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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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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에서 5번 국도를 따라 대구 방향으로 가다보면 고운사로 가는 길이 나오면서 마을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 마을에 한산이씨 종택이 있다.
멀리 황학산에서 근원하여 의성 옥산을 거처 80리를 누벼 내린, 이름도 예쁜 미천의 살진 냇물이 마을을 안아 굽이치고, 들녘 저편 서남쪽에는 오산, 동남쪽에는 향로봉의 수려한 연맥이 그림처럼 에워 둘러 안동에서도 풍광이 아름답기로 손꼽히는 마을이다.
종택은 암벽을 병풍처럼 두른 대석산 남쪽 기슭을 배경으로 광활한 들녘 한 복판에 자리하고 있다.
건물은 서쪽을 바라보는 전형적인 口자 기와집으로 팔작지붕에 홑처마 기와집이다. 원래는 행랑채가 건물 정면인 서쪽에 있었으나 지금은 남쪽에 있다. 그리고 건물 오른쪽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사당이 있다.
대산종가가 위치하고 있는 이 마을은 한산이씨와 대구서씨 동성 마을로 전통 고가가 많다.
본래 마을의 문중 어른들이 자제의 교육을 위해 마을 뒤 대석산 절벽 아래 서당을 지었는데, 이상정이 고향으로 돌아와 대산서당이라 하고 학문에 깊이 심취하여 후진을 가르쳤다. 대산서당이라고 한 것은 대석산에서 취했고 아울러 선생의 아호도 대산으로 했다.
이 건물은 출입 대문 2곳을 제외하고 사방으로 자연석 기단을 쌓았는데 사랑채 사랑방과 마루 부분의 기단이 가장 높고, 그 다음으로 안채 안방과 큰 마루 및 건넛방 부분의 기단이 다음으로 높다.
안채는 안방과 큰 마루로 구성되어 있고, 사랑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사랑채 오른쪽에는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다. 사당 안에는 대산 선생 불천위와 4대조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고려시대 문신 이색과 그의 10대손 이홍조를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1771년(영조 47)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2년에 후손들이 복원하였다. 1976년 서원으로 승격하였으며, 경상북도 기념물 제43호로 지정되어 있다.
서원 내에는 정면 3칸 규모의 숭덕사, 10칸의 명교당, 각각 3칸의 동재와 서재, 정면 2칸의 전사청, 정문, 삼문, 15칸의 주소 등의 건물이 규범에 맞추어 질서 있게 배치되어 있다.
서원에는 『목은문집』 등 서적 100여 권이 보관되어 있으며, 숭덕사에는 이색 영정이 보관되어 있다.
목은 이색은 고려 말의 대학자였으며, 그의 후손 이홍조는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던 유학자이다.
타양서원은 1742년(영조 1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창건되어 정평공 손홍량과 상촌 김자수, 파산 유중엄의 위패를 모시고 그들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 있다.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에 의해 훼철되어 서원이 폐쇄되자 그 유적지인 송리 뒷산에 단을 설치하여 향사를 지내왔다. 그 후 1948년 다시 지방 유림과 자손들이 발의하여 다시 세워진 후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서원 내의 건물로는 6칸의 상현사, 10칸의 성경당, 정면 2칸의 전사청, 3칸의 동재, 대문, 주소 등이 있다.
손홍량은 공민왕의 몽진을 맞이하였고, 김자수는 효행이 뛰어났으며, 유중엄은 학문에 깊이가 있는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안동부의 속현인 일직현의 소호리 일대에는 한산이씨와 달성서씨(대구서씨)가 대대로 살아온 곳이다.
붉은 암벽이 병풍을 두른 듯한 대석산 남쪽 기슭을 배경으로 하여 앞으로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고, 멀리 황학산에서 발원하여 의성의 옥산을 거쳐 80리를 흘러내린 미천이 마을을 감싸 흐르고 있다.
1767년 이황의 제자인 대산 이상정이 대석산 줄기인 제월봉과 미천이 만나는 절벽 위에 서실 세 칸을 지어 고산정사라 이름 짓고 이곳 풍경을 읊은 고산잡영을 지었다.
