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국학진흥원은 도난과 훼손으로 멸실위기에 처해 있는 국학자료를 조사·수집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연구·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한국학 전문연구기관입니다.
특히
고문서, 고서, 목판 등 기록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 연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그 일환으로 유교문화와 관련된 기록유산을 DB화하고
문중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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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흥해(興海). 자는 여우(汝友). 호는 임연재(臨淵齋). 백죽당 상지(尙志)의 후손으로 도목촌에서 출생했다.
퇴계의 문인으로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4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을 역임하였다. 1573년(선조 6) 홍문관에 등용되었으며, 풍기군수ㆍ양양부사를 지냈다. 1588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가 큰 흉년을 만나 구황에 힘쓰던 중, 병을 얻고도 민정시찰을 강행하다가 순직하였다.
본관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청계 김진의 넷째 아들로 임하 천전에서 출생하였으며, 퇴계의 큰제자 중 한명이다.
1564년 진사시를 합격하고, 1567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ㆍ대교ㆍ봉교를 역임하였다. 1572년(선조 5)에 사육신 복관 상소를 올렸으며, 1579년 사헌부장령이 되어서는 시사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다. 또 함경도순무어사와 나주목사를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가 되어 정사 황윤길과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했다. 이 때 일본 유학의 원조인 등원성와(藤原惺窩)에게 퇴계학의 진수를 처음 가르쳤다.
귀국 후의 발언 때문에 안방준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파직되었으나,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경상도초유사에 임명되어 곽재우ㆍ김면ㆍ정인홍 등의 의병 활동을 도왔다.
경학ㆍ행의로 이름이 높아 1572년(선조 5) 음보로 전함사별좌가 되고, 인동현감ㆍ한성판관을 거쳐 평시서령을 역임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사복시첨정이 되었고, 이듬해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토적을 소탕하는 공을 세웠고, 1595년 벼슬이 원주목사에 이르렀다.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 관찰사 중영(仲?)의 차자로 퇴계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양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 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대제학을 거쳐, 1590년 우의정에 광국공신 3등으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했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ㆍ권율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하여 평양에 이르러 반대파의 탄핵으로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 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ㆍ경상ㆍ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으며, 이어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 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가 되었다.
1598년 명나라 경략 정응태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 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도학ㆍ문장ㆍ덕행ㆍ글씨가 두루 뛰어났고, 바둑도 아주 잘 두었다고 한다. 안동의 병산서원ㆍ호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서애집』ㆍ『징비록』이 있고, 편저에 『황화집』ㆍ『정충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