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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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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에 대한 간단한 생애정보를 담은 인물사전을 중심으로, 고려와 조선시대 과거 합격자 신상정보, 성씨와 본관정보 및 관직명 정보 등을 종합적으로 서비스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과거(문과, 무과, 생원 진사시, 잡과) 합격자와 고려문과 합격자 및 음관정보를 통합 서비스함으로써 그 내용을 더욱 풍부히 하고 있습니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0(광무 4) - 1945()
    본관
    고성(固城)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이광민(李光民)에 대하여

    1900년∼1945년. 독립운동가. 본관은 고성(固城). 이명은 문형(文衡)·광민(光珉)·영형(永衡)·광민(光敏)·영(暎, 英). 경상북도 안동 출신. 1915년 큰아버지 상룡(相龍)을 따라 중국 봉천성(奉天省)으로 가 유하현(柳河縣)에 있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수료하였다. 1916년 봉천성 통화현(通化縣) 삼도구(三道溝)에 있는 동화학교(東華學校)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원으로 재직하면서 청소년들에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한편, 1926년 정의부(正義府)에 소속되어 중국 동삼성(東三省)과 국내에 파견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담당하였으며, 같은해 10월 정의부의 중앙위원과 법무위원장에 취임하여 활동하였다. 1927년 4월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 조직을 위한 정의부·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의 3부통합에 대한 논의가 있자 김동삼(金東三)·오동진(吳東振) 등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 선임되어 그들과 함께 길림성(吉林省) 신안둔(新安屯)에서 열린 제1회 각단체대표회의에 참가하였고, 1928년 5월 전민족유일당촉성회파(全民族唯一黨促成會派)인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의 대표로 활동하였다. 1927년 5월 길림성 반석현(盤石縣)에 기반을 둔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에서 이 지역 한인보호를 위하여 보호회(保護會)를 조직할 때 김응섭(金應燮)·김상덕(金尙德)과 함께 중앙위원에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덕인(德仁)
    원사재(源沙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말기
    생졸년
    1836(헌종 2) - 1902(광무 6)
    본관
    성주(星州)
    분류
    교육/사상 > 학자
    이광범(李光範)에 대하여

    1836년(헌종 2)∼1902년(고종 39). 조선 말기 유학자. 자는 덕인(德仁)이고, 호는 원사재(源沙齋)이다.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시조는 신라(新羅) 말의 명재상 순유(純由)이고, 동곡(桐谷) 이조(李晁)의 9세손이며, 아버지는 이우춘(李佑春)이다. 그는 아버지가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먹여 연명시켰고, 부친의 묘에서 3년간 시묘(侍墓) 생활을 하는 등 여러 가지 효행과 관련된 일화들이 《호남삼강록(湖南三綱錄)》 등의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진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 1388(우왕 14)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이광보(李光甫)에 대하여

    미상∼1388년(우왕 14). 고려의 무신. 왜구가 극성을 부리던 1377년(우왕 3)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로 용진(龍津: 김해 부근)에 내려가 전함 만드는 일을 맡았고, 이어 1382년에도 사재령(司宰令)으로 전함을 만드는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때 독촉이 아주 심하여 많은 사람들의 원망을 샀다고 한다. 한편, 1388년 1월 순군만호부(巡軍萬戶府) 부만호로 있을 때는 당시의 권신인 상만호 염흥방(廉興邦)이 자기의 가노(家奴)인 이광(李光)과 토지문제로 다투다가 이광을 죽인 전 밀직부사 조반(趙胖)을 복수하기 위하여 그를 국가모반죄로 몰아 연행하여 가혹하게 심문하게 하였을 때 임견미(林堅味)의 사위 도만호 왕복해(王福海), 위관(委官) 윤진(尹珍)·강회백(姜淮伯) 등과 함께 심문에 참여하였으며, 4월에는 봉천선도원수 동지밀직(奉天船都元帥同知密直)으로서 개경의 서강(西江)에 주둔하여 왜구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본래 시정의 무뢰인으로서, 오로지 우왕의 측근에서 왕의 비위를 잘 맞추어 출세하였기 때문에 우왕이 이성계(李成桂) 일파에게 쫓겨나자 그도 옥에 갇혀 장사(杖死)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봉(李光逢)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폐신(嬖臣). 함평이씨(咸平李氏) 함풍부원군파(咸豊府院君派)의 시조이다. 1314년(충숙왕 1) 상호군으로서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연호를 고친 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충숙왕이 즉위하자 얼마 동안은 상왕인 충선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국가의 모든 일을 전지(傳旨)로써 행하였는데, 권한공(權漢功)·채홍철(蔡洪哲)·최성지(崔誠之) 등과 더불어 상왕을 보좌함을 기화로 매관매직 등 악행을 일삼고 공부(貢賦)를 균등하지 않게 매겨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듣고 충숙왕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1319년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가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올랐다. 1321년 충선왕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자 드디어 충숙왕이 권한공·채홍철과 함께 순군옥에 가두었다가 매를 때려 섬으로 내쳤는데, 섬으로 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 경계에 모여 다니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이 문제로 충숙왕을 원망하여 민지(閔漬)·권한공·채홍철과 더불어 심양왕(瀋陽王) 고(暠)의 심복이 되었으며,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일에 앞장서서 백관들로 하여금 원나라 중서성에 올릴 글에 서명하기를 재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324년 삼사사(三司事)의 직을 맡아보았다.

