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영역 열기

krpia

도움말
도움말 검색 도움말

이용자 주석

KRpia 내의 제품을 연구하는 분들이 함께 공유하면 도움이 될 의견 또는 자료의 출처를 남겨주세요.
※ 개인회원만 이용이 가능하며, 홍보, 타인 비방 등의 글을 등록하실 경우 사전 공지 없이 삭제될 수 있습니다.

  • 작성자
    ab******
    경로
    국역 증보문헌비고 > 본문 > 증보문헌비고 제51권 - 제계고 12 > 부록 씨족 6 > 전씨 > 옥천 전씨
    내용
    沃川全氏 侑玄孫都 ----전유 현손 전욱 -------잘못 번역됨 ----전유 현손 전도--------바른 번역
  • 작성자
    hh******
    경로
    국역 증보문헌비고 > 본문 > 증보문헌비고 제211권 - 학교고 10 > 각도사원 1 > 충청도 > 평택
    내용
    평택의 경우 원문은 없는데 번역문이 있는 것은 어떤 경우인지 설명을 부탁합니다. 휴대폰으로 안내를 받으면 더 좋겠습니다. (010-3***-4*** 강*흔)
  • 작성자
    01*********
    경로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 본문 > 서론
    내용
    훌륭한 자료를 모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 작성자
    ab******
    경로
    국역 증보문헌비고 > 본문 > 증보문헌비고 제51권 - 제계고 12 > 부록 씨족 6 > 전씨 > 옥천 전씨
    내용
    수정요청합니다. 원문은 沃川全氏 侑玄孫都 입니다. 번역문에 전욱으로 나옵니다. 이를 원문에 의거하여 "전도"로 수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작성자
    24********
    경로
    이광수 전집 > 본문 > 李光洙全集 9
    내용
    유세우
  • 작성자
    24********
    경로
    이광수 전집 > 본문 > 李光洙全集 9
    내용
    유세우
  • 작성자
    24********
    경로
    당시삼백수(唐詩三百首) > 본문 > 오언고시(五言古詩)
    내용
    유세우
  • 작성자
    24********
    경로
    근대문학 100년 연구총서 > 본문 > 논문으로 읽는 문학사 3(해방 후 남한 2)
    내용
    유세우
  • 작성자
    qe****
    경로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 > 본문 > 대한계년사 권1 > 갑술년(1874) 고종 11년
    내용
    목차
  • 작성자
    sa*******
    경로
    고려도경(高麗圖經) > 본문 > 간략해제
    내용
    이신비
  • 작성자
    gp******
    경로
    인물 패턴 & 디자인 > 본문 > advertising > promotion > 234. Playland 광고
    내용
    틀니로도 이렇게 할수있순요
  • 작성자
    dl********
    경로
    고려묘지명집성 > 본문 > Ⅱ. 고려 무인정권시대(高麗 武人政權時代) > 124. 왕재(王梓)의 딸 왕씨(王氏) 묘지명
    내용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43세에 미혼으로...
  • 작성자
    je******
    경로
    국어학·언어학 용어사전 > ㄱ > 본문_ㄱ
    내용
    이 사전떡분에 다움이 많이 받습니다.
  • 작성자
    yo********
    경로
    한국과학사 > 본문 > 원시, 고대편 > 제3장 방직, 염색 기술 > 제1절 원시 방직, 염색 기술의 발생, 발전 > 1. 방직기술의 발생, 발전
    내용
    1세단군 황후때부터 양잠을 장려하여 집집마다 실크를 생산하였으므로, 마한사람들은 경금(색경사의 무늬 비단)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변진에서는 폭이 넓은 광폭의 섬세한 세포(광폭세포)가 생산되었다(Park, 2007). 고대한국 국가에서는 신분과 관계없이 일반 평민까지 絲견직물을 입을 정도로 널리 대중화 되고 있지만 중국에서 견직물은 지배계층에서만 입을 수 있었다. 한대의 경제서 '감선론'에 '비단옷은 서민의 경우, 70, 80세가 되어야 겨우 입어볼수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제 선왕과 위 혜왕에게 조언한 맹자의 '인정'조에는 ' 5무되는 집의 밭에 뽕나무를 심게 해서 사람들이 50세가 되면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라, 또 집에 돼지, 개, 닭 등을 키우게 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70세가 되면 고기를 먹을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랫동안 평화롭고 사회가 안전하였던, 고조선(1/20)은 중국(1/10)보다 세금이 적어서 살기가 좋으므로 국경선을 넘는 이주민이 많았으며 고조선 사람들은 평화를 숭상하였고 수치스러운 일을 꺼리고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매일 밤마다 연회를 하였었다(삼국지 위지동이전). 고조선의 직물기술은 매우 뛰어나 누에고치로 짠 고조선의 실크는 가공과정에서 세리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남겨 탄력성이 뛰어나고 염색이 잘 되어 당시 주변국과 주요 교역품목이 되기도 했다(Kang, 2011). 유라시아 초원길과 흉노땅이었던 하서주랑에 실크로드가 있었다. 북경에는 기원전 9세기에 국제무역시장이 있었다. 한나라에 무제가 등극했을 때 귀족계층의 사치를 없애기 위해 고조선의 실크를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고도 전한다(Kang, 2011).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한중일 학자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믿어왔지만 홍산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4000년경 누에모양의 옥 장식을 비롯한 유물자료를 보면 고조선의 독자적인 기술형태로 발달시켜온 것으로 밝혀졌다. 금(錦) 직물의 발명은 홍산 문화의 주인인 고조선인들이었으며 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경으로 본다(황 & 천, 중국실크7000). 산동반도의 동이족이 가장 먼저 실크를 사용하였다(한서 우공), 경금이 제직된 기원전 11세기는 상(은), 주나라 교체기로서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주나라는 은나라보다 오히려 문화 수준이 높지 않았다. 이후 ‘춘추’시대라고 불렀으며 ‘전국’(戰國)시대에는 서로들 땅을 더 차지하고자 전쟁을 일삼았다. 반면에 고조선은 천년이상을 중국의 지배 없이 전성기(약BC1800~500)를 누리고 있었다. 고조선의 훌륭한 직물을 만드는 기술은 고구려에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고구려는 금(錦, 비단)으로 상징되어질 만큼 금을 즐겨 입었다. 금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이를 섞어서 화려한 문양을 혼합한 직조기법으로 직조했던 고급직물이다.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경금을 생산했는데 중국과 일본에 선물로 보냈던 특산품이었던 점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생산된 경금은 그 수준이 매우 높고 세계에서 보기 귀한 매우 특징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직물은 자개 무늬처럼 아름답게 짜여진 패금(貝錦)으로 무늬와 색이 아름답기가 중국의 동화포보다 우월하며 직문은 화려하고 저포와 마포는 눈과 같이 희다’라고 중국 晉나라 황제가 격찬하였다(Editorial Department of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1994; 高麗史). 고구려의 백금은 중국에서 와서 배워서 갔다(구당서) 고조선에서는 의복의 재료로 색동이나 채색 경금 직물을 사용하였다. 