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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국학진흥원

한국국학진흥원 - 유교넷 http://www.ugyo.net

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 제목
    선성현 객사(宣城縣 客舍)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선성현은 경상북도 예안의 옛 지명으로 예안군은 1913년 안동군에 편입되었다. 이 객사는 1712년(숙종 38년) 현감 김성유가 고쳐 지은 一자형 건물이다. 1976년 안동댐 건설로 지역이 수몰되자, 안동군 도산면 서부동에서 지금의 성곡동 민속촌으로 옮겨왔다. 원래는 도산초등학교의 교무실 등으로 사용되어 왔었다. 객사의 평면은 중앙에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주사를 배치하고 양옆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익사를 연결해 지었다. 주사의 맞배지붕은 양 익사의 지붕보다 한 층 높은 솟을지붕이다. 새가 머리를 들고 날개를 펴고 있는 듯 만들어진 전형적인 객사 건물로 왕의 전패를 모시고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서 예를 갖추었다. 양옆의 익사는 사신이나 귀한 손님의 숙소로 개방하였다.
  • 제목
    흥해배씨 임연재종가(興海裵氏 臨淵齋宗家)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동에서 영덕 방면의 국도를 따라 가다 산 쪽으로 꺾어져 들어간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흥해배씨 임연재종택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1558년(명종 13) 임연재 배용길이 건립한 것으로 안동댐 수몰로 1973년 12월에 안동군 예안면 도목동에서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종택의 왼쪽에는 역시 수몰로 인해 1989년 임동 지례에서 이곳으로 옮겨온 고성이씨 지례파종택인 이태형고택이 있다. 임연재종가는 흥해배씨 안동 입향조인 백죽당 배상지의 종택으로 배상지의 8대손인 배용길의 당호를 취해 ‘금역당’으로도 부른다.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몸채와 금역당, 사당 등 3채의 건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대문을 들어서면 생활 공간인 몸채가 있고, 몸채의 왼쪽에 작은 담을 사이에 두고 별당인 금역당이 위치하며, 그 뒤편 높은 축대 위에는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 제목
    안동향교(安東鄕校)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동향교는 고려시대에 건립되어 이 고장의 공교육을 담당했다. 영남지방에서 가장 큰 향교였으며, 대성전은 성균관과 그 규모가 동일했다고 한다. 따라서 정전인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해서 중국의 유학자 21위를 모시고, 동서 양무에 우리나라 명현 18위 등 모두 122위를 봉안하였다. 예전에는 명륜동에 있던 웅장한 건물이었으나 한국전쟁 때 소실된 후 1987년 안동시 송천동의 현 위치에다 복원하였다. 이때에 동서무 제도 없이 중국의 성현과 한국의 명현을 함께 대성전에 모시도록 정하였다. 특히 중국의 다섯 성인을 제외한 현인들에 대해서는 국적 구별 없이 연차에 따랐다는 것이다. 현재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청아루, 주사 등이 있다.
  • 제목
    읍취정(揖翠亭)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읍취정은 조선 중기의 학자인 석문 정영방이 무이산 기슭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안동 8대 경승의 하나인 선어대를 바라보며 고즈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생은 영양 수비에 살다가 안동 송천으로 돌아와 선어대 아래에 정자를 지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시를 짓고 세상을 잊고 노년을 보내려는 뜻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그 후 정자가 황폐해질 때마다 다시 고쳐지었으나 마침내 건물마저 없어지고 말았다. 1980년에 송천파 후손인 정휘양의 주도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영방의 본관은 동래로 우복 정경세의 제자이다. 광해군의 실정을 보고 영양에 은거하여 서석지를 조성하여 살았다. 정자 입구에 모감주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선생의 아들이 영양 연당으로부터 옮겨 심은 것이라 전한다.
  • 제목
    역동서원(易東書院)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동지방에서 가장 먼저 창건된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 3)에 지방 유림의 공동의견으로 역동 우탁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곳이다. 1684년(숙종 10)에 ‘역동’이라는 현판이 나라에서 내려져 선현 제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 현 위치에 복원하였다. 서원의 옛터는 낙동강 상류의 예안면 부포리 오담이었으나 안동댐의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는 송천동 안동대학교 안에 옮겨져 있다. 대개 서원의 명칭은 지역명이나 그 명현의 호를 사용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경우에는 퇴계 이황이 우탁이 주역을 처음 연구하여 안동에서 가르친 것을 기념한 것이다. 경내의 건물로 상현사, 신문, 명교당, 동재, 서재, 장서각, 전사청, 주소 등이 남아 있다.