  • 자연(子淵)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94(숙종 20) - 1773(영조 49)
    본관
    평창(平昌)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부(李光溥)에 대하여

    1694년(숙종 20)∼1773년(영조 49).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자연(子淵). 판서 계남(季男)의 후손이며,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명석(命錫)의 아들이다. 1715년(숙종 4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이듬해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었다. 그뒤 장령·헌납·집의를 거쳐, 승지에 이르렀다. 1756년(영조 32) 경성부사로 재임중 힘을 다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한 결과 돌아올 때 가진 것이라고는 오직 해어진 침구뿐이었다 한다. 목민관으로서 백성들에게 진력하여 처자를 제대로 돌보지 않을 정도로 청백하였다. 당시 정승인 김재로(金在魯)는 “그를 등용하지 않으면 어찌 다른 인물을 쓰겠는가.”라고 반문하였으며, 여러 중신들도 한결같이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였다. 그뒤 숭록대부 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다.

  • 관지(觀之)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34(영조 10) - 1801(순조 1)
    본관
    울산(蔚山)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빈(李光彬)에 대하여

    1734년(영조 10)∼1801년(순조 1). 조선 후기 문신. 자는 관지(觀之)이다.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제주도 제주시(濟州市) 조천읍(朝天邑) 북촌리(北村里)에서 태어났다. 시조는 고려 고종(高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나라에 공을 세워 학성군(鶴城君)에 봉해졌던 이철(李哲)이며, 부친 이정무(李廷茂)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1765년(영조 41)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03위로 무과에 급제하여 만경현령(萬頃縣令)을 역임했다. 아들로는 역시 무과에 급제한 이방익(李邦翼)과 이방윤(李邦潤)이 있다.

  • 도보(道甫)
    원교(圓嶠)/수북(壽北)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5(숙종 31) - 1777(정조 1)
    본관
    전주(全州)
    분류
    문학 > 문필가
    이광사(李匡師)에 대하여

    1705년(숙종 31)∼1777년(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도보(道甫), 호는 원교(圓嶠) 또는 수북(壽北). 예조판서를 지낸 진검(眞儉)의 아들이다. 소론이 영조의 등극과 더불어 실각함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못하였으며, 50세 되던 해인 1755년(영조 31) 소론일파의 역모사건에 연좌되어 진도로 귀양가서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정제두(鄭齊斗)에게 양명학(陽明學)을 배웠고, 윤순(尹淳)의 문하에서 필법을 익혔다. 시·서·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특히 글씨에서 그의 독특한 서체인 원교체(圓嶠體)를 이룩하고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림은 산수와 인물·초충(草蟲)을 잘 그렸다. 인물에서는 남송원체화풍(南宋院體畵風)의 고식(古式)을 따랐으나, 산수는 새롭게 유입된 오파(吳派)의 남종화법(南宗畵法)을 토대로 소박하면서 꾸밈없는 문인취향의 화풍을 보였다. 대표작으로 〈행서4언시 行書四言詩〉(서울대학교 박물관 소장)와 1746년 오대(五代)의 인물화가 왕제한(王齊翰)을 임모하여 그렸다는 〈고승간화도 高僧看畵圖〉(간송미술관 소장)와 〈산수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등이 있으며, 서예의 이론을 체계화시킨 《원교서결 圓嶠書訣》을 비롯하여 《원교집선 圓嶠集選》 등의 저서를 남겼다.



