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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양집』은 권익창(權益昌 ; 1562~1645)의 시문집이다. 권익창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무경(茂卿), 호는 호양(湖陽). 조목(趙穆)·김성일(金誠一)의 문인. 경서에 통달하고 성리학에 잠심하였다. 학암서원(鶴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이 책은 현손인 상욱(相頊)이 생전의 저술을 모아서 편집과 교감을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에게 부탁하고 서문까지 받아 두었으나, 미처 간행하지 못하고, 100여년 뒤에 후손 진용(進龍)이 「십도십목(十圖十目)」까지 한데 묶어 간행하였다. 권말(卷末)에는 문인인 권원(權瑗)과 후학인 권상일(權相一), 류이좌(柳台佐), 정래성(鄭來成)의 발문이 붙어 있다. 권수(卷首)에는 이광정(李光庭)의 서문이 수록되어 있고, 권1은 시, 권2는 문, 권3은 「십도십목(十圖十目)」, 권4는 부록으로 편차되어 있다. 권1에 수록되어 있는 90여 편의 시는 전형적인 도학자의 시세계를 보여 준다. 권수에 수록되어 있는 「자수(自修)」라 제(題)한 7언절구는 호양시(湖陽詩)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시이다. 교훈적이고 설리적인 시와 함께 자연을 읊은 산수시(山水詩), 스승이나 친구를 대상으로 한 증답시(贈答詩)나 회인시(懷人詩), 세상살이의 애환을 담담하게 읊은 술회시(述懷詩)가 시세계의 주종을 이루고 있다.
권2에 수록되어 있는 문 역시 사장(詞章)에 속하는 사부(辭賦)는 한편도 없고 잠(箴), 설(說), 변(辨) 같은 도학문장과 다섯편의 기문, 그리고 서와 발이 각 한 편, 마지막으로 잡저에 「시자손(示子孫)」, 「호양자자전(湖陽子自傳)」이 수록되어 있다. 「호양자자전(湖陽子自傳)」은 길지 않은 글이지만 호양의 인간적 면모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글이다. 자신이 공부하고 독서한 내력과 방법을 밝히고 평상시의 생활태도를 담담하게 기술하고 스스로 찬을 붙였다. 이 글의 핵심은 호양의 학문적 업적으로 학문적 성취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권3에는 「십도십목(十圖十目)」이 수록되어져 있다. 여말의 우탁(禹倬)이나 선초의 윤상(尹詳) 이래로 영남 일대에서 꾸준히 진력해 온 역학 연구의 전통을 계승하여 천인, 태극, 음양, 오행, 팔괘의 관계를 도표를 그려 설명하고 이를 다시 천문, 지리, 역술, 도양에까지 확대하여 모두 십도로 체계한 것이다. 또한 십목은 십도를 이해하기 위한 세부 항목으로 십도의 용어를 해설하고 용어 상호간의 관계를 조목 조목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 권4는 부록으로 후학들이 호양을 추모한 글을 모은 것이다. 종모제(從母弟)인 이시명(李時明)이 찬한 행장과 이유장(李惟樟)이 찬한 묘갈명, 문인과 후학들이 바친 제문과 만사를 모은 것이다.
「십도십목(十圖十目)」은 저자의 학문적 요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그의 문집이 간행되기 이전에 따로 한 책으로 묶여 유포되었으며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학문적 성과이다. 이에 대한 연구가 앞으로 저자 연구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나, 현재까지는 학계의 관심이 미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호우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이환(李煥 ; 1582∼1661)의 시문집이다. 이환의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계명(季明), 호는 호우(湖憂)이다.
이 책은 1871년(고종 8) 후손들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주목(柳疇睦)의 서문이, 권말에 이유장(李惟樟)의 발문이 있다. 권1·2는 시·만사 250수, 권3은 명(銘) 2편, 전(箋) 1편, 기(記) 2편, 축문·제문 37편, 묘지명 6편, 묘갈명 4편, 권4는 행장 1편, 잡저 7편, 부록으로 묘지명·가장·묘갈명·유고후어(遺稿後語)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대개 자연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지은 것이다. 「연경반력축사각지중이위지시헌력(燕京頒曆縮四刻之中而謂之時憲曆)」은 당시 중국을 통하여 새로 입수된 역서와 서양에서 제작되어 중국을 통하여 들어온 태양력 즉, 시헌력을 비교하여 장단점을 설명한 글이다. 「위용궁사민정순찰사급경차관서(爲龍宮士民呈巡察使及敬差官書)」는 용궁지방 수세의 시정을 요구한 것으로, 지방관리의 농간으로 전답의 결부(結負)가 정확하지 않게 책정되어 세금의 부과가 공정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실제상의 전결과 공부상의 전결의 차이점을 대조, 비교하면서 시정을 건의하였다. 「납폐계(納幣啓)」는 선현들이 혼인에 대한 의견을 교환한 서간문 중 참고가 될만한 내용을 모아놓은 글로, 혼인이 인륜의 대사임을 강조하고 세상의 어떠한 일도 원만한 부부의 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점을 말하였다. 「격신여섭문(檄申汝涉文)」에서는 병자호란 때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들과 관군들의 알력을 해소시키고 일사불란한 충성심을 발휘하여 국난을 극복해 나갈 것을 권유하고, 또한 나라가 어려울 때에는 모든 백성이 자기를 버리고 국가를 위하여 희생하여야 함을 주장하였다.