경금은 경사가 색사인 것으로서 위사가 색사인 위금(緯錦, AD7세기경부터 발생 및 유행)과 대비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금 직물과 색동을 널리 착용한 것으로 보아 풍성히 생산되었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정교한 무늬의 경금을 착용하였는데, 고대인들의 기술력이 매우 정교하고 훌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다양한 색상으로 실을 염색해왔으므로 염색기술도 매우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고조선은 제직기술과 염색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사회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漢 대 견직물유물을 보면 자수가 많고 얇은 차이나 실크(경량의 평직조직) 원단이며 옷 실루엣의 폭이 매우 좁다. 반면에 우리는 경금으로 두껍고 뻣뻣해서 실루엣이 옆으로 풍성한 편이다. 고대 한국국가에서 견직물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방직기술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옥단추와 청동단추를 매우 많이 옷에 부착하였는데 이것은 무겁기 때문에 차이나실크에는 붙이지 못한다. 반면에 조밀한 경금에는 붙일 수가 있겠다. 양모 색사를 사용하여 무늬를 나타낸 것을 계 ? 라고 부른다. 양모 제직도 매우 발달되었다. 경금은 색사로 무늬를 짠 견직물로서 경사방향으로 색사를 사용하고 2-3가지의 색 경사가 동일공간에 존재하며 표면 쪽에 부출되는 경사 색에 의해서 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원단은 매우 조밀하게 되며 두껍게 된다. 색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이를 피하려면 분구법을 사용하여 색동처럼 경사를 일정하게 구간을 나누어 색사를 달리하여 정경하게 된다. 경금은 건조한 신강자치구 고원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 경금들은 고구려 초기나 그 이전의 경금으로 추정되는데 동물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특징이 있으며 고조선의 경금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나 까다로운 경금의 제직법으로 인해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소그드나 중앙아시아 신강지역에서도 고구려 경금과 유사한 호릉이 제작되었는데 견사의 생산이 부족했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고구려의 실꾸리가 활동한 무대였다. 실꾸리가 변해서 실크 silk 가 되었다. 그리스-로마언어로 기원전 5-6 세기 경금을 '세레스'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단을 가져오는 극동의 신라사람을 뜻한다. 고조선의 다채로운 색무늬 경금이 서역에 전달된 것이었다. 세레스가 변해서 견 단백질 명칭 세리신이 되었다. 비잔틴시대 518년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 등의 모자이크벽화의 화려한 팔루다멘툼, 로룸 등에서 고구려의 빳빳한 경금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오래된 서양복식사책을 보면 바지는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6세기에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화려한 색상도, 뻣뻣한 실크도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모두 東타타르인이었던 부여와 고구려, 실크를 수출하는 고조선, 신라 등으로부터 전파 받은 것들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을 요한다. 또 보통 직기로 짜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이를 간편히 하는 직기가 개발되었는데, 무늬를 구성하는 색 경사들을 주기적으로 들어 올려주는 수평 직기가 발명되었다. 수평 직기는 수평의 형태이며 위에 사각 틀이 더 존재한다. 즉 베틀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야 개구가 크게 확보되어 위사투입이 용이하다. 고조선의 직기는 이러한 수평 직기였을 것이다. 경사 도투마리가 힘을 잘 받고 또 상하 종광 운동에 의한 개구가 크게벌어지도록 수평형 직기를 사용해야 경금의 생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분구법으로 인해 2-3배가 넘는 수많은 색 경사의 무게를 견디도록 해주며, 잉아 또는 종광 수가 많아서 무거우므로 이들을 위에서 고정해주는 사각 틀이 필요하게 된다. 나중에는 무늬가 더 정교해지면서 상부 지지대가 더 복잡 발달하여 1대의 직기에 2명이 앉아서 작업해야하는 제화루 직기(製華樓 織織)가 되었다. 즉 위사 투입과 바디침을 하는 사람 이외에 추가적으로 1인이 제화루기 위에 앉아서 무늬 경사들의 상하운동을 빈번히 변화시켜 주게 된다. 반면에, 사천성 성도에 있는 한(漢) 화상석 스캔 본으로서 경사빔과 직물빔의 위치 각도를 살펴보면 매우 가파르게 비스듬한 직기이다. 화상석에서 볼 수 있는 한(漢)대 직기 18대는 모두 비스듬한 직기형으로서 사(斜)직기이다(Shin, 2012). 직기에 관하여 AD4세기에 쓴 西京雜記에 의하면 ‘120개의 잉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짜는 방법이 50-60개의 잉아로 변경되었고 이는 비효율적이므로 다시 12개 잉아로 대체하였다’고 하였다. 점차 무늬가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Figure 26,27은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를 비롯하여 서아시아의 직기는 똑바로 직립한 수직형 형태로서 경사에 많은 장력이 걸리는 수기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카페트 짜는 형태에서 발전한 직기이다. 한 줄씩 위사 쪽에다 색사를 집어넣는 형태이다. 사직기나 돈황 벽화에 그려진 수직직기로는 경금을 제작할 수가 없다. ‘중원의 직기는 전국시대 이후에는 비스듬하게 기운 斜직기 형태’ 라고 한다(Hwang & Cheon, 2016). 전국시대 이후에는 직기가 모두 사직기가 되었다는 뜻은, 춘추시대 때까지만도 수평형 직기를 사용하여 경금을 제직하기도 했었다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제나라 노나라에서는 고조선의 영향으로 견직물산업이 갑자기 부흥하게 되었었고 경금을 생산하였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경금이 생산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너무 자주 발생하여 가정과 나라가 평화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사각틀 수평직기가 왼쪽 마네킹 뒤에 보이는데, 이것도 수평직기이면서 위로 사각틀을 갖고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수평형 직기와 사각 제화루 직기는 한나라의 사직기와 돈황의 수직 직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따라서 신장에서 출토되는 경금이 한나라 경금이라고 주장하지만, 한(漢)대 유명인들이 착용의복을 통해 당시 유행한 실크를 보면 모두 얇은 흐느적거리는 실크이며 자수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신강자치구나 타림분지, 남러시아, 팔미라 등에서 발굴되고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 경금이 한나라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비스듬한 직기(한나라 화상석)와 수직 직기(돈황굴)로는 절대로 경금을 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뻣뻣하고 두껍고 치밀한 경금은 모두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생산되고 착용되었던 것들이다. 