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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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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수(1545~1594)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인수(仁?). 호는 창암(滄菴) 대구 파동 출생으로 어려서 고모부 백진양(白震陽)에게 의탁하여 어른이 될 때까지 오로지 학문에 힘쓰다. 고모부가 후손 없이 돌아가시자 생활 터전을 이어받아 예천 용궁 무이리에서 살게 되었다.
서애 류성룡의 매부이며 청풍자 정윤목의 장인이다.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사양한채 오로지 선비의 도리를 지키며 학문 연구에 여생을 보냈다. 선조때 한성우윤(漢城友尹)에 증직 되었으며, 무이서당(武夷書堂)에 제향되었다. 후손들이 그를 위해 무이리 소천에 창암정(滄庵亭)을 건립했다.
전원발(?~?) 본관은 용궁(龍宮). 호는 국파(菊坡). 현서 달지(縣西 達池: 聞慶 永順) 출생으로 1315년(충숙 2) 원나라의 괴과(魁科)에 급제하여 금자광록대부 병부상서 겸 집현전태학사(金紫光祿大夫兵部尙書兼集賢殿太學士)에 이르렀다. 고려로 돌아올 때 원나라 황제 순제(順帝)를 하직하면서 ‘고려에서 거두는 세공을 대폭 줄여달라 청하니 순제는 이를 허락하고, 공복(公服) 한 벌을 하사하며 이별을 아쉬워 하였다’ 한다. 귀국하여 축산부원군(竺山府阮君)에 봉해지고, 조선건국 후 명나라에서도 이 예(例)에 따르니 이 공을 치하하여 태조(太祖)는 다시 축산부원군에 봉하였다.
그는 벼슬을 마다하고 고향인 용주서성화천(龍州西省火川)으로 내려와 청원정(淸遠亭)을 짓고 자연을 벗삼아 자적(自適)하였다. 또한 명필이었으니 법주사에 있는 자정국존보명탑비문(慈淨國尊普明塔碑文)이 지금도 남아 있다. 1698년(숙종 24)에 ‘고려 명신으로 원에서 조공의 폐됨을 아뢰어 생령(生靈)을 편찬하게 했다‘하여 고향의 성화천을 소천(蘇川)으로 고치게하였고, 1701년(숙종 2)에 숭덕사(崇德祠)와 전교당(典敎堂)을 짓고 애국심을 기리니 곧 소천서원(蘇川書院)이다.
임귀지(1435~1508) 본관은 장흥(長興). 호는 삼송정(三松亭). 세종조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특히 홍산현감(鴻山縣監)으로 있을 때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그를 기리는 유애비(遺愛碑)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단종(端宗)이 폐위되자 예천 율현(醴泉 栗峴)으로 낙향하여 학문연구에 진력하였다. 상덕사(尙德祠)에 제향되었다.
윤섭(1550~1624) 본관은 파평(波平). 자는 경즙(景楫). 호는 죽호(竹湖) 예천 지보(醴泉 知保) 출신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공으로, 1598년에 장례원 사평(掌隷院 司平)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벼슬에 뜻이 없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망락당(望洛堂)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이웃돕기에 전심 전력하였다.
성품이 너그럽고 두터우며 인자했고 저서로는 칠송정 동유록과 문집2권이 남아있다. 죽호향사(竹湖鄕祠)에 제향되었다.
정윤목(1571~1629)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목여(穆如). 호는 청풍자(淸風子). 약포 정탁(藥圃 鄭琢)의 셋째 아들로써 서애 류성룡(西厓 柳成龍), 한강 정구(寒岡 鄭逑)의 문인이다.
예, 악, 병, 형, 음양, 율력(율력), 백가(백가)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였으며 특히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또 필법이 탁월하여 초서의 명필이라 일컬어졌다. 1616년(광해 8)에 소촌도찰방(召村道察訪)에 보직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에 기강이 문란해짐을 보고 당세에 뜻이 없어 사직과 산수를 벗 삼아 시와 서로 세월을 보냈다.
만년에 용궁 장야평(龍宮 長野坪)에 초려를 짓고 마을의 자제들의 교육하였다. 도정서원(道正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청풍자문집(淸風子文集)이 있다.