고산칠곡이란 명칭은 이 칠곡시에서 연유된 것인데 미천이 고산정사를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7곱 구비를 노래한 것이다. 7곱 구비의 계곡과 함께 소호헌, 수옥정, 밀암재사 등의 유적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건물은 1792년(정조 16)에 권조의 할아버지 권보를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수곡종택이다. 옆에 있는 별당에는 일지재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풍산에서 하회마을로 가는 길목의 오른쪽에 안동권씨 집성촌인 가일마을에 있다. 중요민속자료 제176호로 지정된 이 종택은 안채와 새 사랑채인 일지재로 구성되어 있다.
행랑채의 오른쪽에 낸 대문을 들어서면 넓은 사랑마당을 건너서 사랑채와 그 뒤의 안채가 튼 口자를 이루며 남서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사랑마당 왼쪽에는 일지재가 남향하여 있고, 안채의 뒤쪽 약간 높은 터에 사당이 있다.
안채는 口자형으로 안마당쪽을 향한 4칸 중 오른쪽 2칸은 전면이 개방된 안대청이고 왼쪽 2칸은 통칸 안방이다. 일지재는 겹집으로 앞줄의 우측 2칸은 개방된 마루를 돌려 깔았고 좌측의 온돌방은 마루쪽으로 큰 들문을 달아 시원스레 개방하였다.
안동시 풍천면 가곡(가일)마을에 있는 이 집은 조선 초기의 문신 권주의 옛집이다.
권주는 경상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1482년(성종 13) 승정원주서로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들고 갔다는 이유로 1504년(연산군 11) 갑자사화 때 파직당하고 살해되었다. 그가 죽자 가족들은 예천으로 이주하여 이곳은 빈집으로 방치되었다.
그 뒤 18세기 중엽부터 후손들이 다시 들어와 살게 되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150여 년 전에 다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현재 이 집은 시습재란 당호를 쓰는 6칸의 큰 집으로 口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간소한 구조를 하고 있는 포집이 많이 간략화 된 익공집으로서, 대청의 대량을 받친 주두에는 초각한 양봉을 끼워서 의장적 효과를 나타내었다. 안채 북동쪽에는 사당이 있다.
유성룡의 호인 서애는 하회마을의 서쪽 화천 건너에 있는 벼랑이고, 그 위에 상봉정이 있다.
먼저 양진당과 충효당을 지나 남산을 바라보면서 똑바로 길로 나오면 화천과 만나게 되고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들면 커다란 느티나무와 마주한다. 이 고목과 마주하여 강을 건너다보면 산기슭에 정자가 보이는데 이 정자가 상봉정이다.
서애 유성룡은 이곳을 흡사 봉이 하늘을 나는 형국이라 하여 상봉대로 이름 짓고, 정사를 지으려 하였으나 재력이 없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지명을 자호로 삼았다.
그 뒤, 겸암 유운룡의 증손으로 현감을 지낸 회당 유세철이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상봉정을 세웠다.
청성서원은 조선중기 명종 때의 학자인 송암 권호문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1608년(선조 41) 사림의 발의로 연어헌지에 창건하여 1612년(광해군 4)에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오다가 1767년(영조 43) 안동시 풍산읍 막곡리로 옮겨지었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1909년 다시 지어서 매년 2월과 8월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3호로 지정되었다. 강당, 동서재, 정도문, 청풍사, 전사청, 신문 등 모두 7동의 건물이 배치되어있다.
권호문은 벼슬길에 마음을 접고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여 이름을 날린 유학자이다.
석문정사는 1587년(선조 20)에 학봉 김성일이 지은 정자이다.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청성산 중턱 전망 좋은 곳에 동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김성일은 자연 경관이 뛰어난 이곳에서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였다.
경치 좋은 곳에서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정자와 정사의 기능을 함께 갖고 있다. 그래서 인지 ‘석문정’과 ‘석문정사’란 현판이 각기 대청 내부와 바깥쪽 도리에 걸려 있다.
당호는 건물 서쪽에 마주보고 서 있는 바위 둘이 마치 석문처럼 보이는 데서 비롯되었다 한다.
건물 자리와 사방으로 거닐 수 있을 정도만큼만 고른 좁은 대지에 ㄴ자형으로 앉혔다.
낙동강 쪽으로 시야가 트여져 있는 정면 좌우측에 각기 2칸 온돌방과 4칸 대청을 배열하고, 이 온돌방 뒤편에 돌출된 온돌방 1칸을 더 두었다.