또 서아시아의 수직형 직조 기술 전통과 척박한 자연환경도 경금의 생산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史記’에 따르면 ‘대완(박트리아)에서 서쪽 파르티아(대하)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에는 명주실과 옻나무가 생산되지 않았다’ 고 한다. 또 ’투르크와 파르티아(페르시아)는 중국과 로마 비잔틴의 직접 무역을 방해하였다’(Lee, 2016)고 하듯이 소그드 상인과 페르시아는 중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이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부터 북방민족과 친하게 지내고 동서무역 중계를 통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실크를 직접 생산 하였다기보다는 수입재원인 실크를 고조선과 고구려에 의존하였다. 기술력과 재료수급 측면으로 보아 경금을 생산하지는 못하였고 이들은 세계적으로 중계무역상으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 ‘고창국에서는 잠상기술이 있었고 4세기에 들어서야 구자(차)도 금(錦)을 생산’ 하였다고 하는데, 파르티아에서는 견사와 뽕나무를 재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구차도 주로 실꾸리를 구입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었으나 경사 색사를 미리 준비하고 제화루 직기에 색사를 적절히 배치해야 하는 까다로운 제직법으로 인해 구차나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경금은 다소 서투른 솜씨의 문양이 제작된 것이 유물로 보인다.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도기술을 요하는 무늬의 생산이 어려웠으며 이를 대신하여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6세기경 삼국지 위서에서 ‘서방에서는 동방의 두꺼운 견직물을 풀어서 양모사를 혼합하여 호릉(胡綾)을 다시 짜기도 했다’ 라 하는데 즉 중앙아시아에서는 재료가 부족하였다는 뜻이며 이를 풀어서 위금으로 새로 짠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아시아에는 AD 5-6세기가 되어서야 뽕나무 및 양잠기술이 뿌리를 내렸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수직형직기 또는 카페트 생산방식과 유사한 위금은 곡선적인 큰 무늬의 제작이 가능하므로 이는 복잡한 경금을 점차 대체하였는데 삼국시대 후기(AD600)에는 소그디아의 큰 무늬 위금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AD7세기경 위구르, 소그드인들의 사마르칸트 벽화의 복식을 보면 옷 문양의 크기가 매우 크다. 경금은 위금을 낳았고 위금의 유행 전파와 함께 무늬의 크기는 점차 커졌으며 위금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고조선 이전인 배달문화로 여겨지는 홍산 문화 유물에 기원전 4500년으로 추정되는 옥잠(옥누에)이 출토(Park, 2007).되었으므로 한국의 견직물 직조가 세계에서 가장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한국은 고조선 이전 신석기시대부터 견직물 옷감을 생산하고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고 파악된다. 시경의 황하하류와 발해만에는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기원전 18세기의 비파형청동검과 기원전10세기의 다뉴세문경과 같은 수준 높은 금속 가공 기술력이 증명하듯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하고 훌륭한 직물인 경금의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들째,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 고원, 히말라야산맥과 곤륜산맥 등이 장애가 되어 중국 장안에서 가는 길은 미처 인지되고 있지 못했다. 기원전 138∼126년에야 비로서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서역개척한 후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오아시스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북방에 서역으로 가는 초원로 실크로드가 있었으며, 지구는 북반구인 관계로 말미암아 이 실크로드의 동쪽끝은 발해만의 고조선이며 기원전 10세기경의 이른 시기에도 우리의 아름다운 실크가 서역에 먼저 소개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비단길은 한나라 장건이 개척한 길을 통해서 중국 비단- 얇고 흐느적거리는 차이나 실크-이 서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빨리 이동하며 초원을 가르는 고조선과 흉노 신라 상인에 의해 발해만 유역에서 생산된 경금- 화려하고 무늬가 있는 실크-이 유라시아 초원길을 통해서 서방으로 전파된 것이며 이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 투르크의 후손들인 카자흐스탄, 이란 등의 부흥 및 도시발달과 역사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우리도 홍산 문화 유물, 고조선 유물, 단군세기 등을 근거로 실크로드의 역사는 새로 기술되어야 한다. 셋째, 홍산 문화는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고조선의 신석기, 옥기, 청동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므로 발해만고조선 문화라고 보고 있는데, 견직물의 시초는 옥 누에가 출토되는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경에 발명된 고도의 제직기술이 있어야만 짤 수 있는 경금은 색 경사를 여러 겹으로 중복 배치하여 무늬를 짠 직물이므로 두껍고 조밀하여 뻣뻣하며 서늘하거나 건조한 날씨에서 제직한 것이다. 중원의 흐느적거리는 실크와는 완전히 다른 원단이며 주변국과 서역 등지에 수출하는 특산품이었다. 고조선의 신라, 고구려 선조들은 세계 최초로 경금 실크를 개발해서 실크로드 초원길을 통해 서양에 전파하였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넷째,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하면 귀족계층의 부인이 직조하고 있는데 하층민보다는 한자도 아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고조선의 귀부인이 실제 직조에 참여하였다. 고도의 제직기술을 필요로 하는 경금은 평화시기에나 제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고조선이 평화롭고 문화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조선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이 필요하며 색 경사를 사용하고 무늬가 매우 복잡하므로 수평형태의 직기 또는 제화루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전국시대이후 한나라의 직기는 모두 비스듬한 사직기 이었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경금의 생산은 불가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서역이나 북방에서 출토되는 경금 유물에는 ‘한(漢)대와 동진시대’ 라고 적혀있지만 이는 모두 고조선, 고구려의 경금으로 보아야 타당하겠다.
