문집인『동연문집(東淵文集)』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봉호산(蓬壺山)을 유람하면서 그날의 행적과 지나간 곳의 풍물을 간단히 적은 노정기이다. 10월 3일 출발하여 11월 7일 돌아왔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람 기피증이 있어 집밖을 나가지를 못했는데 족질 공여(恭汝)가 봉호(蓬壺)의 경치가 뛰어나다는 말을 해주어 유람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 뒤 봉호산을 유람하고서 자연의 경관에 매료되어 스스로 탄식을 자아내게 되었음을 언급하고 있다. 정백휴의 자는 주보(周輔), 호는 동연(東淵), 본관은 오천(烏川)이다. 조우원(趙友愿)의 문하에서 배웠고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을 깊이 연구하여 크게 성취하였다. 또 효심이 지극하여 조부와 양친을 정성껏 모셨고 평상시에도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단정히 앉아 낙민서(洛?書)와 예설(禮說)을 읽기에 주력하였다.
  • 제목
    남정일록(南征日錄)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정일록(南征日錄)』은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 ; 1865∼1928)이 남쪽지방을 유람하면서 기록한 것이다. 계해년(1923년) 1월 19일 출발했지만 도로가 정체되어 29일에서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서울에서 50여일을 머물다가 3월 19일에 돌아왔다. 대개 민립대학기성회를 각 지방에 선전하려고 하였고 유인식은 경북의 책임을 맡았다. 남도지방에 간사로 되어 먼저 남도 몇 개 군을 돌아보고 다시 서울로 상경할 때까지의 상황들을 날짜별로 적은 것이다. 마지막 상경할 때 날짜가 5월 15일로 기록하고 있는데, 날짜기재에 있어서 특이한 것은 음력으로 기술하다가 3월 30일 아래에 양력 5월 5일이라고 명시하고는 음력으로 기록하지 않고 양력 5월 6일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하루도 빠짐없이 31일까지 기록하고 있다. 음력은 30일까지 밖에 없어 31일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분명 양력 5월이다. 그리고 또 다시 양력 5월 1일부터 15일까지 기록되어 있는데 뒤에 것은 6월 1일의 오기인 듯하다. 왜 이렇게 기록했는지 의문이 간다. 유인식은 안동출신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며, 호는 동산(東山)이다. 유근(柳瑾)ㆍ이상재(李商在) 등과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1908년(융희 2) 유림(儒林)의 재산을 모아 협동학교(協東學校)를 설립, 교장이 되었으며, 1910년 조선 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 조선 노동공제회(朝鮮勞動共濟會)등을 조직했다. 이듬해 조선 민립대학(朝鮮民立大學)의 설립을 발기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하고, 1927년에 신간회(新幹會)의 안동지회(安東支會)를 조직하였고 회장이 되었다.
  • 제목
    남정일지(南征日誌)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정일지」는 유장식(柳璋植)의 문집인『가림문집(可林文集)』 권 4에 실려져 있다. 정묘년(1927년) 8월 11일에 출발하여 9월 16일까지 모두 36일간의 여정이다. 8월 11일에 일초(一初)와 함께 경주로 향하려고 했는데 이때 이서경(李恕卿)이 와서 남쪽 유람에 있어서 불국사와 석굴암을 보지 못하면 헛된 여행이라고 이야기 해 주었다. 그래서 늦게 출발하여 지곡령을 넘어 저녁에 중평에 사는 신득삼(申得三)의 집에 머물렀고, 다음날 주방산을 구경할 것을 약속하였다. 주요 경로는 주왕산 일대를 둘러보고 기계(杞溪)를 지나 양동마을을 거쳐 경주일대를 구경한 후 청도를 거쳐 밀양까지 갔다가 다시 경산, 대구를 거쳐 돌아오는 여정이다. 각 지역의 특징을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어 각 지역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 제목
    남천록 상(南遷錄 上)
    발급년
    1873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천록(南遷錄)」상(上)은 김성구(金聲久 ; 1641∼1707)의 문집인『팔오헌집(八吾軒集)』권 5에 수록되어 있다. 기미년(1679년) 3월에 부수찬에 제수되어 5월에 입성하여 사직소를 올리는 것으로 일기는 시작된다. 장령으로서 효종 승하시에 어머니인 대비의 복상문제를 두고 1년 상을 주장했던 송시열 등을 탄핵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나 조지석(趙祉錫)을 탄핵할 때 대간의 임무를 성실하게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해 결국 제주도 정의현감으로 가게 된다. 귀양 가는 도중의 전말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청음 김상헌이 제주도 안무어사로 다녀와서 기록한 『남사록(南?錄)』의 많은 대목을 인용하고 있으며, 정의현감으로 있으면서 겪은 제주도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토로하고 있어 제주사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일기는 11월 23일까지 기록하고 있다. 김성구의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덕휴(德休), 호는 팔오헌(八吾軒)이다. 아버지는 용양위부호군 추길(秋吉)이다. 1662년 사마시를 거쳐 1669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지평(持平)ㆍ정언(正言)ㆍ대사성(大司成) 등을 거쳐 1693년 강원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안동의 백록사(栢麓祠)에 배향되었다.