  •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901(광무 5) - 1972()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독립운동가
    이광세(李光世)에 대하여

    1901년∼1972년.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용천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그곳 만세시위를 주동하였으며, 그해 9월 김동식(金東植)과 박초식(朴初植)의 권유로 김도원(金道源)·조원세(趙元世) 등 13명의 동지와 함께 보합단(普合團)에 가입하여 의주 동암산(東巖山)을 중심으로 하여 소집책으로서 활약하였다. 1919년 11월 용천군 안평동 박초식의 집에서 조원세 등과 일제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폭탄 11개를 만들어 8개를 보관하였다. 이후 철산의 문내정(文迺貞)·박여청(朴汝靑)·정양봉(鄭陽鳳) 등에게서 군자금을 적극 모금하여 1920년 1월 이종영(李鍾榮)·김인영(金仁榮) 등에게 제공하였으며, 1920년 8월 선천군 성산사(成山寺)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7명을 사살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관전현독립단(寬甸縣獨立團)과 합류, 활동하였다. 그해 11월 단원 김도원이 무장계획단원인 조상백(趙相伯)을 만나 두 단체가 제휴하여 서울에서 군자금을 모금할 것을 결의하자, 보합단의 명의로 서울 운니동 변석연(邊錫淵)앞으로 군자금 3만원을 준비하여두라는 경고장을 발송한 다음, 김도원·장정용(張廷鏞)과 같이 서울에 잠입하여 무장계획단 책임자인 이종영과 함께 변석연과 담판하여 군자금을 받기로 약속받았다. 약속된 날 이종영·김도원·이성규(李成珪)·장석두(張錫斗)·조상백과 함께 변석연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그의 큰아들 덕영(德永)의 밀고로 미리 잠복하여 있던 일본경찰에 김도원 등은 잡혔으며, 자신은 피신하던 중 종로경찰서원에게 잡혀 숨겨둔 폭탄 8개까지 압수당하였다. 1922년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받았다.


  •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외배/올보리
    시호

    이칭

    시대
    근현대 > 항일기
    생졸년
    1892(고종 29) - ?
    본관
    전주(全州)
    분류
    문학 > 소설/수필가
    이광수(李光洙)에 대하여