  • 작성자
    yo********
    경로
    한국과학사 > 본문 > 원시, 고대편 > 제3장 방직, 염색 기술
    내용
    1세단군 황후때부터 양잠을 장려하여 집집마다 실크를 생산하였으므로, 마한사람들은 경금(색경사의 무늬 비단)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변진에서는 폭이 넓은 광폭의 섬세한 세포(광폭세포)가 생산되었다(Park, 2007). 고대한국 국가에서는 신분과 관계없이 일반 평민까지 絲견직물을 입을 정도로 널리 대중화 되고 있지만 중국에서 견직물은 지배계층에서만 입을 수 있었다. 한대의 경제서 '감선론'에 '비단옷은 서민의 경우, 70, 80세가 되어야 겨우 입어볼수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제 선왕과 위 혜왕에게 조언한 맹자의 '인정'조에는 ' 5무되는 집의 밭에 뽕나무를 심게 해서 사람들이 50세가 되면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라, 또 집에 돼지, 개, 닭 등을 키우게 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70세가 되면 고기를 먹을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랫동안 평화롭고 사회가 안전하였던, 고조선(1/20)은 중국(1/10)보다 세금이 적어서 살기가 좋으므로 국경선을 넘는 이주민이 많았으며 고조선 사람들은 평화를 숭상하였고 수치스러운 일을 꺼리고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매일 밤마다 연회를 하였었다(삼국지 위지동이전). 고조선의 직물기술은 매우 뛰어나 누에고치로 짠 고조선의 실크는 가공과정에서 세리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남겨 탄력성이 뛰어나고 염색이 잘 되어 당시 주변국과 주요 교역품목이 되기도 했다(Kang, 2011). 유라시아 초원길과 흉노땅이었던 하서주랑에 실크로드가 있었다. 북경에는 기원전 9세기에 국제무역시장이 있었다. 한나라에 무제가 등극했을 때 귀족계층의 사치를 없애기 위해 고조선의 실크를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고도 전한다(Kang, 2011).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한중일 학자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믿어왔지만 홍산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4000년경 누에모양의 옥 장식을 비롯한 유물자료를 보면 고조선의 독자적인 기술형태로 발달시켜온 것으로 밝혀졌다. 금(錦) 직물의 발명은 홍산 문화의 주인인 고조선인들이었으며 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경으로 본다(황 & 천, 중국실크7000). 산동반도의 동이족이 가장 먼저 실크를 사용하였다(한서 우공), 경금이 제직된 기원전 11세기는 상(은), 주나라 교체기로서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주나라는 은나라보다 오히려 문화 수준이 높지 않았다. 이후 ‘춘추’시대라고 불렀으며 ‘전국’(戰國)시대에는 서로들 땅을 더 차지하고자 전쟁을 일삼았다. 반면에 고조선은 천년이상을 중국의 지배 없이 전성기(약BC1800~500)를 누리고 있었다. 고조선의 훌륭한 직물을 만드는 기술은 고구려에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고구려는 금(錦, 비단)으로 상징되어질 만큼 금을 즐겨 입었다. 금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이를 섞어서 화려한 문양을 혼합한 직조기법으로 직조했던 고급직물이다.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경금을 생산했는데 중국과 일본에 선물로 보냈던 특산품이었던 점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생산된 경금은 그 수준이 매우 높고 세계에서 보기 귀한 매우 특징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직물은 자개 무늬처럼 아름답게 짜여진 패금(貝錦)으로 무늬와 색이 아름답기가 중국의 동화포보다 우월하며 직문은 화려하고 저포와 마포는 눈과 같이 희다’라고 중국 晉나라 황제가 격찬하였다(Editorial Department of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1994; 高麗史). 고구려의 백금은 중국에서 와서 배워서 갔다(구당서) 고조선에서는 의복의 재료로 색동이나 채색 경금 직물을 사용하였다. 경금은 경사가 색사인 것으로서 위사가 색사인 위금(緯錦, AD7세기경부터 발생 및 유행)과 대비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금 직물과 색동을 널리 착용한 것으로 보아 풍성히 생산되었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정교한 무늬의 경금을 착용하였는데, 고대인들의 기술력이 매우 정교하고 훌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다양한 색상으로 실을 염색해왔으므로 염색기술도 매우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고조선은 제직기술과 염색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사회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漢 대 견직물유물을 보면 자수가 많고 얇은 차이나 실크(경량의 평직조직) 원단이며 옷 실루엣의 폭이 매우 좁다. 반면에 우리는 경금으로 두껍고 뻣뻣해서 실루엣이 옆으로 풍성한 편이다. 고대 한국국가에서 견직물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방직기술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옥단추와 청동단추를 매우 많이 옷에 부착하였는데 이것은 무겁기 때문에 차이나실크에는 붙이지 못한다. 반면에 조밀한 경금에는 붙일 수가 있겠다. 양모 색사를 사용하여 무늬를 나타낸 것을 계 ? 라고 부른다. 양모 제직도 매우 발달되었다. 경금은 색사로 무늬를 짠 견직물로서 경사방향으로 색사를 사용하고 2-3가지의 색 경사가 동일공간에 존재하며 표면 쪽에 부출되는 경사 색에 의해서 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원단은 매우 조밀하게 되며 두껍게 된다. 색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이를 피하려면 분구법을 사용하여 색동처럼 경사를 일정하게 구간을 나누어 색사를 달리하여 정경하게 된다. 경금은 건조한 신강자치구 고원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 경금들은 고구려 초기나 그 이전의 경금으로 추정되는데 동물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특징이 있으며 고조선의 경금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나 까다로운 경금의 제직법으로 인해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소그드나 중앙아시아 신강지역에서도 고구려 경금과 유사한 호릉이 제작되었는데 견사의 생산이 부족했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고구려의 실꾸리가 활동한 무대였다. 실꾸리가 변해서 실크 silk 가 되었다. 그리스-로마언어로 기원전 5-6 세기 경금을 '세레스'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단을 가져오는 극동의 신라사람을 뜻한다. 고조선의 다채로운 색무늬 경금이 서역에 전달된 것이었다. 세레스가 변해서 견 단백질 명칭 세리신이 되었다. 비잔틴시대 518년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 등의 모자이크벽화의 화려한 팔루다멘툼, 로룸 등에서 고구려의 빳빳한 경금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오래된 서양복식사책을 보면 바지는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6세기에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화려한 색상도, 뻣뻣한 실크도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모두 東타타르인이었던 부여와 고구려, 실크를 수출하는 고조선, 신라 등으로부터 전파 받은 것들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을 요한다. 또 보통 직기로 짜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이를 간편히 하는 직기가 개발되었는데, 무늬를 구성하는 색 경사들을 주기적으로 들어 올려주는 수평 직기가 발명되었다. 수평 직기는 수평의 형태이며 위에 사각 틀이 더 존재한다. 즉 베틀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야 개구가 크게 확보되어 위사투입이 용이하다. 고조선의 직기는 이러한 수평 직기였을 것이다. 경사 도투마리가 힘을 잘 받고 또 상하 종광 운동에 의한 개구가 크게벌어지도록 수평형 직기를 사용해야 경금의 생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분구법으로 인해 2-3배가 넘는 수많은 색 경사의 무게를 견디도록 해주며, 잉아 또는 종광 수가 많아서 무거우므로 이들을 위에서 고정해주는 사각 틀이 필요하게 된다. 나중에는 무늬가 더 정교해지면서 상부 지지대가 더 복잡 발달하여 1대의 직기에 2명이 앉아서 작업해야하는 제화루 직기(製華樓 織織)가 되었다. 즉 위사 투입과 바디침을 하는 사람 이외에 추가적으로 1인이 제화루기 위에 앉아서 무늬 경사들의 상하운동을 빈번히 변화시켜 주게 된다. 반면에, 사천성 성도에 있는 한(漢) 화상석 스캔 본으로서 경사빔과 직물빔의 위치 각도를 살펴보면 매우 가파르게 비스듬한 직기이다. 화상석에서 볼 수 있는 한(漢)대 직기 18대는 모두 비스듬한 직기형으로서 사(斜)직기이다(Shin, 2012). 직기에 관하여 AD4세기에 쓴 西京雜記에 의하면 ‘120개의 잉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짜는 방법이 50-60개의 잉아로 변경되었고 이는 비효율적이므로 다시 12개 잉아로 대체하였다’고 하였다. 