이환의 아버지는 한성부우윤을 지낸 윤수(潤壽)이며, 어머니는 풍산유씨(豊山柳氏)로 중영(仲?)의 딸이다. 외삼촌인 유성룡(柳成龍)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616년(광해군 8)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벼슬을 포기, 향리로 돌아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에 학행으로 헌릉참봉에 천거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오직 후진교육에 힘썼다.
『호은집』은 조선 말기의 문인, 송계흠(宋啓欽 ; 1856∼1934)의 시문집이다. 송계흠의 자는 원건(元建), 호는 호은(湖隱) 본관은 야성(冶城), 아버지는 재형(在衡)으로 영주(榮州)에 거주했다. 공은 10세에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나, 과거에 실패하고 국세 또한 날로 기울어짐을 보고 국내의 명산대천을 찾아 다니며 유유자적하였다. 한성(漢城)의 서점 앞을 지나다가 진귀한 책이 많음을 보고 머뭇거리는데 주인이 ″당신이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한다면 전부를 빌려보게 하리라”하거늘, 5일 후에 주인이 그가 본 책을 물어본 즉 서슴없이 대답하므로 정말 천재라고 탄식하였다. 만년에 세상에 대한 미련을 끊고 경전을 탐구하여 후진을 양성하는 일에 힘써 송고정(松皐亭)을 짓고 거기서 기거하며 소요자적함을 일삼았다.
『호정실기』는 조선 중종 때의 문신 김세량(金世良 ; 1502∼1571)의 실기이다. 이 책은 후손 석규(錫奎)가 1908년에 편집, 간행하였다. 김세량의 자는 언숙(彦叔), 호는 호정(昊亭),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다경(多慶)의 아들로 이언적(李彦迪)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19년(중종 14) 생원이 되었고, 1535년 문과에 장원급제했다.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전적(典籍)·진해현감(鎭海縣監)·청도현감(淸道縣監) 등을 지냈으며, 그 뒤 교리(校理)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능했다.
『혹산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이승수(李承洙 ; 1857∼1912)의 시문집이다. 이승수의 자는 찬경(贊敬), 호는 혹산(或山),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아버지는 병준(炳峻)이며, 경산(慶山)에서 살았다. 어려서 양친과 큰 형을 잃어 일찍이 고아가 되었다. 그는 장복추(張福樞)와 이종기(李種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는데, 그가 스승을 찾아가 학문하는 순서를 묻자 스승이 ″몸을 닦는 길은 『소학(小學)』에 있고, 의리(義理)의 정미함은 『근사록(近思錄)』에 있으니 이 길로 들어가면 문로(門路)가 틀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고산서원(孤山書院)이 폐쇄되자 고을 사람들이 서당을 세웠다. 이에 그가 원근의 유학자들과 더불어 여기에서 예(禮)를 강론하였다. 그가 죽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문객이 5백명이 넘었다고 한다.
『홍와집』은 조선 말기의 학자 이두훈(李斗勳 ; 1856∼1918)의 시문집이다. 이두훈의 본관은 성산(星山). 자는 대형(大衡), 호는 홍와(弘窩)이다.
이 책은 문인 이인광(李寅光) 등이 편집하여 1928년 경상북도 고령 내산서당(乃山書堂)에서 발행하였다. 권두에 유연구(柳淵龜)의 서문이, 권말에 문인 이상희(李相羲)와 종질 경(俓)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244수, 권2는 시 152수, 뇌사(?辭) 7편, 권3∼8은 서(書) 246편, 권9는 잡저 5편, 서(序) 11편, 기(記) 4편, 발(跋) 3편, 명(銘) 2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는 산수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한 여행시와 친구와의 이별을 주제로 한 송별시, 죽음을 애도하는 만시 등이 대부분이며, 「구미횡월(九眉橫月)」·「만대행운(萬黛行雲)」·「남루효각(南樓曉角)」 등 본격적인 서경시도 상당수에 이른다. 서(書)에는 스승 이진상에게 올린 16편의 서신을 비롯하여 곽종석·권연하(權璉夏)·장복추(張福樞)·허유(許愈)·이종기(李種杞)·허훈(許薰)·장석영(張錫英)·이승희·김창숙(金昌淑) 등 당시 영남지방의 문인·학자 및 독립운동가에게 준 서신이 상당수 있다. 특히, 곽종석은 이진상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한 동문이며, 이승희는 스승의 아들이라는 특별한 관계 외에도 지맥·인맥·학맥 등이 서로 얽힌 사이였다. 권3의 「상한주선생소학문목(上寒洲先生小學問目)」·「상한주선생대학전십장문목」을 비롯하여 「답허후산육례발문(答許后山六禮發問)」 등 상당수의 별지(別紙)는 대개 경학·예절에 관한 내용이다.
