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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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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때의 대신이다. 1566년(명종 21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국(史局)에 들어가니 그 명성이 높았으며 당시 영의정이던 이준경(李浚慶)이 지인지감으로 있었는데 통천서각(通天犀角)을 증정하면서 장래에 나를 대신하리라고 하였다.
1579년(선조 12년)에 우승지(右承旨)에서 함경도 순찰사(咸慶道巡察使)가 되어 니탕개(尼湯介)의 난(亂)을 평정할 때 임금이 운전(雲錢)을 하사하며 격려하여 모든 장병을 훌륭히 통솔하고 특히 호령이 엄숙하여, 적은 감히 싸우지도 못하고 달아났다. 그는 지감이 있어 그의 부하에 있던 이순신(李舜臣) 신립(申砬) 김시민(金時敏) 이억기(李億琪)등이 모두 당세에 이름난 장군이었고 그는 관찰사(觀察使)로 다시 임명되어 계속 관북을 지켰었다. 북쪽 변방을 방비하던 그가 관북 일대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정성을 다하자 여진족들은 아기를 낳기만 하면 정언신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천성이 효성이 지극하여 친상을 집행함에 수요질(首腰?)을 벗지 않았고, 여막을 묘 아래에 짓고 조석으로 울고 상식하셨다. 그의 배위는 신씨 인데 일찍이 병색 위급한데 한번 보기를 청하니 공이 단절하고 삼년지례를 마치도록 보지 아니 하셨다.
평생에 자기를 법답게 하고 검소하고 간약하게 몸에 명주옷을 입지 아니하고 여러 가지 반찬을 먹지 아니하고 연세가 많아서 문경의 산수를 사랑하사 안동 풍산 가곡으로부터 가은 소양동에 이거하여 물고기를 구경하고 구로(鷗鷺)들과 친압(親押)하여 낮이나 저녁이나 노닐고 만력 병술(1587)년에 복되게 돌아가시니 연세 62라. 소양동 자좌의 언덕에 장사지냈다.
신잠은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불렸다. 『병진정사록(丙辰丁巳錄)』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3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한다.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묵죽에 뛰어났다고 하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묵죽과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한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설중탐매도(雪中探梅圖)〉와 〈화조도(花鳥圖)〉가 그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저서로는『영천집(靈川集)』이 있다.
본래 과거에 뜻이 없었으나 부모를 위하여 내키지 않음을 무릅쓰고 향시에 응시하여 여러 번 합격하였으며, 때로는 장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예부와 정시에서 떨어지고 말았고, 뒤늦게서야 때를 잘못 만났음을 알았다. 이에 과거공부를 폐하고 귀향하여 거처 주변의 연못가에 정자 하나를 짓고 여생을 즐기는 장소로 삼았다. 그 산을 마주하고 물에 임하고 있는 경치가 지극히 그윽하고 뛰어나 이것으로 인하여 사고라고 자호하고, 정자 이름을 산수정이라고 하였다. 꽃을 심고 대나무를 기르니 책상머리에 앉아 밝은 창 너머로 오래도록 대하고 있노라면 상쾌하기 그지없어 생각이 한점 티끌도 없이 맑아졌다.
채헌의 삶은 한마디로 산수와 함께 한 삶이었다. 일찍이 생원시에 일등으로 합격할 만큼 자질이 뛰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관직상의 이력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대신에 그는 오직 산림에 묻혀 누구보다도 곡진한 풍류를 즐기며 살았으니, 그가 만년에 석문정을 짓고 아울러 석문구곡을 경영하며 산수를 즐겼던 과정이 이를 여실히 증명한다. 특히 당시에 석문구곡과 관련하여 그가 남긴 〈석문구곡가〉는 주자의 〈무이구곡가〉에 연원을 둔 시가(詩歌)류로 우리나라 구곡시가(九曲詩歌)의 일단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석문정을 짓고 나서 그 주변의 경치에 대해 다시 12경을 명명하고 그것을 시로 읊어서 남기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바. 이 시편에는 곧 그의 의식체계나 나아가 삶에 대한 궁극적인 가치관까지도 진정으로 녹아 있음을 여실히 읽을 수 있다.
고상안은 1553년 경북 용궁의 왕태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이조정랑을 지낸 강제(姜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후에 벼슬이 정랑에 이르렀다.
그리고 일시 귀향하여 선묘(先墓)에 배소하던 중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이때 그는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어 상당한 공을 세웠다. 특히 1594년에는 권율의 천거로 무과(武科) 별시(別試) 시관(試官)에 차출되어 통영에 가게 된다. 그렇게 하여 이순신과 보름간 같은 병영에서 생활하게 되었는데 이 당시 그가 이순신과 상당히 많은 시를 주고 받았다고 한다.