연어헌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송암 권호문이 자연과 벗하며 살았던 유서 깊은 정자이다. 앞쪽에 한글로 쓴 연어헌 현판이 하나 더 있으며 내부에는 무민재, 유정재 등의 현판과 시판이 걸려 있다.
청성산 기슭에 낙동강을 굽어보며 자리잡고 있다. 연어란 솔개가 하늘로 날아 오르거나 물고기가 연못에서 뛰어 오르는 것이 다 진리의 작용이라는 말에서 따왔다.
당호는 주세붕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건물은 1958년에 다시 지은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중앙에 2칸의 마루를 두고 좌우측에 각각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누각 아래의 기둥을 약간 길게 하여 누각식 정자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권호문의 본관은 안동이며 이황의 문인으로 벼슬길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던 유학자이다.
파산정은 안동시 풍천면의 낙동강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파산 유중엄의 정자이다.
유중엄은 1564년(명종 19)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학생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고자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34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길을 가는 사람마다 그곳을 가리키며 애석해 하던 것을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정자를 짓고 파산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아주 단출하다.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주위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처음에 1802년(순조 2) 10월에 봉암사를 창건하고 남응원, 남융달, 남급, 남천한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일에 제사를 지내 오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28년에 강당과 주사를 다시 지었고, 1962년에 유림의 발의로 사당을 세웠다. 이때에 사당 6칸과 문간 3칸, 전사청 2칸 등의 건물을 완성하였다.
1964년에 회의를 열어 봉암서원으로 회복하여 남응원을 중심에 모시고 남융달, 남급, 남천한을 배향하였다. 주향으로 모셔진 남응원은 영양인으로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한 유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서원의 건물 구성은 사당인 상현사, 강당인 람휘당, 숭덕재, 광업재, 전사청, 고직사로 이루어져 있다.
병산서원은 원래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이 그 전신인데, 1572년(선조 5) 서애 유성룡이 지금의 병산으로 옮겨 놓았다.
1604년(선조 37) 서애가 죽자 후학들이 1614년(광해군 6) 존덕사를 세워 그의 위패를 모시고 병산서원으로 개칭하였다. 그 후, 철종 때 현판을 내려받아 위치를 굳혔다.
서원은 화산의 동남쪽 경사지에 남향하여 낙동강 건너의 병산 절벽을 바라보고 있다. 경사지 아래쪽의 외삼문인 복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연못이 있고 건너편에 높은 석축이 있는데 이 석축의 계단을 오르면 보기 드물게 큰 만대루가 동서로 길게 놓여 있다.
그 밑을 지나 계단을 다시 오르면 마당 건너편에 강당인 입교당과 그 앞 양측에 동·서재가 마주보고 있는 교육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동재 뒤편 담장 밖에는 주소인 口자형 주택이 자리잡고 있다.
병산서원의 복례문을 지나면 거대한 규모의 누각이 앞에 서 있는데 바로 만대루이다.
만대루의 만대는 두보의 시 「백제성루」에 나오는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 만하니.”에서 따온 말이다.
낙동강을 향해 열려 있는 만대루는 서원 주변의 경치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인 입교당과 마주보고 있으며, 유생들이 행사 때 한자리에 모였던 대강당의 역할을 하였다.
7칸의 단순한 이 건물은 병산서원의 집합적 질서의 묘미가 함축되어 있다. 만대루의 기둥들은 주변 경관을 수직적으로 분절시켜 한 폭 한 폭이 병풍이 된 듯 보여주고 있다.
중앙 마당을 감싸는 입교당, 동재·서재 그리고 외부로 열려 있는 만대루의 시각적 구성은 외부에서는 폐쇄적인, 내부에서는 개방적인 서원 건축의 특징을 나타낸다.
병산서원의 입교당은 서원의 중심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 명칭은 숭교당이며, 명륜당으로도 불렸다.
입교당은 교육 건물의 권위를 살려서 높직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고, 좌우에 과장될 정도로 커다란 아궁이가 뚫려 있다.