이두훈의 성리학적 견해는 대체로 주기설(主氣說)을 배격하고 이원론적인 주리설(主理說)을 주장한 이진상의 설을 따르고 있다. 묘지·묘갈·행장 등은 당시 영남지역 인사들의 인적사항과 활동상황을 살피는 데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성리학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없는 것은 외세에 시달리게 된 당시의 나라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였던 까닭으로 보이는데, 1896년 곽종석·윤주하 등 5, 6인과 함께 각국 공관에 보낼 포고문을 작성한 바도 있다.
이두훈의 아버지는 인한(寅漢)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지운(芝運)의 딸이다. 처음 김희진(金希鎭)에게 글을 배웠고, 뒤에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으로, 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윤주하(尹胄夏)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화강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최학승(崔鶴昇 ; 1817∼1878))의 시문집이다. 최학승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성언(聲彦), 호는 화강(華岡)이다.
이 책은 1953년 증손 항묵(恒默)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권상규(權相圭)의 서문이, 권말에 항묵의 지(識)가 있다. 앞에 연보와 목차가 있고, 권1은 서 8수, 제문 3편, 상량문 2편, 기(記) 5편, 발(跋) 1편, 잡저, 권2는 잡저, 부록으로 포제(褒題)·포계(褒啓)·포척록(褒?錄) 각 1편, 장(狀) 5편, 만사 13수, 제문 3편, 유사 1편, 묘갈명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잡저의 「대흥일록(大興日錄)」은 저자가 대흥군수로 있을 때 지은 일기이다. 1869년(고종 6)에서 1872년까지 군에서 일어났던 각종사항을 처리한 일과 문제된 것을 일기체로 기록한 것으로, 매우 특이한 자료이다. 19세기말 봉건사회의 관료가 목민관으로서 맡은 소임을 충실하게 수행해 나가려는 모습에서 당시 사회상의 여러 가지 단면을 엿볼 수 있다. 특히, 공해(公?)의 수리, 사창(社倉)의 관리소홀과 폐단, 간교한 아전들의 범법행위, 지방토호들의 횡포, 세금부과의 과중함, 매혼(買婚)·산송(山訟)·문벌로 인한 송사, 지방유생들의 접대 등 생생하고 사실적인 기록은 당시 사회의 이면을 고찰하는 데 도움이 된다. 또한, 정치사의 이면에 가려진 19세기 사회상을 봄으로써 민중생활의 단면을 파악할 수도 있다. 한편, 이 일기에는 포창(浦倉)에서 일어난 일들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세미(稅米)를 거두어들이는 모습과 그것을 포창에서 하역하는 정경, 세곡선(稅穀船)을 운송하는 과정 등 봉건경제의 동맥인 해운업에 대한 참고 자료가 된다.
최학승의 아버지는 성균진사 윤곤(潤坤)이며, 어머니는 장연노씨(長淵盧氏)로 주학(周學)의 딸이다. 최치원(崔致遠)·최승로(崔承老)·최숙(崔肅)·최제안(崔齊顔) 등의 후손이다. 1851년(철종 2)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852년 승문원 부정자, 1860년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을 지냈다. 1867년(고종 4) 공조참의, 1868년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냈고, 1869년 외직(外職)인 대흥군수(大興郡守) 등을 역임했다.