정필규(1760~1831)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명응(明應). 호는 노암(魯庵) 약포 정탁(藥圃 鄭琢)의 후손으로 경사(經史)에 능통하고 사마(司馬)로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의 문인이다.
1789년 사마시에 합격했으며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문장과 덕의(德義)로써 당시의 본보기가 되고 만년에 천거되어 혜릉 참봉(惠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 뒤 출사의 뜻을 끊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는데 그 중에 운산 이휘재(雲山 李彙載)가 고제(高弟)로 약포(藥圃)가 퇴계(退溪)의 문인이고 운산이 노암의 문인이니 받은 글 다시 찾아갔다고 한다.
권의(1475~1558)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정암 조광조(靜菴 趙光祖)의 문인이다. 1507년(중종 2)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1509년(중종 4)에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거쳐 의흥 현감(義興 縣監)을 역임하였다.
의흥 현감으로 있을 때 향약을 백성들에게 권장하여 태평성대를 누리기도 하였다. 치사(致仕) 후 용문 제곡(龍門 渚谷)에 터를 잡고 1566년(명종 21) 야옹정(野翁亭)을 짓고 후진양성에 힘써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하였다. 아우 충제 벌(沖齋 撥)과 더불어 금곤옥계(金昆玉季)라 일컬었다.
권욱(1556~1612)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초(景初). 호는 매당(梅堂).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문인이다. 1590년(선조 23)에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에 의병장이 되어 많은 공을 세웠으며 1597년 정유재란 때 두 차례나 “임금이 직접 싸움터에 나아가라는 상소[親征疏]”를 올렸다. 왜란 후 학문과 행실로 천거되어 참봉에 임명되었다가 봉사(봉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어머니가 아프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간병을 하다가 1608년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슬퍼하다 병을 얻어 타계하였다. 봉산서원에 제향되었다.
박종린(1496~1553) 본관은 함양(咸陽). 자는 자용(子龍). 1516년(중종 11) 진사가 되었으며 1532년(중종 2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남상(翰林南床), 홍문과교리, 시강원설서(試講院說書), 이조정랑(吏曹正郞)등을 지냈다. 벼슬에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의 횡포가 심하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도의수양(道義修養)과 학문연구에 전념하며 후진 양성에 일생을 보냈다. 추원사(追遠祠)와 영사정(永思亭)에 제향되었다.
이타(?~1465) 본관은 전주(全州). 시호는 이정(夷靖) 태종의 6남이며 어머니는 숙의 최씨이다. 평소 성품이 온순하고 부드러웠으며 어려서부터 질병으로 조정에 설 수가 없었다. 특히 음악에 조예가 깊어 동방 아악을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자연을 사랑하고 부귀에 관심이 없어서 서울 남쪽 율현리(栗峴里)에 거처하면서 거문고를 타고 독서를 하며 화초기르기를 낙으로 삼았다. 1433년(세종 15)에 이타를 희령군으로 봉하였고, 중한 병을 가엾게 여겨 과전(科田) 1백 결(結)을 주었다. 1452년(단종 즉위) 단종이 호조(戶曹)에 명하여 윤처공(尹處恭)의 집을 주었다. 1465년 7월에 죽었는데 그의 졸기에 따르면 “이정이라고 시호하니, 마음이 편안하며 편안함을 좋아하는것을 이(夷)라하고 부드럽고 곧으며 편안히 살다 죽은 것을 정(靖)이라”한다 하였다. 1792년(정조 16)에 명하여 이정사(夷靖祠)를 짓고 불천위로 모시게 하였다.