  • 제목
    임천서원(臨川書院)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임천서원은 1607년(선조 40)에 지방 유림의 공동 의견으로 학봉 김성일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신 곳이다. 김성일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호는 학봉으로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임진왜란 당시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진주성에서 순국하였다. 1618년(광해군 10)에 ‘임천’이라는 현판이 내려져서 선현 제사와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8년 현 위치인 안동시 송현동 속칭 호암마을에 다시 지었고, 이듬해에 그의 위패를 숭정사에 모셔서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서원의 경내 건물로는 숭정사, 홍교당, 동재, 서재, 신문, 전사청 등이 있다. 강당인 홍교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제목
    경주김씨 추원재(慶州金氏 追遠齋)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추원재는 원래 안동시 월곡면 노산리 마을 어귀의 산길슭에 있는 상촌 김자수의 어머니 일직손씨의 묘소 아래에 있었던 재사이다. 상촌 김자수는 1351년(충정왕 3) 현 안동시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금곡동은 지금도 ‘김씨 골’로 통하는데 그것은 경주김씨들이 세거했기 때문이었다 한다. 김자수는 고려 공민왕 23년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도 관찰사 등 현달한 지위에 올랐으나 나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은둔하였는데, 조선 태종이 형조판서를 제수하여 부르자 아들에게 관을 준비하고 뒤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결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경기도 광주에서 자결하였다. 이 재사는 조선 말기에 지어졌으며, 1973년 12월 안동댐 수몰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이며,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추원재 현판과 김자수의 15대손이 쓴 기문이 걸려 있다.
  • 제목
    원천동 치암고택(遠川洞 恥巖古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치암고택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이에 격분하여 세상을 떠난 이만현의 집이다. 원래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에 있었으나 안동댐 수몰로 현 위치로 옮겨졌다. 또한 이 집은 지방민속자료 제11호로 지정되있다. 이 집은 안채와 사랑채가 口자형 평면으로 구성된 목조 기와집으로 안채 지붕보다 사랑채 지붕이 더 높은 것이 특징이다. 사랑채의 왼쪽 지붕은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오른쪽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사랑채의 기단은 자연석을 4단으로 높게 쌓았고, 다른 부분에는 자연석을 3단으로 쌓았다. 안채 대청과 사랑채 누마루는 우물마루이다. 안방 뒤 툇간과 일직선으로 대청 1칸까지 쌀뒤주가 있었으나 옮길 당시에 뒤주를 없앴다. 대문과 사랑채 정면에는 치암고택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 제목
    토계동 향산고택(土溪洞 響山古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향산고택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한일합방의 울분을 단식을 통해 항의하다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옛 집이다. 지방민속자료 제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 안동군 도산면 토계동에 있던 것을 안동댐 수몰로 1976년 지금의 자리로 이전하였다. 1986년 3월에는 한 집안 3대의 독립유공을 기려 ‘삼대독립운동가문’으로 지정하였다. 이 가옥은 一자형의 사랑채와 ㄷ자형의 안채로 이루어진 口자형 집이다. 사랑채는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지붕 옆에 바람을 막기 위한 풍판을 달았는데 일반 주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다. 안채 양쪽에 방 전면에 폭이 60㎝되는 마루를 둔 것 또한 독특하다. 사랑채 정면에 향산고택 현판이 걸려 있다.
  • 제목
    태사묘(太師廟)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태사묘는 안동시 중심부인 북문동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고려 개국 공신인 김선평, 권행, 장길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이 세 사람은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과 한판 승부(병산전투)를 벌릴 때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지역의 대표적인 호족들이었다. 이들의 활약으로 안동은 고창군에서 안동부로 승격되었다. 1481년(성종 12)에 관찰사 김자행이 사당을 세우는 터전을 마련했고, 이어서 1540년(중종 35) 안동부사 김광철이 현 위치에 사당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보물각, 주소 등 여러 부속건물이 있다. 특히 보물각에는 삼태사의 유물인 옥관자 외 21점이 보존되어 있다. 이 유물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삼태사가 사용하던 유물로 전해지나 시대가 다른 유물이 함께 있다.
  • 제목
    귀래정(歸來亭)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이 건물은 고성이씨 낙포 이굉선생이 1510년(중종 5)에 지은 정자이다. 1513년(중종 8)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물러나 안동부성 건너편 낙동강이 합쳐지는 경치 좋은 곳에 정자를 짓고 그곳이 도연명의 ‘귀거래사’와 같다하여 이름으로 삼았다 한다. 이중환의 『택리지』에는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귀래정, 임청각, 군자정, 옥연정을 으뜸으로 꼽고 있다. 귀래정에는 주인을 비롯해 이현보, 이우, 이식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 배면 4칸의 T자형 팔작지붕으로 전면 4칸에는 대청마루를 두고 배면은 온돌방을 꾸몄으며, 마루 주위에만 두리기둥을 사용하였을 뿐 그밖에는 모두 각기둥를 사용하였다. 규모가 작고 꾸밈새가 검소하나 앞쪽에 큰 누마루를 두어 별당으로서의 여유와 운치가 있는 정자이다.