『화산선생일고』는 조선 초기의 문신 권주(權柱 ; 1457∼1505)의 시문집이다. 권주의 자는 지경(支卿), 호는 화산(花山),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이 책은 1718년(숙종 44) 현손 구(?)가 편찬하였으며, 1798년에 간행되었다. 이 중 유서(諭書)의「갑자화적(甲子禍蹟)」은 연산군이 폐비 윤씨의 입묘의론(立廟議論)을 일으킨 뒤 갑자사화가 일어난 과정을 간략히 기술한 것이다. 「동방록(同房錄)」은 성균관에 있을 때 같은 방을 쓴 인물의 명첩이고,「동사록(東?錄)」은 1493년 경차관으로 대마도에 갈 때 글을 준 인물의 명첩이며, 「연행록(燕行錄)」은 1502년 부사로 명나라에 갈 때 시문을 준 인물의 명첩이다. 「갑자록(甲子錄)」에는 갑자사화 때 성종의 윤비폐의(尹妃廢議)에 참여했다는 죄로 극형에 처해진 윤필상(尹弼商) 등 12명과 언관(言官) 및 김종직(金宗直) 문하로 피살된 홍귀달(洪貴達) 등 14명의 이름이 간략한 행장(行狀)과 함께 실려있다. 이 문집은 갑자사화를 전후한 조선 초기의 정치적 관계와 명·대마도와의 외교관계를 연구하는데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
권주는 1474년(성종 5) 진사가 되고, 148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1489년 공조정랑(工曹正郞)으로 있을 때 요동(遼東)에 질정관(質正官)으로 다녀왔다. 1493년 부응교(副應敎)로 있으면서 대마도(對馬島)에 경차관(敬差官)으로 다녀 온 뒤 응교(應敎)가 되었다. 1497년(연산군 3) 도승지, 충청도관찰사,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으며, 1502년 명나라에 다녀온 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었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발하면서 1482년(성종 13) 연산군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賜死) 때에 승정원주서로서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이유로 평해(平海)로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교살(絞殺)당했다. 1506년(중종 1) 우참찬에 추증되면서 신원되었다.
『화산세고』는 권의(權?), 권장(權檣), 권심언(權審言), 권욱(權旭) 등 안동권씨(安東權氏) 후손들의 시문집이다.
권의(權? ; 1475∼1558)의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사빈(士彬)의 아들이며, 권벌(權?)이 그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가 되었으나 더 이상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예천(醴泉)의 저곡리(渚谷里)에 거주하다가 1540년(중종 35) 찰방(察訪)이 되었고, 1545년(인종 1) 의흥현감(義興縣監)이 되었다.
권장(權檣 ; 1489∼1529)의 자는 제보(濟甫), 호는 우암(寓菴), 사빈의 아들로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1519년(중종 14) 서경덕(徐敬德) 등과 함께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다. 예문관검열(藝文館口閱)·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 등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29년(중종 24) 금산군수(金山郡守) 재임 시 병사(病死)했다.
권심언(權審言 ; 1502∼1574)의 자는 중택(仲擇), 의(?)의 아들이다. 권벌의 도움으로 벼슬길에 나가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지례현감(知禮縣監)·거창현감(居昌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권욱(權旭 ; 1556∼1612)의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 심언(審言)의 아들이다. 8,9세에 『효경(孝經)』과 『소학(小學)』의 장구(章句)를 읽고 통달했으며, 김성일(金誠一)의 문하에 나아가 주서(朱書)와 『심경(心經)』에 대해 질문하였으며,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었고, 1592년(선조 25) 임진란에 창의(倡義)하여 의병들과 문경(聞慶)지역을 방어하였다. 1602년(선조 35)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물가에 작은 집을 짓고 매화를 심어 `매당(梅堂)`이라 칭하고 학문연구와 벗들과 교유하며 여생을 보냈다.
『화재선생문집』은 황익재(黃翼再 ; 1682∼1747)의 시문집이다. 황익재의 자는 재수(再?), 호는 백화재(白華齋),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이 책은 증손 태희(泰熙)가 편집, 간행했으나 간행연대는 알 수 없다. 권5의「무신일기(戊申日記)」는 그가 이인좌의 난 때 경상우도소모사(慶尙右道召募使)가 되어 난을 평정하였던 과정과 감회를 기록한 것으로서, 난의 배경, 지방행정의 난맥상, 백성들의 고초 등이 상세하게 나타나 있다. 「경술일기(庚戌日記)」는 난 평정 이후 자신이 오히려 난에 연루되어 있었다고 참소당하여 함경도 구성(龜城)에 귀양가서 생활하던 때의 기록으로서, 억울한 심사와 정치생활의 무상함, 7년간 유배지에서의 생활상, 험준한 산하의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잡저(雜著)의 「사창절목(社倉節目)」은 순천현감(順天縣監)으로 있을 때 기근과 흉년에 대비한 사창의 운영방침과 정비계획을 조목별로 정리하여 제시한 글이다. 또 「진청절목(賑廳節目)」은 백성들을 위한 양곡 방출과 회수의 기본방침을 밝힌 것이며, 「향약절목(鄕約節目)」과 「양사재절목(養士齋節目)」은 지방 양반계층이 유교적 미풍양속을 정착시키는데 선도적 구실을 하기 위하여 지방행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촉구한 것이다. 당시 농촌의 궁핍한 생활상과 행정의 무능한 통치를 자세히 적고 있어 참고자료가 된다.