이 후 그는 몇몇 외직을 거치고 환갑이 가까운 무렵에 정국의 혼란함을 피하여 귀향한다.
이러한 그를 이광정은 묘표에서 ‘공은 성품이 평온하고 기개가 있었다. 목숨을 버릴지라도 변절하지 않을 성품이었으면서도 조용하고 온화하였다. 비굴하게 아첨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몸을 낮추어 가시밭길을 걸었으니 그 은덕은 오로지 지방 고을에 베풀었을 뿐 나라에 큰 흔적을 살찌우지는 못했다. 조정이 어두워짐에 그 오염되고 혼탁함을 벗어나 초야에 깊이 묻혔으니 누가 그 고귀한 족적을 알아줄리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정방시는 평생을 고절한 은사(隱士)적 삶을 살았던 것으로 짐작될 뿐 괄로의 흔적을 찾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당시 사림에서 상당한 명망을 누렸던 것으로 보이는 바, 훗날 「죽림재」를 중수하고 「죽림정」을 올릴 당시 사림이 유계를 형성하여 물자를 조달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선생은 특히 ‘죽림’이라는 아호와 결부되어 진실로 군자죽(君子竹)에 비견되는 고매하면서도 절조 있는 품성과 행실로써 사림의 흠모의 대상이었다는 사실이 그의 묘갈명이나 죽림정에 남아 있는 몇몇 문장들을 통해서 증명되고 있다.
단종은 1457년 10월 24일 금부도사 왕방연이 가지고 온 사약을 받고 17세의 어린 나이로 숨을 거두었고 그 시신은 동강에 버려졌다. 삼족이 멸할 후환이 두려워 그 누구도 시신에 손을 대지 못하였다. 이 때 엄흥도는 영월 관아의 호장으로 있었다. 그는 날이 어두워지자 아들 3형제와 함께 단종의 시신을 염습하여 영월 엄씨들의 선산인 동을지산(冬乙旨山: 현재 장릉)에 몰래 매장하였다. 그리고 단종이 입고 있던 옷을 가지고 계룡산 동학사를 찾아가 생육신 김시습과 함께 그곳에다 단을 쌓고 초혼을 부르며 제사를 올린 후 종적을 감추어버렸다. 지금도 공주 동학사 숙모전에는 엄흥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생몰년 미상. 고려 의종∼명종 때의 문인. 예천임씨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다. 문헌을 상고하여 보면 대략 의종경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건국 공신의 후예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할아버지 중간(仲幹)과 상서(尙書)를 지낸 아버지 광비(光庇)와 한림원 학사를 지낸 큰아버지 종비(宗庇)에 이르러 옛 귀족 사회에 문학적 명성으로 기반이 닦여 있었다. 그는 일찍이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 무신의 난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20세 전후에 무신의 난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은 가운데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공음전(功蔭田)까지 박탈당한 채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 가족을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피신, 약 7여 년의 유락(流落)을 겪었다.
반충은 효자로 유(濡)의 5세손이다. 일찍 부친을 잃고 지극한 효성으로 모친을 섬겼다. 모친이 돌아가시자 시묘 살이 하면서 3년 동안 죽만 먹었으며 한 번도 집에 가지 않았다. 슬픔으로 뼈가 드러날 지경이었으며 한 번 이를 보인 적이 없었다. 조석으로 올리는 제물은 손수 깨끗하게 준비하였다.
일찍 부친을 잃고 모시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여 모친상을 마치고 나서 조용한 방에 두 신위를 모셔놓고 삭망으로 제사를 올리면서 그 추모하는 정성을 시묘 살이 할 때와 똑같이 하여 인근에서 그 효성에 감탄하였다. 그 천성이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버이를 섬기는 틈틈이 향시에 나아갔으나 몇 번이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어버이 뜻에 순응하여 감히 거역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으니, 어버이가 세상을 뜬 후에 드디어는 다시 과장에 나가지 않았다.
무릇 행동거지나 처세에서 법도를 따랐으니 그를 보는 사람들 모두 그가 엄중한 위인임을 알았으며, 다른 사람들의 한 가지 장점과 한 가지 행실과 같은 것은 비교될 바가 되지 못했다. 자신이 서자라서 제사를 주관할 수 없었기에 집 안에 별도로 양친의 신위를 모셔놓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여묘 살이를 하는 동안에 동산에 좋은 나물이 자생하여 제사를 모셨는데 상을 마치자 나물들이 모두 말라버리고 말았다니 진실로 하늘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밝게 드러난 것이라 하겠다.