    1892년(고종 29)∼미상. 소설가·평론가·언론인. 본관은 전주(全州). 아명은 보경(寶鏡), 호는 춘원(春園)·장백산인(長白山人)·고주(孤舟)·외배·올보리 등. 익명은 노아자·닷뫼·당백·경서학인(京西學人) 등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생. 1. 가계 아버지는 종원(鍾元)이며, 어머니는 충주김씨(忠州金氏)이다. 5세에 한글을 비롯하여 천자문을 깨우치고 외할머니에게 〈덜걱전〉·〈소대성전〉·〈장풍운전〉 등을 읽어드릴 정도로 명석하였다고 한다. 8세경에는 동리의 글방에서 《사략》·《대학》·《중용》·《맹자》·《고문진보》 등을 읽어 한시 백일장에서 장원하여 인근동리에서 신동으로 소문날 정도였다고 한다. 2. 일본유학 그러나 가세가 기울기 시작하여 가난의 설움을 속 깊이 느끼다가 11세 때인 1902년 콜레라로 부모를 여의었다. 이듬해 동학에 입도하여 천도교의 박찬명대령 집에 기숙하며 서기일을 맡아보다가 1905년에 일진회(一進會)의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도일, 대성중학(大城中學)에 입학하였으나 학비곤란으로 이해 11월에 귀국하였다. 이듬해 다시 도일하여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 3학년에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이 무렵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으로부터 귀국하는 중 동경에 들러 행한 애국연설을 듣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메이지학원의 분위기에 따라 청교도적 생활을 흠모하게 되고 서양선교사들의 성경시간에서 익힌 기독교생활을 하기로 결심하기도 하였다. 홍명희(洪命熹)·문일평(文一平) 등과 공부하면서 소년회(少年會)를 조직하고 회람지 《소년》을 발행하면서 시·소설·문학론, 논설 등을 쓰기 시작하였다. 1909년 11월 7일에 〈노예 奴隷〉, 18일에 일문 〈사랑인가〉, 24일에 〈호 虎〉를 쓸 정도로 습작에 열중하였다. 그해 12월에는 〈정육론 情育論〉을 《황성신문》에 발표하였다. 3. 귀국후 문필활동 1910년 메이지학원 보통부 중학 5학년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정주 오산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해에 언문일치의 새 문장으로 된 단편 〈무정〉을 《대한흥학보》에 발표하였다. 그해 7월에 백혜순(白惠順)과 중매로 혼인하였으나 날이 갈수록 애정 없는 혼인을 후회하며 실망의 나날을 보냈다. 1912년 나라를 잃은 슬픔과 자신의 장래에 대한 번민으로 건강을 많이 상하였다. 오산학교 재직시에는 톨스토이를 애호하면서 학생들에게 생물진화론을 가르쳤다고 하여 교계에서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1913년 스토(Stowe, H. E. B.) 부인의 〈검둥이의 설움〉을 초역하여 신문관에서 간행하고, 시 〈말 듣거라〉를 《새별》에 발표하였다. 그해 11월 세계여행을 목적으로 상해에 들렀다가 1914년 미국에서 발간되던 《신한민보 新韓民報》의 주필로 내정되어 도미하려고 하였으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귀국하였다. 김병로(金炳魯)·전영택(田榮澤)·신석우(申錫雨) 등과 교유하며 사상가 내지 교육자가 되기를 꿈꾸었다. 1915년 9월 김성수(金性洙)의 후원으로 재차 도일하여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편입한 뒤 이듬해 1916년 9월 와세다대학 철학과에 입학, 광범위한 독서를 하였다. 계몽적 논설을 《매일신보》에 연재하여 문명(文名)을 높이고, 이듬해 1917년 1월 1일부터 한국신문학사상 획기적인 장편 〈무정〉을 연재하였다. 이어서 〈소년의 비애〉·〈윤광호〉·〈방황〉을 탈고하고 《청춘》에 발표하였다. 격심한 과로 끝에 폐환에 걸려 1917년 귀국, 《매일신보》 특파원으로 남한지역 오도답파여행(五道踏破旅行)을 떠났다. 1917년 두번째 장편 〈개척자〉를 《매일신보》에 연재하기 시작하여 청년층의 호평을 받았다. 이듬해 폐환이 재발하였으나 허영숙(許英肅)의 헌신적 간호로 위기에서 소생하였다. 전통적인 부조중심의 가족제도와 봉건적인 사회제도를 비판하는 〈신생활론〉·〈자녀중심론〉등의 논문을 발표하여 많은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백혜순과 이혼에 합의한 뒤 1918년 10월 여의사 허영숙과 장래를 약속하고 북경으로 애정도피를 떠났다. 그러나 11월 중순경 윌슨 미국대통령의 14원칙에 의거한 파리평화회의가 열리게 된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귀국하였다가, 다음달에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조선청년독립단에 가담하고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뒤 상해로 탈출하였다. 상해에서 안창호를 만나 그의 민족운동에 크게 공명하여 안창호를 보좌하면서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에 취임하고 애국적 계몽의 논설을 많이 쓰면서 안창호의 인도로 주요한(朱耀翰)·박현환 등과 독서·정좌·기도를 함으로써 수양생활에 힘썼다. 1921년 4월 단신으로 상해를 떠나 귀국, 선천에서 왜경에게 체포되었으나 곧 불기소처분되자 이때부터 변절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해 허영숙과 정식으로 혼인하였다. 《개벽》에 〈소년에게〉를 게재한 것이 출판법위반혐의를 받아 종로서에 연행된 바 있었다. 이어서 《개벽》에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여 민족진영에게 물의를 일으켜 문필권에서 소외당하였다. 이 무렵 《원각경 圓覺經》을 탐독하면서 단편 〈할멈〉·〈가실 嘉實〉을 집필하였고, 김성수·송진우(宋鎭禹)의 권고로 동아일보사의 객원이 되어 논설과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에는 안창호를 모델로 한 장편 〈선도자 先導者〉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다가 총독부의 간섭으로 중편완(中篇完, 111회)에서 중단되었으며, 이 무렵 금강산을 순례하면서 보광암의 월하노사(月河老師)의 인도로 뒷날 《법화경 法華經》에 심취하는 인연을 맺게 된다. 《동아일보》 사설 〈민족적 경륜〉(1923)이 물의를 일으켜 일시 퇴사하게 되고, 이때에 《동아일보》에 〈허생전〉·〈재생〉(1924)·〈마의태자〉(1927)·〈단종애사〉(1928)·〈혁명가의 아내〉(1930)·〈이순신〉(1931)·〈흙〉(1932) 등을 연재하였다. 4. 평가 이광수의 문학관은 “동시대 최선의 세계관을 선택하고 동시대와 인물의 중심계급을 전형화하였다.”는 작자의 말을 참고하더라도 퇴폐적인 문학이나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지는 극단적 문학관을 지양하였다. 그는 〈무정〉을 ‘노일전쟁에 눈뜬 조선’, 〈개척자〉를 ‘한일합방으로부터 대전(大戰)전까지의 조선’, 〈재생〉을 ‘만세운동 이후 1925년경의 조선’, 〈군상 群像〉을 ‘1930년대의 조선의 기록’이라고 스스로 말했듯이 사실주의문학을 지향하려 하였다. 이광수는 가운이 기울어짐에 따라 가난을 체험하면서 청일전쟁을 겪었고, 부모를 잃은 뒤 동학당 일을 본 탓으로 일본헌병에 쫓겨 고향을 떠났을 때가 노일전쟁중이었다. 그는 오산학교 교원시절에는 경술국치의 망국인의 설움을 겪었고, 방랑시절 시베리아의 치타에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들었으며, 그 종말을 사랑의 도피처인 북경에서 알았다. 3·1만세운동의 소식을 상해에서 들었는가 하면, 중일전쟁 폭발시에는 수양동우회사건으로 옥에 갇혔고, 광복 후에는 일제 말엽 훼절로 친일파라는 심판을 받고 수난을 당하였으며, 6·25중에는 젊은 시절부터 고생한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공산당에게 납치되어 생사불명, 거처불명의 불귀객이 되었다. 그는 민족근대사의 수난을 순교자처럼 받았고, 그것을 민감하게 소설·논설문·시가·수필류·기행문 형식으로 표현하였다(그의 원고매수는 8만매로 추량할 정도로 방대함.). 그의 직업은 교육자·언론인·민족운동가 등 다양하였으나 시종일관한 것은 작가이다. 흔히 이광수는 한국근대문학사에서 선구적인 작가로서 계몽주의·민족주의·인도주의의 작가로 평가를 받는다. 그것은 시대분위기와 사회적 조건 그리고 개인의 취향에 의한 결과인 것이다. 대체로 이광수의 초기작품들은 인간의 개성과 자유를 계몽하기 위하여 자유연애를 고취하고, 조혼의 폐습을 거부하였는가 하면, 〈무정〉에서는 신교육문제를, 〈개척자〉에서는 과학사상을, 〈흙〉에서는 농민계몽사상을 고취하면서 민족주의사상을 계몽하였다. 그러나 이광수 연구자들은 그가 당면한 사회적 갈등에 철저히 대응하기보다는 이상적인 설교로 힘을 무산시켰다는 부정적 측면도 검토하고 있다.