황익재는 1702년(숙종 28)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고, 박사·병조좌랑을 거쳐 평안도사를 지냈다. 1709년 전라도사에 재직할 때에는 조세의 조운과정(漕運過程)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엄격히 단속하였고, 1711년 무안현감으로 있을 때에는 거듭된 흉년으로 피폐해진 농민들의 구휼에 힘썼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반란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을 받아 7년간 유배되었다. 1736년 복직의 명을 받았으나 사양하고 낙향하여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활산선생문집』은 남용만(南龍萬 ; 1709~1784)의 시문집이다. 남용만의 본관은 영양(英陽). 초명은 해만(海萬). 자는 붕로(鵬路), 호는 활산(活山)이다.
이 책은 권두에 정범조(1723~1801)·이계(耳溪) 홍량호(1724~1802)의 서문이 있고, 권1과 권2에는 부(賦) 1편과 고시(古詩) 19제(題)·율시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唐詩)의 체(體)를 본떠서 지은 작품이 여러 편 보인다. 권3에는 소(疏) 1편·서(書) 24편, 권4에는 잡저 12편·설 11편·논 5편, 권5에는 서(序) 7편·기 14편, 권6은 발 6편·명 3편·상량문 6편·축문 2편·제문 7편·비명 2편·묘지명 10편·묘갈명 6편·행장 3편이 각각 실려있다. 부록에는 어록·행장·묘갈명·만사 등이 있다. 행장은 후손 경채(景采)가 지었고, 묘갈명은 홍양호가 찬하였다.
남용만은 홍양호가 서문에서 밝혔듯이 당시 경주 지방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중 한사람이었다. 그래서 홍양호는 그를 예로써 초빙하여 젊은이들을 가르치게 했던 바, 그의 문집을 통해 그의 학문적인 역량과 교육활동의 일면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남용만은 1756년 생원시에 합격하고서는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독서와 저술활동에 전념하였다. 두 차례에 걸쳐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평소 산수의 아름다움을 즐겨 춘추가절(春秋佳節)에 경주의 자옥산(紫玉山)·반월성(半月城)에 잔치를 베풀고 돌아갈 것도 잊었다고 한다.
『활안집』은 조선후기의 학자 홍구범(洪龜範 ; 1691∼1762)의 시문집이다. 홍구범의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대백(大伯), 호는 활안(闊岸)이다.
이 책은 1977년 종후손 성근(成根)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성근의 후지가 있다. 문집은 권1은 시 119수, 권 2·3은 서(書) 4편, 잡저 57편, 권4는 설(說) 3편, 책(策) 3편, 권5는 서(序) 3편, 기(記) 7편, 발(跋) 8편, 권6은 잠(箴) 2편, 명(銘)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에는 차운(次韻)·화답(和答)한 것이 많은 양을 차지하며, 그밖에 영물(詠物) 또는 감회를 읊은 시가 더러 있는데 대개 은일적 감상을 나타낸 내용들이며, 전고(典故)를 많이 인용하고 있다.
잡저는 무려 57편이나 되는 많은 분량인데, 이 중에는 『주역』·『서경』·『시경』·『대학』·『중용』·『논어』·『맹자』·『춘추』·『서명(西銘)』·『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역학계몽(易學啓蒙)』·『가례(家禮)』·『율려신서(律呂新書)』·『근사록(近思錄)』·『대학연의(大學衍義)』·『이사(二史)』·『오대사(五代史)』·『고사사통(古史史通)』등 44종의 서책에 대하여 그 대의와 요지를 해설한 것이 있다. 「관제(官制)」·「유품(流品)」·「전선(銓選)」·「자격(資格)」·「천거(薦擧)」·「고과(考課)」등은 당시의 인사에 관한 제도를 설명한 내용이다. 이 밖에 「태극재동정선후변(太極在動靜先後辨)」은 태극의 동정에 선후가 없음을 논변한 글로서 상당히 논리적인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홍구범의 아버지는 우하(宇河)이며, 어머니는 일선김씨(一善金氏)로 구서(九敍)의 딸이다. 약관 이전에 경사(經史)와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에 통하였으며, 지방의 과장에 나아가 문명(文名)을 떨쳤다. 1727년(영조 3) 성균관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여, 여러 분야의 학문을 깊이 연구했으나 대과에는 오르지 못하였다. 시문에 능하였으며, 당시의 명사 이세태(李世泰)·정중기(鄭重器)·정간(鄭幹) 등과 교유하였다.
『활재문집』은 이구(李? ; 1613∼1654)의 시문집이다. 이구의 자는 대방(大方), 호는 활재(活齋),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구의 글은 대부분 성리학에 대한 것인데, 권2∼4의 잡저(雜著)에 실린 글들이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특히 권5∼6의 「간사잉어(看史剩語)」는 윤탁보장(尹鐸保障)·상여완벽(相如完璧)·악의불하이성(樂毅不下二城)·조괄위장(趙括爲將)·진득천하(秦得天下)·전횡자살(田橫自殺) 등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중국 역사에 대한 논평이다.