  • 제목
    남천일록(南遷日錄)
    발급년
    1905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천일록(南遷日錄)」은 황중윤(黃中允 ; 1577∼1648)의 『동명문집(東溟文集)』 권 6에 수록되어 있다. 계해년(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 모친의 병환으로 울진에 있었는데, 조정에서는 그가 청과의 주화론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4월 22일에 해남으로 유배의 명이 내려지게 된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4월 22일 출발하여 5월 19일 해남에 도착한 것으로 일기를 끝맺고 있다. 황중윤의 자는 도광(道光), 호는 동명(東溟), 본관은 평해(平海)이며 아버지는 여일(汝一)이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14년 예빈시직장, 성균관전적을 거쳐 이듬해 춘추관편수관,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1617년에 헌납, 좌랑, 정랑이 되었으나 사양하고 1619년 재차관으로 요동에 다녀와서 직강, 지평이 되었다. 인조반정 후 공이 화의를 주장했다 하여 해남에 유배되었다가 정온의 소청으로 풀려 나왔다.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 항복의 소식을 듣고 비분을 금치 못하여 산협 속의 절간에 우거하며 여생을 마쳤다.
  • 제목
    남한일기(南漢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한일기(南漢日記)」는 정지호(鄭之虎 ; 1605~1677)가 병자년(1636년) 12월 13일부터 이듬해 2월 15일까지의 일기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문집인 『무은선생문집(霧隱先生文集)』 권 5에 실려져 있다. 병자호란은 청나라가 조선을 침공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했다가 결국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구두삼배를 한 치욕스런 역사적 사건이다. 그는 이때 32세의 젊은 나이로 당시의 순간들을 빠짐없이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상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정지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자피(子皮), 호는 무은(霧隱)이다. 아버지는 진사 응원(凝遠)이며, 어머니는 홍요좌(洪堯佐)의 딸이다. 1635년(인조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세마(洗馬)가 되었으며, 1637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전적을 거쳐 이듬해 정언이 되어 권신 김자점(金自點)의 전횡을 탄핵하였다. 이로 인하여 요직에서 물러나고 종묘서영(宗廟署令)ㆍ황주판관ㆍ대동도찰방 등을 전전하였다. 1643년 개성부경력, 1645년 성균관의 사예ㆍ사성, 1649년 예빈시정(禮賓寺正), 1650년(효종 1) 호조와 공조의 참의, 1657년 좌승지ㆍ도승지ㆍ대사간 등을 지냈다. 1659년(현종 즉위년) 성절부사(聖節副使)로서 청나라에 다녀오고, 형조참판을 거쳐 1676년(숙종 2) 대사간이 되었다. 당쟁에서 초연하였으며, 권세에 아부함이 없이 자기의 소신대로 일을 처리하였다.