  • 진지(鎭之)

    시호
    충장(忠壯)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7(명종 12) - 1608(선조 41)
    본관
    광주(廣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이광악(李光岳)에 대하여

    1557년(명종 12)∼1608년(선조 41).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진지(鎭之). 군수 호약(好約)의 아들이다. 1584년(선조 17)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1592년 곤양군수(昆陽郡守)가 되었는데, 때마침 임진왜란으로 왜병이 영남일대에 쳐들어오자 선봉으로 장병을 격려하여 대비하였다. 그뒤 적이 대군을 이끌고 진주성을 포위하여 목사 김시민(金時敏)은 고립되고 대세가 위급해지자, 당시 거창에 있던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명령으로 좌익장(左翼將)이 되어 성안에 들어가 김시민과 합세하여 성을 사수하였다. 김시민이 적탄에 맞아 쓰러지자 그를 대신하여 총지휘관으로 싸워 대승을 거두고 적을 격퇴시켰다. 1594년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의 부장으로 함께 동래에 갔으나 적이 나오지 않으므로 돌아왔다. 이후 100여차례의 싸움에서 항상 선봉으로 적의 예봉을 꺾어 우군의 사기를 북돋우었고, 특히 활을 잘 쏘아 화살 하나에 반드시 3, 4명을 죽였다고 한다. 1598년 전라도병마절도사로서 명나라군대와 합세하여 금산·함양 등지에서 왜군을 무찌르고 포로가 된 본국인 100여명과 우마 60여필을 탈환하였다. 그뒤 훈련원도정을 거쳐 1604년 경기방어사가 되어 선무공신(宣武功臣) 3등으로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1607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로 있을 때 병을 핑계로 근무를 태만히 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 영중(榮仲)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98(선조 31) - 1657(효종 8)
    본관
    전주(全州)
    분류
    항일/국방 > 무신
    이광영(李光英)에 대하여