점차 무늬가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Figure 26,27은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를 비롯하여 서아시아의 직기는 똑바로 직립한 수직형 형태로서 경사에 많은 장력이 걸리는 수기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카페트 짜는 형태에서 발전한 직기이다. 한 줄씩 위사 쪽에다 색사를 집어넣는 형태이다. 사직기나 돈황 벽화에 그려진 수직직기로는 경금을 제작할 수가 없다. ‘중원의 직기는 전국시대 이후에는 비스듬하게 기운 斜직기 형태’ 라고 한다(Hwang & Cheon, 2016). 전국시대 이후에는 직기가 모두 사직기가 되었다는 뜻은, 춘추시대 때까지만도 수평형 직기를 사용하여 경금을 제직하기도 했었다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제나라 노나라에서는 고조선의 영향으로 견직물산업이 갑자기 부흥하게 되었었고 경금을 생산하였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경금이 생산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너무 자주 발생하여 가정과 나라가 평화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사각틀 수평직기가 왼쪽 마네킹 뒤에 보이는데, 이것도 수평직기이면서 위로 사각틀을 갖고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수평형 직기와 사각 제화루 직기는 한나라의 사직기와 돈황의 수직 직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따라서 신장에서 출토되는 경금이 한나라 경금이라고 주장하지만, 한(漢)대 유명인들이 착용의복을 통해 당시 유행한 실크를 보면 모두 얇은 흐느적거리는 실크이며 자수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신강자치구나 타림분지, 남러시아, 팔미라 등에서 발굴되고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 경금이 한나라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비스듬한 직기(한나라 화상석)와 수직 직기(돈황굴)로는 절대로 경금을 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뻣뻣하고 두껍고 치밀한 경금은 모두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생산되고 착용되었던 것들이다. 또 서아시아의 수직형 직조 기술 전통과 척박한 자연환경도 경금의 생산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史記’에 따르면 ‘대완(박트리아)에서 서쪽 파르티아(대하)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에는 명주실과 옻나무가 생산되지 않았다’ 고 한다. 또 ’투르크와 파르티아(페르시아)는 중국과 로마 비잔틴의 직접 무역을 방해하였다’(Lee, 2016)고 하듯이 소그드 상인과 페르시아는 중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이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부터 북방민족과 친하게 지내고 동서무역 중계를 통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실크를 직접 생산 하였다기보다는 수입재원인 실크를 고조선과 고구려에 의존하였다. 기술력과 재료수급 측면으로 보아 경금을 생산하지는 못하였고 이들은 세계적으로 중계무역상으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 ‘고창국에서는 잠상기술이 있었고 4세기에 들어서야 구자(차)도 금(錦)을 생산’ 하였다고 하는데, 파르티아에서는 견사와 뽕나무를 재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구차도 주로 실꾸리를 구입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었으나 경사 색사를 미리 준비하고 제화루 직기에 색사를 적절히 배치해야 하는 까다로운 제직법으로 인해 구차나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경금은 다소 서투른 솜씨의 문양이 제작된 것이 유물로 보인다.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도기술을 요하는 무늬의 생산이 어려웠으며 이를 대신하여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6세기경 삼국지 위서에서 ‘서방에서는 동방의 두꺼운 견직물을 풀어서 양모사를 혼합하여 호릉(胡綾)을 다시 짜기도 했다’ 라 하는데 즉 중앙아시아에서는 재료가 부족하였다는 뜻이며 이를 풀어서 위금으로 새로 짠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아시아에는 AD 5-6세기가 되어서야 뽕나무 및 양잠기술이 뿌리를 내렸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수직형직기 또는 카페트 생산방식과 유사한 위금은 곡선적인 큰 무늬의 제작이 가능하므로 이는 복잡한 경금을 점차 대체하였는데 삼국시대 후기(AD600)에는 소그디아의 큰 무늬 위금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AD7세기경 위구르, 소그드인들의 사마르칸트 벽화의 복식을 보면 옷 문양의 크기가 매우 크다. 경금은 위금을 낳았고 위금의 유행 전파와 함께 무늬의 크기는 점차 커졌으며 위금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고조선 이전인 배달문화로 여겨지는 홍산 문화 유물에 기원전 4500년으로 추정되는 옥잠(옥누에)이 출토(Park, 2007).되었으므로 한국의 견직물 직조가 세계에서 가장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한국은 고조선 이전 신석기시대부터 견직물 옷감을 생산하고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고 파악된다. 시경의 황하하류와 발해만에는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기원전 18세기의 비파형청동검과 기원전10세기의 다뉴세문경과 같은 수준 높은 금속 가공 기술력이 증명하듯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하고 훌륭한 직물인 경금의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들째,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 고원, 히말라야산맥과 곤륜산맥 등이 장애가 되어 중국 장안에서 가는 길은 미처 인지되고 있지 못했다. 기원전 138∼126년에야 비로서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서역개척한 후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오아시스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북방에 서역으로 가는 초원로 실크로드가 있었으며, 지구는 북반구인 관계로 말미암아 이 실크로드의 동쪽끝은 발해만의 고조선이며 기원전 10세기경의 이른 시기에도 우리의 아름다운 실크가 서역에 먼저 소개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비단길은 한나라 장건이 개척한 길을 통해서 중국 비단- 얇고 흐느적거리는 차이나 실크-이 서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빨리 이동하며 초원을 가르는 고조선과 흉노 신라 상인에 의해 발해만 유역에서 생산된 경금- 화려하고 무늬가 있는 실크-이 유라시아 초원길을 통해서 서방으로 전파된 것이며 이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 투르크의 후손들인 카자흐스탄, 이란 등의 부흥 및 도시발달과 역사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우리도 홍산 문화 유물, 고조선 유물, 단군세기 등을 근거로 실크로드의 역사는 새로 기술되어야 한다. 셋째, 홍산 문화는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고조선의 신석기, 옥기, 청동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므로 발해만고조선 문화라고 보고 있는데, 견직물의 시초는 옥 누에가 출토되는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경에 발명된 고도의 제직기술이 있어야만 짤 수 있는 경금은 색 경사를 여러 겹으로 중복 배치하여 무늬를 짠 직물이므로 두껍고 조밀하여 뻣뻣하며 서늘하거나 건조한 날씨에서 제직한 것이다. 중원의 흐느적거리는 실크와는 완전히 다른 원단이며 주변국과 서역 등지에 수출하는 특산품이었다. 고조선의 신라, 고구려 선조들은 세계 최초로 경금 실크를 개발해서 실크로드 초원길을 통해 서양에 전파하였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넷째,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하면 귀족계층의 부인이 직조하고 있는데 하층민보다는 한자도 아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고조선의 귀부인이 실제 직조에 참여하였다. 고도의 제직기술을 필요로 하는 경금은 평화시기에나 제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고조선이 평화롭고 문화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조선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이 필요하며 색 경사를 사용하고 무늬가 매우 복잡하므로 수평형태의 직기 또는 제화루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전국시대이후 한나라의 직기는 모두 비스듬한 사직기 이었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경금의 생산은 불가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서역이나 북방에서 출토되는 경금 유물에는 ‘한(漢)대와 동진시대’ 라고 적혀있지만 이는 모두 고조선, 고구려의 경금으로 보아야 타당하겠다.