이구는 향시에 합격하고 별시에 급제하였으나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상산(商山)에 은거하면서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1650년(효종 1) 영남의 선비들이 일어나 승무사(陞?事)를 간쟁할 때 소(疏)를 썼다가 금고된 바 있다. 절조와 학문으로 당시에 추숭되었다.
『황림집』은 조선 후기의 학자 윤사진(尹思進 ; 1713∼1792)의 시문집이다. 윤사진의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퇴보(退甫). 호는 황림(篁林)이다.
이 책은 1914년 후손 병규(炳奎)·상요(相堯)와 최상순(崔尙淳) 등이 『정관치설』 6권과 함께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곽도(郭?)의 서문이, 권말에 유필영(柳必永)의 발문이 있다. 권1은 시 151수, 권2·3은 서(書) 17편과 별지(別紙), 잡저 14편, 서(序) 2편, 기(記) 1편, 발(跋) 4편, 권4는 제문 15편, 축문 2편, 잠(箴) 3편, 명(銘) 2편, 묘표 5편, 행록 4편, 가훈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에는 평생 재야에 묻혀 자연과 함께 지낸 저자의 맑고 깨끗한 기상이 잘 드러나 있으며, 특히 연작시가 많다. 「남창십영(南窓十詠)」·「사시우회십육수(四時寓懷十六首)」·「감흥육수(感興六首)」 등의 작품에서는 임천(林泉)의 즐거움을 풍부한 서정으로써 노래하고 있다. 「심법상전(心法相傳)」·「관역탄성인덕숭업광(觀易歎聖人德崇業廣)」등은 학문의 길에서 느낀 깨달음을 읊은 것이고, 「자탄사수(自歎四首)」·「황림십이영(篁林十二詠)」등에는 스스로를 돌이켜보는 자기인식이 드러나 있다. 서(書)와 별지는 주로 이병정(李秉鼎)·조술도(趙述道)와 후학들에게 『주역』에 대한 견해를 개진한 것들로, 저자의 학문성향을 파악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
잡저의 「장자설기의(張子說記疑)」·「호시취규설(弧矢取?說)」·「익이흥리설(益以興利說)」·「선천후천설(先天後天說)」등 대부분의 논설도 『주역』각 괘의 오묘한 이치를 깊이 있게 분석하여 선인의 오류를 바로잡는 한편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내용들이다. 「서학동서척잠(書學童書尺箴)」과 「가훈」은 후학과 자손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적었고, 「무현금명(無絃琴銘)」·「척촉장명(??杖銘)」등은 함축성있는 묘사로 삶의 자세를 서술하고 있다. 부록에는 『정관치설』·『통서연의』등의 간행을 명하는 교서와, 이를 청원한 유생들의 상소문이 실려 있어 참고가 된다.
윤사진의 아버지는 중추부첨사 방(坊)이며, 어머니는 담양전씨(潭陽田氏)로 경하(景河)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종형 사적(思迪)과 더불어 가학(家學)을 이어 학문에 몰두하였다.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주역』연구에 몰두하여 선인의 학설을 분석, 그 오류를 찾아내는 한편 부분적으로는 독창적인 견해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1791년(정조 15) 강원 감사로 있던 윤사국(尹師國)이 저자의 행적과 저서인 『정관치설(井觀癡設)』·『통서연의(通書衍義)』·『용학집해(庸學集解)』·『하학도설(河學圖設)』등을 조정에 알려, 영동교양관(嶺東敎養官)에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나가지 못하였다.
『황암문집』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진하(金鎭河 ; 1786∼1865)의 시문집이다. 김진하의 자는 치청(穉淸), 호는 황암(篁巖), 본관은 함창(咸昌)이다.
이 책은 1907년 손자 세상(世相)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 가운데 「벽서성경자이우자경(壁書誠敬字以寓自警)」은 벽에 `성경(誠敬)` 두 글자를 써 붙여두고 이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유자로서의 마음가짐을 다진 것이고, 「목면자(木棉子)」는 목화를 들여온 문익점(文益漸)의 덕을 기린 내용이다. 대체로 그의 시는 서정적 낭만보다는 실리적 내용의 시가 주조를 이룬다. 「청경모궁전례소(請景慕宮典禮疏)」는 영남 사림이 경모궁의 보갑년(寶甲年)을 맞아 종묘에서의 전례를 요청한 일로 양사의 탄핵을 받게 되자, 이에 격분하여 올린 글이다. 서(書)는 주로 벗들과 안부를 주고받은 것들이고, 특별한 학문적 내용은 없다. 「사본재잠(四本齋箴)」은 선유(先儒)의 격언 가운데서 근검·경신(敬愼)·시서(詩書)·충효 네 가지를 취하여 일상생활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것이라 하고, 여기에 각각 자경(自警)과 감계의 뜻을 담아 지은 것이다.