이윤수는 타고난 성품이 깨끗하고, 곧고, 방정하고 엄하였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의연하게 대처하였고, 검소와 절약을 생활신조로 하여 자손에게도 항상 진실을 가르쳤다.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사양한 채 오로지 선비의 도리를 지켰는데,
한 번은 처가인 안동 하회에 갔다 처남인 류성룡이 벼슬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권유하자, 분수에 맞지 않는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귀가하는 도중 내성천에서 귀를 씻고 다시는 처가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임진왜란(1592년) 때는 백성의 굶주림을 돕는 데 솔선하였고, 학문 연구에 여생을 보냈다.
임귀지(林貴枝, 1435~1508)는 유천면 율현리 출신으로, 호는 삼송(三松)이다. 본관은 장흥이고, 임우소(林雨所)의 손자다.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충남 부여에 있는 홍산현감을 지냈는데, 백성을 사랑하고 정치를 잘하여 그곳 선비와 백성이 선정비를 세워 칭송하였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不事二君)”고 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율현리로 와서 숨어 살면서 삼송정(三松亭)을 지었다. 이곳에서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선비들과 사귀었다.
공은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능히 공양할 줄 알았다. 그리고 재능 또한 크게 뛰어나고 깨어 있었으며 독서를 좋아하여 게을리 하는 법이 없었다.
부모의 명에 의해 할 수 없이 과거 공부를 하기는 하였으나 마음은 일찍부터 보다 높은 곳에 두고 있었다. 갈암 이 선생을 찾아가 배알하고 많은 학문적 요결을 전수받았으니, 문하에서 같이 문행을 수업하는 자들이 더 배울 것이 없는 자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다시 종숙 우헌공(愚軒公) 헌징(獻徵)에게 나아가 수학하였는데 이때도 공을 수제자로 추대하였다.
윤섭(尹涉, 1550~1624)은 지보면 신충리 출신이다. 자는 경즙(景楫), 호는 죽호(竹湖), 본관은 파평으로, 윤희증(尹希曾)의 둘째 아들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1598년 장례원사평에 올랐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망락당(望洛堂)을 짓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이웃을 돕는 데에 전심전력을 하였다. 성격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인자하였다. 어느 날 한 어부가 신풍리 윤섭의 집으로 찾아와서 자라를 사라고 하였다. 윤섭은 처음 보는 자라를 불쌍히 여겨, 사서 즉시 1.5km 정도 떨어진 낙동강에 돌려보냈다. 낙동강변 갯밭에 그해 조를 재배하였는데, 조가 익어갈 무렵인 9월에 큰 홍수가 나서 강이 범람하였다. 그러나 윤섭의 조밭만은 자라의 새끼들이 조의 이삭마다 까맣게 붙어서 흙탕물의 피해를 막아주었다고 한다. 살려준 자라가 은혜를 갚았다는 것이다.
박종린(朴從鱗, 1496~1553)은 용문면 상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자룡(子龍), 본관은 함양이다. 박눌(朴訥)의 다섯째 아들로, 금당실 사람 문숙손(文叔孫)의 사위다.
1516년(중종 11)에 진사가 되고, 1532년(중종 27)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문관검열로 옮기고, 승정원주서에 기용되었다. 그리고 홍문관에 들어가 정자, 박사(1534년), 수찬(1535년)으로 승진을 거듭하였다.
박종린은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다.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그리고 박종린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기에 1533년에는 아버지가 병조참판에 추증되기도 하였다. 박종린은 경연의 시독관으로서 중종 임금께 사림파의 입장을 건의하여 허락을 받아 낼 만큼 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1537년(중종 32) 1월 21일에 박종린이 임금께 아뢰기를 “궁궐의 일이 밖으로 흘러나가는 사례가 많은데, 이는 궁궐의 규율이 엄하지 않은 소치라고 생각됩니다. 또 제가 듣기로는 15일에 어떤 사람이 개성의 어느 절에서 큰 불교 행사를 하였다 하는데, 이도 단속이 해이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또 사대부 집에서 무당이 거리낌 없이 성행하니, 이런 일들은 엄하게 다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고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아뢴 말이 지극히 마땅하다”고 하였다.