  • 작성자
    yo********
    경로
    한국과학사 > 본문 > 원시, 고대편 > 제3장 방직, 염색 기술
    내용
    1세단군 황후때부터 양잠을 장려하여 집집마다 실크를 생산하였으므로, 마한사람들은 경금(색경사의 무늬 비단)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으며, 변진에서는 폭이 넓은 광폭의 섬세한 세포(광폭세포)가 생산되었다(Park, 2007). 고대한국 국가에서는 신분과 관계없이 일반 평민까지 絲견직물을 입을 정도로 널리 대중화 되고 있지만 중국에서 견직물은 지배계층에서만 입을 수 있었다. 한대의 경제서 '감선론'에 '비단옷은 서민의 경우, 70, 80세가 되어야 겨우 입어볼수 있었다' 라는 기록이 있다. 제 선왕과 위 혜왕에게 조언한 맹자의 '인정'조에는 ' 5무되는 집의 밭에 뽕나무를 심게 해서 사람들이 50세가 되면 옷을 입을 수 있게 하라, 또 집에 돼지, 개, 닭 등을 키우게 하여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70세가 되면 고기를 먹을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반면에 오랫동안 평화롭고 사회가 안전하였던, 고조선(1/20)은 중국(1/10)보다 세금이 적어서 살기가 좋으므로 국경선을 넘는 이주민이 많았으며 고조선 사람들은 평화를 숭상하였고 수치스러운 일을 꺼리고 음주가무를 즐겼으며 매일 밤마다 연회를 하였었다(삼국지 위지동이전). 고조선의 직물기술은 매우 뛰어나 누에고치로 짠 고조선의 실크는 가공과정에서 세리신을 완전히 제거하지 않고 남겨 탄력성이 뛰어나고 염색이 잘 되어 당시 주변국과 주요 교역품목이 되기도 했다(Kang, 2011). 유라시아 초원길과 흉노땅이었던 하서주랑에 실크로드가 있었다. 북경에는 기원전 9세기에 국제무역시장이 있었다. 한나라에 무제가 등극했을 때 귀족계층의 사치를 없애기 위해 고조선의 실크를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내렸다고도 전한다(Kang, 2011).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한중일 학자 모두가 고대 한국의 양잠 기술은 중국에서 수입된 것으로 믿어왔지만 홍산유적에서 출토된 기원전 4000년경 누에모양의 옥 장식을 비롯한 유물자료를 보면 고조선의 독자적인 기술형태로 발달시켜온 것으로 밝혀졌다. 금(錦) 직물의 발명은 홍산 문화의 주인인 고조선인들이었으며 그 시기는 기원전 11세기경으로 본다(황 & 천, 중국실크7000). 산동반도의 동이족이 가장 먼저 실크를 사용하였다(한서 우공), 경금이 제직된 기원전 11세기는 상(은), 주나라 교체기로서 중국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주나라는 은나라보다 오히려 문화 수준이 높지 않았다. 이후 ‘춘추’시대라고 불렀으며 ‘전국’(戰國)시대에는 서로들 땅을 더 차지하고자 전쟁을 일삼았다. 반면에 고조선은 천년이상을 중국의 지배 없이 전성기(약BC1800~500)를 누리고 있었다. 고조선의 훌륭한 직물을 만드는 기술은 고구려에도 그대로 전수되었으며, 고구려는 금(錦, 비단)으로 상징되어질 만큼 금을 즐겨 입었다. 금은 누에 실을 여러 색으로 물들여 이를 섞어서 화려한 문양을 혼합한 직조기법으로 직조했던 고급직물이다. 백제와 신라 사람들도 경금을 생산했는데 중국과 일본에 선물로 보냈던 특산품이었던 점을 통해서 한반도에서 생산된 경금은 그 수준이 매우 높고 세계에서 보기 귀한 매우 특징적 산물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고(구)려의 직물은 자개 무늬처럼 아름답게 짜여진 패금(貝錦)으로 무늬와 색이 아름답기가 중국의 동화포보다 우월하며 직문은 화려하고 저포와 마포는 눈과 같이 희다’라고 중국 晉나라 황제가 격찬하였다(Editorial Department of the National History Compilation Committee, 1994; 高麗史). 고구려의 백금은 중국에서 와서 배워서 갔다(구당서) 고조선에서는 의복의 재료로 색동이나 채색 경금 직물을 사용하였다. 경금은 경사가 색사인 것으로서 위사가 색사인 위금(緯錦, AD7세기경부터 발생 및 유행)과 대비된다. 또한 고구려에서는 남녀노소에 상관없이 금 직물과 색동을 널리 착용한 것으로 보아 풍성히 생산되었고 높은 지위의 사람들은 정교한 무늬의 경금을 착용하였는데, 고대인들의 기술력이 매우 정교하고 훌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다양한 색상으로 실을 염색해왔으므로 염색기술도 매우 뛰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고조선은 제직기술과 염색기술이 고도로 발달했던 사회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특히 漢 대 견직물유물을 보면 자수가 많고 얇은 차이나 실크(경량의 평직조직) 원단이며 옷 실루엣의 폭이 매우 좁다. 반면에 우리는 경금으로 두껍고 뻣뻣해서 실루엣이 옆으로 풍성한 편이다. 고대 한국국가에서 견직물을 대량생산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방직기술을 독자적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옥단추와 청동단추를 매우 많이 옷에 부착하였는데 이것은 무겁기 때문에 차이나실크에는 붙이지 못한다. 반면에 조밀한 경금에는 붙일 수가 있겠다. 양모 색사를 사용하여 무늬를 나타낸 것을 계 ? 라고 부른다. 양모 제직도 매우 발달되었다. 경금은 색사로 무늬를 짠 견직물로서 경사방향으로 색사를 사용하고 2-3가지의 색 경사가 동일공간에 존재하며 표면 쪽에 부출되는 경사 색에 의해서 무늬가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원단은 매우 조밀하게 되며 두껍게 된다. 색 수가 많아질수록 더욱 그러하므로 이를 피하려면 분구법을 사용하여 색동처럼 경사를 일정하게 구간을 나누어 색사를 달리하여 정경하게 된다. 