  • 제목
    남행록(南行錄)
    발급년
    1939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행록(南行錄)」은 이경록(李經祿 ; 1736∼1804)의 문집인『파강선생문집(巴江先生文集)』 권 3에 수록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 봄에 유람의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차에 맏딸이 남쪽에 시집가 있고, 재종 동생의 비웃는 듯한 권유로 인해 작심을 하고 신안으로 길을 나선 것이다. 고령(孤嶺)을 넘고 법산(法山)을 지나 신안(新安)에 이르기까지 남해안 일대를 유람하면서 그곳의 승경과 여정을 기행문 형식으로 상세히 기록한 글이다. 2월 1일 출발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3월 1일로 봐야 할 듯하다. 마지막 기록날짜가 4월 25일 집으로 향했다고 기록하고 있고, 3월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이경록의 자는 중수(仲綏), 호는 파강(巴江), 본관은 벽진(碧珍), 아버지는 희춘(熙春)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丁氏)로 도사(都事) 도명(道明)의 딸이다. 최흥원(崔興遠)과 이주대(李柱大)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평생 칠계(漆溪)에서 학문연구와 후학양성에 힘썼다.
  • 제목
    남행일기(南行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남행일기」는 이광덕(李匡德 ; 1762~1824)이 지은 것으로, 그의 문집인 『농산문집』 권 3에 실려져 있다. 여행의 동기는 홍시제(洪時濟)가 번암 체제공을 신원하라는 상소를 올렸다가 기장(機張)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각 문중과 각 서원에서는 400 리나 되는 먼 길이기 때문에 글로 위로하거나 종을 시켜 위로의 말을 전하였으나 이광덕은 찾아가서 위로하기로 결정하고 족손인 이회지와 함께 기장으로 길을 떠나게 된 것이다. 7월 29일 출발해서 8월 15일 도착했으니 17일이 소요되었다. 주요 경로는 안계를 지나 양동, 고령을 거쳐 기장에 도착하였다. 도중에 서원이나 향교에 들러 향배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기장에 당도하여 홍시제를 만나 위로하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돌아왔다. 이광덕의 초명은 경원(慶源),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계연(季淵), 호는 농산(農山)이며, 규복(奎福)의 아들이다. 정종로(鄭宗魯), 신체인(申體仁)의 문하에서 수업을 받았으며, 유심춘(柳尋春), 유이좌(柳台佐), 홍우정(洪宇正), 신정주(申鼎周)과 교유하였다.
  • 제목
    노강서원성담선생추배시일기(老江書院性潭先生追配時日記)
    발급년
    1936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노강서원성담선생추배시일기(老江書院性潭先生追配時日記)」는 조선 후기의 학자 이우세(李禹世 ; 1751∼1830)의 『석연집(石淵集)』 권 2에 수록되어 있다. 을해년(1815년) 11월 15일에 회덕의 종회사(宗晦祠)로부터 병자년(1816년) 봄에 성담(性潭) 송환기(宋煥箕 ; 1728~1807)의 추배 향사를 노강서원에서 하게 되었음을 통문 해 와서 참여하러 가기 전의 준비 상황과 가고 오는 도중의 전말을 기록한 것이다. 4월 6일에 종회사에 도착해서 향사를 치르고 4월 28일에 집으로 돌아왔다. 이우세의 자는 제겸(濟兼), 호는 석연(石淵), 본관은 경산(京山)이다. 아버지는 성철(性喆)이며, 어머니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영래(榮來)의 딸이다. 성주(星州)에서 태어났다. 송환기(宋煥箕)의 문인이며 1798년 생원시에 3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보다는 경학연구와 후진양성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여 현판과 금석문에 그의 글씨가 많이 남아 있다.
  • 제목
    노원만록(魯園?錄)
    발급년
    187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노원만록(魯園?錄)』은 노원(魯園) 김철수(金喆銖 ; 1822~1887)가 지은 것이다. 김철수는 의성(義城)인으로 자는 내극(內克), 호는 노원, 봉화 해저(海底)에 살았으며, 재신(在信)의 아들로 1871년 사액서원 46곳을 남기고 나머지는 훼철하라는 명령이 내리자 태학의 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왔다. 이로 인해 하옥(下獄)되어 문의현(文義縣)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되어 향리에서 독서와 저서(著書)로 여생을 마쳤다. 문집 10권 5책이 전한다.