어려서부터 어질고 총명해서 항상 시?서?예?악에 대한 공부에 힘썼으며,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었다. 그러므로 음률을 잘 이해하게 되어 동방 아악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희령군은 군신 간이면서 부자간인 태종대왕에게 더욱 총애를 받게 되어 평생 보배로 아끼던 거문고를 하사 받는 은총을 누렸다. 희령군은 본래 자연을 사랑하고 부귀에 관심이 없어 서울 남쪽 율현리(栗峴里)에 거처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하며 화초 기르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양녕?효령 두 대군과 우애가 더욱 돈독하여 양녕대군의 세자위 사양에도 희령군의 협찬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세종대왕이 희령군과 정인지?권제?안지 등에게 명하여 『용비어천가』를 짓게 하여 조정의 악장으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에 희령군으로 봉해졌고, 1453년(단종 1) 당시 권문세가인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희령군에게 내려 주라”고 호조에 전지(傳旨)하였다.
만년에는 동대문 밖 왕강동(旺崗洞, 현 창신동) 사저에서 독서와 음악을 즐기는 가운데 어사금을 항상 즐겼다. 평생 겸허한 마음으로 살다 세상을 마치니,
이 집이 곧 양녕대군의 집으로 중년에 양녕대군이 사직동으로 이사한 후 희령군에게 물려준 것이다. 고종 때 현록대부 영종정경으로 추증되었고, 시호는 이정(夷靖)이다.
본관은 의성(義城), 호는 맹암(孟巖)이다.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고려전서로 태조 을해에 등과하여 수군절제사, 안무사, 병조참판을 지내고 추충분의익대공신(追忠奮義翊大功臣)으로 녹훈되고 좌찬성을 지냈다.
1394년(태조 3) 경기우도수군 첨절제사로 재직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이듬해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중요한 실책을 범해 1397년 파직되어 옹진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났다.
1400년(정종 2)에 지삼군부사(知三軍府事)로 있을 때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하고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있을 때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포로로 잡은 공으로 태종대왕으로부터 표리(表裏, 겉과 속의 옷감)를 하사 받았다.
이후 은퇴하여 장단(長湍)의 맹동(孟洞)에 은거하다 죽었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작되었고, 박포(朴苞)의 난 때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왕을 호위한 공으로 사후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전라도 장성(長城)의 학림서원(鶴林書院)에 배향되었는데 1868년(고종 5) 대원군에 의해 철폐되었다. 시호는 양소(良昭)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1576년(선조 9)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박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은계도찰방 등을 지내고, 고령현감으로 나가 선정비를 남겼다. 그 후 평안도 도사, 형조정랑, 금산(현 김천)군수를 거쳐 강원도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경산 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현령으로 나가 굶주린 백성에게 봉급까지 줄 정도로 정성을 쏟았다. 그뿐 아니라 공평한 일 처리, 충효 사상 고취, 영농 방법 지도 등을 통해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사가 불러 책 제목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이열도가 이르기를 “사사로운 책 제목을 쓰기 위해 임지를 떠나게 함은 모욕적인 처사입니다”고 거절하며 그 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563년에 내성천의 절벽 위에 ‘선몽대(仙夢臺)’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여러 번 벼슬에 불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덕창은 서애 류성룡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천부적인 품성과 재질이 남보다 빼어나고, 큰 인물이 될 만한 풍도를 보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칭찬과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선조 때 약관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판관을 지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백의호가(白衣扈駕)하여 충성을 바쳤고, 난 후에 벼슬이 내자시정(內資寺正)에 이르렀을 때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임진왜란으로 지리멸렬되고 난 후 수습이 복잡다단하였을 당시 충효를 모두 갖춘 뛰어난 인물로 추앙받던 이덕창이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많은 사람이 애통해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박문도는 경제적으로 풍족했지만 검소한 생활을 하면서 불우한 이웃을 돕거나 집안 후손의 교육에 힘을 쏟았다. 그는 늙어서도 따뜻한 옷을 입지 않고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와 같은 옷을 입었으며, 맛난 음식을 먹지 아니하고 집이 누추해도 고치지 않았다.
경상도 안렴사로 파견된 박문수(朴文秀)가 그의 집에 왔다 대들보에 부딪쳐 갓이 부서지자 “부자가 되면 집이 윤택해진다는데 어찌해서 그대의 집은 이다지도 낮은고?” 하며 감탄했다는 이야기는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한 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평소 친분이 있던 헌납(獻納) 이달의(李達意)의 집에 갔다 환곡(還穀) 100석을 몰래 갚아주었고, 흉년이 들면 재물을 내어 백성을 구휼해서 예천 일대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은혜를 입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