    1598년(선조 31)∼1657년(효종 8). 조선 후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영중(榮仲).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의 후손으로, 부원수 빈(薲)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때는 벼슬도 없으면서 아버지를 따라 행재(行在)에 나갔다. 이때 종신(從臣)의 자제들로서 부형을 모시고 온 자는 유독 그 한 사람뿐이었다. 이에 선조는 포상을 하였는데, 상례의 격을 벗어나 직접 급제시켜 벼슬을 주었다. 또, 아버지를 따라 진해로 남하하면서 적과 싸워 전공을 세웠다. 적병이 물러나고 서울로 돌아와 여러 관직을 거쳐, 경상·전라도의 병수사(兵水使)를 역임하였다. 이때 광해군의 총애를 받던 김상궁에게 가까운 친족이 있어 권세를 믿고 법을 어겼다. 김상궁은 편지로써 완만하고 부드럽게 부탁하였고, 한편 광해군도 밀지를 내렸는데, 그는 이것이 정당하지 않았기에 찢어버리고 나아가 형을 받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광해군의 미움을 몹시 받다가, 서궁(西宮)에 문안하였던 일과 이이첨(李爾瞻)의 죄에 연루되어 마침내 진도로 유배되었다. 인조반정 후 연이어 장흥·양주 두 읍의 수령을 제수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곧 이어 강화부윤으로 임명되었다. 광해군이 강화도로 축출됨에 따라 조정에서 특별히 그를 택한 것이었다. 그는 부임한 즉시 몸소 광해군의 거소를 자세히 살피고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물어보는 등 너그럽게 하고 음식과 의복을 풍부히 하며 깨끗하게 보살폈다. 광해군은 괴이하게 여기고 새로 부임하여온 부윤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이광영이라는 것을 알고나서는 한숨을 쉬면서 말하기를 “이와같이 착한 사람을 일찍이 내가 파면하고 배척하였으니 금일의 재앙은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후기
    생졸년
    ?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우(李光祐)에 대하여

    생몰년 미상. 고려 공민왕 때의 공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서북면에 침입하고 경성(京城: 開京)을 점령하여 공민왕이 남천(南遷)할 때, 전 호군으로서 왕 및 공주·태후와 함께 임진강을 건너 남행(南行)을 수종(隨從)한 공으로 1363년에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에 서훈되었다.

  • 극휴(克休)
    양서(讓西)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64(명종 19) - ?
    본관
    경주(慶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윤(李光胤)에 대하여

    1564년(명종 19)∼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讓西). 진사 잠(潛)의 아들이다. 3세에 이미 글자를 배우고 8, 9세에 문장을 지었으며 초서를 잘 썼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602년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교리·수찬 등을 역임하고, 1607년 서천군수·부제학을 지냈다. 도승지에 추증되고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 원숙(源叔)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03(숙종 29) - 1780(정조 4)
    본관
    평창(平昌)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익(李光瀷)에 대하여

    1703년(숙종 29)∼1780년(정조 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창(平昌). 자는 원숙(源叔). 판서 계남(季男)의 9세손으로, 태석(泰錫)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최수(崔琇)의 딸이다. 1733년(영조 9)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그뒤 여러 벼슬을 거쳐 1743년에 지평이 되고, 이어 1747년에는 장령을 역임하였다. 그뒤 헌납을 역임하고 한성부좌윤이 되었다. 1759년 종성부사로 재직시 치적이 뛰어나다는 북도어사의 보고로 왕으로부터 숙마(熟馬)를 하사받았다. 특히, 초산부사로 재임중에는 공미(公米) 재고량을 일정량만 남기고 주린 백성들에게 분급하여 구휼에 진력하였다. 또한, 외직에서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읍고개에서 10여 거마가 구관(舊官)이 되는 그의 이삿짐을 실어나르러 오자 보낼 물건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청렴한 목민관이었다. 관찰사 이이(李彛)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에 의하면, 그는 백성의 소(訴)가 있을 때마다 공평하게 시비를 가렸고, 부정한 수뢰행위는 일절 삼갔으며, 스스로 자기를 규율하여 백성을 위한 선정에 전력하였다고 한다.



