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자료들을 멀티미디어 요소 형태로 개발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에 있는 도계서원의 현판이다. 도계서원은 숙종 35년(1709년)에 옥봉(玉峯) 권위(權暐: 1517~1630)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이다. 고종 5년(1868) 서원철폐령으로 훼손되었다가 1923년 복원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서원 경내에는 권위 선생의 강학 장소였던 만대헌(晩對軒)이 자리하고 있다.
고산정에 걸려 있던 금난수의 시판으로, 제목은 '고산정에서 노닐다(遊孤山)'이다. 이 시의 운에 따라 퇴계가 답시를 쓰기도 했다.
한 해의 가운데에 천지 만물이 모두 돌아오니
사계절이 좋은 흥취는 어긋남이 없구나
붉은 꽃이 다 떨어지면 푸른 녹음 우거지고
노란 낙엽 표표히 떨어진 뒤엔 흰 눈이 날리네
사암(砂巖) 절벽에 바람 일면 겹옷을 입고
긴 냇가에서 비를 만나면 도롱이를 걸치리
낚시 바구니 안에는 따로 풍류가 담기고
취한 채 찬바람 맞으며 밝은 날을 희롱하네
서원에 어떤 경조사가 있을 때 그 지역의 관리나 유지, 선비들이 함께 도움을 더했던 기록이다. 부조한 물품은 돈과 곡식, 무명과 백지 등 다양했다. 그런데 서원 안의 경조사 뿐 아니라 향촌의 경조사를 치를 때에도, 서원을 중심으로 유생과 유지들이 결속하기도 하였다. 이로 볼 때 서원은 단순한 교육 기관만이 아니라 향촌의 친목과 교화의 역할까지 담당했음을 알 수 있다.
한시집(漢詩集) : 우리 나라의 한시를 정선하여 집필한 한시집.
'수진본'이란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 귀중한 책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투건을 넣는 작은 상자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고 해서 건상본(巾箱本)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는 콩알만하다는 뜻으로 두본(豆本)이라 불렀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공부할 수도 있도록 만든 일종의 핸드북이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컨닝 도구로 성행하기도 하여 한 때 국가적으로 제작을 금지하기도 했다.
대학(大學; 수진본): 주희의 『大學章句(대학장구)』를 작게 만든 것.
'수진본'이란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 귀중한 책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투건을 넣는 작은 상자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고 해서 건상본(巾箱本)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는 콩알만하다는 뜻으로 두본(豆本)이라 불렀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공부할 수도 있도록 만든 일종의 핸드북이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컨닝 도구로 성행하기도 하여 한때 국가적으로 제작을 금지하기도 했다.
잠명(箴銘; 수진본) : 중국 송대의 성리학자 장횡거(張橫渠)의 유명한 글 두 편(『서명(西銘)』과 『동명(東銘)』)을 접이식 책자로 만든 것.
'수진본'이란 소매 속에 넣고 다니는 귀중한 책이라는 뜻이다. 중국에서는 두건을 넣는 작은 상자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고 해서 건상본(巾箱本)이라 하였고, 일본에서는 콩알만하다는 뜻으로 두본(豆本)이라 불렀다.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들이 간편하게 휴대하면서 공부할 수도 있도록 만든 일종의 핸드북이다. 중국에서는 이것이 컨닝 도구로 성행하기도 하여 한 때 국가적으로 제작을 금지하기도 했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은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의 문집으로,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 합 30책의 목판본이다.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며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경상북도 예안(禮安)에서 출생하여, 숙부인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전적·호조좌랑·형조좌랑 등을 거쳐 1542년 충청도 암행어사,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이기(李芑)에 의해 삭직되고, 1557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568년에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내고 다음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원집(原集)은 저자의 수록본을 바탕으로 1573년 손자 이안도(李安道)와 문도 우성전(禹性傳)·조목(趙穆) 등이 흩어져 있는 글을 수집하였고‚ 1578년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초고본의 교정이 진행되었다. 1584년 이안도가 죽자 조목이 뒤를 이어 편집을 담당하고 유성룡과 김성일(金誠一)은 교정을 담당하여 1588년에 선사본(繕寫本)을 완성하였다.
『퇴계선생문집(退溪先生文集)』은 퇴계 이황(李滉 ; 1501∼1570)의 문집으로, 원집 49권, 별집, 외집, 연보 4권, 합 30책의 목판본이다.
이황의 자는 경호(景浩), 호는 퇴계(退溪)·도옹(陶翁)·퇴도(退陶)·청량산인(淸凉山人)이며 본관은 진성(眞城)이다. 경상북도 예안(禮安)에서 출생하여, 숙부인 이우에게서 학문을 배웠고, 1523년(중종 18) 성균관에 입학, 1534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전적·호조좌랑·형조좌랑 등을 거쳐 1542년 충청도암행어사, 이듬해 대사성이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때 이기(李芑)에 의해 삭직되고, 1557년 공조판서·예조판서. 1568년에 우찬성을 거쳐 양관대제학을 지내고 다음해 고향에 은퇴, 학문과 교육에 전심하였다.
원집(原集)은 저자의 수록본을 바탕으로 1573년 손자 이안도(李安道)와 문도 우성전(禹性傳)·조목(趙穆) 등이 흩어져 있는 글을 수집하였고‚ 1578년 유성룡(柳成龍)을 중심으로 초고본의 교정이 진행되었다. 1584년 이안도가 죽자 조목이 뒤를 이어 편집을 담당하고 유성룡과 김성일(金誠一)은 교정을 담당하여 1588년에 선사본(繕寫本)을 완성하였다.
『퇴계연보(退溪年譜)』는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인 이황(李滉 ; 1501∼1570)의 연보로 3권 1책의 목판본이다. 판본의 완결(刓缺)에 따라 여러 번 개간 및 중간되었다. 유성룡(柳成龍 ; 1546∼1607)이 편집한 연보를 권1∼2에 수록하고 사후에 문인들과 종유(從遊)들이 지은 제문과 사제문 등을 부록으로 묶어 편집하였다.
연보에는 이황의 교유관계와 문인관계‚ 학문경향 등이 잘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