김진하의 아버지는 기중(基中)이며, 어머니는 의성김씨(義城金氏)로 구련(龜鍊)의 딸이다. 55세 때인 1841년(현종 7)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과 사헌부지평 등 삼사의 청직을 두루 거쳐 80세에 통정대부·가선대부에 올랐고, 벼슬은 병조참판에 이르렀다. 평생 이황(李滉)의 학문을 존숭하였다.
『황파집』은 김종걸(金宗傑 ; 1628∼1708)의 시문집이다. 김종걸의 자는 국경(國卿), 호는 황파(黃坡),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이 책은 1808년(순조 8)을 전후하여 방손 재전(載銓)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주변경관을 마주하여 느끼는 즉흥적인 감회를 즐겨 읊었고, 그밖에 차운·화답시가 많다. 「탁영암경차주부자탁족간수운(濯纓巖敬次朱夫子濯足澗水韻)」에서는 주희(朱熹)의 자취를 떠올리며 물욕에 얽매임 없이 자연에 묻혀 사는 즐거움을 청아하게 읊고 있다. 「압구정경차퇴도선생운(狎鷗亭敬次退陶先生韻)」에는 압구정의 아름다운 경치를 바라보며 이황(李滉)을 경모하는 마음을 잘 담고 있다. 잠(箴) 중 「제가사잠(齊家四箴)」에서는 봉제사·접빈객 등 수신제가에 바탕이 되는 요체를 적었다.
김종걸의 아버지는 통덕랑 해윤(海潤)이며, 어머니는 봉화금씨(奉化琴氏)로 성현(聲賢)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몰두하여 벼슬길에 뜻을 두지 않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1708년(숙종 34)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에 제수되었다.
『회곡집』은 조선 중기의 문신 권춘란(權春蘭 ; 1539∼1617)의 시문집이다. 권춘란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회(彦晦), 호는 회곡(晦谷)이다.
이 책은 1845년(헌종 11) 후손 엽(曄)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김굉(金口) 안복준(安復駿)의 서문이, 권말에 엽의 발문이 있고, 본집과 속집으로 나뉘어 있다. 본집 권1·2는 시·만사 146수, 소(疏) 1편, 서(書) 10편, 묘갈명 2편, 명(銘) 3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속집 권1∼4는 도(圖) 26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중후하고 단아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백담정사잡영(栢潭精舍雜詠)」은 40수의 장편으로 주위의 경관을 잘 묘사하였고, 「용주회암운곡시운(用朱晦菴雲谷時韻)」은 주희(朱熹)의 시를 차운한 것으로 그 묘사가 그윽하고 아름다워 실제로 눈에 보이는 듯하다. 또, 「차오천주인이덕홍선생십송청풍운(次汚川主人李德弘先生十松淸風韻)」에서는 이덕홍의 청고한 기상을 소나무의 청절에 비겨 잘 묘사하였다. 책(策)은 유도(儒道)와 선정(善政)의 상관관계를 논설한 글이다. 유도의 근본사상은 인(仁)이고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체용(體用)이라고 지적하여, 정치가 인의 체를 터득하여 예(禮)의 용을 쓰게 되면 중화(中和)를 이루게 된다고 하였다. 속집에 수록된 도 가운데 「태극통체인사도(太極統體人事圖)」에서는, 태극은 천하사물의 근본에 대하여, 「중용중화위육지도(中庸中和位育之圖)」에서는 성정(性情)과 체용에 대하여, 「인심도심도(人心道心圖)」에서는 인심과 도심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그밖에 「소학내외편목도(小學內外篇目圖)」·「맹자부동심지도(孟子不動心之圖)」·「사성역학지도(四聖易學之圖)」등이 실려 있다.
권춘란은 퇴계(退溪)의 문인으로서 1570년(선조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7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감찰을 거쳐 대동도찰방(大同道察訪)이 되고 이어서 정언(正言), 지평(持平), 사간(司諫), 직강(直講)을 역임하고 영천군수(永川郡守), 의성현령등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안동에서 김윤명(金允明)의 의병에 가담하였다. 이후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유성룡, 정경세 등과 학문을 논하며후진교육에 힘썼다.
『회구문집』은 이덕록(李德祿 ; 1722∼1792)의 시문집이다. 이덕록의 자는 사행(士行), 호는 회구(悔咎), 본관은 벽진(碧珍)이다.
이 책은 1955년 후손 승락(承洛)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시(詩)는 평이하고 담백한 어조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여러 정감들을 진솔하게 표현한 것이 많다. 사실적인 표현과 담백한 언어의 절제미가 돋보인다.