경금은 건조한 신강자치구 고원에서 많이 발견되는데 이 경금들은 고구려 초기나 그 이전의 경금으로 추정되는데 동물무늬가 매우 아름다운 특징이 있으며 고조선의 경금도 이와 유사할 것이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나 까다로운 경금의 제직법으로 인해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소그드나 중앙아시아 신강지역에서도 고구려 경금과 유사한 호릉이 제작되었는데 견사의 생산이 부족했다는 것이 증명되는데 고구려의 실꾸리가 활동한 무대였다. 실꾸리가 변해서 실크 silk 가 되었다. 그리스-로마언어로 기원전 5-6 세기 경금을 '세레스'라고 불렀는데 이는 비단을 가져오는 극동의 신라사람을 뜻한다. 고조선의 다채로운 색무늬 경금이 서역에 전달된 것이었다. 세레스가 변해서 견 단백질 명칭 세리신이 되었다. 비잔틴시대 518년 로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와 테오도라 황후 등의 모자이크벽화의 화려한 팔루다멘툼, 로룸 등에서 고구려의 빳빳한 경금을 많이 볼 수 있다. 또 오래된 서양복식사책을 보면 바지는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6세기에 착용하기 시작하였고, 화려한 색상도, 뻣뻣한 실크도 최초로 페르시아에서 제작하기 시작했다고 쓰여 있는데, 이는 모두 東타타르인이었던 부여와 고구려, 실크를 수출하는 고조선, 신라 등으로부터 전파 받은 것들이라고 볼수밖에 없다.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을 요한다. 또 보통 직기로 짜기는 매우 어려우므로 이를 간편히 하는 직기가 개발되었는데, 무늬를 구성하는 색 경사들을 주기적으로 들어 올려주는 수평 직기가 발명되었다. 수평 직기는 수평의 형태이며 위에 사각 틀이 더 존재한다. 즉 베틀은 수평으로 되어 있어야 개구가 크게 확보되어 위사투입이 용이하다. 고조선의 직기는 이러한 수평 직기였을 것이다. 경사 도투마리가 힘을 잘 받고 또 상하 종광 운동에 의한 개구가 크게벌어지도록 수평형 직기를 사용해야 경금의 생산이 가능하다. 그런데 분구법으로 인해 2-3배가 넘는 수많은 색 경사의 무게를 견디도록 해주며, 잉아 또는 종광 수가 많아서 무거우므로 이들을 위에서 고정해주는 사각 틀이 필요하게 된다. 나중에는 무늬가 더 정교해지면서 상부 지지대가 더 복잡 발달하여 1대의 직기에 2명이 앉아서 작업해야하는 제화루 직기(製華樓 織織)가 되었다. 즉 위사 투입과 바디침을 하는 사람 이외에 추가적으로 1인이 제화루기 위에 앉아서 무늬 경사들의 상하운동을 빈번히 변화시켜 주게 된다. 반면에, 사천성 성도에 있는 한(漢) 화상석 스캔 본으로서 경사빔과 직물빔의 위치 각도를 살펴보면 매우 가파르게 비스듬한 직기이다. 화상석에서 볼 수 있는 한(漢)대 직기 18대는 모두 비스듬한 직기형으로서 사(斜)직기이다(Shin, 2012). 직기에 관하여 AD4세기에 쓴 西京雜記에 의하면 ‘120개의 잉아가 있었으나 지금은 그 짜는 방법이 50-60개의 잉아로 변경되었고 이는 비효율적이므로 다시 12개 잉아로 대체하였다’고 하였다. 점차 무늬가 단순화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Figure 26,27은 사산조 페르시아(226~651)를 비롯하여 서아시아의 직기는 똑바로 직립한 수직형 형태로서 경사에 많은 장력이 걸리는 수기가 일반적이었는데 이는 카페트 짜는 형태에서 발전한 직기이다. 한 줄씩 위사 쪽에다 색사를 집어넣는 형태이다. 사직기나 돈황 벽화에 그려진 수직직기로는 경금을 제작할 수가 없다. ‘중원의 직기는 전국시대 이후에는 비스듬하게 기운 斜직기 형태’ 라고 한다(Hwang & Cheon, 2016). 전국시대 이후에는 직기가 모두 사직기가 되었다는 뜻은, 춘추시대 때까지만도 수평형 직기를 사용하여 경금을 제직하기도 했었다는 뜻이다. 기원전 8세기 제나라 노나라에서는 고조선의 영향으로 견직물산업이 갑자기 부흥하게 되었었고 경금을 생산하였었다. 그러나 전국시대가 되면서 더 이상 경금이 생산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국시대에는 전쟁이 너무 자주 발생하여 가정과 나라가 평화롭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제주도 박물관에 소장하고 있는 사각틀 수평직기가 왼쪽 마네킹 뒤에 보이는데, 이것도 수평직기이면서 위로 사각틀을 갖고 있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우리의 수평형 직기와 사각 제화루 직기는 한나라의 사직기와 돈황의 수직 직기와는 완전히 다른 형태이다. 따라서 신장에서 출토되는 경금이 한나라 경금이라고 주장하지만, 한(漢)대 유명인들이 착용의복을 통해 당시 유행한 실크를 보면 모두 얇은 흐느적거리는 실크이며 자수들로 채워져 있을 뿐이다. 신강자치구나 타림분지, 남러시아, 팔미라 등에서 발굴되고 있는 빳빳하고 두꺼운 경금이 한나라에서 제작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어렵다. 비스듬한 직기(한나라 화상석)와 수직 직기(돈황굴)로는 절대로 경금을 짤 수가 없기 때문이다. 뻣뻣하고 두껍고 치밀한 경금은 모두 고조선과 고구려에서 생산되고 착용되었던 것들이다. 또 서아시아의 수직형 직조 기술 전통과 척박한 자연환경도 경금의 생산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史記’에 따르면 ‘대완(박트리아)에서 서쪽 파르티아(대하)에 이르기까지 이 지방에는 명주실과 옻나무가 생산되지 않았다’ 고 한다. 또 ’투르크와 파르티아(페르시아)는 중국과 로마 비잔틴의 직접 무역을 방해하였다’(Lee, 2016)고 하듯이 소그드 상인과 페르시아는 중간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나라이다. 페르시아는 기원전 6세기부터 북방민족과 친하게 지내고 동서무역 중계를 통하여 거부가 되었으며 실크를 직접 생산 하였다기보다는 수입재원인 실크를 고조선과 고구려에 의존하였다. 기술력과 재료수급 측면으로 보아 경금을 생산하지는 못하였고 이들은 세계적으로 중계무역상으로 유명하다. 중앙아시아 ‘고창국에서는 잠상기술이 있었고 4세기에 들어서야 구자(차)도 금(錦)을 생산’ 하였다고 하는데, 파르티아에서는 견사와 뽕나무를 재배하였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구차도 주로 실꾸리를 구입하였을 것으로 파악된다. 