  •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 - 1811(순조 11)
    본관
    미상(未詳)
    분류
    항일/국방 > 무신
    이광익(李光益)에 대하여

    미상∼1811년(순조 11). 장수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정조를 옹위한 시파(時派)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벽파(僻派)로부터 고위 무관 중의 윤행임(尹行恁)이라고 지목받아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시기에 행 호군이던 이광익은 벽동군(碧潼郡)에 유배되고, 윤행임은 예조판서로서 전라감사를 제수받아 당일로 임지로 출발하라는 명을 받은 지 4일만에 강진현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었다.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이광익이 윤행임의 당인지 불분명하다며 풀어주라고 하자, 영의정 심환지(沈煥之)는 ‘처지(處地)가 있고 용모(容貌)가 잘 생겼다 하여 정조로부터 특별히 교육의 은택을 받았는데도 조정의 일에 관여하였다’며 반대를 한다. 1805년(순조 5)에 좌포도대장으로 제수를 받고, 황해도와 평안도의 병마절도사, 우포도대장, 승지를 지내고, 양주목사(楊州牧使)로 있다고 특지로써 총융사에 임명되어 좌포도대장, 행 호군을 거쳐 금위대장(禁衛大將)으로 졸하였다.

  • 휘고(輝古)
    은암(隱巖)
    시호
    정헌(靖憲)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628(인조 6) - 1717(숙종 43)
    본관
    성주(星州)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적(李光迪)에 대하여

    1628년(인조 6)∼1717년(숙종 43).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성주(星州). 초명은 연(演), 자는 휘고(輝古), 호는 은암(隱巖). 대사헌 언충(彦忠)의 증손이며, 세미(世美)의 아들이다. 1650년(효종 1) 생원·진사가 되고, 165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64년(현종 5) 주서를 거쳐 전적·지평·정언·지제교 등을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함경도사를 비롯하여 함평현감·강릉현감·영월군수·안변부사 등을 두루 거쳤다. 그는 수령으로서 많은 치적을 쌓아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칠순에 가선계(嘉善階)에 올랐으며, 1706년(숙종 32) 공조참판으로서 임보(林溥)의 옥사를 소홀히 다룬 죄로 파직되었다. 이듬해 80세로 지중추부사가 되어 치사하였는데, 왕이 조화(造花)를 내려 조정이 모두 성사(盛事)로 칭송하였다. 시호는 정헌(靖憲)이다.



  • 시호

    이칭

    시대
    고려 > 고려 중기
    생졸년
    ? - 1194(명종 24)
    본관
    미상(未詳)
    분류
    문신/관료 > 관료
    이광정(李光挺){1}에 대하여

    미상∼1194년(명종 24). 고려 명종 때의 관인. 항오(行伍)에서 입신한 인물로, 정중부(鄭仲夫)가 1170년 무신란을 일으켜 의종을 폐위시킬 때 그에 참여하였다. 이로 인하여 대장군에 제수되었고, 1174년(명종 4)에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거쳐 같은해 여러번 승진하여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었다. 1179년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고, 1180년 태자태부판병부사(太子太傅判兵部事)에 이르렀다. 1181년 재상으로 역시 재상인 송유인(宋有仁)과 함께 10도(十道)에 찰방사(察訪使)를 보내어 관리의 옳고 그름을 살피어 관직을 올리고 내리고 할 것을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이때 파직된 자가 매우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후에 모두 사면되었다. 1183년 수태부판이부사(守太傅判吏部事)가 된 뒤 1184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관직에서 은퇴하였다.

  • 덕휘(德輝)
    해고(海皐)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중기
    생졸년
    1552(명종 7) - 1627(인조 5)
    본관
    연안(延安)
    분류
    문신/관료 > 문신
    이광정(李光庭){2}에 대하여

    1552년(명종 7)∼1627년(인조 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휘(德輝), 호는 해고(海皐). 정언 주(澍)의 아들이다. 1573년(선조 6) 진사시에 합격하고 1590년 교관(敎官)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91년 승문원정자·사관(史官)·시강원설서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에 선조를 호종(扈從)하여 정언과 지제교(知製敎), 예조·병조의 좌랑을 지냈고, 이듬해 환도 후 접반사(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을 도와서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어 지평·병조정랑·동부승지 등을 지내고 이조·예조·병조의 정랑, 동부승지 등을 지낸 뒤 이조·예조·병조의 참의, 좌승지를 거쳐 대사성이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부사였던 심유경(沈惟敬)을 만나러 갔다온 뒤 호조참판이 되어 군향(軍餉)을 정리하여 바로잡는 데 힘썼다. 이어서 공조참판을 거쳐 1598년 접반사로서 명나라의 제독 마귀(麻貴)를 따라 울산을 다녀온 뒤 왜적을 물리치는 데 공헌하였다. 1599년 호조·공조의 판서를 거쳐 한성부윤이 되었으며, 1601년에는 지중추부사로서 청백리에 뽑혔다. 1602년 예조판서를 거쳐 대사헌이 되고, 주청사(奏請使)로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책봉에 대한 고명(誥命)을 받으러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공로로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계되고, 판돈령·판의금을 거쳐 예조·이조의 판서가 되었다. 1604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어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졌고, 뒤에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올라 부원군(府院君)이 되었다. 1621년(광해군 13) 호조판서로 제수되었으나, 그당시의 정치상황이 어지러움을 보고 병을 핑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1623년 인조반정 후에는 공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626년(인조 4)에는 개성유수가 되었다. 이때 그곳의 인심이 매우 탐리(貪利)하여 이를 개혁하는 일을 단행하다가 마찰이 생겨 해직당하고, 기로소(耆老所)로 들어갔다. 정묘호란을 당하여 왕을 강화도에 호종하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인품이 근검하고 신중하여 주요 직책을 두루 맡았다.