잡저(雜著)의 「낙강동주록(洛江同舟錄)」은 오래도록 꿈꾸던 낙동강 유람을 70세가 되어 비로소 실현하게 된 기쁨을 11일 동안의 여정을 따라 역동적으로 묘사한 서정적인 글이다. 친지 등 21명과 함께 공암(孔巖)을 출발하여 낙동강 물줄기를 따라 송당(松堂)·영당(影堂)·월파(月波)·매학(梅鶴)·동락(東洛) 등의 승경을 보며 느낀 감회와 질탕한 풍류를 웅장한 문체로 표현한 뛰어난 기행문이다.
이덕록의 아버지는 수인(遂仁)이며,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동명(東鳴)의 딸이다. 종조부 이시암(李時?)에게서 수학하였고, 극빈한 생활에도 지극한 효성으로 안빈낙도하며 학문에 몰두하였다.
『회당문집』은 신원록(申元祿 ; 1516∼1576)의 시문집이다. 신원록의 자는 계수(季綏), 호는 회당(悔堂), 본관은 아주(鵝洲)이다.
이 책은 6대손 정모(正模)가 1740년(영조 16)에 편집했으며, 간행은 1769년경에 이루어졌다. 시(詩)는 화답시가 대부분이고, 평담한 풍격을 지니고 있다. 서(書)는 주세붕과 서원의 학생에게 보낸 것으로, 장천서원의 운영에 대한 내용이다. 잡저(雜著)에 실려 있는 서원에 대한 기록은 초기 서원의 운영과 재정연구의 자료가 된다.
신원록은 수(壽)의 아들이며 의성(義城)사람이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여 11세 때 부친의 병을 구하기 위해 팔공산(八公山)에 들어가서 약초를 캐고 8년 동안 간호했다.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다가 주세붕(周世鵬)이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세우자 찾아가서 가르침을 구하고 장천서원(長川書院)을 창건하여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였다.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추증되고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회당선생문집』은 근세의 학자 장석영(張錫英 ; 1851∼1929)의 시문집이다. 장석영의 본관은 인동(仁同). 일명 석교(碩敎). 호는 회당(晦堂). 경상북도 칠곡출신이다.
이 책은 1932년 후손 익원(益遠)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1·2는 시 504수, 권3∼18은 서(書) 681편, 권19∼21은 잡저 8편, 권22∼30은 문(文) 1편, 변(辨) 5편, 설(說) 16편, 사(辭) 3편, 계(戒) 1편, 학규 1편, 서(序) 110편, 기(記) 132편, 발(跋) 57편, 잠(箴) 9편, 명(銘) 25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시는 기울어 가는 나라의 형세를 바로잡지 못하는 안타까움과 불우의 한을 시 속에 담아 표현한 것이다. 「야회(夜會)」에서는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나 다정하고 즐겁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서로 경계하는 마음이 생기는 까닭을 애써 잊으려 한다 하였고, 「도한강(渡漢江)」과 「송경회고(松京懷古)」5절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이 절실하게 묘사되어 있다.
서(書)의 「상한주선생(上寒洲先生)」·「상허후산(上許后山)」은 선배인 이진상(李震相)과 허유(許愈)에게 학문의 방법을 질의한 것이고, 「답이계도(答李啓道)」·「답이공윤(答李公允)」은 제자들이 물어온 경전·성리·예절·시사 등에 대하여 자세히 답한 글이다. 「소학강회시발문(小學講會時發問)」은 고산서당에서 『소학』을 강의할 때 어려운 대목을 골라 스승에게 질의한 내용이다. 「정자논성설해(程子論性說解)」와「주자대전기의략(株子大全記疑略)」은 송대(宋代)의 대학자 정이(程?)와 주희(朱熹)의 성리학에 대하여 자신의 견해를 보충하여 설명한 것이다. 「호락설변(湖洛說辨)」은 당시 성리학에 대한 호당과 낙당의 논쟁에 대하여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와 심즉기(心則氣), 미발하였을 때 기질성의 유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등 견해 차이를 긍정 또는 부정하면서 절충의 형식을 취하여 설명하였다. 「변사교설(辨邪敎說)」은 모든 주민이 평등하다고 한 천주교를 반박하여 아비도 임금도 없는 오랑캐의 무리라고 배척하였다. 이 밖에 지구가 둥글며 회전한다는 주장을 반대한 「변지구원전설(辨地球圓轉說)」과 성은 스승이고 마음은 제자라고 한 말을 변론한 「성사심제변(性師心弟辨)」이 있다.
장석영은 1905년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통분하여 일제침략을 규탄하고 을사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형을 요청하는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를 이승희(李承熙)·곽종석(郭鍾錫)과 함께 올렸다. 1907년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 전국에 파급될 때 칠곡지방의 국채보상회 회장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곽종석·김창숙(金昌淑) 등과 협의하여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서를 작성하였으며, 성주 장날의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가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혀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5년 제2차 유림단운동이 있을 때 영남대표로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