경금은 기원전후 서아시아 지역으로 그 제직법이 전파되었으나 경사 색사를 미리 준비하고 제화루 직기에 색사를 적절히 배치해야 하는 까다로운 제직법으로 인해 구차나 중앙아시아에서 생산된 경금은 다소 서투른 솜씨의 문양이 제작된 것이 유물로 보인다. 서아시아 지역에서는 고도기술을 요하는 무늬의 생산이 어려웠으며 이를 대신하여 위사를 색사로 사용하는 위금(緯錦)이 개발된다. 6세기경 삼국지 위서에서 ‘서방에서는 동방의 두꺼운 견직물을 풀어서 양모사를 혼합하여 호릉(胡綾)을 다시 짜기도 했다’ 라 하는데 즉 중앙아시아에서는 재료가 부족하였다는 뜻이며 이를 풀어서 위금으로 새로 짠 것으로 추측된다. 중앙아시아에는 AD 5-6세기가 되어서야 뽕나무 및 양잠기술이 뿌리를 내렸다고 사료된다. 따라서 수직형직기 또는 카페트 생산방식과 유사한 위금은 곡선적인 큰 무늬의 제작이 가능하므로 이는 복잡한 경금을 점차 대체하였는데 삼국시대 후기(AD600)에는 소그디아의 큰 무늬 위금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AD7세기경 위구르, 소그드인들의 사마르칸트 벽화의 복식을 보면 옷 문양의 크기가 매우 크다. 경금은 위금을 낳았고 위금의 유행 전파와 함께 무늬의 크기는 점차 커졌으며 위금은 큰 인기를 얻게 되었다. 고조선 이전인 배달문화로 여겨지는 홍산 문화 유물에 기원전 4500년으로 추정되는 옥잠(옥누에)이 출토(Park, 2007).되었으므로 한국의 견직물 직조가 세계에서 가장 이르다고 볼 수 있다. 고대 한국은 고조선 이전 신석기시대부터 견직물 옷감을 생산하고 있었고 그 종류도 다양했다고 파악된다. 시경의 황하하류와 발해만에는 뽕나무가 많이 재배되고 있었다고 하였는데 기원전 18세기의 비파형청동검과 기원전10세기의 다뉴세문경과 같은 수준 높은 금속 가공 기술력이 증명하듯이 동북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하고 훌륭한 직물인 경금의 생산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들째, 기원전 6세기부터 서아시아 지대에는 이미 상당히 발단된 교통로가 만들어졌으나, 파미르 고원, 히말라야산맥과 곤륜산맥 등이 장애가 되어 중국 장안에서 가는 길은 미처 인지되고 있지 못했다. 기원전 138∼126년에야 비로서 전한의 장건(張騫,~BC 114)이 서역개척한 후 파미르 고원을 지나 대월지에 이르는 오아시스 길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북방에 서역으로 가는 초원로 실크로드가 있었으며, 지구는 북반구인 관계로 말미암아 이 실크로드의 동쪽끝은 발해만의 고조선이며 기원전 10세기경의 이른 시기에도 우리의 아름다운 실크가 서역에 먼저 소개되었던 것이다. 실크로드, 비단길은 한나라 장건이 개척한 길을 통해서 중국 비단- 얇고 흐느적거리는 차이나 실크-이 서역으로 진출한 것이 아니라 말을 타고 빨리 이동하며 초원을 가르는 고조선과 흉노 신라 상인에 의해 발해만 유역에서 생산된 경금- 화려하고 무늬가 있는 실크-이 유라시아 초원길을 통해서 서방으로 전파된 것이며 이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페르시아, 투르크의 후손들인 카자흐스탄, 이란 등의 부흥 및 도시발달과 역사 기록을 통해 증명된다. 우리도 홍산 문화 유물, 고조선 유물, 단군세기 등을 근거로 실크로드의 역사는 새로 기술되어야 한다. 셋째, 홍산 문화는 비파형청동검을 비롯한 고조선의 신석기, 옥기, 청동기 유물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으므로 발해만고조선 문화라고 보고 있는데, 견직물의 시초는 옥 누에가 출토되는 기원전 4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기원전 11세기경에 발명된 고도의 제직기술이 있어야만 짤 수 있는 경금은 색 경사를 여러 겹으로 중복 배치하여 무늬를 짠 직물이므로 두껍고 조밀하여 뻣뻣하며 서늘하거나 건조한 날씨에서 제직한 것이다. 중원의 흐느적거리는 실크와는 완전히 다른 원단이며 주변국과 서역 등지에 수출하는 특산품이었다. 고조선의 신라, 고구려 선조들은 세계 최초로 경금 실크를 개발해서 실크로드 초원길을 통해 서양에 전파하였던 것으로 입증되었다. 넷째, 고구려 고분벽화에 의하면 귀족계층의 부인이 직조하고 있는데 하층민보다는 한자도 아는 지혜롭고 부지런한 고조선의 귀부인이 실제 직조에 참여하였다. 고도의 제직기술을 필요로 하는 경금은 평화시기에나 제직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통해 고조선이 평화롭고 문화수준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조선 경금은 고도의 제직기술이 필요하며 색 경사를 사용하고 무늬가 매우 복잡하므로 수평형태의 직기 또는 제화루기가 필요하다. 반면에 전국시대이후 한나라의 직기는 모두 비스듬한 사직기 이었고 이로서 한나라에서는 경금의 생산은 불가했음이 증명되었다. 따라서 서역이나 북방에서 출토되는 경금 유물에는 ‘한(漢)대와 동진시대’ 라고 적혀있지만 이는 모두 고조선, 고구려의 경금으로 보아야 타당하겠다.
  • 작성자
    yj******
    경로
    삐라로 듣는 해방 직후의 목소리 > 본문 > 1945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 인민 대중에게 격함 - 조선인민공화국 탄생에 제하여〉
    내용
    대한민국 임시정부 응원합니다.
  • 작성자
    in*****
    경로
    국어학·언어학 용어사전 > ㅌ > 본문_ㅌ > 타일드(tilde)
    내용
    띨데
  • 작성자
    OA******************
    경로
    ABC북 맛보기 사전 > 역사와 문화유산 > 2. 역사와 문화유산 > 자금성 > 환관
    내용
    사진 출처 밝히고 써도 될까요?? 글 잘 읽었습니다. 거세 이후의 고충에 대해 생각은 못해봤는데 처음 알게 되네요~
  • 작성자
    se****
    경로
    국역 증보문헌비고 > 본문 > 증보문헌비고 제166권 - 시적고 4
    내용
    귀중한 사료입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