  • 천상(天祥)
    눌은(訥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674(현종 15) - 1756(영조 32)
    본관
    원주(原州)
    분류
    기타 > 은사
    이광정(李光庭){3}에 대하여

    1674년(현종 15)∼1756년(영조 32). 조선 후기의 은일사(隱逸士).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천상(天祥), 호는 눌은(訥隱). 1696년(숙종 22) 진사가 되었으며, 영조 때에 참봉·감역·세마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조현명(趙顯命)이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지방에 학문과 교화를 일으키고자 많은 선비를 뽑았는데 그를 스승으로 모셔 안동부훈도장(安東府訓都長)으로 삼았다. 조정에서 효렴(孝廉)을 천거하라 하였을 때 조현명이 그를 문학과 행의(行誼)가 산남(山南)의 제일이라고 천거하였고, 뒤에 김재로(金在魯)가 영백(嶺伯)으로서 조정에 들어가 또 천거하여 후릉참봉(厚陵參奉)을 제수하였는데, 서경덕(徐敬德)과 성수침(成守琛)이 그 자리를 사양하였음을 알고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그뒤 장릉참봉(莊陵參奉)을 제수받았지만 끝내 사양하였다. 당시 재상이던 조영국(趙榮國)은 그가 문장과 학술에 중망이 있었음에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수를 사양하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교수한 점을 높이 평가하여 6품직 하사를 건의하여 왕의 허락을 얻었다. 영남 문원(文苑)의 모범이며 세교(世敎)를 떨쳤던 인물로 전해온다. 저서로는 《눌은문집》·《칠공자전 七公子傳》이 있다.

  • 휴문(休文)
    소산(小山)
    시호

    이칭

    시대
    조선 > 조선 후기
    생졸년
    1714(숙종 40) - 1789(정조 13)
    본관
    한산(韓山)
    분류
    교육/사상 > 학자
    이광정(李光靖){4}에 대하여

    1714년(숙종 40)∼1789년(정조 13).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휴문(休文), 호는 소산(小山). 아버지는 태화(泰和)이고, 어머니는 재령이씨(載寧李氏)로 주부 재(栽)의 딸이며, 상정(象靖)은 그의 형이다. 1728년(영조 4) 김일경(金一鏡)의 여당(餘黨)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추대하고 난을 일으키자, 아버지와 종숙(從叔)들이 의병을 모아 병영(兵營)으로 쳐들어갈 때 겨우 15세의 어린 나이로 종군하였다. 이때 영장(營將)이 나이가 어리다고 돌려보내려 하였으나, “당태종은 16세에 군영에 들어가서 나라에 충성을 바쳤는데, 내 나이가 어찌 어리다 하오?” 하며 끝까지 항의하여 종군을 허락받았다. 어려서부터 이황(李滉)의 학풍을 추모한 나머지 형 상정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을 공부하였는데, 특히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이치를 강구하는 데 힘썼으며, 《근사록》의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동행이정(同行異情)한 이치를 터득하였다. 또, 그 지방의 석학인 조명천(趙命天)·이평중(李平仲)·조성여(趙聖與) 등과 교유하면서 《심경》을 강론하였고, 최여호(崔汝浩)·최진숙(崔進淑)·최입부(崔立夫)·김희주(金熙周) 등과도 서신을 통해 성리학을 강마하는 한편 당시 학자에 따라 구구하던 예설(禮說)을 총정리하였다. 그가 정리한 예설은 당시 안동 지방의 표준으로 시행되었다. 저서로 《소산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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