권문해(1534~1591)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호원(灝元). 호는 초간(草澗).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인이다. 1560년(명종15)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외직을 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이르고 좌부승지에 이르는 사이 당쟁에 휘말리기도 하였으나 항상 청렴과 정직을 신조로 삼아 처세하였다. 멸사봉공(滅私奉公)하였으며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고, 학문에 진력했다. 마을 뒤켠의 초간수석을 사랑하여 1582년(선조 15)에 초간정사(草澗精舍)를 창건하였다. 저서로는 수천년래의 모든 전적(典籍)을 집대성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20권, 선조일록(先祖日錄), 초간일기(草澗日記), 신묘일기(辛卯日記)34권 등을 남겼다.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김영렬(?~1404)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열자(烈子). 호는 맹암(孟巖) 시호는 양소(良昭). 1394년 고려 전서(典書)로 태조 을해에 등과하여 전서로 있던 중 연해를 노략질하는 왜구를 물리치는 계책을 올려, 경기우도수군첨 절제사가 되었다. 1395년 수군절제사로 발탁되었으며 1397년 실책을 범해 파직 되어 옹진(甕津)으로 유배, 수군에 충군되었다 이듬해 풀려나 1400년에 태종과 회맹(會盟)하여 왕자의 난에 참가해 태종을 왕위에 오르게 한 공으로 1401년에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04년 참판승추부사(參判承樞府事)로 왜선 1척을 노획하고 왜병을 잡는 공으로 태종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받았다. 의성군(義城君)으로 봉해지고 사후 우의정에 증직되었다. 신학림(鶴林), 옥산(玉山), 신천서원(新川書院) 에 제향되었다.
권산해(1403~1456)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덕보(德甫). 호는 죽림(竹林).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1440년(세종 22)에 창덕궁 녹사(錄事) 및 주부(主簿)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단종이 즉위한 후 종부시첨정(宗簿寺僉正)의 벼슬을 하였다. 1455년 단종이 손위(遜位)하고 세조가 즉위하여 찰방(察訪)을 제수하였으나 병들었다 핑계하고 나아가지 아니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주야로 어린임금의 안부를 걱정하던 중 사육신(死六臣)의 비보가 전해지자 북향사배(北向四拜)하고 자결하였다. 이에 세조는 관직을 삭탈하고 자손에게 ‘금고백년(禁錮百年)’의 형을 내렸다. 그 후 1789년(정조 13)에 신원(伸寃)되어 ‘정충각(旌忠閣)’이 내려졌다. 경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과 예천의 노봉서원(魯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이열도(1538~1591) 본관은 진성(眞城). 자는 정가(靜可). 호는 우암(遇岩). 종조부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인이다. 1576년(선조 9)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평안도 도사, 형조정랑(刑曹正郞) 등을 지내고 고령현감으로 부임하였을 때 선정비가 세워졌다. 이후 금산군수를 거쳐 강원도 도사에 임명 되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다신 경산(慶山)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를 추천하니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여 녹봉(祿俸)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나눠 주며 구휼하기에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선몽대(仙夢臺)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이덕창(1569~1616)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숙창(叔昌). 호는 사고(沙皐)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의 문인으로 선조 때 문과급제하여 상주판관을 역임하고, 임진왜란 때 삼종형(三從兄) 이광정(李光庭)을 따라 의병활동을 하여 많은 공을 세우자 특별히 내자사정(內資寺正)에 제수되었다.
이중립(1533~1571)은 지보면 대죽리 사람으로 본관은 월성(月城). 자는 강중(剛中). 호는 구계(九溪)로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에 진사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장의(掌議)로서 10여 년간 근무하면서 요승 보우(妖僧 普雨)를 처형하라고 상소를 올린 곧은 선비이다.
이후 늙은 부모 때문에 사임하고 귀향하여 부모를 모시다 아버지가 1568년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3년 간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병을 얻어 39세의 젊은 나이로 졸하였다. 고향의 사우(祠宇)에 제향되었고 후손들이 그를 기리는 의미에서 구계정(九溪亭)을 지었다.
정탁(1526~1605)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시호는 정간(貞簡). 금당실(龍門面下金谷里)에서 태어나 고사평(醴泉邑高坪里)으로 옮겨 살았다.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친 후 1568년 교리로서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1581, 1589년 두 차례나 명나라에 사절로서 다녀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左贊成)으로 선조를 모시고 의주로 피난을 가 명나라 군사의 내원(來援)에 힘썼으며 이순신(李舜臣)을 백의종군케 하였다. 1600(선조 33)에 좌의정에 올라 영중추부사가 되고 호성공신에 등록되면서 서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연로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고사평에 머물 때 왕이 충훈부(忠勳府)의 화사(畵師)를 보내어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화상축을 하사하였고 죽은 후 위성공신에 등록되고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도정서원(道正書院)과 향현사(鄕賢祠)에 제향되었으며 많은 유품이 남아 정충사(靖忠祠)를 짓고 보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