  • 제목
    반구정(伴鷗亭)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이 건물은 임청각을 지은 이명의 여섯 째 아들 반구옹 이굉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이다. 처음 세운 때는 1530년대 초기로 추정된다. 당시 안동 유림에서는 이 반구정에서 시회와 향회를 자주 열어 많은 선비가 출입하게 되었고, 유생들 가운데 숙식자가 많아서 동재·서재까지 건축하게 되었다. 여기에다 장판각, 주사까지 건축하며 서원의 강학 공간에 버금가는 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그 후 퇴락하여 빈 터만 있었던 것을 1740년(영조 16)에 중건하였으며, 1945년 정자만 소실되어 1946년에 중건하였다. 현재의 재사는 1905년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반구정은 숙부인 이굉이 건립한 귀래정 동쪽에 있으며, 방형의 토담으로 둘러싸인 일곽은 남향 배치된 반구정 앞에 동재·서재가 놓이고 그 앞에 장판각과 비각이 배치되었다. 재사는 반구정의 동쪽 담 밖에 튼 口자로 남향하여 놓여 있다.
  • 제목
    영호루(映湖樓)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영호루는 진주 촉성루, 밀양 영남루와 더불어 영남 3대 누각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 지어졌으며 원래는 현 위치에서 낙동강 건너편 물가에 있었다. 홍건적의 난 때 안동까지 피난 왔던 고려 공민왕이 개경으로 돌아가서 ‘영호루’라고 쓴 현판 글자를 내려 주었다. 이 현판을 걸기 위하여 1567년 안동 판관 신자전이 누각의 규모를 더욱 확장하여 지었는데, 누각이 강물에 너무 가까이 있어 홍수로 인해 떠내려가고 다시 짓기를 몇 번이나 거듭하다가 1934년 갑술년 홍수 때는 건물이 완전히 떠내려갔다. 현재의 영호루는 1970년에 철근 콘크리트로 건축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한옥 누각이다. 일찍이 우탁, 정도전, 정몽주, 권근, 김종직, 이황 등 당대의 대표적 문인이 영호루의 경관을 칭송하여 시를 남겼다.
  • 제목
    광산김씨 유일재고택(光山金氏 惟一齋古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의 나지막한 산비탈에 지붕이 말끔하게 새로 단장된 고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집이 광산김씨 유일재공파의 종택인 유일재이다. 산을 등진 채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남서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재 이 집은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1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당호는 김언기의 호를 붙인 것이며 『서경』의 “오로지 한결 같다.”는 뜻에서 따온 말이다. 1700년대 말에 건축된 이 종택은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잘 보여준다. 정침은 사랑채와 행랑채를 좌우 익사보다 1칸 밖으로 빼내어 날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양 날개에 마루를 깔아 주변 정경을 음미할 수 있도록 배치하였다. 건축물의 구성은 전형적인 口자형의 정침과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안동의 다른 건축물과는 반대로 배치하고 있는 특징이 있다. 사랑채가 정침의 왼편에, 행랑채가 오른편에 배치되고, 안방과 부엌이 정침의 오른쪽에 배치된 점 등이다. 특히 사당도 정침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자리 잡고 있다.
  • 제목
    영양남씨 남흥재사(英陽南氏 南興齋舍)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와룡면 소재지 못 미처 오른쪽으로 놓인 다리를 지나 우회전하여 가면 세곡마을이 있고, 이곳에서 조금 더 가면 남흥재사가 있다.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8호로 지정된 재사는 남흥사 법당 건물을 개조한 것으로 전한다. 건물은 고려시대 말 전리판서를 지낸 남휘주와 참판 남민생 부자의 묘를 수호하고 제사를 준비하기 위하여 세운 재사이다. 1500년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며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건물로 오른쪽의 대청을 누각식으로 꾸몄다. 당초 사찰의 건물을 활용한 관계로 일반 口자 형태와는 구조적으로 약간의 변형이 있다. 조선 전기의 건축 수법을 볼 수 있는 건물이다. 내부에는 원모루의 현판이 걸려 있다.