그리고 일반적인 서원 강당의 구성을 따라서 가운데 대청마루가 놓이고 양쪽에 온돌방이 놓여 있다. 동쪽방인 명성재는 원장실에 해당하고, 서쪽방인 경의재는 교무실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서원 교육은 철저하게 자습 위주였고, 주요한 수업은 보름에 한 번씩 열리는 강회에서 구술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바로 이 구술시험이 열리는 공간이 강당의 대청마루이다.
이곳 입교당의 마루에 앉아 있으면 좌우의 동재·서재가 한눈에 들어오고 정면으로는 만대루의 기둥 사이로 병산절벽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체화정은 진사 이민적이 효종 때 학문을 닦기 위해 건립한 정자이다. 그 후 순조로부터 효자 기념의 정려비를 받았던 이한오가 노모를 이곳에 모셔 효도하던 곳이라 한다.
정자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다락집이다. 일반적으로 방 앞쪽에 툇마루를 두는 경우 칸 사이를 방보다 작게 잡는 것이 일반적인 형식이라면 여기서는 기둥 사이를 똑같은 넓이로 잡아 3칸 마루를 들이고, 뒤쪽에 온돌방 1칸을 두면서 좌우 옆 칸에 마루방을 들인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사면엔 계자난간을 둘러 앞쪽의 연못을 바라보면서 여유를 즐기도록 배려하였는데, 이 인공 연못은 방장, 봉래, 영주의 세 신선을 상징하는 세 개의 섬을 두어 정자와 잘 어울린다.
전체적으로 건립 당시의 형태가 잘 유지되고 있으며 특히 연못과 정자의 구성은 조경적으로도 중요한 가치가 있다.
서간정사는 병자호란 때 화의를 반대하며 끝까지 절개를 지킨 청음 김상헌을 기리기 위하여 1669년(현종 10)에 지어져 김상헌을 제사지냈으며, 그 후 1786년(정조 10)에 서간사로 사액되었다.
현재는 강당만이 남아 있으며, 서간정사 조금 위쪽에 청음 김상헌 유허비와 비각이 있다. 이 비와 비각은 김상헌의 7대손인 김학순이 1830년(순조 30)에 세웠다. 이 비는 거대한 둥근 바위(빗집바우) 위에 세워져 있는데, 바위 정면에 ‘목석거(木石居)’라고 새겨져 있다.
김상헌은 조선 인조와 효종 때의 선비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하고 끝까지 싸움을 주자앟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안동으로 은퇴하였다. 이후 식음을 전폐하고 자결을 기도하다가 실패한 뒤 학가산에 들어가서 두문불출하였다.
풍산읍에서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오른편으로 아늑하게 자리잡은 마을이 소산마을이다. 소산리의 중심은 바로 큰마로 불리워지는 곳으로 안동 김씨의 집성촌이다.
이 마을에 조선 세종 때에 비안현감을 지낸 비안공 김삼근의 옛집이 있다. 돈소당이라는 당호보다 비안공에 의하여 처음 지은 집이라 해서 비안공구택이라 부르며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11호로 지난 1989년에 지정되었다.
돈소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자형 평면을 갖추고 있다. 정침의 전면은 사랑채와 중문이 자리잡고 뒷편에 안채가 배치되고 좌우에 보조건물을 연결한 구조이다. 자연석으로 높은 축대를 쌓고 축대의 가운데에 계단을 설치한 후 정침을 앉혔다.
돈소당이란 현판은 사랑채에 걸려 있고, 그 옆에 비안공구택이라는 현판을 잇대어 걸었다.
소산의 옛 이름은 금산촌이다. 병자호란 때 청음 김상헌 선생이 낙향하여 은거할 때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소요산의 이름을 따서 소산으로 고쳤다고 전한다. 검소하고 깨끗한 선생의 성품이 마을 곳곳에 깃들어 있는 곳이다.
동야고택은 안동김씨 19대손 김중안이 지었다고 하나 건축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후손인 동야 김양근의 호를 따서 집이름도 동야고택이라 불렀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93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이 건물은 낮은 앞마당에 2단의 높은 축대를 쌓고 그 위에 ‘一’ 자형의 사랑채와 사랑채 뒤에 ‘ㄷ’ 자형의 안채를 배치시켜 튼 口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안채에 사랑채의 기능이 남아 있고 큰사랑방이 있는 사랑채도 소박한 형태를 간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