    내용을 보면 1권은 시집(詩集)으로 30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첫머리에 수록된 「차도정절귀거래사(次陶靖節歸去來辭)」는 1871년 서원철폐에 항의, 귀향하면서 지은 것으로 당시 유림의 우울한 심사가 잘 나타나 있다. 시(詩)는 대개 영물(詠物), 감회(感悔), 사경(寫景)의 시로 칠언절구, 칠언율시가 가장 많다. 특히 소동파의 『적벽부』를 본 따서 지은 「우계적벽기망회시서(愚溪赤壁旣望會詩序)」와 「유청량산(遊淸凉山)」 2수는 운치가 있고 아름다운 것으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노원잡영병서(魯園雜詠幷序)」와 노동(魯洞)의 경치를 읊은 「노원팔경시(魯園八景詩)」와 「근차선조팔오헌명병서(謹次先祖八吾軒銘幷序)」등 만시(挽詩)도 66수가 수록되어 있다.
    2권은 선조들의 유사(遺事)와 행장(行狀), 지인(知人)들의 부탁으로 지은 행장과 증직이나 시호를 청하는 글과 뢰문(?文), 제문(祭文)들을 모아놓은 문서이다. 첫머리에 의성김씨의 시조부터 선고(先考)까지 벼슬을 지낸 선조들의 관직명과 휘(諱)와 자(字)가 기록되어 있으며, 왕고(王考)와 선고유사(先考遺事) 당형행장(堂兄行狀)이 수록되어 있으며, 「사공이공한묘표청 대전라유생작(司空李公翰墓表請 代全羅儒生作)」등 지인들의 부탁으로 지은 글이 4편, 「증이조판서권공수경청시장(贈吏曺判書權公守經請諡狀)」 5편, 유사(遺事) 3편, 「뇌족숙참봉공재정씨문(?族叔參奉公在鼎氏文)」등 뢰문8편, 제계부문(祭季父文)등 제문이 29편이 기록되어있다.
  • 제목
    단산서원수리일기(丹山書院修理日記)
    발급년
    연도미상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단산서원수리시일기(丹山書院修理日記)』는 단산서원(丹山書院)을 수리할 때의 일을 날짜 별로 기록한 것이다. 표지를 포함하여 18쪽으로 한지에 행초서로 쓴 필사본이다. 맨 앞에 이 서원을 수리하게 된 경위를 밝히는 글이 있고, 이어서 날짜 별로 그 전말을 밝히는 본문이 있으며, 마지막에 이능연(李能淵)이 쓴 발문이 있는데, 발문 글씨의 서체가 일기와 똑같은 것으로 보아 이능연이 쓴 것으로 보인다. 내용은 이준재(李駿在)라는 이가 동전 50꾸러미를 주어서 이에 힘입어 수리를 하였던 바, 9월 13일 의견을 모으고 같은 달 시작하여 10월 9일 마칠 때까지 일한 순서와 들어간 자재, 인부 등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단산서원은 영덕군 창수면 가산리에 있었던 단산서원을 가리키는 듯하다.
  • 제목
    당후일기(堂後日記)
    발급년
    1961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당후일기(堂後日記)」는 강원형(姜遠馨 ; 1862∼1914)의 문집인『혜사집(蕙社集)』권 1에 수록되어 있다. 그가 승정원 가주서로 있을 때인 계사년(1893년) 2월 22일에서 27일까지의 기록으로, 당시의 국정에 참여한 사람들의 직책과 성명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정을 소집한 현황을 보면 2월 22일에 2번 소집하였고, 25일 1번, 26일 1번, 27일에 2번 소집하였다. 강원형의 자는 성윤(聖允), 호는 혜사(蕙社),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칠곡(漆谷)에서 태어났다. 「십삼도유생연명소(十三道儒生聯名疏)」의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조약의 파기, 을사오적(乙巳五賊)의 처형, 일본공사의 횡포와 무례를 엄징할 것 등의 상소를 올리고, 동시에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국내외에 공표하여 국민들의 궐기와 국제사회의 관심을 호소하였고, 그로 인하여 1905년 11월 28일 일본경찰에 잡혀 4개월간 투옥된 뒤 1906년 3월 20일 출옥하였다. 1914년 9월 서울에서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모의하던 중 분사(憤事)하였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