  • 제목
    안동권씨 부정공파종택(安東權氏 副正公派宗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이 건물은 와룡면 가야리 늪실에 있는 안동권씨 부정공파의 종택이다. 안동권씨 부정공파는 안동권씨의 14개 지파 가운데 하나로 권통의를 파조로 하고 있다. 당초 부정공파는 안동부 내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세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권자신이 성삼문 등과 더불어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로 돌아가고 처형되자, 안동을 떠나 풍기 동두들에 옮겨 살았는데 임진왜란 때 종손 권익창이 현재의 자리인 늪실에 정착하였다. 종택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口자형 건물로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안채에는 4칸의 대청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으며 사랑채는 전면 좌측에 배치하였는데 2칸 방과 1칸의 마루를 두었다.
  • 제목
    광산김씨 긍구당고택(光山金氏 肯構堂古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안동 시내에서 퇴계로를 타고 예안의 계실마을로 들어가 마을길을 따라가면 길 오른쪽의 나지막한 산자락에 동남향으로 자리 잡은 광산김씨 긍구당고택이 보인다. 이 집의 당호는 조선 후기의 학자인 김세환의 아호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 ‘긍구’란 “조상들이 이루어 놓은 훌륭한 업적을 소홀히 하지 말고 길이길이 이어 받으라.”는 『서경』의 의미를 담고 있다. 긍구당고택은 정침과 사당, 방앗간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침을 가운데 두고 그 동쪽에 사당이, 정침의 서쪽에 방앗간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침은 평면이 口자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는 전면에 툇마루를 두고 좌로부터 사랑방과 마루를 두었으며, 마루 바로 뒤에 책방을 두어 학문을 중시하는 반가의 면모를 보인다. 정침의 동쪽에 자리한 사당은 정남향 해 있으며 맞배지붕집이다. 내부에는 감실을 두고 4대의 신주를 모시고 있다.
  • 제목
    봉화금씨 성성재종택(奉化琴氏 惺惺齋宗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성성재종택은 예안면 부포리에 있다. 부포마을은 마을 뒤로 낮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쳐 있고, 앞에는 물이 있는 전형적인 배산임수형 마을이다. 마을 중턱쯤에 있는 성재와 성성재종택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앞뒤로 자리 잡고 있다. 성성재와 성재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알려진 금난수의 호로 성재는 금난수의 정자 이름이며, 성성재는 당호이다. 금난수 25세 때에 지금의 종택 아래 있는 동계 가에 작은 정자를 짓고 학문에 힘썼는데, 퇴계 선생이 친필로 ‘성재’라는 현판을 내려주셨다고 한다. 1992년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64호로 지정된 성성재종택은 口자 집과 사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口자 집은 팔작지붕을 서로 연결한 구조로 안채와 바깥채로 나누어진다. 사당은 성성재 오른쪽 산비탈을 이용하여 지었는데 전면에 퇴를 내었으며,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았다. 성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좌우에 쪽마루를 내었다.
  • 제목
    부라원루(浮羅院樓)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부라원루는 전통 우편통신 제도인 역원제도에 의하여 예안현에 속했던 부라원의 누각으로 원사는 없어지고 누각만 남아 있다. 영가지에 의하면 안동지방에는 30개에 가까운 원이 있었다고 하나 당시의 누각이 현존하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원래는 부포동 마을 앞 들판에 위치하여 찾아들기 편한 건물이었으나 안동댐 건설로 1976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지었다.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이 한석봉의 글씨인 것으로 보아 1600년을 전후해 건립한 것으로 보인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2층은 우물마루를 깐 대청마루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누각 아래의 기둥은 다듬지 않은 다각형 기둥이고 상층기둥은 두리기둥으로 되어있다. 칸살을 넓게 잡아 관아건물로서의 위엄을 가졌으며 기둥 위는 전혀 장식을 하지 않았다.
  • 제목
    광산김씨 예안파종택(光山金氏 禮安派宗宅)
    제작연도
    2007-10-30
    해제
    와룡면 사무소에서 퇴계로를 타고 도산서원 가는 길로 가다보면 산중턱에 수십 채의 기와집이 남향으로 자리 잡은 마을이 보이는데, 이 곳이 바로 ‘광산 김씨 오천유적지’이다. 이곳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광산 김씨 예안파가 약 21대에 걸쳐 600여년 동안 세거하던 고장으로 세칭 ‘오천군자리’라 불러온 문화재단지이다. 이 단지 내에 있는 옛 건축물은 문중에서 대대로 유지 보존하여 온 종택, 사당, 정자, 강당 등으로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한 수몰로 원지점으로부터 약 2km떨어진 이곳으로 한꺼번에 옮겨졌다. 후조당은 광산김씨 예안파 종택에 딸린 별당으로 김부필 선생의 당호이다. 중요민속자료 제227호로 지정된 별당인 후조당은 평면이 ㄱ자형을 이루는 건물로 배면이 4칸이며, 좌우 측면이 2칸과 4칸이다. 잡석기단 위에 네모 기둥을 세워 지은 겹처마 팔작지붕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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